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2. 26. 17:40


올 설 고향 길도 붐볐다. 연휴 기간이 길지 않았어도 경찰이 정체 구간의 갓길 통행을 유연하게 풀고, 스마트폰을 활용한 운전자들이 출발 시간을 분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뉴스 진행자의 설명이 있었다. 교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주는 첨단기기의 도움이 컸다는 건데, 어쩌면 고향으로 가는 자동차의 수가 줄었을지 모른다.


최근 명절에 도시에 남는 이가 늘고 있다. ‘고향이라는 감상이 그리 사무치지 않은 청년은 물론, 부모를 도시로 모셔온 장년들도 굳이 먼 길 고생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가 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고향이 오히려 서먹서먹한 이가 시간이 갈수록 늘지 않던가. 게다가 요사이 추세인 납골당은 대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고, 가깝게 살아도 살갑게 지낼 기회가 적었던 친지들을 꼭 명절에 고향에 가서 만나야 할 이유는 그다지 없다.


혼자 사는 어떤 이는 고속버스나 열차를 예매해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을 굳이 승용차를 가지고 간다. 자식들 생각하고 한해 재배한 농작물을 나누어주는 꼬부랑 모친의 즐거움을 마다할 수 없노라는 게 그 이유인데, 그이는 요즘 귀경인파 중 예외에 속한다. 시골 농촌에 남은 농부들이 예전 같이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나이 들어 힘이 모자라기 때문만이 아니다. 도와줄 이웃이 마을에 없으니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은 포기한지 오래다.


잘 팔리는 한두 가지 농작물만 논밭에 획일적으로 심다 보니 기계화하거나 아예 영농 전문기업에 맡긴다. 노인 내외를 위한 텃밭 농작물은 단출하므로 자식들이 찾아오면 읍내로 나가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아야 한다. 손님이라도 오면 면 소재지의 식당을 예약해야 한다. 그러니 자식과 나눌 농작물이 있을 수 없다. 명절에 찾아온 손주가 밭에 자라는 무라도 하나 뽑으려 하면 놀라 막는다. 야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밭떼기로 계약한 상품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상인이 몽땅 가져갈 농작물에 농약이 배어 있는 까닭이다.


도시인들도 흔히 자신을 농민의 자식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퇴색되어 간다. 길던 짧던, 자신이 농촌에서 농사짓던 경험을 가진 이는 물론이고, 부모가 농사짓는 모습을 본 기억을 가진 이가 점점 드물어지지 않던가.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몰려서 사는 도시에 인구가 넘친 지 오래라서 농촌에 아기 울음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층간소음이 살인과 방화로 이어지는 도시에서 산후조리원 외에 아기 울음소리 들리지 않지만 농약으로 새소리와 개구리 소리가 사라진 농촌에 아기의 출현은 어색해지고 말았다.


요즘 농촌에 아기들이 안전하게 놀 시설은 물론, 공간도 함께 놀 또래도 없다. 아기를 낳을 젊은 부부가 드물고, 아이가 자라 다닐 유치원과 학원이 없거나 지나치게 멀다. 대도시 또는 대도시를 지향하는 중소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대부분의 아이에게 농민의 지식이라는 말, 부모도 시큰둥한 마당인데 실감날 리 없다. 아이가 장년이 되면 제 부모를 기억하며 차례야 지내겠지만, 굳이 귀성길과 귀경길을 붐비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농촌에 5일장은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 자급자족하고 이따금 자기 고장에서 나오지 않는 농작물이나 해산물을 구하거나 새로 나온 농구를 보러 대장간으로 나설 일이 없지 않은가. 커피 전문점에 밀려 도시에서 자취를 감춘 다방이 한 집 걸러 문을 연 면 소재지까지 퍼진 건 아니지만, 요즘 웬만한 읍 소재지에 가면 거대한 덩치를 과시하는 대형 마트가 승용차들을 연실 빨아들인다.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농작물마저 마트에서 구입해야 한다. 수확하자마자 상인에게 팔아넘기므로 텃밭이 없다면 하루하루 저녁 준비도 식품매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역 특산물도 지역에서 구입하기 어렵다. 상인이 수거한 농작물을 재분배하는 대형 물류센터는 지역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촌 지역의 마트나 도시의 마트나 파는 농작물은 비슷하다. 여느 마트마다 수입농산물이 넘치고 가공식품이 널렸다. 그러니 식단이 지역의 기후 조건이나 문화와 관계없이, 식성은 어디나 엇비슷하다.


이제 농촌이 필요 없는 세상이 도시에 제조될지 모른다. 도시 텃밭이 유행처럼 생기기 때문이 아니다. 시민들이 틈틈이 식구와 먹을 푸성귀를 심어 조금씩 뜯어먹는 텃밭은 농촌의 가치를 높이면 높이지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 땅과 땀의 가치를 비로소 인식하는 도시인들이 농민에게 고마워하게 되지만 대형 마트에 쌓인 농작물은 그런 가치를 소비자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깔끔하게 다듬은 식품의 재료에 불과하므로 가격이 저렴하면 그저 인기를 끈다. 그 점을 간파한 기업이 제빵에 이어 농업으로 파고들 태세다.


도시 인근에 대규모 온실을 짓는 대기업이 등장했다. 30층 높이의 철근콘크리트 수직농장도 솟아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 땅을 배제한 온실과 수직농장은 허리 높이 작업대에 뿌리를 펼치는 농작물을 시시때때로 수확할 예정이라고 한다. 자본과 과학기술이 안내하는 수경재배다. 도시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실내에서 재배하는 만큼 병충해를 막을 수 있고 파종과 수확에 계절과 장소가 장애일 수 없다. 기계화로 인건비를 최소화하는 까닭에 수입 농산물은 물론 지역 농산물보다 가격 경쟁력이 높을 거로 예견한다. 다만 그런 농장에 전통 농부는 필요 없을 것이다. 관리직 사원과 시간제 노동자가 고용될 뿐.


