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2. 2. 7. 14:57

 

19991231. 40대 중반을 달려가던 우리는 부부동반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카페에 앉아 샴페인을 주문했다. 곧 자정을 맞을 터. 무심한 시간에 매듭은 없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고자 따뜻한 아파트에 아이들 재워놓고 모인 우리는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새로운 마음을 다질 시간을 나눌 참이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서 잔을 높이 든 일행은 어떤 기대감에 젖었는데,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콰과광!” 폭음이 쏟아졌다.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니라,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새천년을 맞는 축포였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금. 40대 중반을 향하던 일행은 50대 중반을 돌파했다. 나이 들면서 빨라지는 시간의 화살은 60세를 향해 가는데, 노스트라다무스와 마야 달력의 저주를 뿌리친 새 밀레니엄은 그간 별고 없었나. 올림픽과 월드컵 열기로 각 3차례 뜨거웠던 시간을 거치면서, 지난 세기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각, 부모가 슬그머니 나간 아파트에 고이 잠들었던 아이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취직 걱정 때문에 졸업을 망설이는 그들의 앞날은 새천년 초기 기대했던 희망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가.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몰아쳤던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작지의 개발과 사막화가 늘어나는 만큼 식량위기는 점점 가시화되는데, 경제성장을 위해 아이를 더 낳으라고 가임여성 닦달하는 우리나라는 젊은이의 취업률만 빈약한 게 아니다. 기득권이 표준을 정하는 세상에서 거대 자본과 재벌은 나날이 번창하지만 다양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와 농어촌은 내년을 기약하기 힘겹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들은 살아가기 버겁다. 대기업에 근무한다고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수보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인 만큼 투기 자본이 춤을 추는 글로벌 경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경쟁에서 소외되는 순간, 대기업 사원도 언제 감원 대상이 될지 모른다.

 

지금은 제 먹을 것 갖고 태어나는 호시절이 아니다. 획일적 표준이 요구하는 경쟁력에 생존이 좌지우지되는 요즘, 남의 다채로운 개성을 배려하는 삶은 사치가 되었다. 12년 지난 새천년, 경쟁력이 밀어붙인 경제성장의 과실을 기득권이 독점하는 세상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에게 아이는 모험을 동반할 각오가 아니라면 낳기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식량도 자급하지 못하는 좁은 국토에 넘치는 인구의 소비 수준은 전 같지 않더라도 태어난 아이는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할 텐데, 경제든 환경이든 부모 맘 같지 않다. 자식에게 미안한 세상이 되었다. 기대감으로 출발한 새천년. 시작은 이렇듯 암울한데, 내일은 창대할 수 있을까.

 

 

 

새천년을 벽두부터 우리 사회를 달아오르게 한 생명공학으로 경제성장을 끌어가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늘어만 가는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주고 지구온난화를 이겨낼 식량을 증산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생명공학은 언제나 부가가치와 국가 경쟁력을 앞세운다. 위험성과 비윤리성을 이유로 만만치 않게 터지는 반대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생명공학은 성과도 올리고 있다. 막대한 연구비에도 불구하고 치료에 사용할 만한 줄기세포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어도 유전자를 조작한 콩과 옥수수는 세계의 식량 기반을 개편할 정도로 재배 면적이 확대된 것이다. 싫든 좋든, 요즘 지구촌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 그 농산물을 재료로 가공한 식품, 그런 사료를 먹여 키운 가축의 육가공식품과 낙농제품을 먹는다.

 

1990년대 말부터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생명공학은 크게 두 분야로 구별해 생각할 수 있다. 흔히 GMO라 칭하는 농산물이 대표하는 유전자 조작과 줄기세포로 대표되는 생명복제가 그것이다. 생명공학에 비판적인 시민단체와 종교계는 안전성 차원에서 유전자 조작 분야와 윤리 차원으로 생명복제 분야를 바라보는데, 그를 반영한 것일까. 개정에 개정을 거듭하고 있지만,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현재 국내에 제정돼 운영되고 있다. 안전과 윤리만은 아니다. 개개인의 유전자를 분리 분류해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감시도 생명공학으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아직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다.

