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6. 5. 16. 15:28
 

장성익 지음(2006), 『대한민국을 멈춰라』, 환경과생명.


“역사를 공정하게 이해하기 위한다면 무엇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하는 미국의 민중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역사는 편견”이라고 단정한다.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처럼 없는 사실을 날조하는 역사학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날조한 역사는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검토하는 과정에서 들통이 날 터이니 날조에 가담한 학자는 학계를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온정주의로 응분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사태는 반복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 학문 자체를 비웃을 테니까.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하면 날조, 있는 사실을 모른 채 하면 거짓이 된다. 하지만 사실에 대한 해석은 학자에 따라 견해를 얼마든지 달리할 수 있다. 사실에 대한 경중도 학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다. 하워드 진은 학계의 주류 해석도 물론이지만 자신이 갖는 주관적 견해도 편견이라 했다. 인간이 기록하는 역사는 솔직히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만 편견인가. 어떤 세상사를 이야기하든, 주류에서 떨어진 자의 주장일수록 편견이라는 편견에 휩싸일 때가 많다. 과학기술도 그렇다. 있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분야로 믿는 역사처럼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이라고 순진한 사람들은 믿고 있지만, 아니다. 이윤을 도모하는 자본과 패권을 노리는 권력에 종속된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거대화되었을지언정 중립과 거리가 멀다. 자본이나 권력의 요구에 충성할수록 선용을 가장한 악용을 경계해야 한다. 거대한 과학기술에서 파편화된 연구자들은 연구비의 출처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이 넘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하여 종교도 편견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전문가일수록, 경합이 심할수록 토론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갈등이나 반목을 연출하고, 나아가 주도권을 노린 패거리의 협잡에 의해 모반과 소외가 발생하기도 한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그랬다. 정권에 비호를 받는 주류는 자신과 달리하는 의견을 가진 이를 거칠게 탄압했다.


정치적 독재가 어느 정도 사라진 지금, 신체에 가하는 물리적 탄압은 드물어졌지만 사회는 주도권을 쥔 패거리의 독재가 여전히 횡행한다. 황우석 전 교수의 가증스런 언어가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할 때에도 그랬지만,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애국!’이라는 독재가 우리 사회를 광적으로 지배한다. 누군가 터뜨리는 응원구호에 동참하지 않는 이는 매국노라 노려보는 주위의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부분의 후보들이 쉰 목소리로 외치는 지역개발과 발전 신화에 문제를 제기해도 그랬다. 돈과 시간과 힘으로 신화를 창조할 능력이 우수한 패거리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편견으로 규정하고, 경우에 따라서 ‘지역이기주의’라는 저주의 못을 박는다.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자를 지역이기주의자로 몰아붙인 패거리는 광적인 중․저준위 핵폐기장 유치경쟁을 성공적으로 유치했다. 지역의 숱한 골프장, 핵발전소와 쓰레기소각장, 새만금간척사업, 평택 미군기지가 그랬다. 천성산 고속전철 구간의 장대터널과 경인운하도, 전자주민등록증도 그럴싸한 논리를 집요하게 유포하는 패거리에 의해 추진될 것이다.


