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12. 25. 17:47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하긴, 날씨가 선선한 산골에 주로 서식하는 까마귀의 터전은 산기슭까지 파고든 배 과수원과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는데, 까마귀가 실제로 배를 가끔 파먹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까마귀 날자마자 떨어진 배는 까마귀가 파먹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까마귀가 부리로 몇 차례 건드린다고 맥없이 떨어지는 배라면 이미 익을 만큼 익은 상태일 텐데, 그땐 파란 하늘이 드높은 늦가을일 게 틀림없다. 게으른 농부가 당도 높은 배를 그토록 방치했다면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 참새가 없듯, 지나가는 까마귀도 건드려야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 터. 웬만한 과수원에 탐스런 배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따냈다.

 

가을로 접어들기 전에 매달린 배는 맛이 떫다. 그때 양지바른 산록에는 잘 익은 열매가 흔전만전하고 동면을 앞둔 개구리와 뱀은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다. 맛난 먹이가 지천인데 무슨 이유로 떫은 배를 집적거릴 텐가. 사방팔방에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려 과수원 주변에서 배 이외의 먹을거리를 몰아내기 전까지, 까마귀는 굳이 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익지 않은 배는 아무리 툭툭 건드려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데, 사람의 편견에 사로잡힌 까마귀가 공연히 욕을 먹을 따름이다. 까마귀가 불길하다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웬만한 사람들은 까마귀를 싫어하긴 하는데, 혹시 할리우드 스릴러 추리영화의 대명사 알프레드 히치코크 때문인가.

 

1963년 히치코크 감독에 의해 악역을 담당했지만 그건 까마귀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미국에 까치가 산다면 감독은 극성스런 까치를 출연시켰을지 모른다. 사촌 사이라서 생김새와 습성이 비슷한 까치들이 인가 근처의 나뭇가지에 앉아 “까악- 까악-” 울어대면 친근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유독 까마귀에 대해 편견을 감추지 않는다. 겨울철 등성이를 휘감던 산불이 꺼진 후 숯만 남은 숲에서 시커먼 까마귀가 나타난 건 우연이고, “과- 과- 과-” 우는 건 목청을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청은 뭐 그리 좋은가. 다른 새 둥지의 어린 새를 잡아먹는 거야 식성의 차이가 아닌가. 먹을 게 지친인데 굳이 부화 도중의 달걀을 깨먹는 인간의 행위는 좀 나은가.

 

사람의 편견에 그리 서운해 하는 것 같지 않은 까마귀는 사람에게 어떠한 피해도 안기지 않는다. 인가에서 음식쓰레기 다소 축내듯 산골 군부대에서 얼어버린 잔밥을 더러 깨먹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잔밥 기다리는 돼지들이 배를 곯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 조상은 까마귀를 반겼다. 정월 대보름에 약식을 먹는 이유를 아는가. 신라 소지왕이 경주 남산의 한 정자에 거동했을 때 갑자기 날아든 까마귀가 겉봉에 “뜯으면 한 사람이 뜯지 않으면 두 사람이 죽는다.”고 쓴 서찰을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고심 끝에 뜯으니 내전의 금갑을 쏘라는 내용인 즉, 그대로 하니 왕을 시해하려 숨었던 왕비와 신하를 잡을 수 있었다는 거다. 그때부터 정월 대보름을 까마귀를 기리는 제삿날로 정해 검은 밥, 다시 말해 약식을 먹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누가 먹으로 활자를 덮은 듯, 방금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까맣게 잊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까마귀 고기를 먹었다!”고 말한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듯 잊을 수도 있어도 오로지 까마귀를 들먹이지만, 생각해보라. 까치와 함께 까마귀는 7월 7일마다 하늘로 올라가 오작교를 만든다. 은하수 양편에 떨어져 지내던 견우와 직녀의 해후를 위해 반드시 시간을 지키지 않던가. 육교 중간에 주저앉아 우는 이에게 물으니, 어느 쪽으로 건너다 넘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해 서럽다 했다던데, 까마귀는 그럴 리 없을 게 분명하다. 까마귀 고기가 몸에 좋다고? 그래서 한동안 산간벽지에서 총질하는 자가 적지 않았는데, 기억력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이라면 혹 모를까, 어림도 없다. 효성이 지극한 까마귀를 먹다니!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다.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까마귀의 습성을 지극한 효성에 비유한 사자성어다. 조류학자 이우신은 오해에서 비롯된 사자성어로 분석하기는 했다. 다 자란 새끼는 어미와 크기가 비슷하므로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걸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언급한 거다. 사실 여부는 둘째로 치고, 까마귀도 행하는 효도를 하물며 인간이 내칠 수 없는 게 법도라는 걸 반포지효는 웅변한다 하겠다. 움직이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임금이 된 신라의 어부 연오랑(燕烏郞)과 남편을 찾아 나중에 일본으로 간 세오녀(細烏女) 설화의 주인공들은 까마귀(烏)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일본은 까마귀를 불길한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겨울이 짧아지면서 2월이면 짝짓기에 들어가는 까마귀는 3월에 낳은 너덧 개의 알을 부화시켜 이른 여름이면 50센티미터 가까운 몸으로 키워내는데, 다 자란 새끼들은 한동안 부모와 남아 들쥐와 뱀, 다른 새의 새끼와 크고 작은 곤충, 곡식과 열매, 그리고 음식쓰레기와 과일들을 탐한다. 중앙아시아에서 극동아시아까지 두루 분포하지만 철저하게 세력권을 지키며 새끼들을 키우다 늦가을 이후 자신이 태어난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무리지어 움직이곤 한다. 그때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폄하하지만, 둥지를 노리는 커다란 매도 이웃과 힘을 합쳐 몰아내는 까마귀를 너무 얕보는 건 아닐까. 태양 속에 사는 삼족오(三足烏)를 기리던 민족답게 이제 까마귀에 대한 편견을 걷어야 하지 않을까.

 

까마귀는 무척 영리하다고 한다. 단단한 부리로도 어찌할 수 없는 호두나 조개를 물고 높이 날아오른 다음, 바위나 아스팔트에 떨어뜨려 깨뜨린 뒤 속을 빼 먹는다는 게 아닌가.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 연구진은 이솝우화를 입증했다고 한 언론이 전했다. 부리가 닿지 않는 튜브에 물을 붓고 그 위에 벌레를 띄워놓자 주위의 돌을 집어넣었다는 거다. 비슷한 연구결과를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에서 얻어내었다고 하니 이제 “까마귀 가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 따위의 시조는 시효를 잃을지 모르겠다. 그에 대응하는 시조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말라!”보다, 그저 백로든 까마귀든, 생긴 그대로 인정하고 그 생태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원생활, 201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