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4. 27. 22:56

《세컨 네이처》, 마이클 폴란 지음, 이순우 옮김, 황소자리, 2009.

 

20세기 독일의 실존철학을 대표한다는 마르틴 하이데거. 프라이부르그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인근 슈바르츠발트에서 사유에 잠겼다고 한다. 멀리 새소리를 들으며 울창한 숲을 조용히 걸으면 꼬리에서 꼬리를 무는 생각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대지의 윤리’를 강조해 미국에서 ‘현대 환경윤리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자연주의자 알도 레오폴드는 위스콘신의 허름한 농장에서 일 년 동안 변하는 풍광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겼다. 비록 모래땅이지만 자연이 게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육체적 노동이 전혀 없거나 있더라도 강도가 낮고 절박하지도 않은 지식인에게 숲과 자연은 사유의 장소로 그만일 텐데, 그런 호강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육체노동에 종사하거나 지시나 대본에 충실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와 달리 재깍재깍 다가오는 마감에 맞춰 원고를 보내야하는 지식 노동자에게 사유처럼 중요한 일도 드물 것인데, 어디에서 생각에 잠겨야 하나.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시의 사무 공간이나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으로 귓전이 어수선한 거리도 탐탁하지 않다. 회색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은 하이데거나 레오폴드가 부럽기만 할 게다.

 

마이클 폴란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책을 쓰는 지식 노동자다. 환경운동가로 지칭되기도 하는 그는 정원에서 사유한다. 흙이라고 한 뼘도 구경할 수 없는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살 때에도 교외의 텃밭에서 사유했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선 뜰에 기필코 정원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무려 1000주 이상 베스트셀러가 된 《세컨 네이처》가 그 결과물인데, 농한기 없이 땀 흘려야 먹고살 수 있는 농사꾼이라면 불가능했을 터. 생계를 보장하는 원고료가 있기에 농작물과 장미 묘를 심으며 즐겁게 사유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사유가 독자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글을 완성하게 했을 테고.

 

중산층이 모이는 미국 교외의 주택들은 거의 강박이다 싶을 정도로 현관 앞에 잔디를 깔았다. 그것도 푹신하게. 영국 대저택을 흉내 내고 싶은 성공한 이민자 심리의 표상이라고 마이클 폴란이 분석하는 미국 주택의 잔디는 중산층의 거국적 일체감이다. 낮거나 아예 없는 이웃 사이의 담을 뛰어넘어 동네 끝까지 탁 트이며 이어지는 잔디를 관리하는데 미국에서 해마다 300억 달러를 쓴다고 한다. 퍼붓는 물도 상당하겠지. 그 잔디를 관리하는 일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날이 뜨겁거나 건조하다 싶으면 물을 흥건히 뿌려야 하고 조금만 자라도 즉각 깎아야 할 뿐이 아니다. 때때로 비료를 주고 잡초도 수시로 뽑아야 한다. 내 집의 잔디라고 방치한다면 쟁송에 휘말릴 수 있으니 이웃 사이의 평화를 생각해서라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굴러 떨어질 바위를 연실 산꼭대기로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묵묵히 예초기를 들던 어느 날 마이클 폴란은 문득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는다. 이건 땅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잔디를 깎는 행위가 썼던 문장을 다시 베껴 쓰는 일이라면 정원 가꾸기는 언제나 새로운 문장을 쓰는 일이라는 걸 각성하면서 땅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로 작심한다. 그렇다고 미국의 거국적 일체감에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없기에 잔디의 강고한 권위를 조금씩 잠식하기로 한다.

 

일체감에서 과감히 일탈해 개나리, 라일락, 조팝나무를 울타리 삼아 심고 마음에 드는 장미도 주문했으며 퇴비까지 만들었다. 근사한 정원의 그림을 기대하며 코스모스와 백일홍과 해바라기를 비롯해 30여 가지 꽃을 심은 것인데, 그만 복병을 만났다. 한 치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고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는 신참 정원사의 기대를 형편없이 뭉개버리고 마는 게 아닌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스승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랠프 왈도 에머슨을 평생 정원사로 소개한 마이클 폴란은 누구나 사용하는 “잡초라는 말은 그 풀이 지니고 있는 미덕을 우리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한 적 있다는 사실을 귀띔하면서 자신도 잡초와 어느 정도 공존하리라 다짐했건만, 그리 지독할지 미처 몰랐다.

 

히피와 조동조합과 잡초를 가장 싫어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잡초는 모조리 뽑아냈지만 마이클 폴란은 잡초의 기세에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 또 사유한다. 19세기의 정원사는 잡초를 야만인으로, 일부러 심는 식물을 개화된 문명인으로 간주했는데 오늘은 잡초에서 장미까지 계급구조가 뚜렷하다는 걸 간파한다. 맹렬하게 원예종을 공격하는 프롤레타리아 때문에 애써 심은 화초가 보이지 않게 되자 마이클 폴란은 잡초는 “잘못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인가 아니면 “재배되는 식물에 비해 유난히 공격적인 속성을 가진 식물”인가, 고민하며 책을 뒤진다. 소로우가 “해와 비와 이슬을 지원군으로 둔 무수한 트로이의 전사”라고 묘사한 잡초는 결국 승리자였다. 지쳐버린 마이클 폴란은 잔디를 들어내 만든 정원에 이랑을 파기로 한다. 이웃이 뭐라 하던, 밭이 될 차례다.

 

그렇게 당근을 심었다. 퇴비도 충분히 주고. 그런데 뽑아보니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냥 짧고 못생긴 게 아닌가. 초보 정원사의 어수룩함이었을까. 러시아워 지하철의 승객들처럼 빼곡한 당근을 아깝다고 솎아내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마이클 폴란은 그렇게 정원사가 가져야 할 ‘제2의 천성’을 배운다. 또한 연약한 모종을 땅 속으로 꾹꾹 누르고 여분의 잎사귀를 가차없이 잘라내는 이른바 ‘초록엄지’의 중요성에 눈을 뜬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글쟁이답게 정원에 관한 책들을 진작 섭렵하는 마이클 폴란은 어느새 이론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정원사로 거듭나고 있었던 거다.

 

가을이 되면 탄소동화작용에 남은 힘을 다하며 열매를 맺던 식물들은 이내 노랗게 풀이 죽지만 정원사는 할 일이 많다. 정원의 열매가 정원사 허락도 없이 다람쥐, 두더지, 너구리, 사슴, 멧돼지 들을 초대하면서 그들의 잔칫상을 벌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지체하면 곰팡이와 박테리아까지 동참하니 겨울에 들기 전에 부지런히 걷어들여야 한다. 왁자지껄했던 정원이 고요해지는 겨울이라고 정원사가 쉴 수 있는 게 아니다.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며 내년의 정원을 설계해야 한다. 그렇다. 정원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의 생물이 사람의 방임 하에 제멋대로 어우러지는 공간일 수 없다.

 

솔직히 정원은 인간 중심적이므로 할아버지처럼 반듯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해야 할까. 비닐이나 농약을 거부하면서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유지하면 어떨까. 마이클 폴란은 후자를 택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원사 철학의 문제일 텐데, 새삼 우리의 처지와 비교된다. 《세컨 네이처》는 우리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 아파트 일색인 도시에서 정원사를 겸하는 시민은 드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원사가 되려는 의지가 있어도 실천이 몹시 어렵다.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지방자치단체에서 근교에 텃밭을 임대해주면 좋을 텐데, 우리는 비닐하우스를 철거한 그린벨트에 아파트를 또 세운다. 우리에게 《세컨 네이처》는 꿈이런가. (사이언스타임즈, 2010년 4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