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1. 9. 10. 04:56

 

태풍 꿀랍이 다가와서 그런가, 추석이 며칠 남았건만 전국의 고속도로는 벌써 붐비기 시작한 모양이다. 자동차 없으면 추석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편이 훨씬 편리할 것 같은 독신도 굳이 승용차를 타기에 그 연유를 물었더니, 추석 때문이라고 했다. 시골 부모는 자식에게 내줄 농작물을 잔뜩 준비해 놓았다는 게 아닌가. 1년 중 오직 이날을 위해 기꺼이 농사를 지은 부모를 생각해서 차를 가지고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건데, 찾아갈 시골에 없는 처지에, 부러운 이야기였다.

 

자동차가 흔치않던 시절, 명절 귀성인파는 서울역 광장에 오래 줄을 서 표를 구해야했다. 아이 놓칠세라 손을 꼭 잡은 부모는 선물 보따리까지 부여잡고 입석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고속도로가 전국을 누비는 요즘, 사람들은 자동차를 선호한다. 도로가 막히더라도 차 안에서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모르는 이와 부대끼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명절이 오면 방송매체들은 도로 사정부터 보도한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자동차가 사람의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설파했다. 집에서 자동차 사이를 움직일 뿐인 사람은 그저 핸들 돌리고 가속과 감속 페달을 밟는데 그치지 않던가. 발 대신 움직이는 자동차를 위해 적지 않은 기름과 비용이 들어가더라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사용해서 얻는 이익이 자동차가 없어 겪는 불편함보다 크다고 믿는다.

 

자동차를 시용하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닐 이유가 없고 천방지축인 아이를 놓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버스가 외면하는 길을 찾아갈 수 있고 대중교통의 막차시간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 자동차가 도로에 늘어나면서 약속시간을 종잡을 수 없지만 처리하는 일과 벌어들이는 돈이 늘어난다. 물론 거리끼는 부분이 적지 않다. 늦은 시간까지 흐느적거리는 자유가 구속되는 차원이 아니다. 소중한 이를 다치거나 숨지게 하는 사고가 빈발하고 숨 쉴 공기를 오염시키며 지구온난화를 촉발할 뿐이 아니다. 자동차를 만들고 사용하고 폐기하는 과정마다 적지 않은 쓰레기를 내놓는다.

 

늘어나는 소비에 비해 생산량이 밑돌아 그런지, 올라간 국제 석유가격은 여간해서 내려오지 않는다. 세금이 많이 포함되었더라도, 우리나라는 최근 1리터 당 2천 원을 훌쩍 넘었는데, 석유 위기를 경고하는 전문가들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고 예상한다. 그렇다면 대안을 찾아야 할 텐데, 사람들은 자동차를 포기하려 할까. 지구온난화까지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승용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제안하며 전기자동차 보급을 전망하지만 자동차 문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자동차에 중독된 세상은 석유를 대체할 자원을 구한다. 콩이나 옥수수, 사탕수수나 유채와 같은 농작물, 파래와 같은 해산물로 대체연료를 개발하는 전문가들은 친환경까지 내세운다. 석유보다 긍정적이라는 거지만 대부분 착시현상이다. 지구촌의 자동차에 넣을 대체연료를 충당하려면 지구 하나로 모자란다. 게다가 그런 농작물의 생산과 대체연료 가공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대체연료에서 얻는 에너지보다 월등하게 많다. 화력이든 핵이든, 자동차에 충전할 전기도 효율이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운전자의 건강과 환경, 그리고 지구온난화 예방에 도움이 되는 건 실제로 없다.

 

대안은 강고하기 짝이 없는 자동차 문화를 근원적으로 바꿔야 한다. 그를 위해 자동차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는 도시를 구상해, 승용차보다 대중교통, 대중교통보다 자전거, 자전거보다 걷는 생활습관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주거공간이 기형적으로 밀집된 초고층빌딩은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낭비되므로 대안일 수 없다. 대부분의 일상을 걷거나 자전거 이용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도록 학교와 직장과 시장과 종교와 문화시설과 농업단지가 가까워야 한다. 이른바 컴팩 시티.

