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2. 1. 6. 16:25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알마, 2011.

 

세상의 모든 물은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향하지만 세상의 모든 강물은 굽이굽이 흐른다. 산간벽지의 기암괴석을 타며 격렬하게 흐르든, 드넓은 평지를 완만하게 적시며 흐르든, 강은 뱀처럼 구부러진다. 지구가 23.5도 기운 상태에서 자전과 공전을 하는 한, 강은 구부러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과학자도 있지만, 그 양상은 제각각이다. 가로막는 산이 있든 없든, 구부러지는 강은 어느 한 군데 똑같지 않다. 그러므로 강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도 구불구불하다. 길과 강을 따라 자라는 동식물이 다르고, 사람은 말과 습관을 달리했다.

 

제이 그리피스. 그는 영국인이다. 자연을 직선으로 길들이는데 가장 앞장섰던 국가에서 교육받아 대학에서 언어를 강의하는 학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삶에 지쳤다. 직선에 길들어질 것을 강요하는 도시에서 얻은 우울증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는 곡선을 찾아 자연으로 탈출해야 했다. 옛 철학자가 자연의 4대 원소라 일컬은 흙, , , 공기를 찾아서 아마존으로,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호주의 사막으로, 웨스트파푸아로 갔다. 거기에 하나 더. 얼음을 찾아 북극권의 이누잇을 만났다. 자연에서 결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이들과 무려 7년의 세월을 호흡하고, 여행기를 썼다.

 

서구의 획일적인 삶에 지친 그리피스를 마구 흔들어 깨운 묘약은 숱한 생명의 정령이 어우러지는 아마존의 원형질을 담았다. 벌컥벌컥 들이키곤 문명의 기억을 어질어질 토해낸 그리피스는 사탕과 도끼와 거울을 가져와 원주민을 혼란시키며 고무수액을 짜내고 거목을 마구 베어낸 서구 문명의 실상에 몸서리친다. 불도저로 숲의 정령들을 황폐화시킨 기독교 문명은 우울증을 몰아낸 묘약을 사탄의 약물이라며 저주했다. 그뿐인가. 황폐화된 아마존에 유럽산 목초를 깔고 가축을 기르며 아마존의 오랜 언어를 말살시켰다.

 

한 소설가는 우리네 말에 신발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십 가지라 했는데, 겨울에 내리는 눈은 몇 가지로 구별할까. 싸라기눈, 진눈깨비, 함박눈. 우리 조상은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며 신을 골라 신었을 텐데, 얼어붙은 북극해에서 사냥해 먹고산 이누잇에게 눈은 생존과 불과분이다. 그래서 그들은 100가지가 넘는 말로 눈을 구별한다. 그저 스노라 하는 영어는 북극권에서 위험하다. 영어에 젖어 삶이 단순해진 이누잇은 곡선을 잃었다. 썰매와 순록대신 엔진 요란한 기계는 생기를 빼앗았다. 온난화로 녹아내리는 빙원에서 이누잇은 야성도 잃었다.

 

형형색색의 생물이 어우러지는 바다에 직선의 쓰레기인 핵폐기물과 화학물질이 썩지 않은 채 내버린 직선은 서구문명이다. 사막에서 개구리와 곤충과 뱀과 캥거루들과 어우러지는 원주민을 총과 성경으로 위협한 서구문명은 웨스트파푸아에서 잔학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금과 구리를 노리고 고원지대의 산림을 파헤치는데 그치지 않고, 자유분방한 곡선으로 살던 주민에게 굴종을 요구했다. 직선은 차별을 낳는다. 차별을 거부하는 원주민들은 총과 불도저에 희생되었고, 지금도 희생이 강요된다.

 

제국주의의 화신이던 영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난 그린피스는 곡선을 찾으며 위안을 받는데, 굽이치던 4대강이 직선으로 유린된 현장에서 우리는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를 읽는다. 곡선으로 복원해야겠기에. (시사in, 2011.12., 224호 부록)

 
 
 

서평·추억

디딤돌 2011. 9. 6. 18:05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알마, 2011.

