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3. 20. 21:58

어떤 분야든 시민운동가라면 한번 쯤 느꼈을 자신의 한계. 환경운동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민들이 발 벗고 나설 정도로 절박한 상황을 절절하게 알리고 대안을 찾아 함께 행동하게 만들어야 할 텐데, 도무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슬이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머리 띠 두르고 거리에 나가 목청 터져라 구호 외치는 집회와 시위를 벌일 때 삼삼오오 불안한 듯 지켜보는 시민들의 가슴을 움직이게 했지만, 군사독재보다 교활한 금권독재가 판치는 이 시대, 효과를 잃었다. 요즘 시민운동은 재미와 감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어디 소설가 없나. 얽히고설킨 환경 문제를 한 꼭지의 시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 어려울 테니 시민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역시 소설이 좋겠는데, 파악한 실상을 알리려 몸을 아끼지 않는 환경운동가는 두리번거린다. 소재를 제공해줄 테니 재미와 감동을 담아 독자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소설을 절절하게 쓸 소설가에 목이 마르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소설가가 쓴 환경소설은 대체로 공허하다. 그렇다고 환경운동가가 직접 소설을 쓸 수 없는 노릇이다. 쓴다면 읽는 이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여길 게 틀림없다. 문제의식을 가진 소설가가 나서야 할 텐데, 그런 이가 어디 흔한가. 의식이 남다른 소설가가 절박한 마음으로 쓴 소설이라고 해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환경운동가는 소설가를 애타게 찾는다.

 

어니스트 칼렌바크. 그는 소설가다. 무소불위의 군사정권이 힘을 잃어가던 1990년대 초, 이 땅에 조심스레 선보였다 잠시 인기를 끈 소설 《에코토피아》를 1975년에 써서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작년 우리에게 소개된 소설 《에코토피아 비긴스》를 1981년에 썼다. 그 두 권의 소설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번역돼 소개되지 않은 소설이 더 있다. 그런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환경운동가다. 그의 소설 대부분이 환경의 근원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80세를 훌쩍 넘긴 그는 여전히 미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생태주의 시각으로 환경 강연에 나선다. 그는 작년에 우리에게 소개된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1998년에 썼다.

 

생태학과 낙원의 의미를 가지는 합성어 ‘에코토피아’는 ‘생태천국’이 되려나. 소설 속의 에코토피아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오리건과 워싱턴 주를 아우르는 지역이 미연방에서 이탈해 독립한 국가다. 이후 교류가 차단되어 실상이 알려지지 않아 억측만 난무하는 작은 나라 에코토피아로 타임스 포스트 지의 윌리엄 웨스턴 기자가 독립 20년 만에 취재차 공식 방문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기자가 송고하는 24개 파일을 빌려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생태천국을 실감나게 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받은 기자의 첫 번째 충격. 넓었던 간선도로는 2차선으로 줄고 나머지는 새들이 지저귀는 공원으로 변했다. 넘치던 승용차는 간 곳 없고 전기로 움직이는 괴상망측한 미니버스와 택시, 손수레와 자전거가 널려있다. 5분 간격으로 시속 16킬로미터의 전기 버스가 다니는 시내는 잉어가 노는 생활하수가 정화되어 흐르고 디자인이 촌스러워도 개의치 않는 시민들의 옷은 천연 섬유나 가죽으로 만들었다. 형편없는 침대에 사치스런 이불, 구식 화장실에 고급 나무 욕조, 모순에 찬 모습은 서방 기자의 상식을 어지럽힌다.

 

자본을 빼돌린 자들이 빠져나가 국민소득이 3분의1로 위축되었지만 시민들이 유쾌하기만 한 에코토피아의 이모저모를 취재하면서 기자의 충격은 거듭된다. 식량을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삶은 철두철미하게 재생 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에 의지한다. 집은 썩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었고 경쟁이 사라진 학교는 학력조차 따지지 않는다. 정규 프로그램이 없는 텔레비전 방송과 환자의 처지에서 치료하는 병원은 차라리 당혹스럽다. 목재와 플라스틱의 원료로 사용하는 울창한 숲을 지속가능하게 벌목하고, 에너지는 태양과 바다에서 얻는다. 특이한 건 야만스런 전쟁놀이다. 인간의 폭력 충동을 그렇게 달래는 전쟁놀이는 원초적이기는 해도 인간의 냄새가 스몄다. 서방 세계의 전쟁보다 절대 잔혹하지 않았다.