 

추석연휴에 한가했던 도시가 다시 복잡해질 즈음 시골이 한가해질 텐데, 복잡할수록 불편한 도시의 대안은 한가로움에 있을지 모른다. 복잡한 도시를 시골과 컴팩 시티로 분산시키고 한가롭게 살아야 사람 사이의 행복도 깊어질 것이다. (요즘세상, 2011.10.2)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9. 23. 20:13

 

2009년은 찰스 다윈이 태어난 지 200년, 《종의 기원》을 발표한 지 150년이 된 해였고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일행이 쿠바를 해방시킨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우리나라에서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쿠바의 독립에 대해 이렇다 할 발언이나 행사를 열지 않았지만 다윈과 진화론에 관한 행사는 몇 차례 열렸다. 아울러 다윈의 진화론을 시대에 맞게 다양하게 해석하는 책이 더러 발간되었다.

 

많은 이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으로 이해한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 먹히고 처한 환경에 적응된 개체들이 생존할 자격을 갖는다는 해석으로, 우승열패, 다시 말해 우월한 자는 승리하고 열등한 자는 반드시 패한다는 의미다. 쿠바의 혁명세력은 미 자본에 굴종하던 독재정권의 압제에서 민중을 해방시켰는데, 150년 전의 우승열패가 100년 만에 뒤집힌 걸까. 분명한 것은 보잘것없는 무기로 무모하게 달려든 한줌의 오합지졸이 탱크와 비행기를 동원한 수만의 정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건 민중의 굳은 신뢰와 지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고,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현재 분포하는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고 언급한 사실도 없다. 다만 공동조상에서 원숭이와 사람이 갈라졌고 공동조상의 생긴 모습이 지금의 사람보다 원숭이와 가깝다는 걸 숨기지 않았을 뿐이지만 《종의 기원》을 섣불리 들어다 본 많은 이, 특히 종교계의 지도층 인사들은 서슴없이 경악했다. 한 인사는 “맙소사! 사람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니요. 그게 사실이 아니길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만일 다윈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 사실을 민중이 알지 못하도록 《종의 기원》을 다 사버립시다!” 하고 선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년이 넘는 관찰과 번민의 결과를 집약한 다윈의 이론이 종교계의 반발로 무력해질 것을 염려한 당시의 열혈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스스로 다윈의 불독을 자처했고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도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방어했는데, 약육강식은 토머스 스펜서가 적자생존은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했다. 다윈의 자연도태 이론은 헉슬리나 스펜서의 논리와 분명히 달랐건만 어찌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은 《종의 기원》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개념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당시 영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런 오해를 증폭시키는데 한몫했을지 모른다. 단지 총을 먼저 쥐었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민중과 자원을 마구 약탈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1895년 사망한 토머스 헉슬리가 만년에도 약육강식 이론을 열심히 설파할 때 러시아 출신의 젊은 지리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을 들며 나왔다. 시베리아에서 자연을 관찰해보니 만물은 서로 돕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일방적으로 잡아먹거나 서식지를 함부로 빼앗기 않는다는 거였다. 개미와 꿀벌, 작은 새들의 사회성, 자연계에서 행동하는 늑대나 설치류 뿐 아니라 인류의 조상, 중세 도시, 근대인의 행동을 두루 살펴보며 경쟁을 피하려 서로 노력하고 생태적으로 과잉 번식을 통제한다고 주장했다. 헉슬리가 당연시하던 제국주의 이론을 논박한 것이다.

 

2007년 영국 BBC에서 4년간 촬영해 발표한 《지구》에 나오듯, 늑대는 툰드라 지역을 이동하는 순록 떼 사이를 치고 들어가 사냥을 한다. 일방적이다. 늑대가 순록을 잡지 이끼를 뜯는 순록은 늑대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울지 않는 늑대》에서 팔리 모왓은 늑대는 순록을 잡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무슨 소린가. 순록이 늑대를 잡아먹는다는 게 아니고 늑대가 느려 순록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다. 생각해보라. 늑대가 수시로 순록을 잡아먹었다면 툰드라 지대에 순록은 다 먹혀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늑대보다 순록이 월등히 많다.