 

생명공학은 불치병과 난치병의 근원적인 치료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획기적인 식량 증산으로 기아 문제를 해결할 것을 약속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에너지 부족과 생태계 파괴를 완화할 것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새천년 들어 대학과 연구소마다 유난스럽게 연구해왔지만 기존 질병은 더욱 치명적으로 돌변했을 뿐 아니라 아토피나 과잉행동장애증후군과 같이 전에 없던 질병이 생겨났다. 식량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을 뿐 아니라 석유는 공급의 정점이 지나 가격 앙등만 남았고 생태계 파괴는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생명공학의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생명공학의 성과와 무관하게, 경제성장을 위한 경쟁 사회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나 생태계 보존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이 신뢰할만한 성과를 올린다면 장차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불치병과 난치병을 유발하는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몰두하는 생명공학 연구가 누구의 어떤 질병을 얼마나 치유할 수 있을까. 성체줄기세포든 배아줄기세포든, 환자 개개의 몸에 부작용이 없는 줄기세포로 분화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계층은 깊은 위화감으로 몸서리치며 치료를 포기하는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 병리현상은 심화되겠지.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유전자 조작 연구는 이제까지 농산물의 증산에 관심이 없었다. 식량이 돈이 되지 않는 한, 그런 연구에 시큰둥할 텐데, 증산에 나선다 해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굶주리는 지역은 대개 돈이 없다. 팔다 남는 식량은 지금처럼 사료로 전용할 테니, 부자들의 고기 식단은 더욱 풍성하게 될 게고, 육식에 의한 질병은 늘어만 날 테지.

 

 

 

생명공학은 경쟁이 낳은 부작용이다. 남보다 빨리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경쟁은 많은 이윤을 얼른 제공하는 시설을 위해 농경지와 갯벌을 거듭 매립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배타적 속도와 목표만을 위한 에너지 과다 소비로 이어져 대기권에 온실가스 농도를 높였고, 사막화와 지구온난화로 이어졌다. 환경변화로 이어지는 필연적 기상이변은 농작물의 작황을 악화시켰고, 녹색혁명의 실패 이후에 등장한 생명공학은 식량 증산이라는 명분으로 몇 안 되는 다국적기업에 의한 가혹한 독점과 획일화로 이어졌다. 이제 세계의 콩과 옥수수는 똑같은 유전자다. 다양성을 잃었기에 재배 방식은 오로지 다국적기업에 문의해야 한다. 그렇게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위해 유전적 다양성을 가진 전통 씨앗을 포기한다면 환경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지구촌은 돌이킬 수 없는 식량난을 초래할 수 있다. 식량 자급률이 25퍼센트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더할 게 틀림없다.

 

육류와 가공식품이 넘치는 세상은 질병을 늘어나기만 하는데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 과소비는 쏟아지는 자외선의 양을 늘렸다. 그뿐인가.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는 핵분열로 충당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방사능을 생활권에 만연시켰고, 때때로 핵발전소가 폭발해 치명적인 방사성물질을 대기와 바다와 토양에 퍼뜨린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앙 권력의 획일적 의지에 따라 빠르게 돌아가는 경쟁적 산업 시스템은 교통사고와 작업장 사고를 빈발하게 했으며 나아가 국가 사이에 테러와 전쟁도 이따금 발생하게 했다. 그 일련의 결과로 늘어나는 개개인의 불치병과 난치병을 줄기세포로 치료하겠다는 발상은 과연 타당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명공학자의 장밋빛 청사진에 현혹된 자본과 국가들이 막대한 연구비를 퍼붓고 있지만, 아직까지 개개인에게 보편적으로 처방할 수 있는 줄기세포는 명징하게 개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만 해도 해마다 100억 원을 10년 동안 퍼부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1004억 원을 계속 지원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 늘어나고 고질화되는 질병의 원인을 방치하거나 부추기지 않던가. 생명공학 중 줄기세포 연구는 아직 연구자의 축제에 지나지 않는다. 노화를 줄기세포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호도하는 태도는 연구비 지속적 획득을 노리는 생명공학자의 이기심에 가깝다. 예나 지금이나, 노화는 받아들여야 할 과정이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다. 의료행위로 연장하는 수명은 개인은 물론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

 

