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5. 5. 9. 10:29

 

대장암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큰 선종성 용종을 가진 이가 2008년 이후 5년 사이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보도가 지난 3월 나왔다. 언론은 거기까지 보도했다. 2008년 이전의 상황은 알리지 않았다. 2018년 이후의 추이도 전하지 않았다. 그 내용을 밝힌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선종성 용정이 늘어난 이유를 분석하지 않았다.


선종성 용종이 있다고 반드시 대장암 환자로 이어지는 건 아닐지라도, 도대체 왜 그 용정을 가진 이가 최근에 늘어난 걸까? 언론은 고령층 인구의 비중이 커지는 상황에서 서구적 식생활이 증가하고 건강검진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는 사람의 수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는데, 상투적이다. 최근 5년 이내에 식생활이 갑자기 바뀌고 고령층이 늘어난 게 아닌 만큼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대장내시경 검사가 최근 늘었더라도 설득력이 약하다. 다른 질병은 두고 하필 선종성 용종만 늘어난 이유는 뭘까? 한 전문가는 2008년부터 수입이 허용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의심한다. 정부가 일사천리로 식용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그런 농산물로 가공한 식품(GMO)의 수입을 허용한 뒤에 선종성 용정이 증가한 게 아닌지를 추론하는 거다. 물론 그 추론을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다. 다만 원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어떤 합리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씨앗으로 GMO농산물을 독점 생산하는 다국적기업은 어떤 유전자를 어떻게 조작했는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종의 유전자를 농작물에 넣는 과정은 정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지 않았던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실제로 그렇다. 시장에 내놓을 때 몰랐던 부작용이 널리 소비된 이후 밝혀지거나 연구할 때 몰랐던 부작용이 다른 지역에 파종하자 나타나기도 한다.


유전자 조작 기술로 맛을 강화한 브라질너트는 먹는 이에게 가려움증을 유발해 퇴출되었지만 그 정도는 약과에 그친다. GMO감자를 먹은 실험쥐의 뇌와 심장이 위축되고, 유전자 조작된 어떤 옥수수를 먹은 닭과 제주왕나비의 생존율이 절반 이하였다는 주장은 과학적 근저를 가진다. 숲에 풀어놓은 보통 옥수수를 탐한 초식동물이 GMO옥수수를 외면하는 현상은 무엇을 웅변하는가?


미국인의 선종성 용종 발생률은 얼마나 될까? 유기농산물을 주로 구입해 가족과 요리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미국인이 식품매장에서 구입하는 가공식품의 대부분에 GMO가 섞였다고 이르기에 하는 궁금증인데, 어느새 우리나라는 GMO 수입 세계 1위 국가가 되었다. 그것도 대부분 미국계 다국적기업이 생산한 GMO 일색인데, 유럽인들의 선종성 용정 발생률은 어떨까? GMO표시가 분명한 유럽에서 소비자들은 시장에서 GMO를 거의 퇴출시켰다.


자연의 동물이 회피하는 GMO가 쥐와 닭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GMO 관련 자본에 독립적인 과학이 밝혔으니 GMO는 사람에게 절대 안전하다 확신할 수 없다. 그런 GMO2008년부터 먹어온 사람들은 그 전과 다른 건강의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런가? (푸른두레생협소식지, 20155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4. 10. 13. 17:33


1960년대 대부분의 국가가 그랬듯, 우리나라도 이공계의 수재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핵발전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때 핵을 전공한 분들 중에 지금도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이, 얼마나 될까요? 미국의 드리마일 핵발전소와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에 이어 관리가 엄격했다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거푸 네 차례 폭발했는데, 아직도 뿌듯해할까요? 심장병과 백혈병에 이어 감상선암이 증가하고, 안심해도 좋을 해산물이 드물어지는 현상을 보고 머쓱해진 분이라면 후회하고 있겠지요. 청년으로 돌아간다면 핵발전 분야를 선택하지 않을 성 싶습니다.


성적이 빼어난 요즘 이공계 학생들이 어느 분야를 선호하는지 모르지만, 한때 생명공학의 인기가 높은 적 있었습니다. 황우석 전 교수가 있지 않은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한 추문으로 우리나라의 과학 위상이 세계적으로 곤두박질친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이니,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데, 생명공학도 3의 불로 치장된 핵발전처럼 다음세대를 위한 과학으로 표장되었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말할 것도 없고, 폭발한 지 30년에 가까워지는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치명적 방사선을 여전히 분출합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에 넣어도 소용없을 텐데, 그 부담은 후손에게 전가되지요. 생명공학은 어떨까요.


요즘은 원자력공학이라고 고쳐서 말하지만 예전에 누구나 핵공학이라 했습니다. 그렇듯 공학이라는 단에 앞에 보통 재료의 명칭을 붙이지요. 원자에서 발생하는 힘은 미약해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없습니다. 핵반응으로 놀라운 에너지가 발생하므로 공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핵공학으로 정의해야 옳지만, 연이은 폭발사고로 워낙 부정적인 인식이 생겼고, 명칭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지요.

 

 

다음세대를 위한 생명공학?

 

추상적인 생명은 공학의 연구 재료가 될 수 있을까요? 논리학자는 생물공학이라고 말하던가 아니면 생명과학이라고 칭해야 옳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명공학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생명공학은 생명을 재료로 사용합니다. 바로 후손의 생명입니다.


