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12. 24. 23:57

 

멀리 고흥반도가 수묵화처럼 펼쳐지는 순천만. 갈색으로 바뀐 갈대숲 너머 넓은 갯벌이 드리워진 순천만은 요즘, 겨울의 진객인 흑두루미들로 품격이 한껏 높아지고 있다. 1996년 70여 마리를 시작으로 조금씩 늘어나더니 2006년부터 200마리를 넘기고 2008년 330여 마리로 증가해 올해는 400마리를 훌쩍 넘었다. 흑두루미 사이에 알음아름이 진면목을 보이는 겐가. 내년에는 몇 마리가 찾아와 줄지, 벌써부터 설렌다.

 

세계에 1만 마리 이하로 명맥을 유지하는 흑두루미는 1985년 이래 낙동강을 따라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에 200여 마리 월동하곤 했으나 거듭되는 개발과 오염으로 방해를 받자 1990년대 중반 천수만이나 김포 일원의 농경지로 거취를 옮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파트단지의 거듭되는 확산으로 김포평야에 사람의 출입이 잦아지자 흑두루미는 재두루미들이 무리지어 방문하는 철원평야에 몸을 의탁하곤 했는데, 어느새 순천만의 상징으로 등극하다니. 그만큼 순천만은 천연기념물 228호 흑두루미에게 각별한 모양이다.

 

중국 헤이룽 강이나 몽골의 초원 주변에서 번식하는 흑두루미들은 얼음이 단단해지기 전인 10월 경, 성장한 새끼 한두 마리를 데리고 일본 가고시마 현의 이즈미 시를 대거 몰려간다. 따뜻할 뿐 아니라 충분히 먹을 만큼 알곡을 뿌려주기 때문인데, 덕분에 이즈미는 두루미의 고장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그만큼 많은 관광객이 모인다. 그렇다고 모든 흑두루미가 이즈미의 호의를 덮어놓고 반기는 것 같지 않다. 일부 흑두루미 가족은 한반도부터 머물다 뒤늦게 합류하고, 어떤 가족은 순천만에서 아예 겨울을 난다고 철새 관찰에 겨울 주말을 다 바치는 아마추어 탐조학자들이 증언하는 걸 보면.

 

지난겨울, 난생 처음 순천만을 찾은 어린 흑두루미는 넓은 논을 이리저리 가르는 전깃줄을 제 부모처럼 요령 있게 피하지 못하고 그만 발목이 겹질린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걷는 제 부모 뒤에서 절룩거리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자 많은 시청자들이 안타까워했는데, 올해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순천만 주변 770여 헥타르를 ‘생태계 보존지구’로 지정하고 내륙습지도 자연스럽게 복원한 순천시가 흑두루미를 비롯한 철새를 보존하려 발벗어나섰고, 흑두루미가 떠난 4월 이후 전봇대와 전깃줄을 모두 제거한 거다. 그 소문을 들은 것일까. 올해는 내년이 기대될 만큼 많은 흑두루미가 날아들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자연스런 갯벌을 가지고 있는 순천시는 전봇대를 뽑는 정도에서 그친 게 아니다. 흑두루미가 찾는 들판에 날마다 400킬로그램의 먹이를 뿌려놓는 것은 물론이고 농경지와 갯벌 사이의 갈대숲을 보존해 흑두루미의 편안한 이동과 휴식을 도모해주었다. 겨울철에도 논에 물을 고이게 했으며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옷과 자동차의 전조등 빛이 흑두루미를 자극하지 않도록 갈대로 엮은 가림막을 설치했다. 생업에 지장이 생길까 우려하던 주민을 끈질기게 설득했을 뿐 아니라 순천만 일대의 식당을 사들여 철거하거나 조류 관찰을 위한 시설로 바꾼 뒤의 일이었다.

 

순천만의 일부를 통과하는 고속도로에 문제제기하며 자동차 빛이 차단될 정도로 숲을 조성토록 정부를 설득한 지역 환경단체와 뜻을 함께한 순천시의 노력은 결국 순천만에 변화가 일게 이끌었다. 순천 시민들의 성의에 감동했는지 흑두루미는 물론, 천연기념물 205호인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해 가창오리도 갑절 이상 늘었고, 우리나라 이외의 국가에서 자취를 감춘 고라니도 눈에 띄게 증가한 게 아닌가. 그윽한 자연과 고즈넉한 저녁노을을 선사하는 순천만에 관광객까지 300만 명 가까이 찾아오면서 순천시의 재정이 단단해졌지만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은 보존에 대한 농민의 믿음을 얻은 일이었다. 흑두루미가 깃드는 논에서 거두었으니 친환경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높은 가격에도 쌀이 다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루미 종류 가운데 작은 편이라지만 키가 95센티미터가 넘어 훤칠한 흑두루미는 말 그대로 목에서 머리를 뺀 온 몸이 시커멓다. 목 중간에서 머리 위와 턱까지 희지만 눈 위의 이마가 검은 흑두루미는 한겨울 50에서 500마리의 떼로 먼 거리를 이동하지만 가족 단위로 성큼성큼 흑색 다리를 움직이며 10센티미터 가까운 황록색 부리로 물고기와 조개와 게와 갯지렁이, 알곡과 식물의 연한 뿌리와 줄기와 잎사귀를 즐겨 먹는다. 한데, 그들이 떼로 찾는 이즈미는 흑두루미가 살기 좋은 환경일까. 찾아오는 두루미들이 섭섭하지 않게 먹이를 뿌리자 겨울이면 이즈미는 흑두루미와 재두루미들로 장관을 이루지만 전문가들은 사실 걱정이 많았다. 질병에 그만큼 빠르게 전파되기 때문이다.

 

최근 흑두루미들 사이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순천만에 남는 흑두루미 가족이 점점 늘어난다는 거다. 이즈미보다 자연성이 높은 순천만을 흑두루미가 선호할 것으로 추측하는 조류 전문가들은 월동지가 분산되었다는데 일단 안도감을 표시했다는데, 2006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습지조약인 람사협약에 등재된 순천만이 200여 철새들이 군무하는 세계적 연안습지이자 국제적인 생태관광지구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순천 시민들의 이해와 협조가 주효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세계 5대 연안습지로 등극한 순천만을 내내 보존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절제된 탐사와 더불어 자연은 있는 그대로 놔둘 때 비로소 보답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시민들이 인식한다면 숙제는 술술 풀리지 않을까.

 

순천만이 이즈미를 능가하는 생태자연공원으로 거듭난 데 고무되었는지 한 공무원은 이즈미 이상 흑두루미가 찾을 거로 확신했다던데, 순천만이 성공한 배경에 이즈미 시의 경험이 컸을 것이다. 자연공원의 보전에 앞서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은 건, 과유불급이다. 흑두루미에 대한 지나친 배려는 자칫 생태계의 조화와 균형이 흐트러지게 만들 수 있다. 이즈미를 능가하려는 마음보다 순천만의 생태 조건의 범위 내에서 겨울에 찾아와 머무르려는 흑두루미를 맞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는 2013년 전남 순천시에서 국제정원박람회가 개최된다. 올림픽,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축제라는 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한 원동력은 순천만에 있었다. 그 박람회를 계기로 자연이 제공하는 가치에 사람들이 비로소 눈을 뜰 수 있기를 이번 겨울에 이어서 해마다 순천만을 찾을 흑두루미와 함께 기원해본다. (물푸레골에서, 2010년 2월호)

좋은글 모셔갑니다
겨울 강화도는 귀족 두루미가 있어서 즐겁습니다
흙두루미도 보고 싶어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