녹색의 이름으로, 녹색의 세상으로, 감당할 수 없이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멈추라고 환경잡지의 편집인이 외친다. 생태계는 녹색이다. 마치 환경을 위하는 양 위장하며 막무가내로 추진하는 개발행위를 당장 멈추지 않으면 조상이 전해준 자연과 생명을 후손에게 온전히 넘겨줄 수 없다고,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개발신화에 최면 걸린 사람들을 절박하게 흔든다. 「환경과 생명」의 편집주간인 그는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과 진보적 변혁을 지혜롭게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매체”를 꿈꾸는 장성익이다. “주어지는 게 아니라 조직해야 할 희망”을 감히 선동하거나 강요하는 세상에서 내일을 낙관할 수 없을 터, “돈과 기계의 노예가 되어 물질과 과학기술을 우상 숭배하느라 얼도 넋도 다 빠진” 오늘, 편견은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는 맑은 눈’이다. 그래서 그는 “편견을 계속 아끼고 지키”겠다고 선언한다. “파멸적인 질주를 멈춰 세우고 사람과 자연과 사회가 아름다운 생명평화의 합창 속에서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내일”을 모색하면서, 비록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상문화가 진지한 논의를 방해하는 세상이지만, 그는 『대한민국을 멈취라』를 써야 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것은 “모든 자연과 사람과 생명을 끝도 없이 파괴와 멸절과 타락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죽음의 향연’, 다시 말해 ‘개발과 성장의 광풍’이 아니다. “사람을 포함한 온갖 생명들은 유기적이고 순환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므로 이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마치는 일이 시급하다. 가냘픈 영혼을 불태우는 지율스님이 죽음을 무릅쓰며 막아내려는 것은 경부고속전철로 상징하는 자본의 이윤과 경쟁, 효율과 속도다. “폭압적인 군부 파시즘과 개발 독재의 깃발 아래 초고속으로 진행돼온 맹목적인 산업화․근대화와 초고속 양적 경제성장의 음습한 그늘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들의 총화이자 그 필연적인 귀결”인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국익’, ‘세계 최초(고)’, ‘차세대 성장 동력’ 따위의 ‘기만적 판타지’가 만드는 ‘저열한 욕망’에 빠진 ‘환상의 굴레’에 포박된다면 제2, 제3의 황우석 사태는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요가 아니라 욕망을 만족시키지 위해 교묘한 논리로 추진하는 ‘신개발주의’는 어떤가. ‘생태․역사․문화’의 복원으로 치장한 청계천, 물류비 절약을 위해 한강과 낙동강을 잇겠다는 경부운하, 그리고 과학기술자와 정부와 자본과 언론이 한 통속이 되어 저지른 황우석 사태는 저자가 보는 ‘슬픈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과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결과 지상주의’요 소수 비주류의 지혜가 차단되는 광기에 가까운 ‘집단 패거리주의’이며 과도하게 왜곡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이고 돈과 이윤의 논리로 위태롭게 직진하는 ‘경제 지상주의’라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전도돼 그 경계가 모호해 조작된 사이비 논리기 판을 치는 이때, 진실과 양심의 북소리를 드높이 울리면서 대대적인 역공을 가하자고 저자는 목이 쉰다.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 고길섶은 국가폭력과 자본의 억압 속에 주민투표를 성사시킨 부안을 1971년 3월부터 70여 일 계속된 민중의 해방구, ‘파리 코뮌’에 비유했다. 수천 명의 전투경찰이 저벅저벅 군화소리를 내던 부안은 반핵의 물결이 넘실댔다. 당시 부안을 찾은 저자는 농사고 뭐고 다 때려치운 행님과 동상, 돌멩이를 채운 페트병을 들고 나선 할머니, 수업 거부를 스스로 결정한 학생들이 삶의 주체로, 지역의 주인으로 일어서 “죽음과 파괴와 분열의 독약을 뿌리는 자들”에 대항하는 찡한 모습을 본다. 그리고 군민에게 깊은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겨준 중앙과 지방정부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동시에 희망을 느낀다. 내 지역의 핵폐기장이 싫으면 남의 지역도 안 된다고 성숙한 그들이 아니던가.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무례가 압축적으로 응결”된 새만금간척사업은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저 거대한 위선과 기만과 억압과 허위의식의 결정판”으로 해석하는 저자는 간척의 시대는 끝났다며 새만금에서 자연과 경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우주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후손의 내일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다른 지역의 핵폐기장도 걱정하며 에너지 효율과 대안을 촉구하는 부안 주민들은 서울대학교 교수보다 훨씬 성숙하다. 서울대학교 지하에 핵폐기장을 유치하자는 발상은 얼마나 유치하거나 오만한가. 집권자에 대해 집착하는 철딱서니 없는 해바라기가 유난히 만개한 대학다운 아부 성 발언이었을지 알 수 없지만.


“바다와 물과 강이 사이좋게 어울려 억겁의 세월동안 서로 밀고 당기며 빚어놓은 신비로운 자연의 속살이 꿈틀거리고, 경이로운 생명의 우주가 속속들이 들어차 있”는 새만금 갯벌을 있는 그대로 맞으려 하지 않는 인간은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어리석은 환상으로 자신의 마지막 비빌 언덕인 자연의 ‘온유한 생명의 곡선’을 ‘사나운 개발의 직선’으로 재단하려 든다. 인간은 자연은 물론 자신의 생명과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이던가. 저자는 미국이 왜 “저 끔찍하고도 가공할 증오와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었는가” 물으며, 폭력과 공격성이 현대문명의 근원이라는 점, 폭력과 생명파괴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가 필연적으로 끌어낼 심각한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를 염려한다.