인류복지를 앞세우는 생명공학은 식량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것처럼 홍보합니다. 굶주리면서도 늘어나는 가난한 인구를 먹여 살릴 거로 자신합니다. 유전자를 바꿔주면 미꾸라지가 가물치처럼 커지고, 생산량이 늘어나는 농작물로 개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가능할까요? 먹이와 비료를 늘리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력이지만, 더 살필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도 식량은 70억이 넘은 세계의 인구에게 골고루 돌아가고 남을 정도로 넘치지만 많은 인구는 굶주리거나 기아로 세상을 일찍 떠납니다. 많이 먹어 찐 살을 빼려는 인구가 지구촌의 어떤 곳에 넘치지만 다른 쪽은 먹을 게 없습니다. 지구촌에 나눌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웃과 나누던 식량이 사고파는 상품으로 바뀐 이후의 일입니다. 다국적기업이 주도한 일이지요. 식량으로 큰돈을 벌어들일 수 없다면 어떤 자본도 증산에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지구온난화가 심해진다면 세계적 식량위기가 앞당겨질 것으로 예견하는데, 그때가 되면 생명공학으로 식량을 더 생산하려는 다국적기업이 생기겠지만 식량 구입할 돈이 부족한 국가는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생명공학을 평등하지 않은 과학으로 여기는 사람은 윤리와 안전 차원으로 생명공학을 주목합니다. 생명공학이 위험한 이유는 유전자를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GMO’라고 하는 새로운 농산물은 원래 없었던 유전자를 조작해서 넣는 생명공학 기술로 만든 생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극에 사는 넙치 유전자를 넣어 잘 무르지 않는 딸기를 개발하거나 중금속이 섞인 물에서 잘 사는 올챙이의 유전자를 나무에 넣어 가로수로 사용하겠다는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는데, 그런 딸기에 들어간 유전자가 먹는 이의 몸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올챙이 유전자를 넣은 나무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만일 가로수로 심었다면 그 유전자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 건강에 문제를 일으켰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사실 GMO는 농작물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유전자를 가진 생명이라면 조작하여 GMO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도 물론 가능하지만 대부분 돈벌이가 되는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합니다. 어떤 약을 생산하기 위해 미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에는 조작된 유전자를 먹는 것은 아닙니다. 조작된 유전자가 미생물 안에서 만든 물질을 약으로 먹고, 약은 환자만 먹으므로 환경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농작물은 다릅니다. 유전자를 먹게 됩니다. 그래서 GMO 농작물을 특히 안전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조작된 농작물이나 생물에 들어간 유전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생물로 들어가는 일이 생깁니다. 몬산토라는 회사에서 만든 유전자 조작 콩과 유체를 심었더니 그 유전자가 잡초에 옮겨진 일이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생겼습니다. 그 콩과 유채는 몬산토에서 파는 제초제에 이겨내도록 유전자가 조작되었던 건데, 그 유전자가 잡초로 옮겨가는 바람에 잡초들까지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 되면 많은 돈을 들어 농사를 짓는 농부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해충을 죽이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감자를 먹은 쥐가 죽어가는 현상,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먹은 닭이 더 일찍 죽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유전자 조작한 송사리 60마리를 정상 송사리 6만 마리와 섞었더니 40세대 만에 모두 전멸했다는 미국 과학자의 연구는 걱정거리를 크게 안겨줍니다. 덩치가 크게 자라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연어를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 연어의 알이 양식장에서 빠져나가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연어를 가공하거나 요리해서 판매할 거라는 점입니다. GMO라는 표시가 분명하지 않다면 소비자는 먹기 전에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파는 다국적기업은 그런 표시를 한사코 반대합니다. 소비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정부와 의회라면 정확한 표시를 붙이도록 법과 제도를 제정해야 옳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일랜드>라는 미국 영화가 2005년에 우리 극장가에 선보인 적 있습니다. 부자들에게 장기를 이식하기 위해 복제한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이 들어 심장이니 간이 약해지면 심장을 떼어줄 복제인간을 미리 생명공학으로 태어나게 하는 사회는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추악한 일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는 인간의 복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장기를 만드는 연구자라면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장차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태아나 배아를 죽여야한다면 어떤가요? 아직 사람이 아니므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파란 장미와 줄기세포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은 현대의학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인류의 질병을 해결해 인류의 꿈인 수명연장이 이루어질 것으로 장담합니다. 현재가 아니라 많은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어진 이후에 그리 될 것이라고 일부 생명공학자들은 확신하지만,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지금 많은 지역의 인구들은 간단한 약품과 시설이 당장 없거나 부족해 생명을 잃습니다. 깨끗한 물이 없어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많은 돈이 필요한 생명공학은 요즘 누구를 위해 연구되던가요? 남성보다 여성, 젊은이보다 노인이나 어린이가 먼저 희생되는 지역 인구의 꿈도 생명연장일까요? 거대한 자본이 계획하는 생명공학은 가난한 계층의 질병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공학으로 치료하겠다고 장담하는 병은 사실 그리 다양하지 않습니다. 세포의 재생과 관계가 있으니 젊은이보다 나이든 이에게 혜택이 갈 가능성이 높지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가능성을 살피는 연구 단계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의 종류는 꽤 다양해 200여 가지가 되고, 그 세포들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언제나 새롭게 재생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재생력이 아무래도 떨어집니다. 젊었어도 어떤 세포가 활발하게 재생하지 못하면 병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재생력 있는 세포를 환자의 몸에 충분히 넣으면 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부세포는 피부만 만들고 골수는 피를 만들지 신경이나 심장세포를 만들지 않습니다. 화상을 입어 재생이 불가능해진 환자의 피부를 제거하고 활발하게 재생할 수 있는 피부세포를 이식한다면 치료가 가능해질 것인데, 그러자면 줄기세포로 피부세포를 분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줄기세포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참 복잡합니다.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한 세포를 분화시켜야겠지만 그보다 분화된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안전한 줄기세포는 보통 환자 자신의 몸에서 찾습니다. 한데 나이 든 이의 몸에서 줄기세포를 충분하게 찾기 어렵습니다. 젊은이는 건강하고 안전한 줄기세포를 찾을 수 있다지만, 줄기세포 치료가 필요한 젊은이는 매우 드물겠지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개발 과정에서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유전자의 다양성이 사라진 생물은 환경변화에 매우 약하게 됩니다. 조류독감 때문에 죽는 경우가 드문 철새와 달리 양계장의 닭이 몰살하는 이유와 비슷한데, 유전자를 조작한 생물은 그 정도가 훨씬 클 겁니다. 유전자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농작물이나 가축을 제대로 키우려면 투자비를 크게 늘려야 합니다. 많은 에너지를 동원해 사육이나 재배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니까요.