태양과 LED조명으로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과학기술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도시의 농장, 아니 공장은 아무리 정교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관리할지라도 생태계 안에서 진화해온 식물의 성장을 완전히 흉내 낼 수 없다. 수확한 식물을 선택할 사밖에 없는 이에게 균형 있는 영양은 물론 건강을 장기적으로 보장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석유 공급이 제한된다면 가동이 불가능할 그런 농장은 도시의 확장과 집중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판촉을 위한 현란한 광고 능력을 가진 자본이 아니라면 투자를 망설이겠지만, 땅과 더불어 농촌과 농민을 잃은 도시의 소비자들은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농사에 비닐 사용을 한사코 거부하는 농부가 있다. 귀농한 그는 땅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유기농업은 물론이고, 농작물이나 농부나 겨울에는 쉬어야한다고 믿는다. 멀지 않은 과거까지 우리 조상이 살아왔던 방식이다. 이웃은 물론이고 생태계의 삼라만상이 살아서 도움을 주고받던 시절의 농업이었다. 그 시절, 집 떠난 이는 고향을 그리워했고, 명절이면 반드시 찾아왔다. 생명체가 가진 건강한 귀소본능이다. 삶의 정서와 뿌리가 내린 자신의 땅이므로.


     농작물이든 사람이든 땅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다. 우리는 시방 건강한가. 다행히 명절이면 고향을 찾는 인파가 붐빈다. 희망이 남았다는 증거이겠으나 그 시효는 충분하지 않다. 돈이 만들어내는 신기루, 그 이기적 탐욕에서 서둘러 벗어날 궁리가 필요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해지는 징후가 더 흉흉해지기 전에. (지금여기, 2013226일, "마트에서 농작물을 구입하는 농민"으로 게재)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1. 2. 9. 00:06

 

농경사회에서 한해를 시작하는 의미의 설. 요즘이야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이 부모가 계신 곳, 또는 부모의 영전을 모시는 곳에 모여 선조를 기억하며 마주앉는 데 큰 의미를 두겠으나, 농경사회에서 설 차례상은 자신을 태어나게 한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며 올 한해 농사를 기원한다는 데 뜻이 있겠다. 그래서 차례상은 설이든 한가위든 그 고장의 전통 음식문화를 반영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지만 설 차례상도 추석과 다르지 않으니 풍성한 게 틀림없는데, 요즘은 차례상보다 차례 마치고 식구들과 먹는 음식이 더 호화스럽다. 지방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특색을 갖는 상차림은 세월이 흐른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흩어졌던 식구와 마주앉은 밥상에 조상이 구경도 못한 음식이 올라올 게 틀림없다. 계절과 장소가 아주 생소한 열대과일과 양주만이 아니다. 역대 어느 황재 상차림이 부럽지 않다. 차례 핑계로 모처럼 가족이 고기와 여러 나물을 나누던 시절은 아늑해졌다.

 

설이 지난 뒤 한 신문의 환경전문기자는 풍성했던 설 식탁의 원산지를 따져보니 국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쌀과 달걀, 약간의 채소 이외에 쇠고기와 당면, 표고버섯과 참기름은 수입이라고 고백하면서 국산 음식에서 얻는 칼로리를 가리키는 칼로리 자급률200849%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자료를 들어 독자를 주목하게 했다. 아울러 1980년대 초 30퍼센트에 불과해 위기를 느낀 일본은 최근 40퍼센트까지 끌어올렸지만 1970년 식량자급률이 81퍼센트이던 우리나라는 199043퍼센트에서 현재 27퍼센트로 곤두박질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라고 걱정했다.

 

우리나라에서 안정적으로 자급하는 농산물은 쌀이 사실상 유일하지만 해마다 일정 물량을 수입해야 한다. 그렇게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례상에 올라온 떡국이 국산이 아닐 가능성도 있는데, 국산 쌀이므로 당연히 국산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일본의 한 단체가 자국에서 생산한 밀로 가공한 우동의 국산화 비율을 40퍼센트 미만으로 분석해 화제에 오른 적 있다. 분명히 일본의 농경지에서 생산했지만 생산하는 과정에서 소비한 화학비료와 농약, 농기계와 그 무거운 기계를 움직이는데 쓴 석유, 농산물을 식품으로 가공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첨가물들은 수입에 의존했다고 냉정하게 계산한 결과라고 했다. 우리 언론의 환경전문기자는 자신의 차례상에 올라온 떡국이 국산이라고 판단했지만 생산과정까지 다시 고려한다면 국산이라 주장하기 민망해할지 모른다.

 

27퍼센트에 불과한 우리의 식량자급률을 농산물과 가공식품의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와 기계 설비를 고려해 다시 분석한다면 얼마나 빈약해질까. 27퍼센트의 40퍼센트라면 1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리 식량자급률을 걱정한 그 환경전문기자는 우리의 칼로리 자급률을 2008년 기준으로 49퍼센트로 잡았지만 내폭 낮춰야 옳을지 모른다. 기계화된 농촌에서 사용하는 석유 에너지는 도시의 가정보다 많다. 거기에 화학비료와 농약은 전량 석유로 가공했고, 수확한 농산물을 말리거나 저장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한겨울에 출하를 준비하는 비닐하우스는 어떤가. 수입 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우리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칼로리 자급률을 다시 계산한다면 마이너스로 나올 가능성이 오히려 높을 게다.

