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7. 3. 15. 08:37


요즘 신포동은 저녁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전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10여 년 전 해가 저물기 무섭게 도서관처럼 고요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면 발길이 한결 뜸해진다. 같은 시간 연수구와 구월동, 그리고 부평은 북적인다는데, 신포동을 빠져나간 사람들은 늦은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걸까? 꼭 그런 건 아닐 텐데, 인천시 중구 최고위관료는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이 신포동을 외면한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중구청은 신포동 일원에 주차장을 확보하려고 애를 쓴다.


1970년대 말,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지만 휴일이나 저녁 시간이면 젊은이들은 으레 신포동으로 모였다. 공원과 다양한 식당이 있고 둘러볼 근대유적이 가깝다는 장점만은 아니었다. 인구 100만을 막 넘어선 인천시에서 젊은이들이 모일 공간은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 인구 30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어도 블랙홀 같은 서울과 가까우니 인천의 많은 젊은이들은 광화문으로 가서 촛불을 든다. 하지만 확대된 인천의 도심은 다핵화되었다. 신포동이 예전 같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주차장 때문일까?


연수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아이들은 신포동보다 광화문과 강남을 더 잘 안다. 부모가 신포동의 추억을 이야기해도 궁금해 하지 않고 타 지역의 친구와 굳이 찾아가려 하지 않는다. 인천의 근대유적이 여전히 산재해도 둘러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어른들의 추억이 깃든 식당이 그 자리에 있지만 흥미를 일으키지 못하는 까닭은 주차장과 무관하다. 신포동 일원에 추억을 묻은 시민들이 아이와 신포동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인천시도 중구청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오후 10시 무렵까지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차이나타운과 동화마을의 단장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중구청의 고민은 거기까지다. 주말에 북적여도 평일에 조용해지는 차이나타운의 주변에 개항 관련 유물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방문객은 거의 없다. 늘어난 인천시민도 그 사실을 거의 모른다. 먹고 살기 바빠 그런지, 알려준 이웃이 없었다. 동화마을을 들러본 방문객이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내 자신도 찾을 생각이 없다. 아무리 알록달록해도, 주민 동의 없이 조성한 마을에 관심이 생기지 않는 탓이다.


최근 답동성당 신도들이 발끈했다. 신도 대부분이 모르는 사이 성당 앞뜰이 주차장 부지로 은밀하게 팔려나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답동성당 일원 관광자원화 사업이라는 이름의 개발 사업을 위해 중구청은 답동성당 앞마당 일부와 가톨릭회관 부지 3541제곱미터를 812300만 원에 사들였고, 6500제곱미터 넓이의 공원과 지하 4254면 주차시설을 확보한다는데, 그 땅을 매각한 인천교구는 자기 종교의 신도는 물론이고 인천 시민과 일체 사전논의를 하지 않았다. 역사를 지닌 답동성당의 정체성이 인천교구의 현실적 의지에 종속된 토지에 불과한 게 아니다. 어떤 개발이든, 신도는 물론 인천시민의 환대를 받는 행사가 되어야 옳았다


동인천역에서 이어지는 지하상가와 연결해 신포동 방문객들이 신포시장과 답동성당을 오가기 편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이라지만, 성당 일대에 역사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사업을 언젠가 시작할 거라 막연히 믿어왔던 가톨릭 신자들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을 거 같다. 애초의 이름이 달라졌을 뿐, 내용에 변화가 없다고 한발 물러선 중구청 관계자와 인천교구 담당자는 성당 땅 되찾기 비상대책위원회로 모인 신자와 시민에게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사업이므로 양해를 당부했다고 한다. 법적 하자가 없으니 따르라는 겐가? 사업의 성격과 규모를 다시 논의하자고 손을 내미는 자세는 분명히 아니었다.


1889년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인 답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성전인 동시에 한때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화의 성지였지만 이제 그 빛은 찾을 수 없다. 노을을 받을 때마다 눈부시던 언덕 위의 건축물은 가톨릭회관이 가렸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젊은이가 모여들던 앞뜰은 주차장으로 바꿔 성지의 면모를 내버린 지 오래다. 신자가 아니라도 심신이 피곤할 때 잠시 들려 경건한 기운을 받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젠 아니다. 그저 인천의 한 성당 중의 한 건물이 되었을 뿐인데, 주차장이라. 인천시민의 마음은커녕 눈길마저 부정하려는 걸까.


국비 74억 원과 시비 1038000만 원, 그리고 구비 762000만 원, 모두 254억 원이 들여 지을 답동성당 일원의 관광지는 장차 어떤 모습을 연출할까? 병원이나 양판점 주차장처럼 승용차들이 차곡차곡 들어선 중고차 매매단지와 같은 모습은 아니겠지만, 신자들이 기대했던 성지와 거리가 멀 거 같다. 외관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치장해도 성스러워질 가능성은 없다. 인천의 정체성을 반영할 거라 믿기 어렵다. 주차 수요가 증가해도 신포동 일대의 관광이 흥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신도는 물론 인천시민과 논의가 생략된 마당이 아닌가.