 

《에코토피아 비긴스》는 그런 에코토피아가 독립할 수밖에 없는 과정을 그렸다. 어니스크 칼렌바크는 《에코토피아》가 크게 성공하자 미국과 같은 국가에 왜 생태천국이 필요한지 독자와 이야기 나누고 싶었나보다. 자본이 생명과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태적 삶은 애당초 영위하기 불가능하다는 걸 독자에게 귀띔해야 했을까. 《에코토피아》에서, 취재가 끝날 무렵, 독립에 앞장섰던 여성 대통령을 만난 웨스턴 기자는 뭔지 모를 고민과 심각한 열병을 앓더니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자 씻은 듯 나았고 고민도 사라진다. 그리고 취재 중 만나 사랑을 나눈 산림관리원과 결혼을 결심한다. 자유로운 성도 어니스트 칼렌바크가 꿈꾸는 생태천국의 밑그림이므로.

 

어니스트 칼렌바크가 그린 에코토피아, 다시 말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의료, 과학…, 서양인이 생각하는 생태천국은 우리가 꿈꾸는 생태천국과 같지 않을 수 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리와 세월의 차이는 가치관이 다른 생태천국을 그릴 것이다. 영국의 토머스 모어는 1516년 어디에도 없어도 누구나 꿈꾸는 유토피아를 그렸다. 윌리엄 모리스는 1890년에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들리는 생태천국을 이야기했다.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자신보다 먼저 상상의 나래를 편 두 영국 작가의 책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는데,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소설 두 권까지 더 섭력한 우리는 어떤 에코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우리 식의 생태천국을 그린 소설은 만날 수 없다.

 

생태천국을 그리려면 생태학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흔히 생태사상이라 말하는 개념도 익히면 좋겠지. 70세에 이른 어니스트 칼렌바크가 쓴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오랜 환경 강의에서 얻은 그의 경험이 녹아든 사전이다. 아니 사전이라기보다 생태학 개념 안내 소책자 정도라고 할까. 생태학에 대한 식견이 없어도 현실의 환경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누구나 쉽게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개념들을 종횡으로 이어준다. 간단한 단어풀이가 아니다. 제석평전의 인드라망처럼 얽히고설킨 온갖 생태적 개념을 재미와 감동으로 엮어준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생명공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환경정의는 생물권의 위기와 밀접하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의 아무 페이지를 펼치면 생태주의자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안내를 두루 받을 수 있다. 현실에서 에코토피아를 꿈꿀 수 있도록.

 

1991년 출간된 《에코토피아》는 현재 절판되었다. 헌책방에 발품 팔아도 구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환경단체인 환경정의에서 ‘환경책 큰 잔치’를 열 때마다 다시 출간하길 바라는 도서 명단에 올리건만, 돈이 되지 않을 거라 예단하기 때문인지 감감무소식이다. 출판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도 도솔 출판사에서 《에코토피아 비긴스》를 펴냈으니 판권을 가진 정신세계사가 《에코토피아》를 다시 출간하면 좋으련만 희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에코토피아 비긴스》에 이어 《에코토피아》를 재미있게 읽고 감동을 받은 독자가 《생태학 개념어 사전》까지 독파한다면,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환경운동가의 절박한 심정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텐데. 환경운동가만이 아니라 자식 키우는 시민도 생태천국을 꿈꾸며 행동에 나설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불교환경 58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9. 7. 9. 09:48

 

동물생태학을 겨우 이해했던 시절, 굽이치며 흐르다 이따금 범람하기도 했던 하천의 둑이 콘크리트 블록으로 일사분란하게 단장되면서 민물고기의 종류와 개체수가 크게 줄었을 때였다. 이공계의 건조한 틀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정한 시간 내에 통계 처리가 가능할 만큼 채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을 뿐, 터전 잃고 사라지는 생물에 대한 안타까움은 깃들지 않은 채 하천 생태계가 단순해져 생물상이 위축되었다는 사실만 무미건조하게 기록했다. 실개천에 꼬리치레도롱뇽이 떼로 발견되었을 때 눈이 휘둥그레지며 경탄할 줄 알았지만 골프장이 장차 그들의 삶터를 질식시키게 거라는 생각에 가슴앓이하지 못했다. 조사 결과를 환경단체에 전달할 따름이었다.