 

이집트의 민주화운동이 거세지자 경제계는 석유가격 상승을 우려했고 아니나 다를까, 수에즈운하가 통제되지도 않았건만 가격이 소폭 상승했다. 이집트 사태가 진정되면 국제 석유가격도 진정될 수 있을까. 많은 석유전문가는 고개를 젓는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의 산유국들이 실상을 밝히지 않아 그렇지, 이미 석유는 생산 정점을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물건을 놓고 흥정하지 않고 돈부터 예치해 거래하는 석유시장은 소문에 극도로 민감하니 석유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리라 점친다. 이른바 선물시장이다. 국제식량도 선물시장에서 거래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수요보다 생산이 모자라면 가격은 오르는 법이다. 게다가 가격이 소문에 연동하는 선물거래 체제에서 매점매석이 횡행하는데, 석유가격 하락은 기대할 수 있을까. 식량은 어떨까.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의 과소비가 원인인 지구온난화는 곡창지대의 사막화를 몰고오는데 그치지 않았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은 풍수해를 낳았고, 세계 농업지대는 때 아닌 가뭄과 홍수로 예년 수확을 건지지 못하게 했다. 지난해 여름 러시아를 비롯한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는 극한 더위에 이은 화재로 밀 작황이 예년의 절반으로 뚝 떨어져 수출을 금지하기에 이르렀고, 그 여파는 러시아에서 밀을 수입하는 아프리카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에서 밀을 수입하지 않았어도 우리나라의 밀가루 가격이 들썩들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러시아 주변국만의 사정이 아니다. 주요 식량 수축국가의 하나인 파키스탄과 호주의 사정도 전 같지 않다. 그 와중에 세계 최대의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마저 식량 순수입국이 되었다.

 

10배의 석유 칼로리가 부어져야 수확이 가능한 곡물을 사료로 사육하는 요즘 산업축산은 식량위기를 부추긴다. 주로 옥수수와 콩을 주원료인 사료를 16킬로그램 먹이면 쇠고기 살코기 1킬로그램을 얻을 수 있다. 돼지고기 1킬로그램은 소의 절반, 닭과 유제품 1킬로그램은 돼지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료를 먹여야 하는데, 세계 고기의 4분의1을 독식하는 미국의 식생활을 따르려는 국가는 늘어나기만 한다. 유럽과 일본, 우리와 중국이 그렇다. 유럽은 그래도 식량을 거의 자급하고 일본은 자급률을 높이려 애를 쓰는데 우리는 식량 증산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아직 수출대금이 많이 축적돼 안심해도 좋다는 걸까.

 

벌써 십 수 년 전, 당시 월드워치연구소 소장이었던 레스터 브라운은 앞으로 중국을 누가 먹여살릴 것인가걱정했다. 세계 최대의 달러 소유국인 중국에서 지구촌의 농산물을 휩쓸어간다면 나머지 나라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으니 미리 자급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인데, 우리는 ‘4대강 사업과 신도시 개발로 경작지가 위축되기만 한다. 논보다 생산력이 뛰어난 갯벌도 매립되었거나 매립 예정이고, 조력발전으로 파괴되기 직전이다. 그렇지만 우리 식탁은 여전히 풍성하다. 대부분 수입 농산물이거나 석유에 의존해 생산한 국산 농산물이고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가공식품이다.

 

설 차례상은 겉보기 풍성했다. 하지만 대부분 조상들이 외면했을 음식이었다는 걸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차례 뒤 식구들과 마주한 밥상은 더욱 화려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은 음식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경작지의 황폐화를 부르는 지구온난화와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키는 석유자원이 정점을 넘겼거나 넘기려는 시점이다. 자국민이 굶주리는데 식량을 수출하려는 민주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년의 세계 식량위기는 올해 심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이 예측한다. 많은 기후학자들은 미국의 경작지도 안심할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징후가 흉흉한 지금은 황제보다 풍성한 식단에 만족할 때가 아니다. 외국의 식량기지 확보보다 자급률 확대를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식량안보보다 식량주권이다. 바로 조상이 먹던 상차림의 회복, 다시 말해 제 철 제 고장 농산물로 자급하는 터전의 확보다. (지금여기, 2011.1.?)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8. 7. 00:27

 

서양인, 특히 미국인들은 우리나라 젊은이의 체형을 부러워한다고 한다. 늘씬한 8등신이라기보다 몸에 군살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그를 위해 밥을 덜 먹거나 피트니스클럽에 등록해 꾸준히 운동하는 이가 적지 않지만 그건 서구의 여느 나라도 마찬가지다. 왜 한국인은 서양인보다 날씬한 편일까. 음식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굶주림에 지친 어린이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부여잡고 쓰러져 죽어가는 지역의 시각으로 지독한 역설이지만 서구의 많은 국가에서 비만이 가난의 상징으로 바뀐 지 오래 되었다. 피트니스클럽에 등록하거나 다이어트에 돌입할 시간과 돈이 없기 때문이기 이전에 눈과 코를 자극하는 저렴한 음식이 지천에 널려있는 까닭일 텐데, 가난한 이에게 비만을 일으키는 요인은 음식의 양보다 질과 관련이 있다. 먹는 이와 땅의 건강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재배하는지, 무슨 가축을 어떻게 사육해 어떤 방식으로 가공했는지 전혀 모르는 음식에 도덕은 깃들 틈이 없다. 이웃과 나누는 ‘밥’이라기보다 요란한 광고를 앞세우고 나 몰라라 파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량에 양심은 대체로 절연되었다.

 

어느 한쪽에선 차려낸 음식의 40퍼센트 정도를 버리고 어느 한쪽은 한 국자의 음식도 접시에 나눌 수 없는 지구촌의 현실은 식량에 얽힌 역설을 발판으로 한다.