인류의 과도한 화석연료 낭비는 지구온난화를 일으켰는데, 농업에서 낭비하는 화석연료도 상당합니다. 그러므로 유전자 조작은 지구온난화를 악화시킬 겁니다. 예전에 드물던 기상이변은 어느새 일상화되었는데 기후학자들은 더욱 심각해질 거로 예견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유전자가 단순해진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온난화된 환경에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도태된다면 지구촌 식량위기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려받은 기름진 땅에서 조상은 안전하고 건강한 농작물을 재배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농작물로 입맛에 맞는 고유 음식을 국가와 지방마다 다양하게 먹어왔습니다. 농작물이 단순하다면 음식도 다양하기 어려울 텐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독점적으로 파는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왜 우리가 위험에 빠져들어야 하는 걸까요. 다국적기업의 광고에 속아 앞으로 밥상에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가공한 식품이 가득하게 된다면 후손의 삶은 어찌될까요? 자기 땅에 어울리는 농작물을 잃은 만큼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맥없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환경오염을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생명공학자도 있습니다. 특별한 오염을 제거하는 미생물을 만들어 폐수를 정화할 수 있다는 주장인데, 실현되었다는 소식은 여태 들리지 않습니다. 한데 꽃말이 불가능인 파란색 장미는 생명공학으로 개발돼 대단히 비싸게 팔린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페튜니아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넣었던 겁니다. 개발한 기업의 돈벌이에 도움을 주겠지만 그 장미가 인류복지를 향상시키는 건 아닙니다. 폐수는 물론이고 핵폐기물도 정화하는 생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명공학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물, 그리고 그 생물이 가진 유전자가 제 자리에 멈춰 있지 않을 테니까요.


석유가 고갈되면 생명공학으로 사탕수수나 옥수수와 같은 농작물, 그리고 파래와 같은 바다 식물을 효율적으로 개량해 바이오연료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명공학자는 희망합니다만, 그런 식물을 막대하게 재배하는데 들어가는 영양분은 대부분 석유로 가공합니다. 가공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까지 감안한다면 생명공학으로 개량한 식물에서 얻는 바이오연료의 에너지가 고갈을 앞둔 석유보다 많을 거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바이오연료도 태우면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가 배출됩니다.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식물을 생명공학으로 개발하겠다는 호언장담이 아직 없는 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줄기세포를 먼저 유도하고, 그렇게 얻은 줄기세포로 치료 가능한 세포를 분화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한 만큼 비용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라도 안전하고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줄기세포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줄기세포가 연구되고 있는 정도인데, 돈이 아주 많으면서 운이 좋아야 치료할 수 있는 생명공학을 인류의 복지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줄기세포로 나를 문제없이 치료할 수 없습니다. 아무 장기를 이식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면역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나아질 수 있을까요?


내 몸이든 남의 몸이든, 사람의 몸에서 찾는 줄기세포는 보통 안정적입니다. 나이든 사람의 몸에서 나온 줄기세포가 아니라면 치료할 세포로 분화된 이후 암과 같은 다른 세포로 바뀌는 경우가 적다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만 완전하지 않으므로 불안합니다. 그래서 위험하기도 합니다. 면역 거부반응 뿐 아니라 한번 분화한 뒤 엉뚱한 세포로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줄기세포로 세포 재생을 도와 치료하는 생명공학은 아직 연구 단계일 뿐인 겁니다. 치료를 장담해서 현재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유혹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비윤리적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유도하는 줄기세포보다 시험관에서 만든 배아로 줄기세포를 유도하려는 생명공학자도 있습니다. 배아는 아직 사람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어도 성인 여성의 자궁에 착상하면 사람이 될 수 있는 상태의 생명입니다. 그런 배아는 흔히 시험관아기라고 말하는 기술로 아기를 임신하게 하는 불임클리닉에서 많이 만듭니다. 황우석 전 교수는 인간복제 기술로 만들었다고 논문을 썼는데, 사실이 아니었지요. 불임클리닉의 시험관에서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킨 뒤 여러 차례 분열하면 배아가 되는데, 일부 생명공학자는 아직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자궁에 착상시키지 않은 배아를 파괴해 줄기세포를 유도하는 것이지요. 생명공학자의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배아를 생명이 아닌 세포 덩어리라고 정의해야 옳을까요?