줄기세포 치료는 여벌을 찾고자 하는 부유층에 의해 자칫 생명경시 풍조를 사회에 깃들게 할 가능성이 있는데, 유전자 조작은 어떤가. 농작물의 조작된 유전자가 엉뚱한 생물에 들어가는 부작용이 미국의 경작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만연되고 있다. 조작된 유전자를 섭취한 동물에 치명적이 부작용이 나타나는 사례는 불길한 전조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생명공학은 배타적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자본이나 패권을 노리는 국가권력이 고집한다. 그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받을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은 어떤 대안을 모색해야 할까. 본격화된 지 10여 년 만에 치명적 한계를 드러내는 생명공학을 외면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 그런 사회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낭떠러지 아래 최첨단 병원을 마련하고 있으니 내리막길이라도 안심하고 페달을 더 빨리 밟으라고 권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함께 여행하는 이와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다정히 나누려면 목표보다 과정을 속도보다 그 순간을 즐겨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득권이 설정한 표준을 향해 도열하는 경쟁 사회에서 생명공학의 대안은 찾기 어렵다. 배타적 경제성장으로 하늘과 땅과 물이 오염되고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며 자외선과 방사능이 농도를 갱신하면서 질병은 늘어난다.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중앙 집중식 식품산업체제의 대안은 생명공학일 수 없다. 생물다양성이 회복되는 생태계, 유전적 다양성이 보전된 농작물,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우정과 환대로 이웃과 생태계를 보살피는 행동이 대안이어야 한다.

 

남의 나라의 동물인 코요테나 이미 멸종된 매머드를 복제해 동물원에 가둘 게 아니라 시방 이 나라의 생태계에 가녀리게 살아남은 생물들의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획일적 재배 조건을 요구하는 다국적기업의 유전자 조작 씨앗이 아니라 조상이 물려준 전통 씨앗으로 예기치 못할 환경변화에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약물이나 의료 장비에 묶인 채 쓸쓸히 나이든 생명이 스러지는 세상보다 보살피던 식구와 이웃의 따뜻한 성원과 감사함이 묻어나는 축제의 마당이 되어야 세상은 한결 환해진다. 배타적 경제성장보다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이 확장된 것이다. 귀농운동본부를 끌어가는 한 농민은 치매에 들어선 노모를 도시에서 시골로 모시고 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노모가 땅에서 활동하면서 회복되는 모습을 똥꽃이라는 책에서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행복은 그만큼 연장되었다.

 

생명공학이 불필요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건축이 할 일은 없을까. 나와 내 식구를 다정하게 돌보는 이웃과 친지가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갑게 살 수 있는 마을은 건축이 충분히 구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평화(平和)밥을 평등하게 나누는 일이라고 한다. 평화를 위해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마을을 어떻게 구상하면 좋을까. 앞뒤 위아래 집에서 일면식 없이 몇 해를 살아가는 회색 아파트 구조에서 벗어나 얼굴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고 텃밭을 함께 일구며 나눌 수 있는 녹색 공동주택을 도시에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며 입시학습에 매달리기보다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다채로운 생명이 어우러지는 생태계를 만끽하는 우정 어린 마을도 건축이 구상할 수 있으리라. 이웃이 나와 내 식구를 배려하는 마을이라면 생명공학에 목말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새천년 들어 거액을 연구비를 정부에서 거푸 받아내던 우리나라의 생명공학계는 다시 1004억 원을 챙길 모양이다. 그런다고 생명공학계에 천사는 왕림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배타적 성장을 향해 경쟁하는 사회에 천사가 찾을 리 없지 않은가. 유전자를 조작하고 복제하는 생명공학은 자연에 울타리 치며 사유화하던 18세기 산업혁명 자본가의 엔클로저를 능가한다. 21세기의 생명공학 엔클로저는 후손의 생명에 울타리를 친다. 청사진이 근사한 생명공학은 21세기의 신기루다. 경쟁사회가 빚은 삭막한 환경을 치유할 듯 거룩한 표정을 관리하며 나타난 생명공학은 후손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미 암울하게 시작된 새천년의 건강한 행복은 경쟁보다 서로의 배려로 행복을 나누는 행동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은 아니다.(건축, 2012년 1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0. 7. 5. 00:49

 

평생 삽과 돈으로 사람을 부렸던 어떤 교인이 유구했던 4대 강을 10미터가 넘는 철근콘크리트 보로 틀어막으면서 “강 살리기”라고 언명하자, 국무총리 이하 장차관과 행정고시 출신 고위 공직자들이 “할렐루야!”를 외쳤다. 그러자 민심은 재판을 걸었다. 사법고시 출신에게 판단을 의뢰한 것인데, 고발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법리 검토조차 거부당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유난히 잘해 영재라 받들어졌던 이들이 그랬다. 외국어고등학교와 대치동에서 갈고닦은 그 실력파들은 오로지 삽자루 아래 웅크렸다.