 

막 태동한 환경단체의 부탁으로 골프장 부지를 흔쾌히 조사하던 한 선배 학자는 조사를 마쳤음에도 더 머물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길 내게 청했고 어색한 막걸리 자리로 이어졌는데, 이후 현장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인문학을 모르던 이공계의 머리는 어지러움의 연속이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생태학과 사람의 관계를 어렴풋이 감지하게 된 이공계는 인문학 책을 허겁지겁 뒤적이기 시작했지만 실험에 이은 귀납법에 길들여진 머리는 도무지 이해의 끈을 잡지 못했다. 그때 만난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는 단비였다. 자연에 나가고, 사람을 만나 토론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쓸수록 암흑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던 이공계에게 한 가닥 빛을 던져주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처한 환경은 다양할지라도 나름대로 대안을 추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마음 한 구석에 생겨났다.

 

여기저기에서 읽은 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를 소설가보다 환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었다. 환경단체를 도와주는 학자의 뜨거운 자세를 내게 보여준 선배는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계기로 환경운동가의 길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후배의 모습에 은근히 걱정의 눈치를 보냈지만 후배는 그때 소설가를 찾고 싶었다. 인문학을 이해하지 못한 채 권력에 길들여진 과학자들과 그들의 편협한 논리를 편집해 이용하는 관료들이 돈과 감언이설로 순박한 주민들을 꼬드기거나 속이며 핵폐기장을 강행하려 들 때, 어디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같은 소설가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초보 환경운동가의 무미건조한 글은 설득력이 약했기 때문인데, 군사정권이 막 물러난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생태계와 사람의 고통을 보고 가슴앓이 하는 소설가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가에게 환경은 소재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런데 재미와 감동으로 인문학에 겨우 눈을 뜬 이공계를 전율케 한 《에코토피아》가 환경운동가의 작품이었다니.

 

환경단체가 막 맹아를 터뜨렸던 1990년대 초, 우리 사회에서 잠시 반짝이다 사라진 《에코토피아》는 어느새 잊히고, 환경보다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믿은 유권자들의 선택에 의해 생태학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이가 지방과 중앙의 정치무대를 지배하면서 조상이 거의 온전하게 물려준 우리 생태계는 시방 파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 만큼 위기의식도 깊어지는 환경단체에서 ‘생태 해설자 과정’을 거푸 꾸리며 시민들의 환경 의식을 독려하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원인이야 많겠지만, 현실에서 여전히 아쉬운 건 생태 의식이 시민사회에 제대로 배양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생태학에 둔감한 인문학과 인문학에 낯설어하는 생태학이 환경 위기의 근본을 짚어내지 못하니 실천과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잘 쓰는 환경운동가답게 전국을 누비며 강연에 나서는 미국의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10여 년 전, 그러니까 부시가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머리에 쥐나게 만들기 전에 생태학에 눈 뜨고자하는 독자를 위한 생태철학 사전 《에콜로지》를 썼고, 해외의 우수한 환경책을 주목해온 에코리브르에서 이번에 그 책을 번역 출간했다. 사전 형식이지만 사실 어떤 교과서보다 친절하고 웬만한 소설보다 감성적이다. 단순한 낱말풀이를 지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태학의 상식과 논리를 알리는 걸 뛰어 넘는다. 많은 체험과 강연과 글쓰기에서 되새긴 절절함이 행간에 뜨겁게 우러나는 언어로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그는 인문계인가 이공계인가. 아니면 철학자인가. 부럽기 짝이 없다. 인문학으로 생태학을 읽을 수 있는 힘을 든든하지만 쉽게 전하는 《에콜로지》. 독자는 개념 하나 하나에서 번져나가는 생태철학을 기쁘게 이해하고, 나아가 행동을 위한 비장함을 배양하게 되리라.