배아로 얻는 줄기세포를 유도하려면 여성은 생명공학 연구자에게 난자를 먼저 기증해야 합니다. 난자와 배아는 다음세대를 상징합니다. 정리하자면, 다음세대의 생명을 희생시켜 현 세대의 생명을 연장시키겠다는 연구인 겁니다.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일부 부자를 위해 후손을 희생하는 의료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평등합니다. 정의롭지 못합니다.


배아로 얻는 줄기세포는 다음세대로 성장할 수 있는 세포를 파괴하는 윤리적 문제만 노출하는 건 아닙니다. 위험하므로 치료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환자의 몸에 들어갈 경우 암세포로 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전 교수가 사실을 왜곡해 국제적으로 물의를 빚은 2004년과 2005년의 논문은 배아를 파괴하여 만든 줄기세포가 쥐의 몸에 들어가 암세포로 돌변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생명공학자는 많은 연구가 축적된다면 안전성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우리는 안전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얼마나 강조했던가요. 30년 전 과학을 지금 살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시 기대가 대단했을지 모릅니다. 성과가 찬란해 보이는 지금의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안전성을 찾지 못하는 생명공학은 영원히 안전하지 않을 것으로 생물학을 전공한 저는 확신합니다.

 

 

비윤리적이고 불평등하며 안전하지 않은

 

생명공학의 안전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전자 조작 연구와 생명복제 연구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유전자를 조작해 고기에서 과일 향이 나는 소를 개발해 복제할 수 있습니다. 우스개였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서 닭에 개 유전자를 넣어 날개를 다리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생명공학자도 있습니다. 그런 닭을 복제하여 보급한다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생명공학은 윤리와 안전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는 아직 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가능성이 보인다면 다국적기업이 가만히 있을 리 없겠지요. 바로 이익추구로 연결할 겁니다. 그럴 경우 후손이 직접 피해를 입는 불행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줄기세포로 배아를 파괴하든, 유전자 조작 농산물로 건강한 생태계와 삶을 위협하든, 모두 다음세대에게 위험하고 비윤리적입니다. 불평등하므로 정의롭지 않습니다.


내 땅에 오래 적응된 농작물을 건강하게 먹고 자라면 줄기세포도 불필요합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유전자자 조작된 농산물을 먹은 동물의 몸에 이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사람 몸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명공학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식량 자급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먹는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합니다. 그러면서 해마다 20조 원 이상의 음식쓰레기를 버린다고 합니다. 수입하는 농산물이나 가공식품이 몸에 좋을 리 없겠지요.


물 맑고 공기 좋으며 먹을거리가 건강한 환경이라면 질병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줄기세포 치료는 불필요해집니다. 나이 들어서 생기는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노인은 치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른 나이에 세포에 노화가 생기는 질병은 대부분 건강하지 않은 환경에 오래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오염물질과 방사능이 많은 환경, 스트레스와 피로에 젖는 환경을 그대로 두고 생명공학부터 연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핵발전처럼 나중에 후회할 생명공학이라면, 지금부터 경계해야 합니다. (환경정의 발간, 우리와 다음을 생각하는 청소년 환경정의 교과서, <환경정의, 니가 뭔지 알고시퍼> 기고문)

반갑습니다.
황사가 심한 월요일입니다.
외출 시 각별히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소중하고 유익한 자료 감사히 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7. 1. 09:03

 

권정생 선생의 7주기가 얼마 전 지나갔다. 조촐한 추모 행사가 열렸는데, 가고 싶어도 머뭇거리게 된다. 적지 않은 인세가 들어와도 청빈보다 평생 가난하게 산 권정생 선생은 생을 거둘 때까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났어도 세파에 찌든 몸으로 찾아갈 수 없었다. 북한 주민의 3분의1이 굶주린다는 말이 들릴 때, 서글픈 세상에서 기쁜 이야기를 쓸 수 없다던 권정생 선생은 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며 독자에게 북한 지원을 호소한 적 있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어도 안 먹고, 술만 술술 잘 넘어간다.”는 주당의 너스레가 있는데, 동지 때 아내가 팥죽을 챙기지 않는다면 죽 먹을 기회는 거의 없다. 술술 잘 넘어가는 술로 고주망태가 된 다음날 전문식당을 찾은 적이 드물게 있고, 아메리카노가 지겨울 때 단팥죽을 주문할 따름이다. 그저 죽은 별식일 따름인데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그런 죽이 쇠약해진 몸을 거뜬히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지율스님이 KTX 천성산 구간 터널의 부당함을 알리며 100일 가까이 수행하던 단식을 마칠 적이었다.


