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7. 5. 27. 11:57
 


데이비드 스즈키 지음, 이한중 옮김(2007),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나무와숲.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말이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아이에게 억지로 시키는 부모들이 주로 그렇게 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부모 손에 이끌려 진력나게 공부한 친구는 취직이 잘 되는 대학의 학과에 들어가 어엿한 직장을 구했고, 손색이 없는 짝을 만나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린다. 누가 보아도 부러운 인생인데, 그 친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자신을 외톨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기 부모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는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나’라는 개성이 없었고, 허구헛날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게 부모의 성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도 제 아이들을 몹시 닦달한다. 경쟁사회에서 일단 한번 쳐지면 회복하기 어렵다는 조바심이 작용, 자식을 위해 모질게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15년 전, 되새겨야 할 맹모삼천지교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현대판으로 재현되었다. 거리의 어떤 아이는 소리만 듣고 5가지 자동소총을 알아맞힐 수 있다고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자랑하더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의 한 저자는 탄식을 하면서 “그 아이가 그 시간, 자연에 있었다면 5가지 새들의 울음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을 텐데…”, 자연을 잃은 아이에게 깃든 삭막한 심성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맞다. 도심에 녹지가 부족하기로 타 도시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천은 황당한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도시로 유명하다. 빤히 바라본다는 이유로 낯선 이에게 칼을 들이대는 범죄, 자신의 힘을 후배에서 과시하려 지나가는 초등학생을 불문곡직 때려죽이는 폭력이 백주대낮에 발생한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그와 같이 흉포한 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개성이 어우러지는 생태계에서, 생태계의 자손인 사람이나 동식물은 이웃을 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환경문제를 그 근본에서 성찰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데이비드 스즈키가 묻는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20분 더 공부하면 남편이 바뀐다!” 라고 교실 뒤에 써 붙인 어떤 여자중학교 교실의 급훈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남보다 뛰어난 사람과 친해지라고 주장했을 리 없다. “새로운 발견에 관한 도덕적ㆍ윤리적ㆍ사회적 파장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어디서도 받은 적이 없는” 과학자, 과학 중에서 유전학을 전공한 데이비드 스즈키는 “과학의 대중화를 연구 실력이 변변찮은 사람들이나 하는, 좀 상스러운 일”로 여기는 동료 과학자들의 편견을 무릅쓰며 25년 동안 써온 글을 다시 편집하면서, 여전히 감탄할 만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자연에 속에서 감성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세상과 기대를 남겨줄 것인가?”

 