 

행정과 사법고시 못지않게 문이 좁은 이른바 ‘기자고시’를 용케 통과한 자 중에서 일부는 과학부를 담당한다. 그들은 운이 없다. 정치와 경제부는 힘 있고 돈을 가진 이와 친해질 수 있고 사회부는 무척 바쁘더라도 보고 배우는 게 많다. 연예인을 두루 만날 수 있는 문화부는 재미있는데, 과학부는 전혀 아니다. 대부분 인문계 출신인 기자가 특종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보도자료의 문체도 그렇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보도자료의 내용만 건조하게 전할 따름이다. 다른 부서로 옮겨갈 때까지.

 

황우석은 달랐다. 번지르르한 설명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전문적인 내용을 생략하는 대신 기자들이 원하는 핵심, 성공적인 실험이 이어진다면 우리나라의 부가가치가 반도체 이상 커질 것이라 장담하지 않는가. 드디어 과학부에서 특종을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과학부에 제시하는 보도자료에 이론은 생략된다. 성과로 가슴 설렐 정도로 과포장될 뿐이다. 과학이 앞장서서 선동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형광 송사리가 개발됐어요!” ‘74남북공동성명’이 뉴스에서 빠진 7월 4일, 과학부 기자들은 일제히 희소식을 날렸다. 물론 취재한 건 아니다. 늘 그랬듯, 보도자료에 충실한 것이었다. 국내에서 최초에 세계적으로 제브라피시 이후 두 번째라니 가슴 벅찰 준비를 하라는 기자는 형광조명을 비치면 스스로 붉은 빛을 내는 형광 송사리를 호들갑떨며 소개한다. 하긴, 하느님이나 개발할 생명, 그것도 우리나라의 과학이 개발했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게 유전자 변형 기술을 이용해 개발된 형광 송사립니다! 여러분!” 기자는 말을 더듬는다. 마침내 마이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개발자 왈, “바다 송사리의 세포 골격과 근육의 수축이완에 관여하는 유전자 조절부위 영역을 산호의 형광단백질을 융합시켜 형광 송사리를 만들었습니다.” 무슨 소린지 영 모르지만 지도교수가 점잖게 “형광 송사리를 바닷물에 집어넣으면 환경호르몬과 같은 해양오염물질의 농도에 따라서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쉽게 저희가 육안으로 오염정도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덧붙인다. 곧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라는 형광 송사리. 특종 자격이 있나.

 

국토해양부로부터 몇 해 얼마나 받았는지 밝히지 않은 연구자의 지도교수는 지난 1997년 보통 미꾸라지보다 36배나 빨리 자라는 이른바 ‘슈퍼 미꾸라지’를 개발해 과학부 기자들의 주목을 받은 적 있었다. 그런데 이후 그 미꾸라지는 왜 언론에서 사라졌을까. 기자들은 취재를 하지 않았다. 보도자료에 기댄 당시 언론들은 식량문제를 즉각 해결할 거로 둥둥 띄웠다. “한 마리에 400그램이나 하는 이 슈퍼 미꾸라지 한 마리면 온 가족이 배불릴 수 있습니다!”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그 교수가 자랑한 슈퍼 미꾸라지는 시방 어디에 있는가. 추어탕 체인점에는 분명히 없다.

 

앞으로 안전성 심사기관의 승인을 거쳐 해양환경 감시용으로 활용할 계획이라는 형광 송사리.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서 바다에 사는 송사리가 있다는 걸 보도로 알았는데, 환경감시를 위해 산호의 유전자를 꼭 넣어야 했나. 형광물질 없는 송사리나 형광물질을 가진 산호를 활용할 수 없었을까. 사실 그런 시비는 사소하다. 슈퍼 미꾸라지가 발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슈퍼 미꾸라지에 포함된 변형된 유전자는 안전할까 걱정했는데, 형광 송사리는 어떨지 알 수 없다는 점이 큰 걱정이다. 안전성 승인을 전제했지만, 그 승인기관이 어디이고 누가 심사하는지, 생태적 안전성도 조사하는지 궁금하다. 활용 뒤 뜻하지 않게 생태계에 그 형광 유전자를 전파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생명공학자들은 ‘유전자 변형’ 또는 ‘유전자 재조합’이라는 용어를 선호하지만 사실상 형광 송사리는 돌연변이의 산물이다. 세계의 시민단체는 과학자가 만든 돌연변이를 ‘유전자 조작’이라 말한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그 농산물을 가공한 식품을 ‘GMO’라 하고. 어떤 원인으로 몸 안의 유전자가 변하든, 감염이나 먹이를 통해 외부의 유전자가 들어오든, 부모에게 물려받지 않은 유전자는 돌연변이 유전자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돌연변이 유전자는 개체와 환경에 위험을 초래한다. 송사리에 들어간 산호의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페튜니아의 파란색 유전자를 카네이션이나 장미에 쉽게 집어넣지 못했듯, 생명공학자들이 산호 유전자를 억지로 송사리에 넣었을 것인데, 그런 유전자는 쉽게 생태계로 빠져나가 다른 생명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 형광 송사리를 잡아먹은 다른 물고기에서 형광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걱정은 그 수준을 넘어선다.