50년이 넘는 기억 속에 돈이나 먹을 게 없어 굶은 적은 없지만 두어 차례 단식은 했다. 지율스님을 응원하려 조계사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마음을 모을 적에 고작 하루 3끼를 굶었고 물론 견딜만했다. 그날 함께 단식한 수녀들은 24시간 먹는 이야기만 꺼냈다. 팔도음식을 거쳐 각종 샐러드로 이어질 때마다 군침을 다셔야 했는데, 청양고추를 넣어야 샐러드도 제맛이라는 말에 기가 질리기도 했다. 단식을 마치면 조계사 앞 수레에서 파는 수수팥떡부터 먹으리라 다짐했건만 그 시간에 수레는 떠나고 없었다.


타의로 끼니를 거른 적 없으니 굶주림의 고통을 이해할 리 없는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적은 있다. 아직 젊었던 30대 후반의 일이다. 굴업도 핵폐기장을 반대하며 들어간 단식이었다. 주위에서 하도 겁을 줘 잔뜩 긴장하기도 했지만 3일 만에 중단했으니 배고플 기회가 없었다. 10끼 굶고 찾은 식당에서 허연 죽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 내주었는데, 그걸 조금 마시고 일어서니 참기 어려운 허기가 갑자기 밀려왔다. 단식보다 복식이 어렵다니 죽보다 부드러운 음식, 하필 초콜릿을 골랐다. 이후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족히 일주일은 고생해야 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고, 자식들 입에 이팝 들어가던 때

 

청주의 명물 중 하나는 입구 4차선 도로를 덮은 가로수 터널일 테지만 시민들이 지켜낸 산남동의 원흥이 방죽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산남3지구 주택 개발 사업이 예정된 곳은 계단식 논이 넓었다. 공사가 시작될 즈음 법원과 검찰청이 예정된 터에서 조금 떨어진 원흥이 방죽에 새카만 두꺼비 올챙이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며 이동하고 있었다. 보호대상종이던 두꺼비의 오랜 산란터라는 걸 확인한 청주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행동했고, 부족하나마 원흥이 방죽의 훼손을 막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6천 가구가 넘는 산남동의 번듯한 아파트에 살림살이를 들여놓은 이 가운데 원흥이 방죽을 기억하는 이 드물다. 그래서 그런가. 산란하는 두꺼비가 해마다 줄어든다.


법원과 검찰청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의 양 측편은 이팝나무 가로수가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5월 초 회의 참석을 위해 원흥이 방죽 근처의 두꺼비 마을을 찾았더니 이팝나무 가로수들은 저마다 작고 하얀 꽃을 활짝 펼쳐놓았다. 과연 흰밥 한 주발을 엎어놓은 모양 그대로였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들 입에 이팝 들어갈 때가장 뿌듯하다는 말이 있다. 이때 이팝은 흰 쌀밥을 뜻한다. 농경사회에서 24절기의 입하(立夏)는 한참 배고플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 꽃이 피니 입하나무로 불렀다는 말도 있는데, 겉보리도 수확하기 전이다.


저장해둔 쌀이 벌써 다 떨어진 입하 무렵이었을까. 들판의 보리가 봄 가뭄으로 타들어갈 즈음, 권전생 선생은 마을 할머니에게 듣던 안동지방의 굶주림을 가만가만 전한다. 방문 닫아걸고 밥을 먹고 있으면 문을 부수고 느닷없이 들어선 거지가 밥주발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한다. 뺨을 후려쳐 뱉어낸 밥알까지 긁어 먹었던 시절, 뒷산 애기무덤은 발 디딜 틈 없이 애기들이 묻혔고 날보리를 껍질 째 손바닥으로 비벼 먹은 거지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떼로 죽어갔다는 노인의 기억은 권정생 선생이 태어나기 전, 1920년대 우리 조상의 피눈물나는 고통의 한 단면이었다.


겉보리도 먹지 못하고 죽어간 조상의 후손은 요즘, 요령 있게 밥, 아니 칼로리를 줄이려 애를 쓴다. 밥은 별로 먹지 않는다. 하루 3, 일주일 21끼 중에 밥은 식단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한다. 아침을 거르는 경우도 많지만 국수나 빵으로 대신하거나 저녁 때 술 한 잔과 안주로 때우기 일쑤다. 어젯밤 술 때문에 아침을 마다할 적이 많으니 이래저래 쌀 소비량은 줄어든다. 1970년대에만 해도 밥주발에 한 주발을 더 엎어놓은 듯, 고봉을 눌러 담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발보다 작은 그릇에 채워담지 않아도 으레 남긴다.


허기진 구석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요즘 사람들은 칼로리의 대부분을 밥보다 반찬에서 챙긴다. 주문하는 도시락도 밥보다 반찬이 훨씬 많다. 밥은 그저 짜고 맵고 단 반찬을 중화시키려 먹는 용도로 전락했는데, 굶주림을 잊은 우리는 쌀 이외 음식의 자급률이 3%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잊곤 한다. 쌀 자급률마저 80%대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원산지 표시가 허술한 식당의 밥이나 편의점 삼각김밥의 쌀 출처는 의심해볼 일이다.

 

 

비만은 가난의 상징?