 

 

1. 지역을 떠난 식량

 

평화(平和)는 공평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을 말한다. 사람은 예로부터 자신이 속한 마을에서 재배하는 농산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가져오려면 어느 정도의 돈이나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제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농산물을 즐겨 먹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에 비해 지위가 우월하다. 농사는 이웃과 함께 땀 흘리며 상부상조하며 짓는다. 마을에서 함께 농사지은 이웃이 서로 나누는 농작물은 갈등을 일으킬 리 없지만 먼 마을의 낯선 농산물은 그렇지 않다. 재배하는 데 누구의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농산물은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다.

 

1) 지역에 따라 다양한 식량

 

가공식품에 익숙해진 요즘, 농작물이 식량의 원천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사람이 농작물을 재배한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사람은 진화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대부분의 세월을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사냥하거나 수집해 해결했다. 경작이 지금부터 대략 1만 5백 년 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다이아몬드(2005)는 무수한 식물과 동물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재배하거나 사육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머지는 길들이기 대단히 어려웠다는 거다.

 

오래 전 아프리카를 떠난 사람은 요즘 하와이와 이스터 섬까지 퍼졌지만 대부분 농사를 지어 식량을 구한다. 지역에 따라 독특한 농산물이 없지 않지만 재배하는 종류는 엇비슷한데 겉보기 같아도 지역에 따라 품종의 차이는 있다. 지역에 따라 쌀과 콩의 종류가 다르고 소와 돼지 품종이 다르다. 선조에게 물려받은 종자의 품종, 그리고 경작과 사육 기술을 환경에 맞게 개량하면서 다채로워진 결과다.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농작물을 맛볼 기회가 거의 없는 사람들은 지역의 식량에 만족했을 것이다.

 

해마다 비슷한 수확을 기대하지만 어쩌다 뜻하지 않은 흉작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이웃과 식량을 나눠 해결했을 테지만 식솔이 늘거나 수확량이 줄어든다면 마을의 이웃 일부가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 떠났을 것이다. 그런 사정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마을은 늘 자급자족했고 이웃의 식성도 대체로 비슷했을 것이다. 한데 높은 산이나 넓은 강, 바다로 분리된 지역은 환경이 사뭇 다르다. 따라서 재배하거나 사육하는 농작물과 가축의 종류가 다를 수 있다. 재배하는 농작물이 다른 산마을과 들마을과 갯마을도 식성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형성된 식성은 문화가 되었는데, 문화는 차이일 뿐 우열일 수 없다.

 

2) 식량의 상품화

 

옥수수의 원산지인 멕시코에서 주민의 오랜 주식은 또르띨라다. 옥수수를 갈아 반죽해 둥글게 펴서 화덕에 구은 또르띨라에 취향에 따라 으깬 풋고추나 양파나 토마토를 얹고 말아 먹거나 여유가 있다면 볶은 고기를 넣기도 한다. 가축을 사육하고 옥수수와 각종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라면 식구의 밥상을 차리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없을 것이다. 화덕은 물려받았고 땔감은 주변에서 구할 테니 식구 수에 맞게 그릇 몇 가지만 구하면 충분했다.

 

1990년 미국과 캐나다와 멕시코 사이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산 옥수수가 물밀듯 들어오면서 값싼 또르띨라가 조리하는 수고를 덜자 주민들은 화덕을 버리는데 그치지 않은 것이다. 싫든 좋든 화폐 경제권으로 편입된 것인데, 일단 편입되자 돈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자급자족할 때 요긴했던 정도의 돈으로 쪼들릴 수밖에 없는 농민은 돈벌이를 위한 농작물을 ‘상품’으로, 다시 말해 ‘농산품’으로 심어야했고 그것도 모자라면 더 많은 돈을 위해 미국의 공장이 몰려 있는 국경도시로 옮겨야 했다.

 

멕시코에 제한된 사정일 리 없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여러 차례 추진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도시의 공장에 농민을 보내야 했듯, 어느 나라나 산업사회 초기에는 농촌의 인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었다. 이른바 향도이촌(向都移村)이다. 정부는 노동자가 된 농민이 낮은 임금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농산품의 가격을 통제했고, 젊은이가 대거 빠져나간 농촌은 농촌대로 돈벌이를 위해 상품가치가 높은 농산품을 집중 재배하게 되었다. 그런 농업은 경쟁을 부추겼고 경쟁은 이웃과 지역을 넘어 국가 사이로 번졌다.

 

청송군과 영양군의 고추는 순창군과 경쟁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중국에서 값싸게 들어오는 고추와 생존권을 놓고 경쟁한다. 가공식품은 더하다. 영국이 수입하는 치즈는 영국에서 수출하는 치즈와 경쟁한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쇠고기는 미국산만이 아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들어오지만 캐나다의 쇠고기도 한우와 경쟁을 선언하고 있다. 다른 나라도 엇비슷한 사정이다. 농수축산물이 경쟁 상품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익은 생산자나 소비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대부분 기업과 관련 자본에 돌아간다(보베 외, 2002).

 

 

2. 다양성을 잃은 농업

 

추석이면 굳이 승용차로 꽉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고향에 다녀오는 이가 있다. 귀경길에 나설 때마다 부모는 트렁크에 하나 가득 수확한 한해 농작물을 가지가지 실어준다는 게 아닌가. 가격이 얼마 되지 않아도 자식들에 대한 부모님의 애틋한 정성을 몸으로 느낄 뿐 아니라 그 농작물로 밥 지어 먹을 때마다 고향 땅의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다고 그는 고마워한다. 돈벌이를 위해 한두 가지 농산품만 심는 농촌이라면 언감생심 생각할 수 없는 호강이 아닐 수 없다.