비선실세를 동원하는 독선이든 겉치장 그럴싸한 고집이든, 구청장이든 교구장이든, 충분한 논의 없는 집행은 독재와 다르지 않다. 신도 없는 종교가 있을 수 없다면 유권자 없는 정치도 존재 가치가 없다. 역사와 전통을 짓밟은 행정에 지역의 살가움이 깃들 수 없고 돈벌이를 위해 다음세대의 행복을 배제하는 행정이 지속 가능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쳐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답동성당 앞뜰을 주차장 용도로 살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용도를 파악하고도 팔 수 있다는 겐가? 그리해놓고 감히 역사와 인천을 앞세울 수 있나? (인천in, 2017.3.15.)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7. 24. 18:45

     놀이터를 주차장으로 바꾼 어른들

 

생태도시와 자연 에너지 자급에 관심을 갖다보니 이따금 독일을 다녀올 기회가 생긴다. 얼마 전에도 다녀왔다. ‘환경수도라 흔히 칭하는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의 신도시, ‘보봉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벌써 세 번째다. 프랑스 군이 2차대전 뒤부터 주둔했던 프랑스 인접 지역인데,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에너지와 물을 자급하고 대부분의 생활이 지역에서 가능한 컴팩시티를 최대한 추구했다. 안정된 보봉 마을은 공동주택 몇 동을 신축하고 있는데 외부 에너지가 전혀 필요 없는 이른바 패시브 하우스였다.


승용차가 보이지 않는 보봉 마을은 보행자와 자전거의 천국이다. 뒤에서 차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니 마을을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 타는 이의 표정은 밝다. 시내로 연결되는 경전철이 확보돼 있으니 자동차를 아예 없애는 주민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마을 외곽에 따라 마련한 공동 주차장에 차를 넣는다. 마을 밖의 직장이나 프라이부르크 시내의 대학을 오가는 이는 경전철을 이용하거나 태양광 발전 패널로 지붕이 장식된 커다란 주차 빌딩에 둔 차를 사용하는데,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공사 차량 이외의 자동차가 없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방문자가 워낙 많은 탓도 있겠지만, 낯선 이를 향한 보봉 주민들의 시선은 대개 따뜻하고, 생활은 편안해보인다. 여유가 있기 때문일 텐데, 우리네 아파트 단지에서 이웃은 언제나 낯설다. 마을 안에서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도 장소도 없는 탓이리라. 나무를 숲처럼 조성한 언덕에 미끄럼틀을 놓고, 그늘마다 등걸 의자를 배치한 보봉 마을의 놀이터에 어린이만 모이는 건 아니다. 엄마의 손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물장난과 모래장난을 하면 엄마들은 그늘에서 수다를 떤다. 남녀노소가 모여 마을 대소사를 이야기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는 놀이터는 마을 공동체의 소중한 공간인데, 우리는 어떤가.


연수구의 한 아파트 단지를 보자. 커다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는 가운데 모래가 깔린 시소와 그네가 마련되고 사각의 지붕 아래 긴 의자가 배치된 놀이터에 초등학생 이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학교와 학원을 순례하는 사이 가끔 들여다볼 따름이었지만 아기를 데리고 나온 엄마와 손주 손잡고 나온 할머니들은 자주 보였다. 아이들이 안전한 모래밭에서 놀 때, 엄마와 할머니들은 그늘에서 수다를 떨었다. 저녁이면 학원에서 자유로운 청소년들이 가끔 모여 일감 벌이지만 그들도 모일 장소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놀이터는 시방 없어졌다. 시설물을 들어낸 자리에 아스팔트를 깔아 30대 가까운 승용차가 주차될 따름이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도 주차를 못하고 집에 들어간 적은 없었는데, 알량한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야 했을까. 근린공원에 화강암 사이의 바닥분수가 마련돼 있거나 화학제품 쿠션 위로 물이 샤워기처럼 떨어지는 시설이 있어 초등학생 또래 아이들이 시끌벅적 뛰어놀지만, 어른들은 얼씬하지 않는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물놀이에 동참하기 부적당하고,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뜀박질하는 이웃과 자전거 타는 학생들이 뒤범벅인 근린공원에서 마땅히 쉴 곳도 없다. 자동차에 밀려 소외되고 말았다.


10년을 살아도 만나면 반가운 이를 만나기 어려운 우리의 아파트 단지는 언제나 익명의 공간이다. 친구들을 학교와 학원, 때로 컴퓨터 게임방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정서는 삭막하다. 고급 자동차의 종류와 가격을 훤히 알아도 근린공원을 날아오는 새들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종류인지, 거의 모른다. 아파트의 지명도와 평수에 따른 가격 차이로 자신을 평가하는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자연의 생물에 대한 동정심이 약하다. 어려서부터 입시를 준비하는 경쟁에서 몰입하는 아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이웃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익히지 못한다. 그럴 기회가 아예 없다.


