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6. 30. 15:16

 

예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식물은 뿌리 내린 자리를 평생 고수하고 동물은 시도 없이 움직인다. 그래서 식물 분포를 연구하는 이는 되도록 철저하게 주위를 살피며 조사해야 하고 동물은 운에 맡겨야 할 경우가 많다. 나타날 만한 곳을 뒤진다고 꼭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닌 까닭이다. 눈으로 본 식물을 그 자리에 없었다고 주장하기 어렵지만 동물은 없다고 딱 잡아떼도 양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발견되었다고 무성의를 힐난하거나 실력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

 

먹이나 짝을 찾아 오랜 세월 동안 먼 길을 규칙적으로 이동해온 동물은 천재지변이 개입하지 않는 한 찾아간 장소가 낯설어 적응하지 못하는 일은 드물다. 이동 과정에서 고난과 위험이 뒤따르지만 그건 감내할 범위 안에 있다. 툰드라 지역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순록 떼도 그렇지만 그 곁에서 어미와 떨어졌거나 늙은 순록을 속아내는 늑대도 마찬가지다. 순록이 뒤를 쫓는 늑대보다 더욱 절박할 것이라는 생각은 다큐멘터리에 길든 사람의 편견이다. 늑대도 막 태어난 새끼들을 먹여야 한다.

 

순록이나 늑대,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멧돼지도 사생결단으로 움직이곤 하지만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달리더라도 서로 부딪혔기에 목숨을 잃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신체가 견딜 능력 이상으로 달음박질치지 않기 때문이지만, 자신의 몸에 치명상을 일으킬 정도로 부딪힐 일 따위를 만들지 않는다. 천적을 쫓아내려 돌진하는 멧돼지도 위협 이상의 충돌은 자제한다. 그건 자동차를 타기 이전의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략 5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난 우리의 직접 조상은 순전히 자신의 발로 만 년 전에 대륙 구석구석을, 1500년 전에 태평양의 거의 모든 섬까지 확산되었다.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었을 텐데, 가죽 옷으로 체온을 유지하며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다고 믿는 지역으로 해마다 700미터의 속도로 펴져나갔을 거로 인류학자들은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이 전보다 나을 리 없어도 멀리 떨어지지 않아 쉽게 적응했을 테지만 거리가 멀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모습은 전에 비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실뜨기’는 지구촌이 거의 같다고 한다. 인류가 이동할 때 더불어 움직였기 때문인데, 다른 놀이가 많아 방법을 거의 잊은 우리와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복잡한 실뜨기 기술을 구사한다고 한다. 한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바퀴가 없었다. 바퀴벌레의 바퀴가 아니다. 마찰을 줄여 움직이는 힘을 덜어주는 바퀴를 말한다. 바퀴와 마소, 그리고 쇠를 몰랐던 잉카의 후예들은 높은 문화수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68명의 스페인 오합지졸이 휘두르는 칼날에 무려 7천 명이 스러졌다. 그것도 무사들이. 되돌릴 수 없는 1532년의 역사다. 황제의 가마를 잡은 잉카 무사를 큰 칼로 베면 가마가 휘청거릴 터. 그러면 우르르 다시 가마를 잡았던 잉카인들을 밤이 세도록 죽이고 또 죽였다는 거다.

 

8만 대군을 거느리던 잉카가 멸망한 원인이 물론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바퀴의 존재 여부와 무관했을지 모른다. 우리 격언에 “가마 탄 이는 가마를 든 이의 고통을 모른다.”고 했지만, 잉카 황제가 탄 화려한 가마도 온전히 사람의 힘에 의존했다. 자전거는 어떤가. 걷거나 뛰는 것과 달리 바퀴는 사람이 발에 힘을 주지 않아도 움직일 때가 많다. 내리막길은 물론이고 평지나 경사가 낮은 오르막길에도 잠깐은 그렇다. 과학자들은 점잖게 관성이라 설명할 텐데, 잉카는 일찍이 그 관성을 몰랐다.

 

사람은 남의 힘을 빌리려고 제 힘을 쓰는 유일한 동물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진 자에게 독점되는 ‘탈것’을 사용한다는 거다. 가마가 그렇다. 칭얼대는 아기나 환자나 애인을 업는 사람의 등은 예외일 테고, 말이나 낙타의 등, 달구지나 마차, 개나 순록이 끄는 썰매도 그렇다. 계단이 부실한 가파른 언덕을 등에 업은 의자로 태워주는 인부가 중국 장강에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착취에 동참하기 싫어 인력거를 거부했다던데, 도저히 그런 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말 잔등은 괜찮은가.

 

종로에는 피맛골이 있다. 종로 큰길 바로 뒷골목으로, 값 싸고 맛있는 밥집이 즐비해 돈 걱정 않고 친구와 오래 마주할 수 있는 서울 시내에서 몇 안 되는 곳인데 머지않아 역사의 뒤로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거들먹거리는 양반네의 말을 피하려 피맛골을 기웃거렸던 우리네와 달리, 몽골인에게 말은 단순한 탈것이 아닌 모양이다. 친구나 애인 이상이라고 현지 가이드는 말한다. 자기 등에 올라타는 사람을 말이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사람이 그리 합리화하는 거겠지만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게르에 부부만 남기고 온 식구가 초원으로 나가는 봄은 말의 짝짓기 계절이고 사람과 말의 임신 기간이 비슷하다. 따라서 아기가 태어날 때 망아지도 태어날 게고, 그 망아지와 아기의 관계는 그때부터 맺어진다는 게 아닌가.

