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3. 23. 14:10
 

요즘 ‘에코 보보스’가 뜬다. 인터넷 시대에 등장한 환경 친화적 사고의 고학력 소비계층으로, 물질은 물론 정신적 풍요까지 추구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를 반영했을까. 중산층이 몰린 아파트단지 상가의 유기농 매장은 매출이 급신장된다고 한다. 돈이 더 들더라도 아이에게 아토피를 일으킬 음식을 먹일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먹는 것만이 아니다. 노는 토요일이면 놀이공원으로 내몰기보다 환경과 생태적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아이 손잡은 부모는 생태기행이나 자원활동 현장으로 달려간다. 온실가스를 내뿜는 승용차를 탄다는 걸 조금 미안해하면서. 이른바 ‘웰빙’이다.

 

웰빙을 위해 물도 아무거나 마실 수 없다.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담긴 생수는 아무래도 오염될 가능성이 높다. 뚜껑 따자마자 다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병의 생수를 구비해놓는 게 낫다. 환기를 시키더라도 실내 공기를 항상 거르는 게 좋다. 외출복에 묻은 먼지와 주방에서 발생하는 유기물질은 건강에 좋지 않다. 그러니 공기정화기는 필수인데 필터는 자주 갈아야 한다. 직장 관계로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텃밭 갖춘 흙벽돌집으로 이사할 날을 기대하는 에코 보보스는 자연 소재를 이용한 방향제를 구비하고 천연 염색 옷감으로 내의와 외출복을 장만한다.

 

웰빙을 추구하는 에코 보보스는 정장을 즐기지 않으면서 비만을 극히 혐오한다. 식량이 세계적으로 모자라는 마당에 비만은 민폐면서도 가난의 상징이다. 많은 양을 허겁지겁 먹기보다 적당한 영양분을 천천히 섭취하고 운동으로 건강과 몸매를 관리해야 한다. 상다리가 부셔져라 손님상 차리고 귀찮거나 힘겨운 일을 남에게 시키는 사람은 에코 보보스가 아니다. 생태계와 이웃이 처한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는 에코 보보스는 활동가처럼 팔 걷고 직접행동에 나서지 않지만 시민단체에 가입해 회비를 낸다.

 

인터넷이 주도한 에코 보보스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계층이 아니다. 진공관과 반도체 기반 위에서 형성된 인터넷이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 출현했듯, 에코 보보스도 수많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을 딛고 새롭게 등장한 트렌드라고 해석한다. 거듭되는 도전과 갈등을 회피했다면 현재와 같은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던 에코 보보스의 역사를 살펴보자는 게 아니다. 에코 보보스의 세련된 소비를 만족시키지 위해 얼마나 많은 이웃의 희생이 뒷받침되었고 또 현재 희생되고 있는지 인식하자는 거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이웃의 삶을 짓밟는다면, 에코 보보스의 소비생활은 생태적이라고 볼 수 없다. 웰빙은커녕 지속가능하지 않은 허상에 불과하다.

 

입에서 살살 녹는 미국산 쇠고기가 식탁에 올라오는 과정을 모르고 달콤한 초콜릿이 열대우림과 토착민의 삶을 얼마나 파괴했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 소비는 무책임할 뿐 아니라 덧없다. 광우병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탐욕스런 축산 체계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온갖 첨가물이 일이키는 아토피는 결코 줄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위험성을 직감하지 않는 식량 위기 대처는 가능하지 않고 배아를 희생시키는 줄기세포로 어떤 질병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각성을 동반하지 않는 웰빙은 지속될 수 없다. 건전한 소비도 중요하지만 웰빙은 직접행동에 친화력을 가진다.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이웃의 삶을 배려하는 행동이 선행될 때 에코 보보스가 갖는 허영은 비로소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유기농산물 생산과 직거래운동을 주선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생산자와 활동가들에게 유기농산물만 골라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위암으로 1994년 별세했다. 어쩌면 순교한 것인지 모른다. 웰빙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웃의 생태적 삶을 배려하는 행동이 동반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과소비가 빚은 온난화 시대에 에코 보보스라는 허상에 도취될 게 아니다. 보통 시민이 그렇듯, 환경을 고려하는 소비라 할지라도 생태적 삶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 나와 내 가족이 현재와 같이 존재할 수 있도록 희생한 이웃부터 배려하자는 거다. (기호일보, 2008.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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