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07. 5. 6. 15:13

     미국에서 다시 생각하기 싫은 총기 사건이 발생했다. 최악을 갱신했다는 뉴스를 보고, 총기 소유가 허용된 남의 나라에서 가끔 벌어지는 끔찍한 범죄려니 하고 지나가려 했다. 한데, 뉴스를 마칠 무렵, 진행자는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그 범인이 한국인라고 확인한다. 순간, 다른 피부색에 대해 부당한 차별을 일삼던 미국의 역사가 상기되면서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친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범인의 국적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한국인이냐 아니냐가 우리나라 뉴스의 관심일 수 있더라고, 개인이 저지른 범죄는 국가나 민족이 사과해야 할 성격은 아니라고 본다. 누군가 묻는다. 마피아가 흉포한 범법행위를 저지를 때 이탈리아 정부나 시민들이 미국과 미국인에게 사과하는 걸 보았느냐고. 다만, 불쾌한 것은 총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한국과 한국인의 이름이 다시 세계 언어로 들먹이게 되리라는 점이다. 총기 사고가 일어날 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므로.


미국 역사에서 그 나라 선조들이 북미 원주민들에게 부당하게 가한 총탄 세례를 이 대목에서 새삼 거론하지 말고, 생각해보자. 미국 최악의 기록을 경신한 교포 젊은이는 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래에게 총탄을 퍼부었을까. 그 방면에 문외한이라 짐작조차 어렵지만, 전문가들의 여러 분석을 미루어보면, 극단의 외로움이 아닐까. 목표와 속도가 미덕인 경쟁 사회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구석으로 몰렸다고 느끼는 젊은이가 탈출구 보이지 않는 익명의 사회에 대한 분노를 그런 식으로 폭발시킨 것은 아닐지.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하는가』라는 책에서 저자들은 15년 전, 한인 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든 로스앤젤레스 폭동 뒤에 각성하자고 기획된 텔레비전 인터뷰를 되새긴다. 거리의 한 소년은 소리만 듣고 6종류의 자동소총을 구별하더란다. 만일 그 소년이 살아가는 동안 자연과 가까이할 기회가 있었다면 여섯 종의 매와 올빼미가 내는 소리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저자들은 남을 배려할 수 없는 회색도시의 삭막함을 안타까워한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이유만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일은 도시 뒷골목에서 드물지 않지만 자연에서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새 울음소리가 교교하게 들리는 숲에서 낯선 이와 눈이 마주친다고 불안을 느끼거나 불쾌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쟁 사회에 만연하는 두려움은 금세 사라지고 가벼운 인사와 대화는 어색함을 물리친다. 무엇이라도 서로 배려하거나 나누고 싶어진다. 평소 자연을 가까이 했다면, 조승희는 남의 생명을 빼앗으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속도와 목표가 지상 과제로 자리 잡은 경쟁사회에서 개성은 종종 무시된다. 목표가 만든 표준에 부합되지 않는 개성은 억압받기조차 한다. 보라. 요즘 등장하는 이력서는 핸드폰과 이메일 주소가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없다면 현대사회에서 소외시키겠다는 것을 예고하면서. 자동차가 없으면 이용할 수 없는 양판점이 이웃과 다정했던 구멍가게를 몰아냈고, 주차장이 없는 동네의 식당은 전화 주문이 아니라면 생존하기 어렵다. 개성이 불필요한 익명의 사회다. 내 얼굴과 취향을 기억하고 배려해주던 가게와 식당은 점점 드물어진다.


사각의 콘크리트에 갇혀 어려서부터 입시에 매달리는 우리 청소년들은 물론 회색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에서 부족한 것은 생태적 감성이다. 다양한 개성을 배려하는 생태적 감성은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다. 생태적 감성은 자연에서 더욱 자연스럽다. 도시에 자연을 도입한다면 삭막한 일상에서 자연을 느끼는 시민들은 이웃을 비로소 바라보고 배려하게 된다. 뒷골목에서 시선을 피하던 시민들이 나무가 우거진 공원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지 않던가. 다시 만나면 반가워지고, 마음을 나누면 만나고 싶어진다.


앞만 보며 달리면 속도에 비례해 곁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곁을 보면 안 된다. 경쟁에 질 뿐 아니라 사고로 연결될 수 있다. 자동차가 그렇고, 익명의 사회가 그렇다. 한데 세상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조상과 이웃이 있기에 가능했고 앞으로도 그렇다. 역사와 문화가 그래서 중요하다. 나와 이웃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생태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개인은 생태계와 이웃을 돌아보는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내 개성도 인정되고 배려될 것이다. 그러자면 천천히 가야한다. 주위를 살필 수 있도록 자연을 도입한다면 회색도시의 외로움은 극복될 것이다.


최근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음울한 소식이 들린다. 인간만을 위한 개발은 결국 우리 자신의 내일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가진 자만을 위한 표준은 소외된 자를 양산했고, 사회는 그만큼 불안하다. 학교에 왕따가 생기고 사회에 자폐가 증가한다. 분노는 늘어나고, 분노는 범죄를 승인한다. 이반 일리치가 귀띔하듯,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우정과 환대로 이웃을 맞이했다. 돈과 권력이라는 표준으로 줄을 세워 선택된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사회로 접어들면서 개성과 개성에 대한 배려는 가치를 잃었다.


부모와 이웃은 물론, 나를 존재하게 한 문화와 역사와 생태계를 반추하고, 나아가 내 뒤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이어가야 할 세대의 삶을 부끄럽지 않게 배려해야 할 책임을 느끼는 사회에서 왕따와 자폐는 점차 사라지고 끔찍한 총기사고는 옛일이 될 것이다. 수학을 잘하는 자가 남을 잘 웃기는 건 아니다. 바둑을 잘 두므로 달리기가 빠르지도 않다. 노래를 잘 하는 개성과 농구를 잘 하는 개성이 여성다운 남성과 교통사고로 휠체어에 앉은 개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회로 거듭나게 된다면 언어와 종교와 성별과 인종과 학력과 빈부와 나이들이 차별이나 억압의 도구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외로움이 추방되면서 사회는 지금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야곱의우물, 2007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