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3. 9. 12. 12:04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지음, 한티재, 2013.

 

 

교사의 보람은 어디에 있을까. 성공한 제자가 찾아와 고맙다 인사할 때 있을까. 어떤 제자를 성공했다고 평가해야 하나. 대기업의 과장이나 국가기관의 사무관 이상일까. 그런 직장과 직위에 잘 오르는 대학에 선뜻 합격한 제자가 나올 때 교사는 긍지를 가져야 할까. 정의로운 일에 몸을 바칠 때보다 제자의 사회적 지위나 돈벌이 크기에 보람 여부를 의탁하는 건 아닌지 궁금한데. 이계삼은 잘 다니던 모교의 교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재단과 갈등이 있거나 학생지도에 문제가 있던 건 전혀 아니다. 교단을 버틸 힘이 더는 없었던 거다.


역사학자이자 사상가인 이반 일리치는 학교가 교육을 망친다고 말했다. ‘밀양 송전탑 전문가 협의체에서 최고 대학의 교수라는 이가 한국전력에서 내어준 자료에 토씨까지 고치지 않고 베껴 보고서를 제출하는 현상은 이 땅에서 교육이 결국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잘 웅변한다. 4대강 사업이 지구온난화와 풍수해와 고질적 물 부족 현상을 해결해줄 것처럼 이야기했던 수자원학회에서 지난 정권 말기에 큰 연구비를 들이며 고심했다고 한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어떻게 핑계를 꾸며내야 하는지 연구했다는 건데, 권력 앞에서 교과서와 다른 주장을 폈던 그들은 학생 앞에서 무슨 말을 해왔을까.


학교에서 꾸벅꾸벅 졸아도 대치동에서 고액 과외 받으면 스카이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밀양은 수도권 입성도 힘겹다. 지친 제자에게 견뎌보자. 대학 가면 달라지겠지!” 격려해온 자신의 태도에 염증이 생긴 이계삼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을 그만두고 과일장수하는 제자를 보며 낙담한다. 취업 때문에 들어간 대학의 교수는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까 두려워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입학을 구걸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앵벌이 하는 자신이 역겨웠던 이계삼은 농사와 인문학에서 진정한 교육을 찾는다. 이윽고 철밥통을 내려놓았다.


농사꾼을 키우는 학교에서 교사 되려는 이계삼은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교재를 썼다. 청춘의 커리큘럼이 그것이다. 목표와 이상도 없이 그저 대입을 준비하고, 대학 졸업 뒤 정규직이 못돼 주눅 드는 제자들을 마냥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형편없이 대접하는 사회를 바꿔야 했다. “아프니까 청춘20대로 떠넘길 수 없기에, 스승을 두루 만났다. 청춘의 커리큘럼이 초청한 웬델 베리, 도로시 데이, 하워드 진, 더글러스 러미스, 다카기 진자부로가 그들이었다.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이계삼은 슈마허의 책들을 펼친다. 슈마허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을 주목하며, 타락한 산업사회의 기술이 파탄낸 오늘을 적정기술이 돌이킬 수 있다는 확신을 되새긴다. 영성을 간직한 노동과 교육이 엮는 적정기술인데 그에 어울리는 좋은 노동이란 무엇인가. 모든 신체기관이 동원되는 육체노동, 생산의 전 과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노동, 이윤창출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하는 노동이라는 슈마허의 가르침을 학생에게 알려야 했다. 청춘의 커리큘럼첫 단원에 담았다.


농토에서 공장으로, 고향에서 타향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내몰리면서 그것을 해방이라고 강요된 순간부터 우리 삶이 뒤틀렸다고 믿는 웬델 베리의 신념을 청춘의 커리큘럼에 담았다. 커리큘럼에 농업 단원도 있다. 돈과 석유와 기계가 땅을 파헤치는 농업은 차라리 채굴이다. 그런 농업이 파생시킨 공장식 축산은 지옥의 포로수용소며 그런 고기를 먹는 아이들의 영혼과 신체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땅과 자본이 소수에 집중되면 민주주의는 단지 정부의 형태에 불과하다고 진단하는 웬델 베리는 소농이 기반이라고 단언한다. 스티브 잡스는? 퇴비로도 쓸 수 없는 종이 지식일 뿐이다. 이계삼은 새 학교에서 소농의 가치를 설파할 게 분명해 보인다.


이계삼은 무기력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역설하는 더글러스 러미스에게 정치학을 물었다. 거대한 빙상과 부딪혀 침몰할 게 분명한 타이타닉을 그대로 밀어붙인 이유는 흥청망청 소비하는 광란을 진정하기 싫었기 때문일 텐데, 지금 우리의 정치와 경제가 딱 그 모양이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인 알바로 번 돈을 한줌에 갈취하는 대학은 차라리 포주인데, 새롭게 열릴 학교에서는 우리 시대를 어떻게 공부하는 게 좋을까. 후쿠시마 사고를 낳은 체르노빌이 오늘이다. 고갈을 눈앞에 둔 석유위기가 오늘을 대변한다. 땅과 영혼과 정의와 상식을 잃은 오늘을 학생과 읽어야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장기 비상시대, 우승열패의 신화, 흙과 재,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을 비롯해 죄와 벌과 같은 고전을 두루 섭렵한 이계삼은 교사로 산다는 것을 읽고 학교의 모순과 허위 앞에서 솔직하자!”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학교란 위선과 기만으로 지탱되는 국가기관이라는 조너선 코졸의 외침을 듣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애국자, 진실을 추구하는 불복종의 길로 뚜벅뚜벅 나가기로 마음 단단히 먹었다. 중산층에 매몰된 교사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깨 걸고 다독여가며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에서 희망을 찾기로 했다.


그렇다. 희망을 공부해야 한다. 러시아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과 홀로 선 지식인 다카기 진자부로의 시민과학자로 살다를 읽고 길을 찾는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하워드 진은 먼 길을 가려는 이계삼을 격려한다. 많은 스승을 읽으며 기운을 얻고 쓴 청춘의 커리큘럼은 당장 교재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이계삼은 수업을 시작하지 못한다. 초고압송전탑으로 더럽혀진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와 현장을 지키고 있다. 밀양의 가르침도 담은 청춘의 커리큘럼증보판이 나올지 모르겠다.


국어시간에 소설책 읽다 혼 난 불량학생은 국문학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점수따기로 줄세우기에 골몰하는 학교는 무엇에 아부하는가. 학생을 해병대 훈련에 밀어넣는 학교는 교육을 찬탈했다. 증보판이 나오기 전에, 새로운 학교가 문 열기 전에, 우리네 학교에 구속된 청소년부터 청춘의 커리큘럼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오!”라며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와다음, 201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