 

늑대는 그저 《지구》에서 보듯 어미를 잃은 새끼, 다치거나 병들거나 늙은 개체를 솎아낼 따름이다. 만일 늑대가 순록 떼의 일부를 솎아내지 않았다면 툰드라에 적응할 수 없는 열성 유전자가 집단 내에 많이 축적되어 그만 도태되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늑대와 순록은 공생하는 거다. 크로포트킨의 주장처럼 서로 돕는 셈이다. 더 있다. 나뭇잎을 갉아먹는 애벌레는 새의 먹이가 되고, 새는 다음 세대의 숲을 풍요롭게 할 씨앗을 배설물에 섞어 떨어뜨려준다. 애벌레가 나뭇잎을 갉지 않는다면 새를 불러들일 리 없다. 나무는 애벌레에 내줄 여분의 잎사귀를 매달 것이다. 동물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다 그렇다. 만물은 서로 돕는 것으로, 생태계에서 태어나 생태계의 일원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생태계의 그물망에 기댈 때 가장 건강할 수 있다. 바로 자연스러움이다.

 

다윈은 불독을 육종하는 귀족의 작업장을 방문한 적 있다. 한 배의 강아지 중에서 마음에 드는 암수를 골라 키워 짝짓기를 유도한 뒤, 잔뜩 태어난 강아지 중에서 다시 마음에 드는 암수를 골라 짝짓기를 반복하는 귀족에게 다윈은 물었다. 실패한 대부분의 강아지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그러자 그는 무뚝뚝하게 엄지로 뒤를 가리키며 “셀렉션!”, 다시 말해 도태시킨다는 게 아닌가. 귀족이 가리킨 벽에는 강아지를 목매 죽이는 쇠고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다윈은 자연에도 인위적 도태와 비슷한 현상이 있을 거라 믿었고, 훗날 《종의 기원》에서 자연도태에 의한 진화를 주장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진화의 좋은 예로 기린의 목을 든다. 높은 가지의 나뭇잎을 따먹으려고 목이 길어졌다고 해석한다. 그럴까. 진화는 그런 식으로 예정된 방향으로 가는 걸까. 더 나은 쪽으로 진보하므로 진화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걸까. 진화를 진보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지만 생각해보자. 목이 아직 길어지기 전인 기린의 선조는 불편하게 높은 나뭇잎을 따먹으려 왜 용을 써야 했을까. 내일의 진보를 예견하고? 그랬을 리 만무하지 않을까. 모든 개체들은 입 높이의 나뭇잎부터 따먹을 것이다. 그래야 편히 배불리 먹고, 천척이 다가올 때 멀리 달아날 수 있다. 그런데 왜 입 높이의 나뭇잎을 기피하고 기를 쓰고 높은 나뭇가지를 훑으려 애를 썼을까. 이 대목에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거론할 필요가 있겠다.

 

나중에 기린이 될 조상은 많은 개체들이 아귀다툼하듯 입 높이의 나뭇잎을 먹으려는 경쟁이 싫어 슬그머니 피했거나 무리보다 행동이 늦어 입 높이의 나뭇잎을 먹을 기회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는 수없이 높은 곳에 매달린 나뭇잎을 따야 할 텐데, 아무래도 목이 조금이라도 긴 녀석이 유리했다. 남보다 더 먹고 천적을 잘 피할 수 있으니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겠지. 목이 긴 개체들끼리 짝짓기를 할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키가 큰 부모를 둔 아이의 키가 대개 그렇듯, 목이 긴 암수가 낳은 새끼는 목이 길 텐데,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어떤 결과를 빚을까. 목이 긴 기린이 진화된 것이다.