 

우리 사회에는 요사이의 시대 분위기를 잽싸게 반영하는지 생태맹 환자가 도처에 득시글거린다. 특히 중앙과 지방자치단체장과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관료, 그리고 토목 관련학자들이 두드러진다. 녹색을 앞세우며 생명과 이야기가 숱하게 긷든 생태계를 한정된 계층의 이익을 위해 당대에 짓뭉개려 한다. 역사 이전부터 굽이쳐 흐르며 변화무쌍한 생태계를 연출하며 숱한 생물을 다양하게 품어오던 강을 계단처럼 가로막으려 막무가내인 어떤 선출직 중앙공무원이 형용모순에 가까운 ‘녹색성장론’을 아무데나 들먹이면 도처의 생태맹 환자들이 쌍수를 들고 화답하며 시민들을 현혹한다. 이산화탄소를 생태적으로 조절하는 갯벌을 파괴할 조력발전을 유치하면서 친환경에너지 운운하는 어떤 단체장이 “골프장은 녹지!”라고 우기자 해당 지방의 공무원들은 백코로스로 아부한다. 답답한 시민은 종교인과 법조인에 기대려고 하는데, 그들도 길들여진 생태맹일 경우가 다반사다. 스스로 깨닫고 행동할 힘이 필요할 때다.

 

어니스트 칼렌바크의《에콜로지》는 생태맹을 깨우는 교재로 손색이 없는데,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소비자를 길들이려는 자본의 영상문화가 시민들의 뇌리를 지배하는 이때, 얼마나 많은 독자가 《에콜로지》를 펼칠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에콜로지》의 가치는 높고 중요해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 문제를 인식하는 이의 가슴은 요즘 더욱 절박해진다. 《에콜로지》가 절절한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에코리브르 2009년 발행, 《에콜로지》추천글)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6. 30. 15:16

 

예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식물은 뿌리 내린 자리를 평생 고수하고 동물은 시도 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식물 분포를 연구하는 이는 되도록 철저하게 주위를 살피며 조사해야 하고 동물은 운에 맡겨야 할 경우가 많다. 나타날 만한 곳을 뒤진다고 꼭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닌 까닭이다. 눈으로 본 식물을 그 자리에 없었다고 주장하기 어렵지만 동물은 없다고 딱 잡아떼도 양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발견되었다고 무성의를 힐난하거나 실력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

 

먹이나 짝을 찾아 오랜 세월 동안 먼 길을 규칙적으로 이동해온 동물은 천재지변이 개입하지 않는 한 찾아간 장소가 낯설어 적응하지 못하는 일은 드물다. 이동 과정에서 고난과 위험이 뒤따르지만 그건 감내할 범위 안에 있다. 툰드라 지역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순록 떼도 그렇지만 그 곁에서 어미와 떨어졌거나 늙은 순록을 속아내는 늑대도 마찬가지다. 순록이 뒤를 쫓는 늑대보다 더욱 절박할 것이라는 생각은 다큐멘터리에 길든 사람의 편견이다. 늑대도 막 태어난 새끼들을 먹여야 한다.

 

순록이나 늑대,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멧돼지도 사생결단으로 움직이곤 하지만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달리더라도 서로 부딪혔기에 목숨을 잃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신체가 견딜 능력 이상으로 달음박질치지 않기 때문이지만, 자신의 몸에 치명상을 일으킬 정도로 부딪힐 일 따위를 만들지 않는다. 천적을 쫓아내려 돌진하는 멧돼지도 위협 이상의 충돌은 자제한다. 그건 자동차를 타기 이전의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략 5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난 우리의 직접 조상은 순전히 자신의 발로 만 년 전에 대륙 구석구석을, 1500년 전에 태평양의 거의 모든 섬까지 확산되었다.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을 텐데, 가죽 옷으로 체온을 유지하며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다고 믿는 지역으로 해마다 700미터의 속도로 펴져나갔을 거로 인류학자들은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이 전보다 나을 리 없어도 멀리 떨어지지 않아 쉽게 적응했을 테지만 거리가 멀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모습은 전에 비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뜨기’는 지구촌이 거의 같다고 한다. 인류가 이동할 때 더불어 움직였기 때문인데, 다른 놀이가 많아 방법을 거의 잊은 우리와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복잡한 실뜨기 기술을 구사한다고 한다. 한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바퀴가 없었다. 바퀴벌레의 바퀴가 아니다. 마찰을 줄여 움직이는 힘을 덜어주는 바퀴를 말한다. 바퀴와 마소, 그리고 쇠를 몰랐던 잉카의 후예들은 높은 문화수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68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이 휘두르는 칼날에 무려 7천 명이 스러졌다. 그것도 무사들이. 되돌릴 수 없는 1532년의 역사다. 황제의 가마를 잡은 잉카 무사를 큰 칼로 베면 가마가 휘청거릴 터. 그러면 우르르 다시 가마를 잡았던 잉카인들을 밤이 세도록 죽이고 또 죽였다는 거다.

