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2. 1. 20:47

 

1960년대 마을에는 쥐가 많았다. 마루 밑에서 천장을 오르내리며 들보와 서까래를 제 마당처럼 돌아다녔다. 부엌과 광에서 아낙네를 놀라게 하던 쥐가 마루나 방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면 고양이를 구해야하나 고민해야 했다.

 

고양이가 전과를 올릴 때가 없지 않았지만 사람 품에서 길이 든 녀석은 아랫목의 이불에 웅크려 잠을 청할 뿐 천장에서 찍찍대는 소리에 심드렁한 게 보통이었다. 고양이 출현으로 잠시 긴장했던 쥐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건 족제비였다. 고양이보다 날씬할 뿐 아니라 날렵하기 그지없고, 게다가 늘 허기진 상태에서 욕심까지 사나워 쥐구멍으로 따라 들어가 닥치는대로 물어가지 않던가. 조금 묵직한 우당탕 소리가 몇 차례 난 뒤, 천장은 한동안 적막했다. 전국에서 동시에 벌인 쥐잡기운동으로 쥐약이 쥐 천적을 소탕하기 이전까지, 족제비는 민가의 명실상부한 최정상 야생동물이었다.

 

어스름할 무렵, 밭둑이나 마을 뒷산의 바위틈, 커다란 나무뿌리나 다른 동물이 파놓은 굴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족제비는 쥐에게 공포 그 자체일지 모르나 사람의 눈에 올망졸망 귀여운 애완동물처럼 보인다. 짧은 뒷발로 지탱한 갈색의 긴 몸을 곧추세운 채 머리를 두리번거리며 까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천진스럽기 이를 데 없어 냉큼 달려가 품에 넣고 싶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다 자란 수컷의 몸이 40센티미터, 암컷이 30센티미터로 꼬리가 20센티미터 가까운 족제비는 온몸이 연한 갈색 털로 덮여 있고 납작하게 둥근 두 귀를 위 꼭짓점에 둔 역삼각형의 얼굴은 조막만하다. 머리 가운데 박아 놓은 듯 또랑또랑한 두 눈은 코와 턱으로 이어지는 검은 털이 감싸고, 앞으로 톡 튀어나온 검은 코와 작아도 앙칼진 입은 봉긋한 하얀 털이 감싸, 희고 검은 털이 부챗살처럼 갈색으로 바뀌는 얼굴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애완동물로 길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귀가 밝을 뿐 아니라 냄새를 잘 맡는 족제비는 사람 곁을 철저히 피해도 민가는 끊임없이 기웃거리는데 그건 사람 주변에 먹을 게 널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열이 높은 족제비는 민가에서 집쥐나 시궁쥐를 차지하고 낮은 녀석은 등줄쥐로 만족해야 하는데, 서열 높은 족제비에게 별식은 곯아떨어진 병아리다. 먼동 트기 한참 전, 칠흑 같은 밤의 닭장은 조용하기만 한데, 삵이나 수리부엉이는 여간해서 민가를 얼씬하지 않으니 망이 허술한 닭장 속의 병아리는 족제비 몫이나 다름없다. 목줄 묶인 개마저 잠들었다면 금상첨화다. 날렵하게 다가와 잠든 병아리들을 소리도 없이 채갈 것이다.

 

수상쩍은 기척을 느낀 개가 목줄 풀어달라 버둥거리며 짖어야 겨우 눈치채는 사람은 방문을 박차고 나가지만 이미 늦었다. 닭장 안은 미처 물어가지 못한 병아리 서너 마리가 축 늘어져 있을 것이다. 분이 솟구치더라도 참아야 한다. 민첩하지 못한 사람의 손에 쉽사리 잡힐 리 없지만 족제비가 없애주는 수천 마리의 쥐를 생각해야 하므로. 물론 잡혀도 고분고분할 리 없다. 스프링처럼 튀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피부에 깊은 상처를 남기겠지만 그 전에 항문 옆의 샘을 자극해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길 게 틀림없다.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속담 치고는 꽤 지당한 말씀인데, 체면도 염치도 없는 사람을 그리 비유한다니 털에 대한 자부심이 각별한 족제비는 밴댕이와 더불어 어이없을 것이다. 공판정에 나서는 영국의 판사가 한여름에도 족제비 털로 만든 목도리를 굳이 두르는 이유를 모르다니! 오물 쪽으로 몰면 털에 묻는 게 싫어 사람이 든 그물에 걸려드는 족제비의 습성을 자의적으로 정직, 청렴, 결백, 정의, 공정성, 평등의 의미라고 해석하는 판사나 종교 지도자는 중요한 회의에 족제비 털을 두르고 참석한다지 않던가.

 

“족제비는 꼬리를 보고 잡는다.”고?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 때문이었다. 고려 때부터 방문한 사신에게 하사하던 황모필은 붓끝에 힘이 실려 작은 글씨는 물론, 섬세함을 요하는 단청이나 제도와 도안에 없어서는 안 되었다고 한다. 꼬리를 뺀 나머지 털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만큼 족제비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특히 조심해야 했다. 털만 추리는 영국인과 달리 우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 그대로를 목에 두르지 않았던가. 할머니들이 두루마기 위에 걸쳤던 이른바 ‘족제비털목도리’다.

 

성능 좋은 인조털이 대량생산되는 요즘, 족제비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 공장식 양계장은 무시무시한 개가 지키거나 철저히 봉쇄돼 개미 한 마리 접근도 불허한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칠갑이 된 도시는 물론이고 화학농법에 의존해 냉장창고에 한꺼번에 출하하는 농촌에도 쥐가 드물어졌다. 이래저래 민가에서 족제비는 보기 어려워졌어도 습지가 보전된 산에 개구리와 뱀과 등줄쥐가 아직 남아 있으니 위기에 몰린 건 아니다. 그렇다고 족제비의 처지에서 마냥 안심할 수 없다. 유황불 연기를 굴에 불어넣고 그물로 잡아대는 밀렵꾼은 드물겠지만, 아직 천연 족제비털목도리의 가격을 더 쳐주지만, 결을 무시하는 아스팔트가 금수강산을 난도질하는 까닭이다.

 

암컷을 차지하려 겨울부터 경쟁이 치열한 족제비 수컷은 물론이고, 완연한 봄에 교미한 뒤 이른 여름에 대여섯 마리의 새끼를 낳는 암컷도 새끼들이 독립한 이후에는 늘 홀로 생활한다. 새끼를 먹이려 동분서주하는 어미와 막 독립한 새끼들에게 아스팔트는 위험천만한 함정이다. 이른바 ‘로드킬’(road kill)이다. 전주지방환경청의 실태조사 결과, 2008년 전북에서 다람쥐에 이어 족제비가 가장 많이 차에 치어 죽는다고 한다. 도로를 새로 만들 때 대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한 환경청은 운전자의 주의와 관심을 당부했다던데, 족제비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도로를 폐쇄할 수 없다면 생태통로부터 만들어야겠지만 족제비가 새끼를 낳고 키울 때 산악도로의 차선 수를 줄여 서행을 유도하면서 운전자에게 그 이유를 홍보하는 임시방편은 어떨까.

 

기원전부터 길들여진 유럽의 어떤 족제비는 ‘페릿’이라는 애완동물로 신세 망쳤다. 사촌간인 밍크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우리 족제비만이라도 산수갑산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저 자연에서 몰래 바라보며 애달파하면 된다. (물푸레골에서, 2009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