 

기린은 목이 길어지고 싶어 길어진 게 아니다. 높은 나뭇잎이 더 맛있기 때문도 아니다. 경쟁을 피해 먹이를 나눈 까닭이다. 방향이 그리 정해진 게 아니라 우연히 생태적인 빈 공간을 차지한 거고 새로운 공간에 최적으로 적응한 결과 오늘의 기린이 된 것이리라. 다분히 우연이라는 거다. 새 종류 중에 참새목이 유난히 많다. 60퍼센트 이상인데 종이 그리 다양해 진 원인도 먹이의 종류를 나누며 서로 돕는 자연에서 우연히 차지한 새로운 공간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담수어류 중에 60퍼센트를 차지하는 잉어목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인류의 조상 중에 오로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가진 현재의 사람만이 자연에서 선택된 이유도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에 서열이 있을까. 아니, 없다. 현재 자신의 환경에 최선으로 적응한 모든 개체와 종이 가장 진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은 지렁이의 환경에서 살 수 없다. 그건 지렁이도 마찬가지다. 서로 각자의 환경에서 가장 진화되었다. 지렁이가 사람보다 하등이라고 단순하게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능이 높은 생물이 사람이므로 가장 진화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일방적 환상이다. 축축한 땅속에 사는 지렁이는 두뇌가 좋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람을 부러워할 리도 없다. 다만 비 내린 뒤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받고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사람들이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지 모른다.

 

숱한 생물종은 자신이 처한 독특한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하며 자연에서 어우러진다. 그러면서 서로 도울 뿐이다. 건강한 생태계일수록 더욱 그렇다. 진화는 처해진 환경이 바꿔야 비로소 시작된다. 진화는 성공을 목표로 도전하는 모험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면 기존 환경에 적응했던 개체들은 적응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적응 과정에서 도태될 확률이 매우 높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처해진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많은 개체들은 후손을 많이 낳지 못해 도태될 것이고 타고난 유전자와 적응력이 다른 덕분에 견뎌냈던 개체들은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이 변하는 방향을 알지 못한다. 한 세대 전에 지금의 환경을 예견하지 못한 우리는 내일의 환경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화의 끔찍한 험로를 강요당할 수 있다.

 

자연에 생물종이 다양할수록 생태계는 안정된다. 어떤 생물종 안에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환경변화에 이겨낼 능력이 크다. 소나무 숲은 활엽수림보다 화재에 약하다. 무성생식으로 개체 수를 아무리 늘려도 유전자가 단순한 미생물은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일제히 사라지지만 유성생식으로 다양한 유전자를 후손에 물려주는 동물은 견딘다. 디디티를 뿌리자 다 사라진 줄 알았던 메뚜기가 다시 나타나는 건 그 집단 내에 디디티에 이겨낼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철새들은 조류독감이 창궐해도 대부분 멀쩡한데 양계장의 닭들은 순식간에 널브러지는 까닭은 극단적 품종개량으로 유전자가 단순해졌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키웠던 예전의 닭이라면 조류독감에 능히 이겨냈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 우리 선배들은 조류독감이 뭔지 몰랐다는 게 그 증거다.

 

제국주의 시절 헉슬리와 스펜서가 주장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처해진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의미다. 정당하든 부당하든, 돈이나 권력을 가진 친지의 도움을 받는 자만이 권력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 논리는 신자유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승리를 위해 속도와 목표만이 숭상되는 사회는 다양성을 무시한다. 다양한 생물종이 생태계 안에서 서로 돕는 결과를 빚어낸 자연 속의 진화는 남을 짓밟아야 승리한다는 제국주의 논리와 거리가 멀다. 늑대가 순록을 쉽게 잡아먹는 생태계는 존재할 수 없다. 건강할수록 순환과 다양성이 존중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강요되는 생각과 행동만 인정하는 사회는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생태계의 ‘순환’은 사회에서 ‘배려’에 대응하고 생태계의 ‘다양성’은 사회에서 ‘개성’에 대응할 수 있다. 생태계 안에 수많은 생물종이 어우러지듯, 다양한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라야 건강하다.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는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며 민주적으로 충분히 논의한다면 사회 구성원이 모두 동의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앞세우는 우승필패는 굴종과 획일 사회를 강요한다. 결코 건강한 내일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오로지 돈벌이를 위해 “개발! 개발! 발전! 발전!”을 외친다. ‘발전’이라는 개념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발전이라는 용어를 세계에 퍼뜨리며 후진국은 선진국인 미국을 뒤따르라고 1949년에 요구한 미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 이후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보다 화석연료로 거대한 공장의 기계를 돌려 수요보다 공급을 월등히 늘리면서 생겼을 개념일 것이다. 소비를 창출하기 위해 발전이라는 환상을 주입한 것이다. 이후 사회는 획일적인 사고와 생활습관을 요구하며 줄을 세운다. 그 현상이 누적되면서 이제 언어까지 단순해지려고 한다. 문화와 역사도 위태롭다. 획일적 개발의 필연적 부작용이다. 현재 지구는 온난해지고 아토피는 증가한다. 독감 바이러스는 언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지 종잡을 수 없다.