데이비드 스즈키는 “어른들에게 사는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6000마일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직접 모금”한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딸, 그 아이의 내일을 생각한다. 1992년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에서 개최한 세계환경정상회의에 참석, “미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선거에서 진다거나 주식시장에서 돈을 잃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고 강조한 딸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어른들에게 “고칠 방법을 모르면 제발 망가뜨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다른 행동을 하는 어른의 우선순위에 전쟁보다 가난을 끝내는 일,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넣어 줄 것을 요구했다. 물 속 깊이 다이빙했다 수면 위로 올라온 범고래를 보며 “한번 숨을 들이쉬고 저렇게 물속에 오래 있는 쟤네들을 우리는 아쿠아리움의 조그만 수족관 속에 가둬 놓다니 너무 잔인”하다며 울먹인 딸을 둔 데이비드 스즈키는 양산한 쓰레기를 없애지 못하고 다만 옮기기만 하는 우리가 은하수를 잊고 냇물을 마실 수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탄식한 것이다.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로 유네스코 ‘칼링거’ 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환경운동가의 영예인 유엔 ‘환경보호상’과 유엔환경계획의 ‘글로벌 500’ 상을 연속해서 받은 데이비드 스즈키는 캐나다 공영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선정한 ‘캐나다 건국 이래 위대한 캐나다인’ 10명 중의 한 명이다. 그에게 독특한 이력이 있다.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자 전시 특별법을 제정한 캐나다는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캐나다에서 태어났거나 캐나다로 귀화한 일본인을 포로로 취급, 강제노역을 시켰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미국의 식민지도 아닌 캐나다에서 데이비드 스즈키는 그런 황당하고도 가혹한 시절을 경험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이라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다. 가족에 시련이었지만 그 시련을 기회로 받아들였는데, 어려서부터 자연과 떨어지지 않은 삶을 만끽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이와 달리, 생명공학의 문제를 지적하는 유전학자의 양심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40여 권의 책을 썼고,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가지고 있는 데이비드 스즈키의 책은 최근 우리에서 더러 소개되었다. 다른 이와 함께 쓴 공저였다. 일본의 소외된 계층을 방문하며 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강이, 나무가 꽃이 돼보라』와 나무 한 그루가 싹이 터서 한줌의 흙으로 사라질 때까지 갖는 생태적 가치를 조명하는 『나무와 숲의 연대기』, 그리고 오염되고 파괴되는 환경 소식에 진저리치는 사람들을 위해 긍정적 대안의 사례를 기분 좋게 소개하는 『굿 뉴스』가 그것이다. 그 중 두 권을 이한중이 번역했는데, 이번에 이한중은 데이비드 스즈키 혼자서 쓴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를 또 번역했다. 해마다 ‘환경책 큰 잔치’를 개최하는 ‘환경정의’는 생태 시각으로 환경문제를 천착하는 책을 고집스레 번역하는 그에게 2005년 ‘한우물상’을 수여한 적 있는데, 덕분에 데이비드 스즈키의 팬이 된 나는 지금 번역하는 데이비드 스즈키 책이 더 있는가 묻고 싶다.

 

서글픈 환경 현실을 놓고 데이비드 스즈키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탄식만 하지 않는다. 생태적인 시각을 잃지 않는 그는 숲을 사막으로 만드는 문명세계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우리를 설득하려 애쓰지 않는다. 후손의 몫을 남김없이 파괴하는 개발 세력에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지만 생태적인 이상 세계를 공허하게 갈구하는 건 아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그는 잘못을 느끼는 우리를 토닥거리며 현실의 토대에서 실현 가능한 생태적인 대안을 찾아 함께 행동하자고 손을 내민다.

 

“저 벌레 좀 봐!” 할머니가 길가에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는 딱정벌레를 가리키며 말하자, 꼬마는 “배터리가 다 떨어졌나 보네!”하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이비드 스즈키는 어려서부터 기계적인 사고에 길들어진 채, 자연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법은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 시골의 수용소에 머무르며 “학교에 갇힐 일”이 없는 생활을 자연에서 만끽한 만큼,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충만한 그는 어른이 된 후 아이들에게 자연을 선사하러 떠난다.

 

무지개송어를 잡으려 갈 때다. 벌목회사의 숲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전쟁터처럼 마구 파헤쳐진 주변은 벌목하고 남은 나무 등걸과 뿌리로 흉물스러웠다. 차를 세워 놓고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햇살이 뜨거운 빈터를 숨이 차게 걷던 일행은 아직 벌목되지 않은 ‘나무의 성전’에 들어선다. 그리고 에어컨을 틀어놓은 천장 높은 전당에 들어선 듯, 벅차게 감격한다. 그늘이 시원한 키 큰 나무의 품에 안긴 데이비드 스즈키는 초목과 죽어 썩어가는 나무의 축축한 향내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시면서 일순 태고의 분위기에 젖어 침묵에 사로잡히는데, 문득, 아이들도 같은 느낌에 젖은 모습을 본다. 아까부터 말다툼과 불평을 늘어놓던 아이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 듯 조용히 속삭이는 게 아닌가.