 

맨 처음 뷔페식당에 들어간 게 언제였던가. 1980년대에만 해도 대단한 부자가 아니라면 엄두 낼 수 없었는데, 어느덧 일상으로 다가왔다. 결혼식이나 생일에 초대받아 찾는 뷔페식당마다 가득 쌓은 음식. 출처는 과연 어디일까? 접시를 몇 차례 교환하며 받아오는 산해진미의 원산지를 확인하는 손님은 거의 없다.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포장지 뒷면의 깨알 같은 글자를 유심히 살피는 소비자일지라도 유전자를 조작한 농산물인지, 광우병 위험이 높은 고기인지, 후쿠시마 일원에서 잡아온 물고기인지 뷔페식당에서 따지지 않는다. 버리는 음식도 상당할 것이다.


해마다 우리나라에서 버리는 음식 쓰레기는 얼마나 될까. 2008년 환경부는 일인당 하루에 평균 280그램을 버린다고 조사했으니, 인구를 곱하면 하루 14000톤이고 해마다 510만 톤의 음식 쓰레기가 발생하는 셈이다. 처리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식량의 70% 이상 수입하는 처지에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부는 식당이나 가정에서 배출하는 쓰레기가 많다고 밝혔지만 식품회사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가정에서 그렇게 많은 음식 쓰레기를 배출할 리 없다. 식품 제조공장의 발생량은 영업비밀일까?


먹는 양보다 상해서 버리는 고기가 더 많을 때가 드물지 않은 나라가 미국이다. 가공과정에서 대장균이나 식중독 균에 오염된 사실이 밝혀지면 그 회사의 같은 제품을 지체없이 폐기하기 때문이다. 주로 대형 식품회사의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2004년 만두소 파동과 2008년 중국산 유제품의 멜라민 오염 사건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음식이 상품화 전에 버려졌던가. 멀쩡해도 버린다. 오스트리아 최대 도시인 비엔나에서 하루에 버리는 가공식품은 두 번째로 큰 그라츠에서 소비하는 양과 같다. 포장도 뜯지 않은 빵과 유제품이 유통기한 지났다는 이유로 전량 폐기된다.


멀쩡한 상태로 버린 음식을 일부로 찾아 먹는 사람을 프리건(freegan)’이라고 한다. 낭비적 삶을 행동으로 비판하는 미국 프리건의 상당수는 고학력 전문직이라지만 그들이 소비하는 음식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유통기한에 근접해 폐기 대상인 식품을 모아 저소득 계층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정부나 민간단체의 푸드뱅크(food bank)’ 사업은 우리나라도 실시하지만 결식 시민을 없애지 못한다. 어차피 버릴 음식이므로 식품회사에서 기꺼이 푸드뱅크에 내놓지만, 유통기한 지난 재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모두 내놓으면 새로 팔 물건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은가.


음식 쓰레기가 넘치는 세상이건만 굶주리는 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무료 급식소마다 점심 줄이 길어지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 덕분인가?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비만이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 예전에 없던 역설이다. 여유가 없어 값싼 가공식품을 허겁지겁 먹는 가난한 계층에 비만이 늘었다는 건데, 필수 영양소나 비타민이 결핍된 가공식품에 의존하다 젊거나 어린 나이에 성인병에 접어들기도 한다.

 

 

녹색혁명과 유전자조작

 

내일도 3끼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사람은 세계에 얼마나 될까?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30명은 진종일 굶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30명은 3끼 먹을 자신이 없다. 분쟁과 갈등으로 구호식량이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근본 원인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한다. 식량을 생산해오던 기름진 농토에 말뚝을 박은 다국적기업이 플랜트농업단지를 만들어 돈 많은 국가에 팔기 위해 기호식품이나 농산물을 재배한다. 식량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본적으로 이웃과 나눴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품이다. 돈이 없으면 열외일 수밖에 없다.


록펠러와 포드재단의 후원으로 1943년 멕시코 소노라 주에서 시험한 녹색혁명은 대성공을 거뒀다. 적시 적량의 물과 엄선한 화학비료를 적기 투입하자 밀은 3, 옥수수는 2배의 수확을 올렸다. 과학자가 개발해 종자회사가 공급하는 다수확품종이다. 그 씨앗에 맞는 농사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자 2모작은 물론 3모작까지 가능했다. 기아로 허덕이는 지역의 식량은 충분히 공급하게 될 것으로 믿을 만했다. 다수확품종을 심는 농민은 이윽고 조상이 물려준 씨앗을 버렸다.


다수확품종을 대규모로 심기 위해 농민은 소박하게 농사짓던 농토를 바꿔야 했다. 무거운 농기계에 맞춰 경작지를 커다랗고 반듯하게 정리한 다음, 적지 않은 석유를 소비해야 했다. 막대한 투자에서 소외된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해야 했다. 남은 농부는 돈이 들어가는 만큼 수확한 농작물은 적정 이윤이 보장된 시장에 팔아야 했는데, 씨앗을 남기면 계약위반이다. 농부는 해마다 다수확품종의 씨앗을 종자회사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내년에 심을 씨앗을 몰래 갈무리했다 들키면 감당 못할 벌금이 부과된다.


