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4. 4. 23. 11:29

 

해마다 4월 중순의 주말이면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찾아 나선다. 여의도 윤중로 아니더라도 사람들로 북새통인 거리를 천천히 걷는 이유는 단순하다. 화사한 벚꽃을 만끽하려는 것도 흥분에 겨운 상춘객과 어울리려는 것도 아니다. 꿀벌이 한 마리라도 볼 수 있을지 궁금한 까닭이다. 올해도 한 시간 여 걸었고, 꿀벌은 볼 수 없었다.


봄나들이 때 조심해야 했던 꿀벌은 왜 자취를 감췄을까. 우리나라의 토종벌은 애벌레들이 전염병에 걸렸는지 한꺼번에 죽는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미국과 유럽은 건강한 애벌레와 가득한 벌꿀을 두고 양봉업자의 벌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예전에 없던 일이다. 꿀벌이 사라지면 사람은 4년을 버틸 수 없다는데, 그리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했다던데, 왜 우리는 긴장하지 않는 걸까.


도시 근교에서 자취를 감춘 꿀벌이 농촌에 아직 많을까? 소음과 먼지, 악취와 밤낮 없는 빛으로 사시사철 정신없는 도시에 꿀을 가진 꽃이 드물다. 양봉업자도 접근하지 않으니 도시 근교에 꿀벌이 드문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좀 지나치다. 농촌에 꿀벌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꽃이 피면 윙윙 몰려들던 꿀벌을 더는 과수원에서 보기 어려워졌다고 걱정한다. 붓으로 일일이 가루수정하는 일은 힘겨울 뿐 아니라 효율도 떨어진다.


아카시아나 밤꽃을 따라 벌통 실은 트럭이 오르내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만 개가 넘는 벌통을 화물열차에 싣고 대륙을 오르내리는 미국은 꿀벌이 사라지는 원인을 연구해온다. 많은 꿀을 빠른 시간 내에 모아오는 품종으로 단일화된 꿀벌은 타고난 유전자의 다양성이 줄어든 만큼 환경변화에 이겨낼 힘을 상당히 잃고 말았다. 그런 꿀벌의 벌통에 응애가 접근해 애벌레에 알을 낳기 시작하자 양봉업자는 응애만 죽이고 꿀벌에게 해가 없다는 살충제로 대응했다. 하지만 응애는 이내 내성을 가졌고, 더욱 강력한 살충제로 바꾸며 거듭 뿌리자 그만 꿀벌들에게 피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응애 뿐이 아니었다. 일반세균과 곰팡이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바이러스의 공격을 항생제와 소독으로 맞섰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한계를 만나고 말았다. 꿀벌보다 작은 생물들이 약품에 금방 내성이 갖췄고, 더욱 독한 약품을 뿌리면 꿀벌이 중독돼 일찍 죽어 가나거나 꿀과 꽃가루를 충분히 가져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꿀벌이 접근하는 꽃에 온갖 농약이 살포되는 거였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가져온 꿀과 꽃가루가 농약에 오염되자 애벌레의 생존과 부화율이 둔화되고 말았다.


몸이 만신창이가 돼도 생존을 위해 알을 낳고 꿀과 꽃가루를 가져와 애벌레를 키워왔는데, 농화학회사가 새로 개발한 농약, 기생충이나 병균을 죽이고 꿀벌만 살려낸다던 농약이 문제를 키웠다고 미국의 소식통은 전한다. 네오니코티노이드라는 그 농약이 살포된 뒤부터 꿀벌들이 꿀이 가득하고 애벌레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벌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것이다.


전적으로 그 농약 때문일까? 다국적기업인 농화학회사는 연구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아들이면 뒤따르는 손해배상 소송을 감당할 수 없지만, 회사의 주식가격이 뚝 떨어진다. 연구결과를 섣불리 받아들인 최고경영자는 주주총회에 소환돼 문책당할 테니, 어떡해든 게 부정해야 한다. 문제의 농약 때문과 꿀벌이 벌통에 돌아오지 않는 과정이 과학적으로 소상하게 밝혀진 게 아니라면서 손해배상 청구도 외면할 것이다. 법원은 다국적기업의 손을 들어줄 게 거의 분명하다. 돈 많은 기업은 막강한 변호사들을 대거 동원하므로, 경험에 미루어 양봉업자가 이길 재간은 없다.