 

6천만 마리 들소의 발굽 소리가 들렸던 캐나다는 데이비드 스즈키의 할아버지 기억에 수십억 마리의 나그네비둘기가 시커먼 떼를 이루며 며칠이나 날던 자연이었다. 7만의 인구가 5년 뒤 10만으로, 다시 35만으로 늘어나는 도시의 성장률은 자연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개발에 의해 하루 130종 씩 사라지는 생태계의 이웃들. 발이 1에이커나 되는 외계인이 들어와 호수와 강물을 다 마셔 버리고 물고기를 엄청나게 잡아먹으며 독한 연기와 배설물로 공기와 땅을 더럽힌다면 세계의 권부는 어떻게 대응할까.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그 무지막지한 괴물의 파괴행위를 저지하려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나. 한데, 그 괴물은 바로 인간이라고 데이비드 스즈키는 지적한다. 그가 동의했듯이, 생태계의 오랜 이웃은 물론, 캐나다 선주민이 볼 때, 지금의 인간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침략자다. 그것도 모든 게 연결돼 있는 지구에서 바로 자신과 후손의 삶을 공격하는 침략자.

 

데이비드 스즈키는 “생태학자와 경제학자는 단결하라!”고 외친다. 하긴 생태학이나 경제학은 모두 집(oikos)이라는 어원을 갖는 영어 ‘eco’로 시작된다. 배타적 이익을 따지는 단기 투자에서 벗어난다면 경제학과 생태학은 통할지 모른다. 빈부와 계층으로 인한 상대적인 빈곤감과 박탈감은 집안에서 발생하지 않을 게 아닌가. 서구 시각으로 지독하게 궁핍했던 라다크는 ‘가난’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던데,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구걸하는 자가 생기더라고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여사는 개탄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자급자족 공동체에서 가난의 개념은 없다는 걸 파푸아뉴기니의 사례로 이야기하는 데이비드 스즈키는 경제성장을 구원인양 강요하는 ‘획일적인 관념’을 ‘섬뜩한 오만’으로 성격 규정한다.

 

더할 줄만 아는 국민총생산은 확실한 환경파괴를 조장하는 지표다. 그 대신 후손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참 발전 지표’를 소개하는 데이비드 스즈키는 “나무는 일단 잘라내야 가치가 생긴다.”고 보는 임업기업의 렌즈를 피하자고 제안한다. 어획량을 어선의 수가 아닌 남아 있는 어족량으로 계산하고 제재소의 수가 아니라 남아 있는 숲의 상태에 따라 벌목의 양과 질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벌목되는 지역에서 발전이란 “굶주림, 의존, 무기력, 문화의 파괴, 도덕적 해이”이며 정부가 주는 일자리는 실업이라는 말레이시아 사와라크의 주민의 말에 동의하면서, “가격을 제대로 매기는 것이 문제”라고 단정하는 서구경제의 근시안이 아니라 삶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생태적 안목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의 말처럼, 가장 소중한 것에는 가격이 있을 수 없다. 어머니에 값을 매길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났다.

 

올해는 과학기술부가 지정한 ‘생물학의 해’다. 황우석 사태로 땅에 떨어진 생물학계의 사기를 북돋우고, 생명공학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온갖 이벤트를 기획한 올해, 우리 정부와 생물학자들이 시민에게 내세우는 생명공학의 장밋빛 내일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쳐지면 돌이킬 수 없다며 인적, 물적, 금적 지원과 격려를 국가와 시민에게 독려한다.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고 반성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제2의 황우석이 배양될 토양은 더욱 무르익는 모습이다. 생명공학을 반대해 이단자가 된 생물학 전공자의 처지에서 생명공학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비판하는 데이비드 스즈키에 새삼 강한 동지애를 느낀다. 아직도 생명공학에 막연한 기대를 멈추지 못하는 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말을 유전학자인 그가 펼치고 있으므로.

 

연구비의 노예가 돼 있을 캐나다의 주류 유전학계에서 그리 달가워할 리 없겠지만, 생명공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날카롭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인종주의와 생물학적 결정론의 폐해를 아프게 되새기며, 아직 출발선도 찾지 못하는, 결코 출발선을 찾을 수 없을, 생명공학의 잔인한 현주소를 유전학자의 양심으로 고발한다. 이윤과 패권을 노리는 자본과 권력의 요구에 몸을 파는 생명공학과 핵 과학기술의 문제와 실상을 알리면서, 우리에게 혼란과 곡해를 부채질하는 언론재벌에 기만당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그러고 보니 자본주의 역사가 우리보다 깊은 캐나다와 우리.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물고기도 고통을 느낀다. 생물을 착취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고 설파하는 데이비드 스즈키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건강하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많다. 경제성장에 의존해야 풍요롭거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자연스런 삶을 택하자고 제안한다. 유기농산물은 개인의 웰빙 차원이 아니다. 내일의 생태계를 위해 선택해야 한다. 쓰레기 재활용도 같은 이유에서 실시해야 한다.