 

걸음마보다 말을 먼저 타는 몽골인이지만 인구 120만이 북적이는 수도 울란바토르까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타듯 자동차를 탄다. 몽골인에게 걷는 행위는 참을 수 없이 어색한 모양인데, 소득에 비해 비싼 자동차를 구입해서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하며 너나없이 운전하기에 울란바토르는 언제나 막힌다. 대부분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건너간 중고 자동차들이라 운전대 위치가 제각각이고 외양이 조금씩 우그러들거나 찌그러져 있다. 그래도 잘 나가는 자동차들. 달리는 곳이 곧 도로인 초원에 들어서면 질주 본능을 자제하지 못한다. 모르긴 해도 몽골 사람들의 자동차 정비 솜씨는 세계 일류가 아닐까 싶다. 부품을 고치기보다 통째로 바꾸는 우리보다 뛰어날 게 틀림없다.

 

50대는 한번 이상 보았을 할리우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주인공이 자전거를 탄다. 여물이 필요 없고 배설물로 괴롭히지 않는 말보다 편리하다는 걸 내세우는 장사꾼이 등장한 뒤에 나오는 장면이다. 말의 배설물은 도시를 몹시 더럽혔다. 밟지 않으려 하이힐이 등장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런 문제를 산뜻하게 해결한 게 자전거일 텐데, 사람들이 자전거에 완전히 만족했을 리 없다. 자전거는 적지 않은 내 힘을 요구하지 않던가. 자동차가 자전거의 약점을 보완하자 중국 대도시의 거대한 자전거 물결을 크게 위축시켰듯, 말을 버린 사람은 자전거도 내팽개쳤을 테지만 자동차는 높은 진입장벽을 가졌다. 안장은 말보다 낮아도 타는 자의 지위를 높인다고 착각, 더욱 으스댈 수 있었다.

 

자동차는 타는 이의 힘을 그리 요구하지 않는다. 자전거는 물론이고 마소를 탈 때보다 힘이 덜 든다. 손과 발, 그리고 눈동자를 굴릴 정도의 힘이면 네 바퀴 중 최소한 세 바퀴가 동시에 닿는 바닥 위를 달릴 수 있다. 두개의 바퀴만 닿으면 움직이는 오토바이도 동승자에게 힘을 요구하지만 자동차의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앉은 이는 신체는 물론이고 눈의 힘을 빼도 무방하다. 버스와 기차, 선박과 비행기가 그렇다. 하지만 동승자의 경우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일찍이 간파했다. 자동차는 스스로 이동할 권리를 차단한다고.

 

천지사방이 사통오달의 도로로 뚫린 요즘, 위화감을 유발시키는 가격이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모델이라면 모를까 자동차 자체는 계층을 그리 구별하지 못한다. 진입장벽도 매우 낮아졌다. 하지만 그건 요즘의 사정일 뿐이고, 후손의 처지에서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자동차를 인간이 개발한 수많은 탈것 중에 최악이라고 혹평한다. 마소의 배설물을 몰아냈지만 배설물보다 훨씬 위험한 배기가스로 눈이 아니라 폐를 위협하고 피맛골로 가면 무사하던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는 주장인데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의 모델이 새로울수록, 가격이 높을수록, 실내에 대한 안전성능이 좋을수록, 운전자의 태도는 오만불손해지니 자동차 밖의 약자는 더욱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자동차에 의존하는 생활방식이 깊어질수록 후손에게 닥칠 환경 뿐 아니라 에너지 위기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타이어와 자동차회사가 정유회사와 손잡고 미국의 철도망을 사들인 후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이 지배하는 국가들은 자동차가 지배하는 체제로 본격적으로 변화되었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생산라인에 도입한 포드 자동차 회사가 대량생산해 가격을 낮춘 T모델을 월급이 오른 직원들에게 판매하고 나서면서 자동차는 확장 일변도의 도로를 메워나가게 되었다. 도시는 자동차 위주로 설계되고 오래 전부터 도시를 잇던 철도는 광폭 아스팔트 도로로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선정적인 모습의 여성을 등장시키던 관행은 모터쇼와 자동차 경주대회에서 여전히 트레이드마크인데, 이제 자동차는 성인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젊은 여성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자동차가 등장한 마당이 아닌가.