 

8만 대군을 거느리던 잉카가 멸망한 원인이 물론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바퀴의 존재 여부와 무관했을지 모른다. 우리 격언에 “가마 탄 이는 가마를 든 이의 고통을 모른다.”고 했지만, 잉카 황제가 탄 화려한 가마도 온전히 사람의 힘에 의존했다. 자전거는 어떤가. 걷거나 뛰는 것과 달리 바퀴는 사람이 발에 힘을 주지 않아도 움직일 때가 많다. 내리막길은 물론이고 평지나 경사가 낮은 오르막길에도 잠깐은 그렇다. 과학자들은 점잖게 관성이라 설명할 텐데, 잉카는 일찍이 그 관성을 몰랐다.

 

사람은 남의 힘을 빌리려고 제 힘을 쓰는 유일한 동물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자에게 독점되는 ‘탈것’을 사용한다는 거다. 가마가 그렇다. 칭얼대는 아기나 환자나 애인을 업는 사람의 등은 예외일 테고, 말이나 낙타의 등, 달구지나 마차, 개나 순록이 끄는 썰매도 그렇다. 계단이 부실한 가파른 언덕을 등에 업은 의자로 태워주는 인부가 중국 장강에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착취에 동참하기 싫어 인력거를 거부했다던데, 도저히 그런 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말 잔등은 괜찮은가.

 

종로에는 피맛골이 있다. 종로 큰길 바로 뒷골목으로, 값 싸고 맛있는 밥집이 즐비해 돈 걱정 않고 친구와 오래 마주할 수 있는 서울 시내에서 몇 안 되는 곳인데 머지않아 역사의 뒤로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거들먹거리는 양반네의 말을 피하려 피맛골을 기웃거렸던 우리네와 달리, 몽골인에게 말은 단순한 탈것이 아닌 모양이다. 친구나 애인 이상이라고 현지 가이드는 말한다. 자기 등에 올라타는 사람을 말이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사람이 그리 합리화하는 거겠지만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게르에 부부만 남기고 온 식구가 초원으로 나가는 봄은 말의 짝짓기 계절이고 사람과 말의 임신 기간이 비슷하다. 따라서 아기가 태어날 때 망아지도 태어날 게고, 그 망아지와 아기의 관계는 그때부터 맺어진다는 게 아닌가.

 

걸음마보다 말을 먼저 타는 몽골인이지만 인구 120만이 북적이는 수도 울란바토르까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타듯 자동차를 탄다. 몽골인에게 걷는 행위는 참을 수 없이 어색한 모양인데, 소득에 비해 비싼 자동차를 구입해서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하며 너나없이 운전하기에 울란바토르는 언제나 막힌다. 대부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건너간 중고 자동차들이라 운전대 위치가 제각각이고 외양이 조금씩 우그러들거나 찌그러져 있다. 그래도 잘 나가는 자동차들. 달리는 곳이 곧 도로인 초원에 들어서면 질주 본능을 자제하지 못한다. 모르긴 해도 몽골 사람들의 자동차 정비 솜씨는 세계 일류가 아닐까 싶다. 부품을 고치기보다 통째로 바꾸는 우리보다 뛰어날 게 틀림없다.