 

1) 씨앗 주권이 사라지다

 

멀지 않은 과거, 적어도 농부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갈무리해둔 씨앗은 절대 먹지 않았지만 더 많은 수확을 보장한다는 씨앗을 종묘상에서 일괄 구입하는 요즘, 사정이 달라졌다. 수확한 농산품을 전량 시장에 내놓아야 하고 그렇게 하여 벌어들인 돈을 쥐고 끼니때마다 슈퍼마켓 식품 코너를 기웃거려야 한다. 내 땅에서 내가 농사지은 ‘농작물’은 팔아야 할 ‘농산품’이므로 먹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 거다. 농촌은 시방 늙었다. 여러 농산물을 재배하기 벅찬 농촌에서 ‘환금작물’, 다시 말해 돈이 될 농산품만 한둘 심는 일은 이제 이상스럽지 않다. 이른바 ‘소품종 다량생산’의 ‘단작’이다.

 

한 농산품만 재배하면 생태계가 단순해져 환경변화에 대한 완충력이 줄어든다. 홍수와 가뭄 피해는 물론, 해충의 피해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식물이 몰려있으니 해충은 급속히 늘어나는데 해충을 구제하는 천적이 없으니 상품가치를 잃고 싶지 않은 농부는 살충제로 해결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단일 작물이 요구하는 영양분이 금방 부족해지니 농부는 비료를 뿌려야하는데 그 비료는 잡초까지 불러들인다. 살충제의 편의에 익숙해진 농부는 제초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환금작물의 씨앗은 자급자족할 때 뿌렸던 씨앗과 여러모로 다르다. 종묘상에게 구입해야 하는 씨앗은 다수확에 맞게 육종한 까닭에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좁다. 따라서 다수확을 기대하려면 씨앗이 요구하는 조건을 잘 맞춰야 한다. 맞지 않으면 수확이 보잘것없게 된다. 마을의 어른에게 물어 재배해도 소용없다. 종자회사에서 권고하는 매뉴얼을 참조해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매뉴얼대로 농사지어도 실패했을 경우 종묘상이나 종자회사에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런데 경제 논리로 보아, 수확량이 늘면 시장에서 가격은 떨어진다. 내 수확량이 늘어나는 대신 다른 농부는 형편없어야 큰돈을 차지할 텐데, 그러려면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 투자가 절실하게 된다는 거다.

 

1960년대 초 세상에 등장한 녹색혁명은 단작을 세계화했다. 다양한 씨앗을 여기저기 심던 농촌은 녹색혁명 품종의 씨앗에 맞게 농토를 획일적으로 다듬었고 씨앗이 요구하는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를 적기에 적량 살포해야하는 농부는 관개농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가격이 떨어지는 걸 막고 싶은 농부는 농산품을 구입하는 정부 또는 상인의 권고에 따라 재배 면적을 줄여야 했고 지역에 따라 농산품의 종류를제한하게 되었다. 이른바 ‘비교우위 농업’이 권장된 것이다.

 

비교우위 농업은 지역을 넘어 국가 단위로 넓어졌다. 고추와 마늘 주산지가 감자와 배추 주산지와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옥수수와 콩은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옥수수와 콩만이 아니다. 어느새 우리나라는 식량의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대신 멀쩡한 농토에 공장을 지어 외화를 벌어들인다. 우리만이 아니다. 국제미작연구소가 있을 정도로 쌀농사의 적지인 필리핀도 농토에 공장을 지었다. 그런데 벌어들이는 외화보다 국제 곡물의 수입 부담이 크자 식량 위기가 심화되었고 사회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벨로, 2010).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이론에 기대 자국의 식량기지를 없앤 혹독한 대가를 치룬 것인데, 국제 농산품 재고가 모자라는 시기가 온다면 우리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녹색혁명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화학농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땅이 황폐화된 것이다. 이제 농부는 감산을 피하기 위해 농약과 비료를 뿌린다. 그러자 몬산토와 같은 다국적기업이 감언이설로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특정 제초제에 내성을 가진 농산물이므로 그 제초제를 뿌려도 끄떡없을 것이니 제초제로 잡초를 모두 죽인 농토에서 우리가 개발한 콩과 유채와 같은 농산품을 심으라고 세계의 농부들을 유혹하고 나선 것이다. 살충 효과를 가진 유전자조작 면화나 옥수수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씨앗은 오래지 않아 부작용을 드러냈다. 씨앗에 포함된 조작된 유전자가 주위의 엉뚱한 식물로 옮겨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사료로 먹는 가축이나 심지어 사람에게 예측 못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김은진, 2009).

 

이제 다수확 품종을 심는 농촌은 씨앗을 갈무리할 필요가 없다. 아니 하면 안 된다. 계약 위반이므로 적발되면 적지 않은 벌금을 물어야 한다. 종자기업이 통폐합되면서 농부는 그 나라 농촌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계 기업의 씨앗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주권을 잃은 것이다.

 

2) 다국적기업 등장

 

비교우위 농업은 다국적기업의 전횡을 낳았다. 막대하게 수확한 농산품을 소비자에게 직접 팔 수 없는 농부는 결국 다국적기업에 넘기게 되고, 다국적기업은 농산품의 국제교역에 주도권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들이 농산품의 구입과 판매 시의 가격을 통제하는 만큼, 생산자나 소비자는 다국적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다국적기업들은 서로 경쟁한다. 통폐합해 규모를 키우는 다국적기업은 농산품 생산과 가공, 운송에 적극 개입할 뿐 아니라 관련 산업을 수직 계열화했다. 농산품과 사료, 축산과 육가공을 지배하는데 그치지 않고 국제 교역에 주도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다국적기업에 좌지우지되는 국제 곡물은 이제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상품이 소비자에게 인도되기도 전에 대금을 주고받는 선물거래는 소문에 민감하다. 수출국의 흉작 소식은 재고와 관계없이 가격을 치솟게 만드는 것이다.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오른 가격으로 식량을 구입해야 한다. 외화가 부족하다면 폭동을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데, 투자자의 이익에 우선해야 하는 다국적기업은 생산자와 소비자, 외화가 없어 굶주리는 지역의 사정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3) 공장식 축산업의 등장