 

GMO를 보자. 유전자 조작 옥수수와 콩이 제일 흔하고 그 밖에도 많다. 특정 해충을 죽이는 유전자가 들어간 면화는 인도에서 양을 죽였다. 비슷한 형질의 감자는 실험용 쥐의 장기를 위축시켰다. 모나크나비의 생존율을 반으로 줄인 옥수수와 먹은 이를 가렵게 만든 브라질너트도 있다. 모두 형광 송사리와 같은 유전자 조작 생물인데, 사람에게 아직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연구자는 미리 위험성을 간파할 수 없었다. 엉뚱한 유전자가 생명체의 몸에서 어떤 형질을 어떻게 발현시킬지 누구도 사전에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살아 있으므로 번식과 먹이사슬로 생태계에 번진 이후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사람도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특정 제초제에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콩을 심고 몇 년이 지나자 기대와 달리 잡초도 그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을 갖기 시작했다. 조작한 유전자가 퍼진 것이다. 전문가는 ‘수평이동’이라고 말한다. 수평이동의 대상에 산호의 형광 유전자도 포함될 수 있는데, 형광 송사리는 어느 곳에 넣으려 할까. 혹시 양식장이 아닐까. 그 송사리를 먹은 우럭과 광어와 강섬돔이 식탁에 오를 가능성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지 모른다. 내 몸이, 내 아이의 몸에 형광이 발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지만 그 유전자 때문에 암이 발생되거나 유전병이 생기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없는 까닭이다.

 

형광 송사리라고? 그게 유전자 조작 생물체라고? 그걸로 해양환경의 오염을 조사한다고? 그따위 생물 없이 해양환경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아마 거액일 연구자의 연구비 획득을 정당화하기 위한 보도자료와 무책임한 과장 보도. 이제 지겹다. 우리는 ‘헛똑똑이’의 선동에 속지 말아야 한다. (작은책, 2010년 9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7. 5. 2. 00:12

 

신사임당이 젊은 시절에 그렇게 말했다던가. 아름다운 꽃을 그린 화선지를 보고 벌과 나비가 없어 향기를 느낄 수 없다고. 초여름을 앞두고 전국 산하의 꽃나무와 들꽃들은 저마다 향기로운 꽃을 자랑한다. 꿀벌과 나비는 부지런히 날아다닐 것이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씨앗을 생산하려면 먼저 수술과 암술을 가진 꽃을 피워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에 닿아 수정되어야 한다. 수정을 바람에 의존하는 나무를 제외한 들풀과 나무는 꽃이 화사할 뿐 아니라 향기도 그윽하다. 꽃 속에 꿀이 들었다는 걸 암시한다.

 

이맘 때 꿀벌은 꿀을 모으면서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에 묻혀주는 역할을 맡는다. 꽃과 꿀벌이 진화한 이래 지금까지 둘 사이의 관계는 계속되었고, 앞으로 변함없을 것이다. 덕분에 양봉업자는 꽃을 따라 따뜻한 남쪽에서 북쪽 지방으로 오르고, 복숭아와 배도, 딸기와 참외도, 수많은 들꽃과 나무도 열매와 씨앗을 맺을 수 있다. 사람이 먹는 농작물의 삼분의일을 꿀벌이 수정한다.

 

한데, 요즘 꿀벌이 급속히 사라진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린다. 주로 유럽에서 나오는 외신은 꿀벌이 예년에 비해 70퍼센트 이상 사라졌다는 것인데, 최근 미국의 꿀벌은 급격히 격감한다고 걱정한다. 그를 반영하는지 얼마 전, 한 신문은 우리나라의 어떤 과수원에서 사람이 벌을 대신해 일일이 꽃에 붓으로 가루수정을 하는 사진을 내보냈다. 벌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라는 건조한 설명과 함께.