 

20년 가까이 턱에 생긴 암과 친구하며 살다 2002년 76세로 세상을 떠난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자율과 다양성이다. 그는 병원과 자동차와 학교라는 근대의 도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병원은 치료하기보다 병을 만들어내고, 자동차는 스스로 움직일 권리를 빼앗아가며 학교는 교육이라는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남아메리카에서 밀어붙이는 미국식 현대화 정책을 반대하며 멕시코에 ‘국제문화자료센터’를 설립했던 일리치는 미국화는 곧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조장하는 일이라는 것, 전래 문화에는 재미와 감동이 깃든 고유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행복에 우열이 없듯, 문화와 역사에 서열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설파했다.

 

지하철에 붙은 성형외과 광고는 그들이 미를 창조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은 나이와 관련이 없건만, 시들어가는 꽃은 내일을 약속하기에 아름다운 것이건만, 20대 젊은이만 아름답다고 칭송한다. 세상의 경험과 연륜은 다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겐가. 젊든 어리든, 중년이든 늙었든, 자신의 나이에 맞는 삶은 아름다운데, 미를 창조하는 성형외과처럼 제약회사는 병을 창조한다. 고혈압의 범위를 좁히자 혈압약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키가 작으면 질병이라는 학술회의는 성장호르몬을 독점 생산하는 제약회사가 주관했다. 아프지 않은 이에게 약을 팔기 위해 온갖 로비를 다하는 제약회사, 젊은이도 해마다 건강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병원은 환자가 늘어나길 학수고대하는 꼴이다.

 

나이 들면 많은 남성의 머리가 자연스럽게 벗겨지고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폐경이 오는 법이다. 당연히 질병이 아니다. 약으로 살을 뺄 수 있다는 광고는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을 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게 한다. 살이 찔 수밖에 없었던 식생활만이 아니다. 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원인을 근본에서 진단하지 못하게 한다. 노력 없어도 지능을 높이는 유전자를 교환해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단어를 외울 수 있다면 세상이 환해질까. 행복이 다가올까. 부작용 없는 줄기세포 치료제가 세상에 나와 척수를 쉽게 이을 수 있다면 교통사고는 시시한 일이 될 것이다.

 

맞벌이 가정 7살 미만의 어린이에게 충치가 집중되는 원인은 당분이 과한 과자를 많이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양치를 자주 하지 않는 버릇이 충치를 일으켰을 텐데, 뼈를 해치고 건강에도 치명적인 불소 화합물을 수돗물에 넣겠다는 발상은 본말을 전도한다. 불소는 수돗물이나 지하수에서 빼야 할 독극물이다. 이가 없고 면역이 약한 아기, 치료 중인 환자, 불소에 민감한 이까지 거부하지 못하고 무차별적으로 먹어야 하는 물질이 아니다. 비타민도 거부하면 피할 수 있지 않은가. 같은 맥락으로 병원은 환자를 약이나 수술로 고치는 곳이 아니다. 환자 스스로 낫도록 인도하는 곳이다. 그를 위해 전문가의 식견과 경륜으로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며 도와야 한다. 고친다는 의사의 생각은 사람을 부품을 가진 자동차처럼 생각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보험으로 안심하는 세상이 아니라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옳다. 속도보다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사회가 중요하다.