뉘른베르크 재판 기준으로 미국의 전후 대통령은 전부 교수형 감이라고 노암 촘스키가 지적했지만, 차를 가지고 다니며 이라크 파병을 어찌 반대하는가 묻는 권정생 선생의 말처럼, 탐욕스런 개발로 점철되는 근대화를 근본에서 반성하지 않은 한 문제는 끝이 없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자연 현상의 하나다. 분노한 자연에 의해 뉴올리언스의 오만방자했던 제방이 무너져 발생한 미국의 끔찍한 재앙은 어디서든 반복될 것인데, 이와 같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 이른바 ‘생태적 전환’이다. “타이타닉이라는 거대한 문명의 배 위에서 펼쳐지는 초호화판 향연”에 취해 소리 없이 다가오는 파멸을 눈치 채지 못하는 우리는 불필요한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 운송, 소비, 폐기하며 남이 정한 표준에 스스로 구속되고, 남의 문화와 언어를 제대로 흉내 내지 못해 열패감에 젖는다. 자신을 개성의 눈으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허울뿐인 웰빙을 넘어 참된 녹색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충분히 사유하며 행동해야 한다. 책을 읽어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춰야 한다. 사상과 가치관 전환을 통해 새로운 삶,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저자는 호소한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마태복음은 전하지만, 두드리지 않으면 세상의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다.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노동운동이 없었다면, 여성운동이 없었다면, 세상은 아직 어두울 것이다. 환경운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생태파괴에 못지않게 역동적이었던 우리의 환경운동은 거듭나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깊이 고민하며 민중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며 때로 피를 토하면서 행동하지 않고, 명망가의 힘에 손쉽게 의존하고 언론에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오늘의 편의적 행태가 성찰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환경운동의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문제의식이 환경운동 진영에서 분출될 때 장성익은 그 논쟁 한 가운데 있었고, 『대한민국을 멈춰라』의 마지막 부분에 당시 치열했던 논쟁의 내용을 할애했다.


환경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이 사그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치열한 고민과 공부 없이 “잘 나가던 시절의 영광과 명성과 도덕적 우월의식”에 관성적으로 안주해온 것은 아닌가, 저자는 묻는다. 다른 세상을 열어가려고 분투하는 다채로운 몸부림을 체화하기는커녕 내부의 민주화에 등한시하고 사회 권력화에 우쭐하지 않았던가. 의식이 아무리 건전한 환경단체라도 돈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장성익은 명망가의 입김으로 기업에 손 벌리는 행태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이미지 개선을 생각하는 기업이나 시민운동의 가치를 인식하는 정부는 중립적 기금을 조성,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세를 과시하는 환경운동, 명망가에 과잉 의존하는 환경운동에서 탈피, 민중의 곁, 파괴되는 생태계 현장으로 나가자고 제안한다. 현장에서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 공부하면서 개성 있는 환경운동에 신념을 가지고 매진하자고 촉구한다. 간디가 이어받은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은 저자가 보기에 ‘참된 저항’이다. 그런 저항이 없다면 ‘다른 세상’은 불가능하다.




「환경과 생명」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실린 글을 다시 다듬어 엮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 『대한민국을 멈춰라』에 실린 내용은 어떤 특정 시간이나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은 물론 내일에도 주목해야 할 글에는 개성이 돋보이고 저자의 절절한 진정성은 주어진 편의에 생각 없이 사는 독자의 폐부를 아프게 찌른다. 장성익은 ‘녹색 대안 사회의 길잡이’가 되려는 「환경과 생명」의 길잡이다. 그 「환경과 생명」이 올해 교보환경 언론부분 대상을 받았다. 환경관련 전문가와 환경운동가는 물론 일반인에게 생태적 환경담론을 깊고 진지하게 전해온 10년의 역할이 평가된 것이리라. 장성익은 그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아온 셈이다. 그의 문체를 부러워하는 나는 그와 잘 알고 지낸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그의 책 『대한민국을 멈춰라』를 평가한다. 위와 같이, 순전히 편견으로. (환경과생명, 200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