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8. 7. 9. 08:31
 

장마철이 지나면 추석이 다가온다. 성묘 가야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벌초다. 장마 뒤의 묘지는 잡초로 우거진다. 미리 벌초하지 않으면 묘는 후손에게 버림받은 몰골로 남는다. 조상님께 죄스럽고 남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석 전의 벌초는 고역이다. 거침없는 뙤약볕을 받으며 풀을 베다보면 온몸은 땀에 젖고, 억센 풀에 베여 피부에 생채기가 남는다. 생채기는 며칠 동안 가려울 뿐 아니라 남 보기 민망하게 한다. 웃자란 잔디를 베어내는 건 그나마 쉽다. 줄기가 두꺼운 잡초를 뽑다 자빠지거나 뿌리가 깊은 잡초 때문에 호미로 땅을 한참 파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쏟아지는 땀을 훔치며 풀베기에 열중하다보면 어느새 마무리되고, 마침 바람도 시원해진다. 비로소 조상님 뵐 낯이 생기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요즘은 낫으로 벌초하는 이가 드물다. 벌초를 대행하는 업자는 물론이고, 자손도 예초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예초기가 문제를 일으킨다. 땅벌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벌초 전에 낫을 정성껏 갈고, 조상 묘에서 풀을 베어낼 적에 그런 일은 드물었다. 적어도 땅벌의 공격을 대비할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예초기를 사용하면서 속수무책이 되었다. 예초기는 무겁고 시끄럽다. 예초기 날에 돌이 튀면 위험하므로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땅벌이 한두 마리 날아올라도 눈치 채지 못하니 이윽고 떼로 몰려나올 테고, 추석을 앞둔 계절이면 땅벌에 쏘여 죽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사실, 땅벌이라는 벌은 없다. 흔히, 땅속에 집을 짓는 벌을 일컫는다. 말벌 종류가 대개 땅 속에 집을 짓는데 그 중 장수말벌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 장수말벌은 우리나라의 벌 중에 덩치가 가장 크고 그 만큼 침의 독성이 강하다. 머리는 붉은 황색, 가슴은 검은 갈색으로, 일벌에 비해 통통한 여왕벌은 37에서 48밀리미터, 수벌은 37에서 44밀리미터, 일벌도 25에서 37밀리미터에 달한다. 꿀벌의 500배 가까운 독성을 가져, 쏘이면 현기증에서 호흡곤란으로 이어지고, 응급조치가 늦어진다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장수말벌은 벌초하는 사람보다 벌꿀 농사꾼에게 1호 경계 대상이다. 10마리가 공격하면 꿀벌 1만 마리를 죽인다지 않던가.

 

굵은 나무의 양지 쪽 가지나 햇살 받는 처마 아래에도 커다란 집을 짓는 말벌과 달리 장수말벌은 거의 땅속을 고집한다. 어쩌면 선점한 건지 모른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대개의 벌이 그렇듯, 장수말벌도 양지바른 곳을 좋아한다. 묘지는 거의 양지바르다. 땅속의 집에 알을 낳아야 하니 수맥이 없어야 한다. 묘지도 수맥을 피한다. 묏자리를 살피는 지관은 땅벌을 보고 수맥을 판단한다고 한다. 후손이 살핀지 오래된 묘는 비바람 맞고 푹 꺼졌다. 썩어 없어진 시신만큼 틈이 생긴 것으로, 장수말벌은 그런 곳을 선호한다. 이른 가을, 윙윙 대는 예초기에 튄 돌멩이가 땅속 집을 건드리면 장수말벌은 놀라 밖으로 나갈 테고, 묘 하나라도 더 벌초하려 정신없는 일꾼은 호되게 당할 수밖에.