 

 

감옥과 병영, 그리고 학교의 공통점은 감시다. 몇 안 되는 간수가 많은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병사와 학생들은 장교와 교사가 감시한다. 다만 감옥은 가끔 느슨하지만 병영과 학교는 노골적이기에 병사와 학생들은 늘 긴장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정했는지 모르는 규칙과 학과 성적으로 학생의 개성을 말살하는 학교가 두드러진다. 견딜 수 없었던 제이 그리피스는 학교를 버리고 세상으로 훌쩍 떠났다. 그 바람에 뒤쳐졌다고? 아니다. 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더욱 강렬하게 배웠다.

 

10년 전, 시계라는 틀에 구속되지 않은 삶을 추적해 시계 밖의 시간을 썼던 그리피스는 이번에는 유럽의 기독교 문화가 탐욕스럽게 선교한 근대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개성 있던 곡선을 잔혹하게 짓밟은 직선이었다.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아 서구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다양성을 야만시하는 서구 기독교 기반의 근대성에 몸서리치는 그는 서구 시각에서 부적응자가 분명하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떠난다. 자연이 숨 쉬는 야생의 공간에서 근대성에 길들여지지 않는, 아니 길들여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곡선을 만나러, 행장을 꾸렸다.

 

어느 곡선이 좋을까. 서구의 탐욕이 빚은 지구온난화를 걱정했는지, 그리스의 옛 현인들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자연의 원소 4가지, , 공기, , 물이 살아 있는 야생을 찾아가는 데에서 그칠 수 없어 얼음을 더했다. 먼저 야생의 땅’, 아마존을 다녀온 그리피스는 야생의 얼음을 이누잇 세계에서 엿보고,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야생의 물을 방문했다. 호주의 사막에서 야생의 불을 느끼고 야생의 공기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웨스트파푸아에서 찾았다. 자유를 찾아 그렇게 7년을 누빈 그는 현란한 사색과 수다스런 울분을 가득 담아, , , ,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를 펴냈다.

 

서구 도시에서 좀이 쑤셨던 걸까. 우울증에 걸린 그리피스는 묘약을 마실 겸, 아마존으로 갔다. 해방을 위한 충동이었지만 묘약으로 부지불식간에 내화된 근대성의 독을 빼면서 신열을 앓기만 한 게 아니었다. 자연에 남아 서구의 근대성을 혐오하거나 최대한 멀리하려는 원주민의 삶에서 그는 개성 넘치는 송라인을 본다. 비록 어색하더라도 원주민들과 어울리려 애를 쓴 그리피스는 총과 칼과 병원균과 교활한 속임수로 야생의 삶을 강제로 길들인 기독교 근본주의가 곡선의 송라인, 다시 말해 땅, , , 바람, 그리고 얼음의 원형질을 직선으로 겁탈한 현장에서 분노에 몸서리친다.

 