녹색혁명 이후 농작물은 엄연한 상품이다. 가난한 지역의 인구는 농산물을 구입할 수 없다. 농작물의 생산과 소비 뿐 아니라 운송과 유통까지 통제하는 다국적 식량 자본은 다수확 농작물의 공급 방향을 바꿨다. 과잉 생산된 곡물을 가축의 사료로 공급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는 걸 간파한 뒤의 일이다. 요즘 미국의 축산자본이 공급하는 쇠고기가 그렇다. 쇠고기 1킬로그램은 16킬로그램의 옥수수를 먹인 결과물이다. 옥수수는 어떤가. 100칼로리에 해당하는 옥수수를 수확하려면 그 10배인 1000칼로리 열량의 석유를 들이부어야 한다. 농기계와 운송트럭이 태우는 석유만이 아니다. 석유를 가공한 농약과 화학비료도 만만치 않게 사용한다.


옥수수뿐이 아니다. 콩이나 감자도 마찬가지다. 시금치와 당근, 사과나 포도, 아몬드나 땅콩, 돼지고기나 닭고기, 그 가공식품, 우유와 낙농제품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석유를 먹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낭비되는 물도 상당한데 강이 오염되거나 지구온난화 여파로 물줄기가 줄어들자 농부는 지하수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느라 소비되는 석유도 무시할 수 없는데 우리나 미국이나 농촌의 지하수맥은 점점 깊어진다.


제초제와 살충제의 피해가 확산되면서 녹색혁명은 생명공학에 권위를 넘기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옥수수의 30% 이상, 콩의 절반이 유전자조작(GMO)이다. 세계의 곡물창고를 자임하는 미국은 그 비중이 더욱 크다. GMO 씨앗 역시 기업에서 구입해야 한다. 경작에서 가공, 운송애서 저장에 이르는 과정마다 막대한 석유가 들어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지역 단위의 종자회사에 구속되는 녹색혁명과 달리 GMO는 몇 개 안 되는 다국적기업에 세계의 농부와 소비자가 종속된다. 녹색혁명은 지역적 단작을 몰고왔지만 GMO 농작물은 세계가 동일하다. 농작물 고유의 유전적 다양성은 줄어들고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떨어진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

 

우리나라에도 흔해빠질 정도로 수입하는 바나나는 시방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튤립처럼 뿌리를 뜯어 심는 바나나는 여러해살이 풀이지만 사실상 세계가 한 그루를 심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그 바나나에 곰팡이가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을 빼곡하게 심으면 질병은 순식간에 퍼진다. 목적에 맞춰 극단적으로 육종한 닭이나 오리는 유전적으로 단순하다. 그런 가금에 조류독감이 쉽게 퍼지듯, 바나나 곰팡이도 무섭다. 전파를 막으려면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검출된 축사 안전반경 이내의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듯, 넓은 농장을 한꺼번에 불태워야한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GMO 씨앗에 포함된 조작된 유전자는 엉뚱한 식물의 유전자를 오염시킨다. 다국적 농화학기업 몬산토가 독점 공급하는 GMO 중에 특정 제초제에 저항성을 갖는 씨앗이 있다. 몬산토가 독점 판매하는 라운드업’(Roundup, 한국 상품명은 근사미’)을 뿌려도 끄떡없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것인데, 콩과 유채 속의 조작 유전자가 옮겨가면서 잡초까지 끄떡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른바 수평이동이다. GMO를 개발할 때 몰랐던 독성이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먹는 가축이나 사람에게 피해를 안기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다. GMO에 질병이 번진다면 대책 세우기 무척 어렵다. 생산량이 급감해 굶주림이 만연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농작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곡창지대의 가뭄으로 옥수수와 밀 생산량이 줄어들자 국제 곡물가격은 크게 치솟았다. 2010년과 2012년 발생한 러시아의 가뭄은 국제 밀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져 아프리카 지역의 국가에 기아를 부추기고 말았다. 북중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값싼 미국 옥수수가 멕시코로 밀려들어가자 원산지인 멕시코의 옥수수 농업이 붕괴되고 말았다. 자급 기반을 잃은 멕시코 민중은 미국 옥수수로 또띨라를 반죽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뭄은 옥수수 가격을 끌어올렸다. 식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계층이 폭동을 일으켰지만 미국 기업의 세계무역기구 제소를 두려워하는 멕시코 정부는 진압 이외에 다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바이오디젤로 가공해 챙기는 이익이 옥수수 수출보다 크자 다국적기업은 수출 물량을 줄였고 옥수수의 가격은 더욱 치솟았다. 옥수수를 사료와 식용유 재료로 수입하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은 없을까? 식용유와 사료 가격의 상승은 가계소비 위축을 넘어 가공식품과 축산업계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반도체와 자동차 수출로 아직 큰 문제가 없다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다. 수출전선에 차질이 생기면 식량 부족 현상으로 바로 이어질 수 있다. 한두 기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반도체와 자동차는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정부는 노동쟁의를 가혹하게 억압한다.