 

다수확 품종을 집중 재배하면서 남아도는 농산품을 사료로 가공하면서 축산업이 거대하게 변했다. 방목하던 목장은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공장식 축산업이 차지한 것이다. 공장식 축산도 가축을 다수확 품종으로 획일화시켰다. 소, 돼지, 양, 닭의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좁아지고, 그 만큼 사육 환경이 획일화되었다. 이제 모든 가축은 예측 가능한 시간 내에 몸집이 어느 이상 늘어나야 한다. 그를 위해 유전자조작 옥수수와 콩을 가공한 사료를 먹이며 성장호르몬을 주입한다. 그래야 어려도 덩치가 커지는 가축을 빨리 도살해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좁은 사육장에 유전자가 단순한 가축을 밀집시켜 사육하는 공장식 축산에 질병이 창궐하면 순식간에 퍼질 수 있다. 따라서 항생제를 사전에 처방하는 농부는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상처를 입히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서로 쪼지 못하도록 병아리의 뾰족한 부리를 진작 뭉툭하게 자르거나 서로 물어뜯지 못하도록 돼지의 꼬리를 잘라내는 것이다. 그렇듯, 공장식 축산에서 가축의 생명은 종중되지 않고 오로지 상품으로 취급될 따름이다.

 

가축들은 습성에 맞지 않는 사료에 의존하면서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지만 그 전에 도살할 테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인수공통 질병이 인간에게 만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류독감을 비롯해 구제역과 수족구병 만이 아니다. 영국에서 시작돼 세계를 긴장시키는 광우병도 공장식 축산이 원인을 제공했다.

 

4) 문화를 잃은 식량

 

요즘 돼지고기는 세계가 똑같다. 미국산 삼겹살이 우리 삼겹살과 맛이 같다. 품종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계란도 우유도 마찬가지고 쇠고기와 닭고기도 그렇다. 농산품만이 아니다. 그 가공식품도 세계가 똑같다. 식재료와 식단 뿐 아니라 조리방법까지 세계가 공통인 까닭에 다국적기업이 공급하는 패스트푸드는 물론이다. 식성의 세계화라기보다 음식에 깃든 문화마저 상품으로 획일화된 것이다.

 

슈퍼마켓에 전시된 수많은 가공식품의 상표는 제각각이지만 재료는 엇비슷하다. 쇠고기는 옥수수의 가공식품이고 계란과 소시지도 마찬가지라고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마이클 폴란(2008)은 주장한다. 그 뿐이 아니다. 설탕을 대신하는 당분으로 옥수수가 가공돼 음료수에 들어간 이후, 비만 인구가 세계적으로 급증했다. 옥수수 덕분에 값싼 육류가 흔해지고 칼로리가 높은 음료수를 거푸 마시면서 여유가 없는 계층의 몸이 불어난 것이다. 이제 서구사회에서 비만은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 식량에 칼로리는 지나치게 높지만 필수 영양소가 부족하게 되면서 성인병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소아비만과 소아당뇨병도 전에 없이 늘었다.

 

 

3. 황폐화된 식량 환경

 

최근 미국과 유럽은 꿀벌이 사라진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나라의 사정도 그리 밝지 않다. 꿀벌이 사라지면 사람은 많은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생존이 어려워질 수 있다. 꿀벌의 집단이 붕괴하는 현상은 사람의 욕심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많은 꿀을 빨리 모으는 품종을 양봉농가에 집중 보급한 결과,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좁아진 꿀벌은 면역력이 떨어지고 환경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벌통 관리에 애를 먹는 양봉농가가 애벌레에 알을 낳는 응애의 공격을 차단하고자 살충제를 뿌렸건만 살충제가 오히려 꿀벌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피해는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다. 가루수정을 위해 꿀벌을 필요로 하는 아몬드 농업이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대하게 밀집되면서 꿀벌 집단 붕괴 현상이 커진 것으로 제이콥슨(2009)은 주장한다. 많은 아몬드를 빨리 여는 나무를 넓은 면적에 획일적으로 심자 꽃이 피는 2주일 동안 미국은 물론 유럽의 꿀벌까지 총동원해야 했는데, 그때 질병을 공유한 벌들이 가루수정을 마치고 다시 퍼져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수입하는 세계 아몬드 수요의 80퍼센트를 캘리포니아에서 떠맡고 있다.

 

1) 전용되는 식량기지

 

우리 정부는 농토 확보 명분으로 매립한 새만금 일원의 갯벌을 다시 도시로 개발하려고 한다. 개발로 사라지는 농토를 대신하겠다던 그 갯벌은 수많은 어패류의 산란장일 뿐 아니라 자연스런 식량보고였지만 대부분 사라졌다. 칼로리와 영양분은 물론이고 가격으로 볼 때 육지의 어떤 농토보다 경제적 가치가 높지만 한시적 개발 이익을 위해 선조가 물려준 갯벌을 매립하고 만 것이다. 막대한 플랑크톤의 탄소동화작용으로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해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상승된 해수면을 타고 넘어오는 파고를 완충하는 조간대를 우리는 당대에 잃었다. 후손의 생명은 그만큼 위협받을 것이다.

 

바다와 같던 중국의 황하가 갈수기에 마르는 것은 농토를 도시와 공업단지로 전용하면서 강물을 돌렸기 때문이다. 어디 황하 만이랴. 식량기지를 개발하는 곳은 우리나라와 중국뿐이 아니다. 이제 화학농업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세계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앞으로 늘어난 세계 인구를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걱정스러운 상황에서 외채에 시달리는 국가는 기존 농토에 헐값으로 수출되는 화훼작물이나 기호식품을 재배한다.