꿀벌을 괴롭히는 현상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 다시 말해 GMO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기업의 이익에 편향되지 않은 독립 과학자들은 의심한다. 정확한 과정을 과학적으로 밝히지 못했으니 GMO를 판매하는 다국적기업이 피해를 배상할 리 만무하다. GMO 농작물에는 항생제가 포함된다. 그런 농작물에서 꿀과 꽃가루를 가져와 벌통에서 나누는 꿀벌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피해가 가중되고, 그 피해는 과수원, 농장, 그리고 사람에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진맥진한 꿀벌에게 휴대전화의 전자파는 꿀벌이 벌통으로 돌아갈 기운마저 빼앗을 것으로 추정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난다. 도시는 물론이고 산골 구석까지 설치된 기지국에서 사방팔당으로 뿜어대는 전자파가 꿀벌의 방향찾기를 교란한다는 의심인데, 역시 과학적 근거는 밝히기 어렵다. 밝힌들 휴대전화 관련 다국적기업이 순순히 인정할 리 없다. 허구헛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시민들은 어떨까?


올해도 근교에 흐드러진 벚꽃을 꿀벌이 외면했는데, 서울교육청은 농약이 과학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며 우리 땅의 친환경급식을 비웃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GMO 농작물을 학생에게 먹일 수 있다는 뜻까지 비쳤단다. 다국적기업이 표창장을 주고 싶어 조바심이 날 지경이다. 그렇게 꿀벌은 퇴치되고, 우리네 내일은 다국적기업의 이익에 저당된다. 점점 봄이 두려워진다. (야곱의우물, 20145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1. 22. 17:05

   유전적 다양성을 없앤 탐욕

 

올 겨울 버금가게 추웠던 재작년, 강화에서 돌아오는 길목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했다. 아스팔트 위의 눈이 빙판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몹시 추운 날, 차선을 좁힌 어떤 기계에서 분무된 구제역과 조류독감 방제액이 차 앞 유리에 닿자마자 얼어붙은 게 아닌가. 떨어진 방제약이 얼어붙은 빙판길에서 브레이크를 갑자기 밟았다면 앞차와 부딪힐 수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당국은 조류독감을 대비한다. 철새들이 날아오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재작년 구제역으로 인한 3백만이 넘는 돼지와 수십만의 소들이 살처분될 때, 6백만 마리에 달하는 닭과 오리들이 죽어야 했다. 당시 매장된 돼지와 소 대부분은 구제역에 감염되지 않았지만 죽였다. 담당 공무원들의 과로사가 빈발하던 시절, 시민들은 더 넓은 지역으로 바이러스가 퍼지는 걸 막으려는 고육지책으로 이해해야 했지만 사실 상업적 이유가 더 컷을 것이다. 신뢰를 잃지 않아야 나머지 지역의 소와 돼지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으므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어도 침출수가 흐르도록 매장되어야 했던 소와 돼지는 억울했을까? 소와 돼지보다 두 배 가까이 죽은 닭과 오리는 어땠을까.


생매장되는 돼지처럼 보는 이를 아연하게 만들지 않았어도, 산 채로 구겨지듯 자루에 담겨 생매장된 600만 마리의 닭과 오리 중에 조류독감에 걸린 개체는 전혀 없었다. 단지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검출된 철새의 배설물에서 안전반경이내의 농장에 사육되었다는 이유로 살처분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억울했을까. 사람이라면 억울하기보다 분노에 휩싸였겠지만, 정작 억울한 건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포함된 배설물을 흘린 철새였을지 모른다. 살처분은 사람이 저질렀으면서 몇 마리 안 되는 철새에게 조류독감 전파의 혐의를 뒤집어씌우지 않았나.


철새는 한 종류가 아니다. 주로 오리 종류인 수많은 겨울철새들도 사람처럼 독감에 걸릴 수 있을 것이다. 독감이 심한 개체는 먼 거리 날아오지 못했을 테고, 힘겹게 날아와서 충분히 먹고 쉬지 못한 개체는 우리나라에 와서 독감에 감염되었을지 모른다. 얼지 않은 습지를 찾아 갯벌이나 저수지를 오르내리며 배설물을 흘렸을 철새 중에 독감에 걸린 개체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치유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 철새가 백만 개체 이상 운집하는 천수만이나 우포늪에서 조류독감으로 널브러진 사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면역이 약한 개체, 다시 말해 다른 병에 걸렸거나 늙었거나 지나치게 굶주렸거나 아주 어리지 않다면 거뜬히 이겨냈을 게 틀림없다.


철새들은 조류독감으로 떼로 죽지 않는 게 확실한데 왜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등장하는 농장의 닭과 오리와 메추리는 대부분 죽어나갈까. 돼지의 원종인 멧돼지도 구제역에 걸릴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돼지들이 무참하게 매장될 때를 돌이켜보자. 먹을 게 없어 주택가로 나왔다 총 맞고 죽은 경우는 있어도 구제역으로 죽은 멧돼지가 있다는 소식 들은 바 없다. 미국 대평원의 들소처럼 이동하는 소는 우리나라에 없지만, 감염성이 아무리 높아도 버펄로라 하는 미국의 들소들이 구제역으로 떼지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유치원이 휴교에 들어갈 정도로 수두가 번져도 아기들이 죽어나가지 않듯.