 

50대는 한번 이상 보았을 할리우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주인공이 자전거를 탄다. 여물이 필요 없고 배설물로 괴롭히지 않는 말보다 편리하다는 걸 내세우는 장사꾼이 등장한 뒤에 나오는 장면이다. 말의 배설물은 도시를 몹시 더럽혔다. 밟지 않으려 하이힐이 등장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런 문제를 산뜻하게 해결한 게 자전거일 텐데, 사람들이 자전거에 완전히 만족했을 리 없다. 자전거는 적지 않은 내 힘을 요구하지 않던가. 자동차가 자전거의 약점을 보완하자 중국 대도시의 거대한 자전거 물결을 크게 위축시켰듯, 말을 버린 사람은 자전거도 내팽개쳤을 테지만 자동차는 높은 진입장벽을 가졌다. 안장은 말보다 낮아도 타는 자의 지위를 높인다고 착각, 더욱 으스댈 수 있었다.

 

자동차는 타는 이의 힘을 그리 요구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물론이고 마소를 탈 때보다 힘이 덜 든다. 손과 발, 그리고 눈동자를 굴릴 정도의 힘이면 네 바퀴 중 최소한 세 바퀴가 동시에 닿는 바닥 위를 달릴 수 있다. 두개의 바퀴만 닿으면 움직이는 오토바이도 동승자에게 힘을 요구하지만 자동차의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앉은 이는 신체는 물론이고 눈의 힘을 빼도 무방하다. 버스와 기차, 선박과 비행기가 그렇다. 하지만 동승자의 경우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일찍이 간파했다. 자동차는 스스로 이동할 권리를 차단한다고.

 

천지사방이 사통오달의 도로로 뚫린 요즘, 위화감을 유발시키는 가격이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모델이라면 모를까 자동차 자체는 계층을 그리 구별하지 못한다. 진입장벽도 매우 낮아졌다. 하지만 그건 요즘의 사정일 뿐이고, 후손의 처지에서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자동차를 인간이 개발한 수많은 탈것 중에 최악이라고 혹평한다. 마소의 배설물을 몰아냈지만 배설물보다 훨씬 위험한 배기가스로 눈이 아니라 폐를 위협하고 피맛골로 가면 무사하던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는 주장인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의 모델이 새로울수록, 가격이 높을수록, 실내에 대한 안전성능이 좋을수록, 운전자의 태도는 오만불손해지니 자동차 밖의 약자는 더욱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동차에 의존하는 생활방식이 깊어질수록 후손에게 닥칠 환경 뿐 아니라 에너지 위기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타이어와 자동차회사가 정유회사와 손잡고 미국의 철도망을 사들인 후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이 지배하는 국가들은 자동차가 지배하는 체제로 본격적으로 변화되었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생산라인에 도입한 포드 자동차 회사가 대량생산해 가격을 낮춘 T모델을 월급이 오른 직원들에게 판매하고 나서면서 자동차는 확장 일변도의 도로를 메워나가게 되었다. 도시는 자동차 위주로 설계되고 오래 전부터 도시를 잇던 철도는 광폭 아스팔트 도로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선정적인 모습의 여성을 등장시키던 관행은 모터쇼와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여전히 트레이드마크인데, 이제 자동차는 성인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젊은 여성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자동차가 등장한 마당이 아닌가.

 

이제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선 자동차는 아예 주택의 역할까지 일부 떠맡기도 한다. 캠핑카도 있지만 좌석에 앉아 밥을 주문해 먹는 드라이브 인 식당도 있다. 집에 에어컨이 없어도 자동차에 있으니 도로가 꽉꽉 막혀도 멀리 떨어진 피서지를 찾는 엄두를 낸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쇼핑에 몰두하다 보니 대형 양판점은 최근 자체 주유소를 운영하고 나섰다. 가끔 찾아와 트렁크 가득 물건을 싣고 가는 고객에게 기름을 원가로 제공하겠다는 판촉이다. 기름 넣을 때면 으레 찾아오는 고객들이 그때마다 트렁크를 가득 채운다면 동네 주유소는 물론이고, 구멍가게도 모조리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생겼다.