 

추석을 맞아 자동차를 끌고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한 이는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먼 길을 이동했지만 정작 운전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휴게실에 들려 몇 걸음 걸었던 일 빼고 그저 자동차 안에 갇혔을 따름이다. 빠른 속도로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시야와 의식은 좁아진다. 옆에 앉은 친구나 연인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눈을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책도 들어다볼 수 없다. 도시 대기오염의 주범은 자동차다. 디젤 자동차의 오염이 많지만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승용차도 예외가 아니다. 안전장치가 훌륭하고 비싼 승용차일수록 차 밖의 이웃을 배려하지 못한다. 자동차 가격은 그 차를 소유하는 자의 인격과 무관하건만 공연히 작은 차와 비교하며 오만해지는 자가 많고, 그로 인한 교통사고는 이웃에게 불행을 안긴다.

 

자전거를 타자는 캠페인은 자동차의 폐해를 줄이는데 기여할 테지만 자전거보다 보행자를 더 생각하는 도시가 인간적이다. 가로수 그늘이 드리우는 보행자 도로를 확보해야 도시는 쾌적하고 안전하다. 승용차나 버스로 다니던 길을 시간을 내서 천천히 걸으면 이웃이 비로소 보인다. 휠체어를 탄 사람, 아장아장 걷는 아기, 공원의 곤줄박이와 청설모가 보인다. 땅콩을 내밀면 곤줄박이는 휠체어에 앉은 이의 어깨에 날아와 앉는다. 자연의 생물과 가까이 지내는 마음은 남을 배려하는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웃을 돌아보며 걸으면 다리가 튼튼해지고 폐와 심장도 건강해진다.

 

이반 일리치의 세 번째 화두, 학교를 생각해보자. 미셀 푸코는 군대와 병원과 학교를 감옥과 비슷한 감시체제로 보았다. 당하는 이는 느끼지 못하는 감시다. 의사의 전문적인 언어를 환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감옥과 병원은 어려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환자와 수인은 자신의 의료기록과 전과기록에 접근하기 어렵다. 병실과 감방, 간호사와 간수, 그리고 감시가 그렇다. 학교는 군대와 비슷한 데가 많다. 막사와 교실, 소대장과 담임교사, 운동장과 연병장, 그리고 감시가 그렇다. 그중 학교는 오로지 상급학교 진학 성적만 고민한다. 특히 국영수 과탐 사탐만 파는 우리나라가 두드러진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따위는 대학입학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도 배우려들지 않는다. 머리로 익히는 지식에 배점이 높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은 군더더기로 치부할 뿐이다.

 

디엔에이 구조와 아미노산 종류를 고등학생 때 달달 외우지만 교과서에 다 나오고, 인터넷에 잘 설명돼 있다. 그런데 생물학을 전공하려는 고등학생에게 정작 중요한 가치, 과학이 무엇이고 과학자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기회는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식량위기와 기후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았는가. 줄기세포가 어떤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연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누가 희생될지, 그런 기대가 다가오면 사회 구성원의 행복은 증가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일까. 과학은 가치중립이므로 연구결과가 가져올 해악은 관심 밖이어야 할까. 사회적으로 해롭다거나 이롭다는 범주는 누가 왜 정의하고 왜곡하는지 과학자는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일까.

 

만화를 그리고 싶은 학생에게 인문계 고등학교는 가르칠 게 거의 없다. 그 학생은 옛 서당처럼 만화가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나을 텐데, 오늘의 우리 사회는 그런 장치에 아주 인색하다. 수학시간에 만화를 그린다고 운동장을 서너 바퀴 돌리면 체력은 좋아지지만 수학이나 그림 실력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차라리 방과 후 그 학생과 만나 만화로 수학을 쉽게 설명할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니 학생에게 만화책을 선물하면서 만화를 지도할 수 없는 학교 사정을 이해해주길 바라면 어떨까. 노래 잘 부르는 이가 바둑을 잘 두는 건 아니다. 빨리 행동하는 이가 반드시 너그러운 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옮기는 이에게 키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다양한 개성이 배려되어야 건강하다. 경쟁을 강요하며 학생을 주눅 들게 하는 학교는 교육의 가치를 차단한다.