 

9월의 장수말벌 집은 고래광실이다. 그때 집도 가장 크고 개체수도 제일 많다. 덩치가 장수 급인데, 떼로 덤벼드니 어찌할 노리가 없다. 분무 모기약을 마구 뿌리면 일부 �아낼 수 있다지만 그런 걸 가지고 벌초에 나설 수 없고, 냅다 달아날까. 하지만 아무리 빨리 뛰어도 장수말벌을 따돌리지 못한다. 시속 50킬로미터에 이른다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몸을 내맡길 수야 없는 일. 누군가 땅에 바싹 엎드리라고 귀띔하지만, 그건 한두 마리가 윙윙 거릴 경우고, 떼로 공격할 때는 별 소용이 없다. 역시 36계 줄행랑이 최고다. 50미터 이상 달아나면 제 집으로 돌아갈 테니. 장수말벌이 보이지 않으면 그늘에서 응급조치를 한 후, 한시바삐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다.

 

장수말벌은 오래 살지 못한다. 장수(長壽)하지 못한다. 여왕벌이 아니라면 수명이 1년도 안 된다.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하는 여왕벌에게 9월은 인생의 막바지다. 여왕벌은 서둘러 다음 세대의 여왕벌을 점지하곤 수벌을 낳을 것이다. 갓 태어난 수벌과 막 왕좌를 물려받은 여왕벌이 짝짓기를 마치면 소임을 다한 여왕벌은 자신이 낳은 일벌들과 함께 생을 쓸쓸히 정리하고, 땅속의 집도 버려질 터. 소임을 물려받은 새 여왕벌은 내년을 위해 바싹 마른 낙엽이나 바위틈에서 겨울잠에 들어가고, 숱한 곤충을 깨어나는 이듬해 봄, 장수말벌의 한 세대는 다시 시작된다.

 

동면에서 홀로 깨어난 여왕벌은 양지바른 땅속을 찾아 새집을 지으며 알을 낳기 시작한다. 일벌이다. 죽은 나무의 부드러워진 목질을 씹어 펄프를 만들고 펄프를 이어 집을 만드는데, 초기 집에 낳은 알은 여왕벌이 홀로 먹이며 키운다. 6월이면 일벌이 태어나고 여왕벌은 비로소 알 낳는데 열중할 수 있다. 일벌이 집을 짓고 애벌레를 키울 것이므로. 여러 마리의 일벌이 물어와 만드는 장수말벌의 집은 무늬가 알록달록하다. 여러 나무에서 펄프를 만들어 붙이는 까닭이다. 이른 여름, 서너 마리 들락거릴 때 호리병 만하던 벌집은 잠깐 사이에 익은 호박처럼 커지고, 9월이 지나면 항아리 만해지지만 장수말벌이 떠난 집은 가볍기 그지없다. 펄프가 아닌가.

 

꿀벌을 비롯한 곤충을 잡아먹으며 참나무 수액을 즐겨 마시는 장수말벌은 건강식품이나 민방의 약재로 활용된다. 그도 그럴 것이 수액에 함유된 항생물질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장수말벌의 집을 ‘노봉방’이라 하여 땅속의 보물로 여겼다. 노봉방으로 풍을 물리치고 몸의 독을 없앤다고 전하는 본초강목은 장수말벌 집을 다려 종기와 부스럼에 바르면 좋다고 썼다. 살균효과 때문이리라. 동의보감도 해소와 천식에 대한 효능을 알린다. 장수말벌을 소주에 산 채로 넣은 후 발효시켜 약으로 쓰기도 한다. 자양강장은 물론 각종 질병에 효과가 그만이라는 거다. 심지어 애벌레를 식용을 권하는 해외 학자도 등장했다. 각종 미네랄과 단백질이 풍부해 쇠고기보다 좋다는 건데, 그러다 장수말벌마저 도륙될까 겁난다.

 

물려받은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장수말벌은 제 몫 이상을 요구하지 않건만 어떤 생물보다 장수하는 사람은 제 삶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다. 추석을 앞둔 이른 가을, 장수말벌 때문에 사람이 위험한 건지, 사람 때문에 장수말벌마저 위험해지는 건지, 헷갈린다. (전원생활, 2008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