 

자동차를 포기할 수 없는 사회구조는 석유위기 시대 이후에도 자동차를 버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신기술을 연구한다. 연비가 높은 자동차를 넘어 석유를 대신할 에탄올이나 바이오디젤이 연구되고, 전기나 수소를 사용하는 자동차가 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로 굴지의 자동차 회사마다 맹렬하게 개발되고 있다. 이미 전기와 석유를 동시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정부 보조금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환경오염과 석유위기가 심화되더라도 그 차 운전자는 일말의 양심의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알아 두어야 할 건, 사탕수수에서 얻는 에탄올이나 옥수수로 가공하는 바이오디젤을 얻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에너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고, 전기와 수소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가 실로 막대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하나 더. 자동차 바퀴에 근육의 권리를 내맡긴 이후 몸이 돌이키기 어렵게 엉망이 되었다는 고민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사고로 아빠를 잃은 일본의 초등학교 3학년이 쓴 시는 심금을 울린다. 학교 갈 때마다 앵무새 같은 엄마의 “차 조심해라!”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많은 차가 필요한 건가 묻는 아이는 “차가 적어지는 대신 나라가 가난해지고 우리 집이 가난해져도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편이 훨씬 좋지요.” 한 뒤, “없어져버려라 자동차 따위는!”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시를 소개하는 스기타 사토시는 자동차를 문명의 파괴자라고 규정하는데, 강고한 자동차 사회를 선도하는 미국에서 자동차 중독 문화에 대한 반란을 모색하는 케이티 앨버드는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면서 그 실천적인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혼이 당장 어려우면 별거부터 하라고 행동을 부추긴다.

 

한때 자동차가 없으면 이어지는 약속들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아니다. 불필요한 약속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더욱 정확하게 지키게 될 뿐 아니라 독서량이 훨씬 늘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걷는 일이 많아지면서 계단을 내려갈 때 뜨끔하던 무릎이 말짱해졌다. 걸으면서 정지선에 시근덕거리는 트럭을 제외한다면 도시의 소음은 아스팔트를 스치는 바퀴가 원흉이라는 걸 알게 되고, 자전거도로를 침범하는 오토바이가 미워지게 되었으며 동네의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어디 그뿐인가. 길가 화단의 꽃과 가로수 사이를 누비는 직박구리와 철설모가 가끔 눈에 띄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무거운 짐을 옮길 일이 있거나 대중교통으로 왕복하기 어려운 곳에 가야할 때 타려고 주차장에 박아 두어 쓸데없는 보험료가 나가지만, 이혼해도 생활에 큰 불편은 없을 뿐 아니라 가정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식구와 긴밀한 논의가 더 필요할 따름이다.

 

절판되었어도 재판을 희망하는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소설 《에코토피아》는 샌프란시스코의 20차선이 2차선으로 좁혀진 자리에 숲이 가득한 풍경을 신선하게 묘사했다. ‘지구의 날’에 차 없는 세종로에 몰려나온 시민들의 얼굴은 빛이 났다. 뒤에 옆에 차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은 비로소 이웃을 친근하게 바라보게 이끈다. 유럽의 도심에서 흔한 ‘차 없는 거리’의 풍경이 대개 그렇다. 자신의 근육으로 타고 온 자전거, 마음까지 편안하게 하는 대중교통, 아니면 동네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서 온 시민들로 북적이는 그 거리는 악사와 화가들로 활기차고, 손님이 밀려드는 상점은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동차는 우리를 편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구속시켰던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가 아예 없는 사회를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마포의 성미산공동체처럼 마을에서 공유하는 자동차는 인정하지만 미국의 아미쉬공동체처럼 마소로 농사를 짓고 마차로 이동하는 사회는 불가능할 것으로 치부한다. 산업사회를 떠날 수 없는 처지에서 자신이 없기 때문일지 모르는데, 간디가 당부한 마을에서 자급자족한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자 한솥밥을 먹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이때,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힐난하는 이가 없지 않겠지만, 분명히 되새겨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자동차 사회구조는 후손의 처지에서 볼 때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 자동차 바퀴에 빼앗긴 근육의 주권을 되찾을 궁리에 나서야 한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긴장하며 앞만 바라보게 만드는 자동차를 버리면 비로소 피부를 맞댈 가족이 더욱 살가워지고 이웃이 따뜻해질 게 틀림없을 거고 그만큼 후손의 삶에 희망이 깃들 테니까. (실천문학, 2009년 가을호)

"지구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서 빌린 것" 이란 말을 되새기며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