편견이 개입된 서구의 부정직한 문명은 아마존에 들어와 고무 수액을 빨아먹고 거목을 마구 베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자유롭던 언어를 앗아갔다. 정령이 가득한 아마존에서 강과 나무는 오랜 언어였건만 유럽의 가축을 사육하려고 무참히 파괴한 황무지에서 주민들을 그만 오랜 언어를 잃었다. 길들어져 그만 에스파냐어를 더듬더듬, 흉내낼 뿐이다. 우울증을 몰아낸 묘약을 사탄의 약물이라 저주하며 금지시킨 선교사들은 사탕과 도끼와 거울로 정신을 혼란시키고 들어와 면역이 없는 야생에 질병을 퍼뜨렸다. 아마존의 주민들은 백인과 첫 접촉한 뒤 5년 내에 절반 가까이 사망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황무지란 말인가. 숲으로 가득한 아마존?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 나무 한 그루 없어도 다채로운 언어가 생동하는 빙원의 야생은 서구와 비교할 수 없는 순백의 문화와 역사를 여태 간직해왔다. 그 삶을 잠시 경험한 그리피스는 어처구니없이 실수를 저지른다. 서구교육을 받은 백인이기에 뱃전에 끌려온 바다표범의 고통을 얼른 끊으려 이누잇 사냥꾼이 정수리에 총을 쏘자, 자신도 모르게 풀썩 주저앉고 만 것이다. 멸시하던 선교사의 비웃음으로 내상을 앓는 이누잇들은 이후 그리피스의 심사를 이해하면서도 거리를 둔다. 생존을 위한 사냥터에서 모멸감이 일었을 이누잇을 십분 이해하는 그리피스는 자신에게 치미는 화를 참으며 얼음의 야생에서 고뇌한다. 사소한 실수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빙원에서 생존을 이어주던 조상의 시간과 언어와 삶이 선교사가 강요한 시계와 성경의 잣대로 야만이라 처리돼 폐기되지 않았나. 길들어진 이누잇들은 야성을 잃었고 지구온난화로 녹아 가라앉는 얼음의 땅에서 생기마저 잃어간다.

 

그 잘난 유럽의 탐험가들이 대항해 시대에 온 천지를 휘젓고 다녔어도 정작 바다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무것도 건질 게 없다며 황무지라 말했지만 바다를 제집처럼 드나든 원주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야생을 잊지 않은 원주민의 삶에 이끌린 그리피스는 바다에서, 과연! 각양각색 생물들의 향연에 눈이 부시고 인간이 듣지 못하는 야생의 소리에 찬탄하는데, 야생의 다양한 곡선을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지도, 함부로 더럽히는 화학물질과 핵쓰레기와 초음파는 바다마저 황무지로 내몬다.

 

사막이야말로 황무지인가? 개구리를 비롯해 수많은 생명의 오케스트라를 볼 수 없는 백인들은 무슨 짓을 했던가. 사막에서 더욱 자유로웠던 원주민을 총과 성경으로 위협하며 직선의 벽에 가두지 않았나. 하수인은 그 정도가 심했다. 이권을 탐한 백인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했는데, 우리가 실상을 거의 모르는 파푸아 섬, 1975년 호주에서 독립한 파푸아뉴기니의 서편, 다시 말해 웨스트파푸아는 현재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다. 산소 희박한 웨스트파푸아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은 조상이 살아 있는 땅을 결코 파헤치지 않지만 금과 구리를 노린 미국은 1962년 인도네시아의 학살에 눈감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엔조차.

 

승리한 부족이 포로를 잡아먹는 주민의 관습과 아비를 고문해 죽인 뒤 불에 구워 자식과 처에 강제로 먹인 침입자의 행태 중, 어느 편이 야만인가. 사살된 적의 머리뼈를 위축시켜 모으는 전통과 점령을 거부하는 주민 수만 명을 총과 불도저로 사살하는 행위 중, 어느 쪽이 야만인가. 싫어서 피해도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선교사를 활로 쏜 뒤 잡아먹는 숲속 사람과 천연두 바이러스를 묻힌 담요로 종족 전부를 몰살시킨 백인, 누가 더 야만인가를 따지는 그리피스는 바람에서 자유를 구한다. 바로 야생의 삶이다. 독재의 야만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이 산이다. 그런 산에 부는 바람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인을 하청 주고 강간을 외주 맡긴다국적기업의 횡포에 몸서리친다.

 

탐욕을 위해 야생의 다양한 삶을 부정하는 서구문명을 시종일관 조롱하는 그리피스는 7년 동안 자신의 발과 원주민의 눈으로 확인한 비극의 황무지에서 희망의 야생성을 새삼 확인한다. 곡선을 잃은 직선의 삶에서 희망을 구할 수 없는 까닭일 텐데, 길들어지는 삶을 부정하는 그리피스의 심원은 어디에 있을까. 절판되기 전에 시계 밖의 시간을 구해 읽어야겠다. (기획회의, 2011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