 

추석에 우리는 조상에 절을 올리기 전에 지방을 쓴다. 지방은 조상을 학생이라 한다. 그렇다. 학생은 학교에 구속될 리 없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 절망했는데, 우리의 학교는 시방 전도된 가치를 학생에게 강요하지 않은가. 일찍이 전우익 선생은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하며 우리에게 물었다. 혼자 잘 살자고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부르짖은 결과, 우리는 다양성을 잃었다. 숱한 생물로 어우러졌던 생태계는 무너지고, 영겁의 세월을 간직한 금수강산은 탐욕스런 개발로 피를 흘린다. 갯벌은 대부분 사라져가고 굽이쳐 흐르던 4대강은 6미터 깊이로 파헤쳐져 16번 멈칫거리는 호수로 더럽혀질 태세다. 그 때문에 지구온난화는 심화되고 기상이변은 이재민의 수를 거듭 늘린다. 한줌의 다국적 자본을 배불리는 획일적 식량 공급 체계는 아토피와 성인병을 돌이키기 어렵게 증가시켰다.

 

우리가 지구를 지켜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지구의 자연스런 품 안에 건강할 수 있을 뿐이다. 지구가 우리를 지켜주는데 어찌 감히 지구를 살리겠다는 겐가. 내일을 위한 대안을 개발에서 찾을 수 없다면, 개발을 뒷받침하는 과학도 아니라면 순환과 다양성이 어우러지는 생태계처럼 개성을 배려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웃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내게 건강과 행복이 이어질 수 있다. 비록 자연스러움을 상당히 잊은 우리의 처지일지라도, 시방 심각한 위기를 거듭 경고하는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자연스러움을 회복해야 한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현실에 발을 둔 우리는 선택의 여지를 찾아 자연스러운 가치를 어서 되찾아야 한다. 그럴 때 지구는 우리 인간의 내일을 조금 더 배려해줄 것이다. 그래야 사람은 멸종을 면한다. 엉뚱한 종으로 진화되지 않을 것이다. (푸른글터, 2010년 하반기)

 
 
 

서평·추억

디딤돌 2009. 3. 21. 09:56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2007년.

 

 

리 호이나키.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가 이반 일리치와 절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친밀감을 느낀다. 이반 일리치는 누구인가. 비록 바티칸에서 파문했더라도 ‘우정과 환대’라는 정신적 근본 가치를 지키는 신부의 자세를 마지막까지 흩트리지 않았던 사람, 신념을 바탕으로 아무도 선뜻 생각하지 못한 혜안을 우리에게 일러준 사상가가 아니던가. 자동차는 스스로 움직이려는 마음을 방해하고 병원이 오히려 병을 만들 뿐이며 학교가 배움을 망친다고 주장하던 그는 병원 신세를 거부하며 50세 중반부터 20여 년 동안 암과 친구하던 중, 다음 날 발표할 원고를 정리하다 세상을 떴다. 눈을 감은 그의 주변에 초를 밝힌 친구 3천 명이 모였다던데, 리 호이나키는 그 3천 명 중에서도 절친했던 친구라고 하니 그의 책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박사학위를 위한 시험, 그 마지막 시간에 교실 밖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베트남 전쟁반대 시위를 보고 내장 깊숙이 무언가 움찔거리는 느낌을 받은 그는 답안 작성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닫고 뒤 망연자실 교실을 빠져나가 항구적인 망명을 택했다. 도덕적으로 괴물로 변해버린 국가에 충성을 표시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진정한 애국심을 위해 베네수엘라로 떠난 것이다. 망명한 지 8년, 학과 구분을 없애고 학생과 교수는 물론 지역민과 행정요원의 논의로 교육을 끌어가는 혁신적인 대학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내 실망하고 만다. 애국심을 펼칠 생각이었건만 기득권을 가진 교수들의 이기심과 물신에 중독된 학생의 태도에 절망했던 거다. 다시 7년이 지나 정년이 보장되는 순간, 대학 당국에 ‘무기한 휴가’를 자청한 리 호이나키는 미국에서 가장 낯설고 후미진 시골로 들어간다. 땅에서 뿌리를 찾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정의의 길’이란 무엇일까.