 

이제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선 자동차는 아예 주택의 역할까지 일부 떠맡기도 한다. 캠핑카도 있지만 좌석에 앉아 밥을 주문해 먹는 드라이브 인 식당도 있다. 집에 에어컨이 없어도 자동차에 있으니 도로가 꽉꽉 막혀도 멀리 떨어진 피서지를 찾는 엄두를 낸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쇼핑에 몰두하다 보니 대형 양판점은 최근 자체 주유소를 운영하고 나섰다. 가끔 찾아와 트렁크 가득 물건을 싣고 가는 고객에게 기름을 원가로 제공하겠다는 판촉이다. 기름 넣을 때면 으레 찾아오는 고객들이 그때마다 트렁크를 가득 채운다면 동네 주유소는 물론이고, 구멍가게도 모조리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생겼다.

 

자동차를 포기할 수 없는 사회구조는 석유위기 시대 이후에도 자동차를 버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신기술을 연구한다. 연비가 높은 자동차를 넘어 석유를 대신할 에탄올이나 바이오디젤이 연구되고, 전기나 수소를 사용하는 자동차가 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로 굴지의 자동차 회사마다 맹렬하게 개발되고 있다. 이미 전기와 석유를 동시에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정부 보조금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환경오염과 석유위기가 심화되더라도 그 차 운전자는 일말의 양심의 부담감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알아 두어야 할 건, 사탕수수에서 얻는 에탄올이나 옥수수로 가공하는 바이오디젤을 얻기 위해 소비해야 하는 에너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고, 전기와 수소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가 실로 막대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하나 더. 자동차 바퀴에 근육의 권리를 내맡긴 이후 몸이 돌이키기 어렵게 엉망이 되었다는 고민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사고로 아빠를 잃은 일본의 초등학교 3학년이 쓴 시는 심금을 울린다. 학교 갈 때마다 앵무새 같은 엄마의 “차 조심해라!”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많은 차가 필요한 건가 묻는 아이는 “차가 적어지는 대신 나라가 가난해지고 우리 집이 가난해져도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편이 훨씬 좋지요.” 한 뒤, “없어져버려라 자동차 따위는!”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 시를 소개하는 스기타 사토시는 자동차를 문명의 파괴자라고 규정하는데, 강고한 자동차 사회를 선도하는 미국에서 자동차 중독 문화에 대한 반란을 모색하는 케이티 앨버드는 “당신의 차와 이혼하라!”면서 그 실천적인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혼이 당장 어려우면 별거부터 하라고 행동을 부추긴다.

 

한때 자동차가 없으면 이어지는 약속들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지만 아니다. 불필요한 약속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더욱 정확하게 지키게 될 뿐 아니라 독서량이 훨씬 늘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걷는 일이 많아지면서 계단을 내려갈 때 뜨끔하던 무릎이 말짱해졌다. 걸으면서 정지선에 시근덕거리는 트럭을 제외한다면 도시의 소음은 아스팔트를 스치는 바퀴가 원흉이라는 걸 알게 되고, 자전거도로를 침범하는 오토바이가 미워지게 되었으며 동네의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어디 그뿐인가. 길가 화단의 꽃과 가로수 사이를 누비는 직박구리와 철설모가 가끔 눈에 띄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무거운 짐을 옮길 일이 있거나 대중교통으로 왕복하기 어려운 곳에 가야할 때 타려고 주차장에 박아 두어 쓸데없는 보험료가 나가지만, 이혼해도 생활에 큰 불편은 없을 뿐 아니라 가정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식구와 긴밀한 논의가 더 필요할 따름이다.

 

절판되었어도 재판을 희망하는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소설 《에코토피아》는 샌프란시스코의 20차선이 2차선으로 좁혀진 자리에 숲이 가득한 풍경을 신선하게 묘사했다. ‘지구의 날’에 차 없는 세종로에 몰려나온 시민들의 얼굴은 빛이 났다. 뒤에 옆에 차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은 비로소 이웃을 친근하게 바라보게 이끈다. 유럽의 도심에서 흔한 ‘차 없는 거리’의 풍경이 대개 그렇다. 자신의 근육으로 타고 온 자전거, 마음까지 편안하게 하는 대중교통, 아니면 동네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서 온 시민들로 북적이는 그 거리는 악사와 화가들로 활기차고, 손님이 밀려드는 상점은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동차는 우리를 편리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구속시켰던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가 아예 없는 사회를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마포의 성미산공동체처럼 마을에서 공유하는 자동차는 인정하지만 미국의 아미쉬공동체처럼 마소로 농사를 짓고 마차로 이동하는 사회는 불가능할 것으로 치부한다. 산업사회를 떠날 수 없는 처지에서 자신이 없기 때문일지 모르는데, 간디가 당부한 마을에서 자급자족한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이 생존의 기로에 서자 한솥밥을 먹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하는 이때,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힐난하는 이가 없지 않겠지만, 분명히 되새겨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자동차 사회구조는 후손의 처지에서 볼 때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제 자동차 바퀴에 빼앗긴 근육의 주권을 되찾을 궁리에 나서야 한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긴장하며 앞만 바라보게 만드는 자동차를 버리면 비로소 피부를 맞댈 가족이 더욱 살가워지고 이웃이 따뜻해질 게 틀림없을 거고 그만큼 후손의 삶에 희망이 깃들 테니까. (실천문학, 2009년 가을호)

"지구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서 빌린 것" 이란 말을 되새기며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