 

2) 석유위기 앞의 농업

 

지금은 석유 농업이다. 화학비료는 물론이고 살충제와 제초제도 석유를 가공해 만든다. 기계화된 현대농업은 석유 없이 파종, 경작, 수확, 건조, 운반이 불가능하다. 1000칼로리의 옥수수를 수확하려면 그 10배의 석유를 쏟아야 하고, 그렇게 재배한 옥수수를 10킬로그램 먹여야 쇠고기 1킬로그램을 겨우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고기로 배불리면 그 10배의 옥수수를 소비하는 셈이고 다시 그 10배의 석유를 낭비하는 꼴이다.

 

최근 석유위기를 극복하려는 수단의 일환으로 바이오연료를 공급하려는 정책이 지구촌의 일각에서 섣불리 추진되고 있다. 옥수수나 사탕수수로 디젤과 에탄올을 정제하겠다는 건데, 그를 위해 소비되는 석유는 둘째 치고, 자동차 한 대에 주유하는데 들어가는 에탄올은 한 사람이 1년 소비할 곡물을 가공해야 한다고 환경운동가는 주장한다(마슬린, 2010: 141). 지구온난화를 대비해 도시에 ‘농장건물’을 짓겠다는 사람도 있다. 에너지 효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LED와 태양빛을 실내로 끌어들여 농산품을 수경재배하겠다는 계획이 그것이다(경향신문, 2009.7.1). 뉴욕 맨해튼에서 경제성 있다는 농장빌딩을 우리나라에 추진하고 있는데 과연 타당할까. 제안자는 30층 높이의 건물을 짓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도 물론이고 수경재배를 위해 들어가는 화학물질도 에너지 투입 없이 공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땅에 뿌리 내리지 않은 농산품이 먹는 이에게 장차 안전할지 함부로 짐작할 수 없다.

 

3) 식품 첨가물의 확산

 

다국적기업의 거대한 화물선에 실려 오대양과 육대주를 장시간 누벼야하는 농산품은 중간에 상하면 상품가치를 잃는다. 따라서 수확 후 농약 살포는 필수적이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공장식으로 밀집시켜 사육하는 가축처럼 바다나 호수에서 양식하는 어류도 항생제와 호르몬을 비롯한 많은 화학약품을 투여한다. 또한 한 번 가공하면 오래 유통시켜야 하는 가공식품은 맛과 색이 변하지 않은 상태로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많은 화학약품을 첨가하고 세계 곳곳에 지점을 확보한 패스트푸드 역시 동일한 맛과 향을 유지하려고 합성 첨가물을 넣는다.

 

넨시 드빌(2008)은 “슈퍼마켓이 우리를 죽인다!”고 경고하고 안병준(2005)은 “아이에게 과자 대신 차라리 담배를 주는 게 낫다.”고 어처구니없어 한다. 아토피는 오염된 대기만 원인이 아니다. 우리 몸의 내분비계를 교란하는 식품 속의 첨가물과 무관하지 않다. 한 사람이 평생 320킬로그램을 섭취한다고 야마모토 히로토(2006)가 주장하는 화학물질이 그것이다.

 

4) 음식 쓰레기, 해양오염, 그리고 남획

 

늘어나는 음식 쓰레기는 소각되거나 매립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바다에 버려 해양오염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데, 어장의 물고기들이 허겁지겁 버리는 그 쓰레기를 먹기도 한다. 결국 우리 식탁에 오를 물고기들이다. 미국은 음식 쓰레기가 전체 쓰레기의 4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미국이나 우리나 단지 유통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건드리지 않은 멀쩡한 식품이 쓰레기로 둔갑하기도 한다. 버리는 식품으로 굶주리는 세계의 인구를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양이다.

 

남획으로 인한 해양어류의 고갈은 양식업의 규모를 키우고 있으나 그로 인한 해안의 파괴는 쓰나미의 피해를 키울 뿐 아니라 어족자원 보전에도 역행한다. 많은 양식장이 어패류의 산란장을 파괴하고 들어서는데, 항생제에 찌들거나 세균에 감염된 오폐수가 걷잡을 수 없게 배출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와 캐나다 일원의 생명공학 연구소에서 비정상적으로 덩치를 키운 유전자조작 어류의 양식을 연구하고 있다. 만일 그런 어류가 양식장을 빠져나가 조작된 유전자를 퍼뜨릴 경우 어떤 생태적 피해가 확산될까. 사전에 그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을 뿐더러 대책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5) 기후변화와 식량 위기

 

지난 100년 동안 섭씨 0.7도 정도 상승한 지구촌의 기온은 태풍과 허리케인의 강도와 횟수를 늘렸고 경작지를 메마르게 했을 뿐 아니라 사막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세계 평균보다 정도가 심해 1.4도 높아진 우리나라의 해역은 이미 아열대화 되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보라문어와 같은 난대성 어류가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명태와 대구와 같은 한대성 어류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해초가 우거졌던 바위에 백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늘어나는데, 육지도 마찬가지다. 감나무의 남방한계선이 북상하면서 사과의 재배지가 높은 위도로 점차 옮겨가고 있다.