 

“통상적으로 편안한 것에 취미를 잃은 대신 아름다움을 향수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려 변두리로 들어간 리 호이나키는 이웃 농부의 “땅에 뿌리박은” 말과 행동에서 배운다. “완전히 무균 처리된 죽음의 테크놀로지” 공간인 도시에서 “희소성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로 들어갔다는 희열로 농사를 지으면서 비경제적 행동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시몬느 베이유가 땅과 육체적 노동에서 최대의 가치를 찾으려 했듯, 가능한 한 돈과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영위한다. “내가 어떤 종류의 닭을 키우는 게 좋겠습니까?” 물으니 의아해하던 농부에게 리 호이나키는 질문을 바꾼다. 당신은 왜 그 종류를 키우느냐고. 그랬더니 웃으며, “우리 아버지가 키우던 것”이라고 대답하는 농부. 리 호이나키는 감각적 경험의 세계가 살아있는 전통의 지혜에 순종하기로 하고, 이후 어떠한 후회도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각인한다. “정부 관료와 대학과 기업들이, 실로 재앙이라고 할 만큼 진실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뜯어먹고 사는 기생충적인 흡혈귀”라는 잔인할 만큼 아이러니컬한 사실을.

 

너무나 리얼하게 기술적으로 조작된 CD에서 당황한 리 호이나키는 “나와 내 아이를 갈라놓는 테크놀로지”를 혐오하고 시를 찾는다. 근대가 시를 빼앗아가면서 장소를 잃은 사람들은 정신적 어둠으로 빨려들어갔다고 여기고, 과거 수도사들이 그랬듯, 영혼을 향해 있는 육화된 독서, 다시 말해 육체를 움직이면서 소리 내어 읽으려 애쓴다. 그는 자신의 삶 앞에 불현듯 다가온 암을 맞아 처신한 두 친구를 소개하며 “전통적 덕행이라고 알려져온 것의 실천을 저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믿는 근대적인 제도에 노골적 반감을 드러낸다. 기도와 명상으로 극복하는 친구와 의사의 권고에 맹종하다 만신창이가 된 친구. 환영에 불과한 근대적 기술 시스템에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평생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 영예롭게 살아온 아버지를 단지 “추상적인 장수의 사례로 연명”시키기 위해 병원 침상의 쇠틀에 가둬 온갖 기계에 묶어 놓는 의사는 생명 없는 언어로 적힌 가치중립적인 문건을 보여준다. 유감스럽게 우리는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노라고. “예측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데 대해 신에게 감사드려야겠다.”는 냉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에게 리 호이나키는 80을 훌쩍 넘긴 아버지가 존엄 있는 죽음을 스스로 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 수긍하게 만든다. 의사의 양심을 잠시 깨운 것이다. ‘값 비싼 골칫거리’이거나 ‘허약한 보물’로 취급하면서 아이들을 어른에서 분리하는 ‘아동기’를 근대적 산물이라고 확신하는 리 호이나키는 땅에 뿌리내렸던 시절에 아동기라는 면역결핍증은 없었다고 갈파한다.

 

자신이 내는 세금이 전쟁과 군수물자를 구입하는데 사용하는데 저항하며 납세거부운동을 펼쳤던 애먼 헤나시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멋진 대답을 했다고 리 호이나키는 전한다. “야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나는 확신합니다!” 폭탄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며 방공훈련을 거부한 도로시 데이, 그 이전에 억압적인 국가의 폭력에 반대한 고드윈,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를 예로 들면서 자기 자신의 변화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한 사람의 혁명’을 제안하는 리 호이나키는 분명 아나키스트다. 기득권의 지배를 거부하고 땅에 뿌리내린 삶을 옹호하는.

 

이반 일리치의 친구처럼,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믿는 정의에 단호했지 결코 비틀거리지 않는데, 그는 비틀거리며 정의의 길로 간다고 말해 의지가 약한 독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한 과목의 답안만 써 제출하면 받을 박사학위를 버리는 용기, 보장된 종신교수를 눈앞에서 내치는 용기는 아무나 옮길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둘러보자. 기득권이 단단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지위를 놓기 싫어한다. 철밥통이라는 교수나 관료가 특히 그렇지만 어쩌면 시민운동에 자신을 던진 이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기운이 빠질 때 용기를 잃지 말라고 우리를 다독거리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이 시대의 사표가 되는 책임에 틀림없다. (우리와 다음, 2009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