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5. 7. 19. 12:27
 

유전자로 분석해볼 때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일본인인데, 젊은이일수록 우리보다 덧니가 많아 의아한 적이 있었다. 덧니는 유전현상이 아닐 듯한데, 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덧니가 많았을까. 그 수수께끼는 막내의 초등학교에서 보낸 가정통신문을 보니 풀렸다. 기술 그리고 돈이었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상가에는 대개 치과의원이 하나 이상 개원하고 있다.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지역의 자원봉사 치과의사는 아이들의 상태를 훑어보고, 학교는 집 주변 의원에 가서 정식 진단서를 받아오라는 숙제를 낸다. “댁의 아이에게 충치 몇 개와 부정교합 1개가 있다”고 귀띔한 가정통신문이 요구하는대로 동네치과로 아이를 데리고 간 부모들은 정식 진단에 귀를 기울이고, 의사의 친절한 권위에 종속되고 만다. 동네 치과는 컴퓨터 영상을 동원, 뻐드렁니와 덧니를 교정한 아이의 성년이 된 얼굴을 교정하지 않은 얼굴과 비교하고, 잘 되라는 부모의 성화에 따라 학원과 과외를 전전해야하는 아이는 그 순간 환자를 빙자한 고객으로 등록된다.


교정기술이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 일본 어린이들은 부드러운 음식을 우리보다 먼저 탐했다. 그러자 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유치가 빠진 자리에 올라올 영구치는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교정기술이 찬란해진 요즘, 일본이나 우리나 덧니는 드물다. 교정을 위해 멀쩡한 이 하나 이상을 빼고 불편한 장치로 이빨을 안으로 밀어넣는 시술을 수년 동안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교육당국이나 치과의사협회에서 치료비를 지원하는 것도 아니다. 비만이 그렇듯, 덧니와 뻐드렁니도 어느덧 저소득 계층의 상징이 되었다.


60년대 멜로영화의 마지막 장면, “사랑, 해, 해, 해, 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듬직한 사내의 가슴에 묻으며 마지막 말을 남기는 애절한 순간, 관객들은 손수건을 찾아 그렁그렁한 눈매를 훔쳐야했는데, 요즘 그런 영화는 없다. 백혈병 특효약이라는 글리벡이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이후 최루성 영화도 내용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글리벡이 아무 백혈병 환자나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지불능력이 우수해야 자격이 생긴다. 그렇다면 요즘 영화는 가련한 이별이나 맥 빠지는 해피엔딩보다 다른 전개가 필요할지 모른다. 어렵사리 사귄 연인을 돈이 없어 치료해줄 수 없는 무산계층의 절규와 분노로 관객의 뇌리를 자극하는 편이 비평가의 혹평을 피할성싶다.


체외에서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켜 자궁에 수정란을 착상해주는 불임클리닉이 어느덧 보편화되었다. 이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건 집안에 대한 불효거나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불임클리닉이 없을 때 아이 낳지 못한다며 며느리를 쫓아내는 시부모는 영화처럼 많지 않았다. 친지의 아이를 입양해 대를 잇거나 무자식이 상팔자라며 애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기술이 등장하면서 이해 방향이 바뀌고 만 것이다. 불임클리닉도 어떨 수 없는 경우 어떤 새로운 기술이 불임부부를 유혹할까.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로 일단 금지하고 있지만 생명공학기술은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이미 열어놓고 있다. 만일, 숭고한 목적을 빌미로 불임부부에 한해 인간 복제를 허가하는 시절이 온다면?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는 범죄자로 취급될지 모른다. 수혈을 거부하며 기도만 하다 아이 잃은 부모를 검찰은 살인행위로 기소한 적 있었다.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며 생명윤리마저 과학기술의 휘하에 종속시키는 요즘은 이미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인데, 출산율을 끌어올리려는 당국은 어떤 제도를 궁리하고 싶을까. 생명공학으로 장기를 쉽게 이식하는 시절이 곧 온다는데, 그때 형법은 어떻게 변할까. 윤리마저 독점한 과학기술은 돈과 권위에 충성하는데.