우리는 샐러드에 닭 가슴살을 넣는 주부가 드물지만 미국은 아니다. 식당의 샐러드 바에 각설탕처럼 자른 닭 가슴살이 수북하다. 닭 한 마리에서 나오는 가슴살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축산과학은 가슴살을 키웠다. 어려서부터 가슴살이 예외적으로 큰 닭이 있었다. 축산과학은 그렇게 산업적으로 유용한 유전자를 그냥두지 않는다. 그 개체를 활용해 얻는 여러 새끼들 중에서 가슴살이 두툼한 암수를 골라 근친교배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렇게 개발한 가슴살 두툼한 닭은 그만 유전적 다양성을 잃었다. 삼계탕에 들어가는 닭, 아니 병아리는 하루 백만 마리 가까이 기계로 자동 처리한다. 크기가 들쭉날쭉하면 값비싼 기계가 고장날 수 있다. 축산과학은 기계의 오차범위 내로 획일적인 품종을 만들었고, 가축은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을 잃고 말았다.


유전적 다양성이 줄면 환경변화에 견딜 능력이 크게 부족해진다. 그래서 축산과학은 인큐베이터처럼 균질한 사육조건을 창안했다. 온도, 습도, 면적, 실내조명, 먹이, 항생제 들을 일정하게 조절하며 일정 기간 키우면 원하는 닭고기를 얻을 수 있다. 기계 오차범위 내로 들어오는 삼계탕용 병아리만이 아니다. 먹이 다 먹으면 일제히 실내등을 끄는 미국의 가슴살 용 닭도 마찬가지다. 가슴살을 위한 닭은 이론상, 1년 키우면 몸무게가 200킬로그램 가깝게 자란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 죽을 것이다. 두 달 이상 키우지 않는 닭, 아니 병아리인 대부분의 개체들은 도살 전에 다리에 깊은 상처를 가진다. 늘어나는 몸무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인데. 축산과학이 그리 선도했고, 공장식 축산이 그 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요즘 닭은 용도에 맞게 극단적으로 육종돼 있다. 삼계탕과 가슴살용만이 아니다. 적은 사료를 먹어도 많은 계란을 빨리 낳는 닭이 있을 테고, 바삭바삭 튀겨지는 고기를 위한 닭이 있을 것이다. 오리도 메추리도 사정이 비슷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돼지도 마찬가지다. 살코기를 위한 돼지는 전 세계 품종이 동일하다. 그래서 유럽산 삼겹살이 우리 삼겹살과 맛이 다르지 않다. 미국 축산자본의 압력에 굴복해 신종플루로 느닷없이 명칭이 바뀐 돼지독감이 순식간 세계로 퍼진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고기를 위한 소, 우유를 위한 소의 사정이 다를 리 없다. 밍크도 은여우도 비슷할 것이다. 개도축이 법으로 허용된다면 고기용 개도 예외가 없을 것 같다. 극단적으로 변형된 애완용 개와 고양이의 수명이 짧고 병에 약하다. 극도의 육종은 면역력까지 약화시킨다.


과학축산이 창안한 품종의 특징을 잘 살리려면 그에 맞는 환경을 철저하게 유지해야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되던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축산환경이 무너질 수 있다. 우박이 양계장의 비닐 천장을 뚫으면 어린 닭들은 우수수 죽어나간다. 태풍으로 창문이 열려도 마찬가지다. 양계장의 환풍기가 돌아가면서 이동하던 철새의 배설물이 흘러들어갈 수 있다. 그때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병아리들이 떼로 죽어나간다. 구제역은 수의사의 넥타이, 여행자의 구두 굽으로 전파될 수 있다. 마당에서 발로 흙을 파며 벌레를 잡아먹는 닭에서 볼 수 없는 떼죽음이 만연된 현상은 과학축산과 무관하지 않다. 과학축산은 축산자본이 견인했고, 교묘한 광고로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은 살처분과 무관한 자세를 취한다.


     결국 탐욕이다. 탐욕이 부른 공장식 축산이 살처분을 몰고 왔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더 빨리 벌어들이려는 탐욕이 그 동물의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을 없애자 작은 환경변화에도 맥을 추지 못하는 가축들이 기계로 찍어낸 듯 양산돼 공장식 축산에 수용되었고, 획일적인 유전자를 가진 가축들은 병원균에 턱없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안전반경이라는 허구를 구상한 축산과학은 그 안에 있는 가엾은 가축들을 몰살시키는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도록 농장 주인을 다그치고 당국을 움직이게 했다. 탐욕을 위한 일이다. 자본의 탐욕스런 유혹에 소비자가 흔들린다면 살처분도, 극단적 육종도 개선될 리 없다. (프레시안, 2013.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