 

꿀벌이 사라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짐작하는 대로 농약 때문일까.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는 외신은 농약도 무시할 수 없지만, 최근 급속히 사라지는 원인으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광범위한 파종과 더불어 이동전화를 의심한다. 조작된 유전자가 농작물에서 꿀벌로 수평이동한 다음 꿀벌의 유전자를 교란했을 가능성과 전 세계를 뒤덮은 이동전화와 기지국에서 내보내는 전자파가 꿀벌 사이의 정보교환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꿀벌이 사라지는 현상은 가볍게 지나칠 수준을 넘는다. 방심하다가 생태계의 재앙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생존에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학자들은 원인을 한시바삐 밝혀내고 세계의 모든 국가는 황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마련된 대책에 마음을 모아 실천해야 한다.

 

외신은 한결같이 시간이 없음을 강조한다. 확실한 인과관계를 찾지 못해 머뭇거릴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다. 농약이냐 유전자 조작이냐 이동전화의 전자파냐를 논란하다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고로 들린다. 꿀벌이 농약에 유난히 약하다는 것은 사실인 이상, 농촌은 물론 항공방제도 자제해야 할 텐데,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어 걱정이다. 농약을 획기적으로 줄이거나 농약 없는 유기농업을 어서 도입해야 하는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소비자들이 마음을 모으면 당장 피할 수 있다. 전통 농업으로 생산한 농작물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다국적기업에서 생산해서 수출하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소비자가 외면하면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꿀벌이 회복될지 두고 보아야겠지만, 더는 악화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동전화의 전자파다. 이동전화의 편의에 길이든 시민은 물론이고, 이동전화 자본은 꿀벌을 위해 사업을 중단할 용의가 있을까.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을 경우, 결코 막대한 이윤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광고를 동원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소비자를 계속 현혹할 텐데. 쏟아지는 최신 모델마다 사실상 크게 필요하지 않은 기능을 추가하며 당장 바꿔야 할 것처럼 유혹할 텐데.

 

다급히 타전하는 외신을 보고 흐드러진 꽃을 주의 깊게 살피니 정말 꿀벌이 무척 드물다. 꿀벌이 줄어들자 꿀이 모인 남의 벌통을 빼돌리는 양봉업자의 범죄가 늘어난다는 뉴스가 등장하는데 우리는 조용하다. 벌이 사라진다는 뜻은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의미인데, 왜 아직도 무관심한가. 사람은 꿀벌이 사라진 이후 4년을 견딜 수 없다는데. (요즘세상, 2007년 5월호)

님에게 인사드립니다.
저는 인서점아저씨라고 합니다.
글이 좋아서 스크랩하려다 실패하고 복사를 해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의 카페에 아래와 같은 글을 붙여서 올려놨지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인서점아저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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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겨레 신문에

<꿀벌이 사라진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꿀벌의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 인간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아래의 다섯 가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 벌의 살아가는 생태적 습성에서 '자연환경'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 벌의 집단생활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흡사하고 그것은 자연의 모습이다.

* 자연이 허용하는 집단생활의 민주주의적 조직의 한계를 알 수 있다.

* 인간의 집단생활과 조직의 한계와 극복을 사회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 모델이다.

* 자연의 파괴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오는 반응을 알 수 있다.



저는 이런 것을 토대로

청년시절에 '막 철학'이라는 것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추출한 논리가 저의 <삼각논리>이며

저를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게 했던 발 그 <주체철학>이기도 하고

<현상발전의 법칙>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철학을 위해 저에게 모든 헌신적인 활동을 아끼지 않았던

저의 영원한 친구 '조영명'이라는 분과 함께 했던 저의 '사고와 인식'의 모두인 것입니다.

또 이 까페의 끝 부분에 <인서점아저씨의 막 철학>이라는 항목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는 제가 언제라도 이 '막 철학'을 쓰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여간, 그래서 어떤 이의 불로그에서 이 글을 복사해다가 올립니다.

(사실, 인사를 하고 스크랩 할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군요.)

인서점아저씨 올림



****벌의 생태와 그 조직과 활동을 주의 깊게 살피면

인간의 사회조직은 물론 그 한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철학, 신학도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발견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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