연구개발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과학기술 산물의 단가는 초기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고 관련 자본은 흔히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도가 지나치다싶다. 원가 900원 정도인 글리벡은 2만5천 원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던가. 엄청난 투자비를 변명하지만 충분히 환수한 이후에도 가격은 스스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반론을 민중들이 펴면, 적절한 이윤이 보장되어야 과학자들의 연구 동기가 유인되고 자본이 축적되어야 새로운 과학기술 연구에 투자할 여력이 발생한다고 관련 자본은 당위성을 늘어놓는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독점일 때 높던 단가가 경쟁체제에서 추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를 위한다며 숭고한 표정을 관리하던 다국적 제약회사였건만, 자본이 값을 내리느니 차라리 판매를 중단하겠다며 환자들을 협박한다. 그 태도는 무엇을 웅변할까.


자본이 치료제를 생산하여 혜택을 광고하는 현실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환자는 줄어들지 않고 위화감은 극복 불가능하다. 환자는 누가 양산하는가. 오염되고 불안전한 환경이 환자를 만들어내지만 자본은 환자를 양산한다. 발생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을 사회나 국가가 외면하는 현실에서 효능만 광고하면서 질병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가 만연되기 때문이다. 환자, 즉 소비자를 소외하며 생산자가 주도하는 의료과학기술은 일차적으로 돈벌이에 충실할 수밖에 없고 혜택에 차별이 생기니 계층 간 위화감을 부추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랫목부터 따뜻해져야 차차 윗목에 훈기가 가는 법이라는 유산계층의 설득은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한다. 한꺼번에 따뜻해지도록 구들을 놓을 줄 알아야 상목수가 아니던가.


소설 <시빌 액션>에는 공장 폐수로 오염된 우물 때문에 백혈병에 걸린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파란 하늘을 우러르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죽어야하는가!” 절규하다 엄마 품에서 숨을 거둔다. 자본이 살찌는 최첨단 치료는 절대 위화감을 치료하지 못한다. 의료과학기술의 개발보다 다음 세대까지 생각하는 예방이 선행되어야 한다. 질병 원인이 최대한 제거된 건강한 환경에서 건강한 정신과 몸으로 이웃과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면 환자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료계의 파업이 환자의 수를 크게 줄인 역설을 생각해보자.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이반 일리치의 언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환경미디어, 2005년 8월)

딸내미 치아교정을 해주고 있는 입장에서 찔립니다.
부드러운 것만 먹인 기억이 없는데도 앞쪽 이 두 개가 비뚤어져, 모양은 별로 상관치 않는 우리 모녀이니 그냥 두었는데, 갈수록 더욱 비뚤어지고, 거기에 음식이 끼어 잇솔로도 빠지지 않고...자칫 앞쪽의 이가 썩겠다 겁이 덜컥 나더라구요.
그래 할 수 없이 교정을 시작했는데 아이가 힘들어하니 나도 영 기분이 그럽디다.
그런데 아직 10살 안팎의 아이들이 교정을 하러 오는 거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것도 덧니니 뭐 그런 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이가 뻐드러져(?) 밉다나 어쨌다나...
그렇게 어린 애들을 교정하면 나중에 어금니까지 다 갈고도 교정한대로 있으려나...
요즘은 평생 얼굴만 뜯어먹고 살 것인 양 이쁜 거 이쁜 거만 찾아 내가 다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의료목적 교정이라면 문제될 게 없겠습니다. 미용목적이 문제지요. 제 막내는 앞니가 나와 입을 늘 벌리고 입으로 숨쉽니다.개래서 코에 문제가 생겨 교정을 고려했는데, 치과의사와 교육당국이 하는 꼴이 어이없고 값도 만만치않아 뻐드렁니도 개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아이에게 입을 꼭 다물고 코로 숨쉬기가 익숙해지도록 종용합니다. 아직도 버릇이 되어 입을 벌리고 다니는데 숨은 코로 쉰다고 하네요. 입도 다물어야 할 텐데요.
저는 복이 많아서 건치입니다. 돌을 씹어 이가 깨져서 치과에 간 것이 유일합니다. 아이들에게도 거친 음식을 먹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