 

온난화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열대과일을 재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농작물의 경작은 기온만이 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온난화되면서 토양미생물의 종류와 분포 상황이 바뀌고 강우의 양과 시기가 변하면 당장 기존의 농작물부터 잃게 될 테지만 그렇다고 아열대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조건이 쉽게 조성될 리 없다. 열대과일은커녕 식량위기가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사막화도 걱정이다. 많은 예산과 인력으로 나무를 심고 초지를 조성하는 중국도 내몽고 일원에 확산되는 사막화를 진정시키지 못하는데 몽골의 사정은 더욱 열악한 실정이다. 앞으로 사막화되는 초원은 가축 방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해양 곳곳의 어장 역시 전에 없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해수 이동이 변하기 때문인데 그 뿐이 아니다. 다수확 품종 위주의 지나친 품종개량으로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줄어든 농산품이 온난화된 기후에 견딜 수 없다면 내일의 식량 사정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4. 다시 지역으로

 

기아 인구가 많은 아프리카라고 해서 기름진 경작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은 외채가 국가를 짓누르고 해외 기업이 경작지를 독차지하는 탓에 굶주린다. 부정한 정권에 제공된 외채였고 그 외채에 대한 이자를 어느 정도 챙겼다면 이제 탕감할 때가 되었다고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 출신인 지글러(2008)는 주장한다. 굶주리는 지역에 그때그때 식량을 공급하는 자선은 한시적 대책에 불과하다. 지글러의 주장처럼 떳떳하지 못한 외채였다면 탕감하여 수출용 농산품 재배에 매달리는 일이 줄어들도록 배려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땅에서 평화롭게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안을 모색하는 편이 근본적으로 바람직할 것이다. 지역의 식량을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식량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어야 평화가 유지된다. 그를 위해 식량은 안보가 아닌 주권 차원으로 확보해야 한다. 이윤을 앞세우는 기업이라면 모를까, 제 나라의 사정이 어두워져도 식량을 수출하는 국가는 드물다. 다국적기업이라면 국제시장에 식량이 부족할 때 가격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안정된 식량을 확보하려면 각국 정부는 식량기지를 해외에 마련하기보다 국내에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토를 확보하는 게 안정적이다. 바로 ‘식량주권’이다.

 

식량이 무기 또는 투기화 된 마당에 축적한 외화로 식량을 수입하려는 자세는 석유위기가 멀지 않은 시대의 대안일 수 없다. 분배의 불균형이 있는 세계 식량은 위기의 경계에 있을지언정 뿐 모자라지 않는다. 위기는 위험과 기화를 동시에 제공한다. 우리는 위기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지구온난화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이때, 예측할 수 없는 환경변화에 최대한 견딜 수 있도록 농산물의 유전적 다양성의 폭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지역은 제철 제 고장 농산물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다품종 소량 생산의 가능성을 타진해야 하고 그를 전제로 농토를 확보해야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자면 농사에 종사하는 인구가 획기적으로 늘어나야 할 텐데 당장 어렵다면 지역의 자치단체는 유럽과 일본처럼 도시 근교에 텃밭을 조성해 분양하는 방법을 선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안전한 식량은 자신이 농사지은 농작물이나 사육한 가축이지만 당장 그럴 여건이 안 된다면 신뢰할 수 있는 이가 생산했거나 키운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신뢰할 수 있는 생산자를 알지 못한다면 그런 농산물을 판매하는 상점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서구의 유기농 마켓이나 우리나라의 생활협동조합이 그런 상점의 예가 된다. 생활협동조합의 소비자 조합원이 되어 생산자 조합원이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업으로 힘겹게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내놓은 제철 제 고장의 농산물과 축산물을 흔쾌히 구입하며 가족과 밥을 지어 먹는다면 땅도 살리고 농민도 살리고 나와 가족의 내일도 살릴 수 있다. 가격이 비싼 만큼 넘치지 않게 구입해 다 먹는다면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고 비만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진정한 유기농산물의 자격은 제철 제 고장에서 생산해야 얻을 수 있다. 운송 과정에서 많은 석유를 소비한 수입 농산물은 유기농산물의 자격을 잃는다. 유기농 커피와 같은 기호식품이나 운송 과정에서 농약을 뿌리지 않은 유기농 열대과일은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다. 다만 아직 피할 수 없다면 생산자의 권리를 수용한 ‘공정무역’ 농산물을 구입하는 편이 바람직하리라. 폴란(2009)은 ‘음식’을 먹으라고 권한다. 상품이 아니라 음식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덧붙여 음식 쓰레기를 되도록 줄이고 몸이 비대해지지 않도록 과식을 삼가하고 주로 채식을 하자라고 제안한다. 아무래도 가축을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과정에서 식량이 낭비되고 물과 에너지가 과소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인심과 환경이 지금보다 좋았던 시절, 우리 조상의 식성이다. 우리나 세계나 자연스런 식단에 언제나 답이 있다. (방송대 교재, <세계의 정치와 경제> 중, 2010년 12월 발행 예정)

 

 

참고문헌

 

김은진. 2009. <유전자조작 밥상을 치워라>. 도솔.

안병준. 2005.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국일미디어.

Bello, Walden. 김기근 옮김. 2010.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더숲.

Bové, José, François Dufour. 2002. 홍세화 옮김.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울력.

Deville, Nancy. 이강훈 옮김. 2008. <슈퍼마켓이 우리를 죽인다>. 기린원.

Diamond, Jared. 김진준 옮김. 2001. <총ㆍ균ㆍ쇠>. 문학사상.

Hiroto, Yamamoto. 손성애 옮김. 2006. <오염된 몸, 320킬로그램의 공포>. 여성신문사.

Jacobsen, Rowan. 노태복 옮김. 2009. <꿀벌 없는 세상 결실 없는 가을>. 에코리브르.

Maslin, Mark. 조홍섭 옮김, 2010. <기후변화의 정치경제학>. 한겨레출판.

Pollan, Michael. 조윤정 옮김. 2008. <잡식동물의 딜레마>. 다른세상.

Pollan, Michael. 조윤정 옮김. 2009. <행복한 밥상>. 다른세상.

Ziegler, Jean. 양영란 옮김. 2008. <탐욕의 시대>. 갈라파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