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1. 10. 3. 02:24

 

전국의 산등성이에서 등산객 설레게 하던 억새축제가 지나가니 가을이 성큼 깊어졌다. 하늘이 곧 구만리로 펼쳐지면 북녘에서 기러기들이 알파벳 브이로 하늘을 가르며 끼룩끼룩 날아올 테니 제비들은 내년 봄을 기약하며 강남으로 떠났을 것이다. 억새가 으악, 으악울어대기 때문이다.

 

1950년대를 풍미한 원로가수 고 고복수는 ,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하며 허전한 음색으로 <짝사랑>을 노래했다. 으악새는 억새의 방언. 산등성이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슬피 운다니! 한편의 서정시다. 봄꽃으로 화사했던 산하는 풍요로운 생명으로 여름을 채우다 화려한 단풍으로 마무리되고, 이제 배우와 관객이 떠난 무대처럼 쓸쓸하기 짝이 없다. 머지않아 북풍한설 몰아칠 터. 깊어가는 가을. 으악새 슬피 우는 계절은 적막하다.

 

한데 아닌가. 축제마저 끝나 적막해진 억새밭에서 서정적 분위기에 취하려는데, 으악새는 억새가 아니라는 주장이 들린다. 경기도 북부에서 왜가리를 왁새라 부른다면서 으악새는 억새가 아니라고 정정해준다. 물고기가 풍성했던 강가에서 새끼들을 거뜬하게 키웠던 여름철새 왜가리는 가을이 깊어지자 으악, 으악줄여서 , 슬피 운다는 건데, 그럴싸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즈음, 긴 다리를 뒤로 주욱 편 왜가리들이 둥지로 날아갈 때, 과연 , 울긴 운다.

 

백로와 더불어 왜가리들이 둥지를 치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 멀리서 한여름에도 눈에 덮인 듯 보였던 소나무 숲은 여태 천연기념물 209호다. 모내기를 마친 오후의 농촌은 나른하고 미꾸라지가 숨은 논에 작열하는 뙤약볕이 한바탕 소나기를 예고할 때, 논 가장자리를 지키는 왜가리들은 숨을 죽였다. 벚나무들이 하얀 꽃잎을 우수수 떨어뜨릴 무렵,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도래지에서 짝을 찾아 알을 낳은 왜가리는 두 달 가까이 품어 맞이한 서너 마리의 새끼들을 먹이느라 하루가 아쉽다. 눈을 뜨고 솜털이 몸을 덮기 무섭게 무럭무럭 자라는 새끼들을 부지런히 먹여야한다.

 

정지된 슬로모션인 듯, 논 가장자리나 강가에 반 쯤 잠긴 다리를 천천히 들었다 내려놓으며 찰랑이는 수면, 그 아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왜가리. 잔뜩 웅크린 S자 목이 용수철 튀듯, 날카로운 부리를 번개처럼 내밀곤 쩝쩝 입맛을 다신다. 그 순간, 버둥대던 미꾸라지를 논에서, 퍼덕거리던 피라미를 강가에서 어김없이 잡아챈 거다. 물속의 플랑크톤이 번성할 때, 플랑크톤을 먹는 수서곤충도, 수서곤충을 먹는 피라미와 갈겨니도 무럭무럭 자란다. 그때를 놓치면 왜가리는 보채는 새끼들을 걷어 먹이기 어렵지만, 한여름의 산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윽고 저녁 무렵, 가늘고 긴 다리를 박차고 넓은 날개를 너울너울, 창공을 우아하게 날아오른 왜가리는 새끼들이 기다리는 둥지로 , 날아간다.

 

서쪽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 때, 다시 , 시끄러웠던 여주군 북내면 신접리. 울타리를 친 도래지 주변에는 필름 담았던 플라스틱 통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회색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는 왜가리를 촬영하고자 찾은 사진작가들이 다녀간 흔적이었다. 붉은 노을을 받으며 날아오는 자태도 아름답지만 태양을 배경삼아 고요하게 다가오는 모습도 숨을 멈추게 한다. 다만 울타리를 넘어 둥지로 접근하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치켜올린 카메라 렌즈와 머리 위로 뜨끈한 배설물이 쏟아질 수 있다. 새가 대개 그렇듯, 산성을 띈 배설물은 사진작가의 카메라와 옷만 망치게 하는 게 아니다. 둥지의 나뭇가지도 일찌감치 말라죽었다.

 

1미터에 가까운 잿빛 왜가리는 15센티미터 정도의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운 물가의 폭력자다.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성큼성큼 걷는 이유는 오로지 먹이다. 월척의 물고기도 커다란 부리로 물고 들썩들썩. 머리부터 꿀꺽 삼키는 왜가리는 개구리, , 자라, 쥐도 마다하지 않으며 어미 곁에서 멀어진 토끼도 사정 봐주지 않는다. 사람의 편견과 달리 먹성이 그리 우아하지 않은 왜가리는 언젠가부터 황소개구리까지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전국의 저수지마다 떠들썩했던 황소개구리 퇴치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즈음일 게다. 한배 만여 개의 알에서 부화된 황소개구리 올챙이는 작으면 아기 해열제 숟가락, 다 자라면 군용 야전숟가락만큼 크다. 여름 끝 무렵, 어미 곁을 막 떠난 어린 왜가리들이 잡아채기 적당하다.

 

농번기가 마무리된 농촌에 한 폭의 정물을 선사하는 왜가리는 농경사회의 다정한 벗이다. 많이 찾아오면 풍년이 든다며 길조로 여기는 주민들은 백로와 더불어 마을 뒷산을 하얗게 물들이는 왜가리를 반긴다. 들판이 농약으로 오염되었을 때, 중독된 왜가리들은 논 가장자리와 둥지 아래 비틀거리며 쓰러지곤 했지만 이젠 아니다. 유기농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논과 강에 먹이가 늘어나지 않았나. 왜가리가 친환경의 상징으로 등극하면서 주민들은 도래지를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전망대도 만들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모여드는 왜가리의 자태를 넋을 잃고 바라본 외지인들은 그 지역의 친환경 농작물을 한아름 구입할 게 아닌가. 자연도 왜가리도 반성하는 사람을 그렇듯 용서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왜가리가 걷던 4대 강이 흙탕물로 변하더니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커다란 굴삭기 삽날이 모래를 퍼올릴 적에 불현 듯 떠오르는 물고기 서너 마리 주어먹을 때 몰랐는데, 굴삭기가 떠난 강가에 먹이마저 떠나고 만 거다. 강 본류가 깊어지자 이어지던 지천의 바닥도 폭우에 휩쓸리면서 덩달아 깊어졌으니 무럭무럭 자라는 새끼들을 기쁘게 부양하던 왜가리는 당혹스러웠을 터. 내년에 다시 와도 되나. 아니, 찾아올 수나 있겠나. 왜가리 조각상을 세우고, 가을걷이 마치고도 논에 물을 빼지 않는 주민들과 다른 어떤 힘에 이 땅의 왜가리는 시방 떠밀린다.

 

기러기 울어예는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억새가 시들어갈 즈음이면 강남으로 떠나던 왜가리가 언젠가부터 머물기 시작했다. 겨울에도 강과 논이 얼지 않자 아예 머물기로 작정한 것이리라. 가끔 가두리양식장을 기웃거려 쫓겨나곤 하지만 마음이 고운 사람과 긴 겨울을 눈을 맞으면서도 보내려하는 왜가리는 이 순간, 굴삭기 삽날에 터전이 빼앗긴다. 지구온난화로 이 땅에 남은 왜가리에게 내년 이후가 더 걱정이다. (전원생활, 2011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