구입할 돈이 충분해도 식량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 16세기 거대한 노천은광에서 큰돈을 벌어들인 볼리비아 포토시의 스페인 출신 귀족은 유럽에서 식량을 실은 배가 제때 접안하지 못하면 굶거나 쥐를 잡아먹어야 했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은 환경변화에 약한데 지구온난화는 가뭄과 홍수가 느닷없이 곡창지대를 휩쓸게 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수입할 식량이 없으면 예나 지금이나 굶주릴 수밖에 없다. 다국적기업에 식량의 4분의3을 의존하는 우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석유로 돌아가는 농업, 다가오는 굶주림의 공포

 

예로부터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놈 없다고 했다. 식량은 부족하지 않아야 돈도 명예도 유지될 수 있다. 지급된 건빵을 병사에게 나눠주던 군종장교도 고된 훈련으로 배가 고프면 슬며시 숨긴다는 게 아닌가. 평화(平和)는 밥을 공평하게 먹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식량 자급률이 처참한 우리나라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기준으로 진정한 독립국이 아니다. 드골 대통령 취임 당시 80%였던 식량 자급률을 프랑스는 현재 200%에 육박할 정도로 끌어올렸다. 프랑스에서 농부는 존중된다. 덕분에 먹고 사는 시민들에게 고마운 존재인데 우리는 어떤가. 고마운 마음은커녕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석유농업이 확산되고 고기 소비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중국도 식량 수입국가가 되었다. 수출하는 식량보다 수입량이 많아졌지만 자급할 농토는 아직은 충분하다. 그래도 자국의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의 안정적 유지를 지원하는 관료와 지식인이 늘어나는데, 우리는 경각심조차 배양하지 못했다. 정부와 지식인들은 가족농이나 소농보다 시대착오적으로 기업형 농장을 지원할 따름이다. 귀농 인파가 늘어나는 현상과 관계없이 농부가 천대받는 분위기에서 농토는 점차 사라진다. 투기 목적으로 농토를 구입한 외지인은 개발 기회를 엿보지만, 주택이나 공업단지, 또는 연구시설로 농토를 대규모로 매립하는 정부에 비교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서울시의 인구 과밀화를 분산하기 위한 세종행정수도는 보호대상종인 금개구리가 분포하는 논밭을 넓게 매립했다. 충북 오송 생명과학연구단지와 오창 과학산업단지도 논밭이었다. 행정을 위하든 연구를 위하든, 특별시에서 논밭을 없앤 도시로 주소를 옮긴 시민들도 날마다 무언가 먹어야 한다. 아파트 숲으로 뒤바뀐 옛 김포평야에 입주한 시민들도 무언가 먹는다. 인천 아시안게임의 경기장은 하나같이 논밭을 깔고 앉았다. 오는 921일부터 보름동안 경기장에 모여들 아시아의 선수와 인원, 그리고 관중도 먹어야 하는데, 논밭을 매립한 우리는 무엇을 권해야하나.


나날이 과도해지는 화석연료 사용이 지구온난화를 심화시키는 요즘은 석유위기 시대다. 이제 석유가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 뽑아올리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석유 가격이 치솟고, 가격 상승으로 석유 소비가 억제되어도 올라간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석유로 짓는 농사는 머지않아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 악몽의 전조는 벌써 시작되었으니 식량과 에너지 부족이라는 이중고가 지구촌을 엄습할 텐데 자식 키우는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나.


굶주리는 국가의 곡창지대에 플랜트농업단지를 조성하는 행태는 지탄의 대상일 뿐, 전혀 정의롭지 않다. 막대한 석유를 소비해야 하는 플랜트농업은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 수확한 농작물의 저장과 운송 과정에서 막대한 석유가 낭비될 뿐 아니라 음식 쓰레기가 발생한다. 상당한 화학물질을 운송 도중인 농작물에 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시에 농사를 위한 빌딩을 짓고 LED 조명으로 수경재배하는 이른바 수직농장도 석유위기 시대에 대안이 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소비자와 거리가 가까운 만큼 농장주에 배타적인 이윤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로컬푸드로 분류할 수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 얼굴을 마주하며 안전한 농작물을 거래하며 마을을 나눌 때 비로소 로컬푸드라 말할 수 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수직농장이 유기농업일 수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물론이고 생태계와 문화까지 두루 유기적으로 이어져야 유기농으로 인정할 수 있다.


어떻게든 내 땅에서 석유 소비를 줄이며 식량을 자급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농토를 더는 개발하지 않아야 하고, 개발된 농토를 경작지로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를 위해 정부는 인력을 양성하고 실행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모자라지 않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식단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널리 보급해 식탐과 낭비를 부추기는 말초적 식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곡물사료 사육으로 얻는 육류의 소비를 줄이면 소비자와 환경이 크게 개선될 뿐 아니라 식량 자급률도 크게 높일 수 있다. 전통 가족농과 소농을 적극 지원하고 천혜의 갯벌을 보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갯벌은 수많은 어패류의 서식지이자 산란장이고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며 태풍으로 인한 해일을 완충하지 않은가.


아무리 노력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을지 모른다. 많은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유기농산물을 자급할 농토가 충분하지 않은 현실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감안해 국가와 전문가, 그리고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며 정의로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사막화 확산으로 방목 위주인 전통 축산업에 위기를 맞은 몽골을 유기농업으로 지원하며 사막화를 방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몽골과 우리가 상생하며 만족할 대안을 함께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춘궁기를 두려워하던 조상을 모시는 우리는 늦기 전에 배고픔을 모르는 자식과 행복하게 살아갈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기억은 물론 상상조차 어려운 굶주림의 공포가 코앞으로 다가오기 전에 대안을 절박하게 모색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기쁨과희망, 2014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