 

우리가 물려줄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상, 아이의 세상은 그들의 눈높이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그런 내일을 위해 풀뿌리 환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는 데이비드 스즈키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명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살리고 인간의 욕구를 생태적으로 충족하는 방안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 애쓴다. 『굿 뉴스』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양한 사례를 전하고 있지만, 남획하지 않는 어업과 숲을 싹 쓸어내지 않는 벌목도 제시한다.

 

목하 위기산업이 뜬다. 보험업계와 과외산업이 그렇고 성형외과를 비롯한 의료산업도 마찬가지다. 뒤쳐지면 돌이키기 어렵다는 최면으로 앞만 보며 뛰는 일상에서 위기 산업은 호황을 맞는다. 마음이 조급한 우리는 주위의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의 개성을 배려할 여유를 찾지 못한다. 생태계와 이웃은 물론, 가족과 자신의 개성마저 망각하고 만다. 획일적 기준이 요구하는 성공에 올인해야 하므로. 성공했다 믿는 자가 자부심으로 가장한 우월의식은 동 시대에 사는 이웃에게 피할 수 없는 위화감과 박탈감을 안겨주고, 그런 사회에서 자폐는 전에 없이 늘어난다. 수많은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미국의 조승희 사건은 자연을 돌아볼 수 있는 환경이라면 결코 배태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유를 잃은 삶은 자신은 물론 제 자식까지 고통에 몰아넣는다. 지구온난화, 오존층파괴, 그리고 아이에게 나타나는 아토피는 아이의 책임과 거리가 멀다. 대기를 오염시키고 먹을거리에 화학첨가물을 뒤섞은 건 어른이다. 청정에너지라고 세뇌하는 핵발전소의 광고는 어떤 내일을 물려줄 것인가. 자원과 에너지의 대량생산, 대량운송,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유지되는 무역자유화는 초국적기업에게 막대한 이윤을 한시적으로 선사하지만 그 폐해는 후손에게 영속된다. 지금도 형편없는 식량자급구조를 더욱 황폐시킬 만들 한미FTA는 어떨까. 우리에게 닥친 가장 시급한 환경문제를 “현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괴를 일삼는 가치와 신념에 있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스즈키는 “소중한 지구의 건전한 시민을 많이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짤막한 글을 모아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를 내놓았다.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아이는 제 부모가 저를 위해 고액 과외공부를 시키고 비싼 옷 입히며 성형 수술비를 내주지 않았다고 불만하지 않는다. 아이의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닦달하거나 조바심에 젖어 큰돈을 쓰는 부모보다 제 아이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내일의 삶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이끌어주는 부모를 아이들은 더욱 존경할 것이다. 바로 생태적인 내일이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으려 기를 쓰는 요즘 세대는 자신의 부모에 소홀하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래도 지금은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물자가 주변에 어느 정도 충족되지만 지구온난화와 석유정점이 예고되는 내일은 어떨지. 자원과 식량이 부족해지면 세상은 더욱 각박해질 텐데, 이웃을 짓밟아야 성공하는 세상에서 자식의 성공에 더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노인들은 차라리 걸림돌이다. 늙어버린 현 세대는 자식에게 장차 어떤 대접을 받을까.

 

아이도 아이지만, 어쩌면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는 그 생태적 이유를 절실하게 제공한다. (환경과생명, 2007년 여름호)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이 책으로 저도 데이비드 스즈키의 팬이 되었습니다.
이제 <굿뉴스>를 읽을까 합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