학자들은 자신의 사는 곳의 녹지가 30퍼센트 미만이면 나무가 우거진 자연을 찾아 나가려 한다고 주장한다. 승리를 위한 속도와 경쟁으로 점철하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축물에 치이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건데, 회색도시의 그런 부작용을 먼저 경험한 독일은 도심에 나무가 우거진 숲을 공원을 확보하고, 주민이 거주하는 공간에 30퍼센트 이상의 녹지를 조성하려 노력한다. 신도시의 녹지는 50퍼센트를 지향한다. 그래야 범죄도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녹색 공간에서 이웃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마을에 삶이 뿌리내리기 때문이라는 학자들은 풀이한다. 녹지공간인 마을의 놀이터는 그래서 중요한데, 우리는 속도와 경쟁의 도구인 자동차에 밀려나고 말았다.


경쟁과 속도가 아무리 높은 수입과 안락함을 보장한다고 해도, 성공은 혼자 이룰 수 없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뿐 아니라 생태계의 도움 없이 성공은 물론이고 행복도 지속될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이 시대의 어른들은 놀이터를 없앴다. 이제 좀 되돌아보자. 아이의 성공을 위해 학원을 순회하게 강요하는데, 우리 청소년의 행복 정도는 세계 최하위 수준을 맴돈다.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내일을 스스로 준비하지 못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스트레스가 되는데, 깊게 생각해보자. 아이가 생각하는 실패는 기실, 어른의 강박관념일 뿐이 아닌가,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산과 들을 쏘다니며 자신의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 땅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성적에 얽매이게 하는 건, 차라리 죄다. 어른들의 강박관념 때문에 어린이 놀이터는 적막하지만, 그러므로 놀이터를 없앨 수 없다.


     놀이터가 사라진 아파트 단지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곧 어른이 될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을 진정 생각한다면, 알량한 놀이터를 부슬 게 아니라 어른이 양보해야 한다. 자동차를 과감히 포기하여 주차 면적을 줄이는 만큼 녹지를 조성해야 이 삭막한 시대에 어른다운 일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부모는 집에 일찍 들어와 학원보다 친구와 놀이터에서 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 아이의 내일을 위해 이롭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이웃과 녹지에서 만나 다정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새로 꾸몄더라도, 놀이터를 짓밟은 주차장은 본래의 모습을 빨리 회복되길 강력히 희망한다. 도대체 부끄러워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을 바라볼 없으니. (인천in, 2012.7.24)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7. 21. 08:13

    놀이터까지 주차장으로 바꾸다니

 

19층 고층 아파트가 네모꼴로 배치된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첫 입주 당시 확보한 넓은 주차 면이 날이 갈수록 비좁아졌고, 저녁 이후 집 가까이 차 두는 일은 포기하게 되었다. 어두워지면 이웃의 자동차 앞에 평행주차를 하거나 빈 공간을 찾아 단지를 이리저리 돌아야 하는데, 이른 아침에 차를 빼려면 귀찮은 일을 감수해야 한다. 차 앞에 평행주차한 자동차 여러 대를 밀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비나 눈이라도 내리면 옷이 푹 젖거나 넘어질 수 있다.


어느 주말이었나. 편한 옷으로 쉬는데, 경비원이 올라왔다. 아파트 왼 편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를 주차장으로 바꾸는 안에 찬성 서명을 해달라는 거였다. 서명 용지를 들고 올라온 나이 든 경비원에게 뭐라 할 수 없는 일. 그도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서명에 응한 가구는 대부분 찬성에 표시를 했지만 그들과 같은 란에 표시할 수 없었다. 선행학습에 바빠 그런지 거의 한산하기는 해도, 어린이 놀이터마저 빼앗는 어른의 횡포에 동참하기 싫었다. 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나이가 지났지만 놀이터는 옳다고 보았다.


말이 어린이 놀이터지, 그 놀이터에 어린이만 모이는 건 아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사이에 잠시 들리거나 어쩌다 학원에 빠진 아이들이 놀기도 하지만, 주로 유치원을 파했거나 유아원에 들어가지 않은 꼬마들이 엄마나 할머니, 어떨 때는 할아버지와 같이 와서 시소나 그네를 탄다. 깨끗한 모래가 푹신하게 깔려 안전하다. 그늘이 있는 의자에 앉으면 아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 떠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두워지면 입시를 외면한 듯 보이는 청소년들이 소곤거리거나 큰 소리로 일감 벌이지만, 그들에게 그만한 공간도 제공하지 못하면 어디 동네라 할 수 있겠나.


2년 전 추석을 하루 앞두고 수도권을 몰아친 태풍 곤파스는 태풍에 대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아파트 주민들을 괴롭혔다. 단지마다 수십 가구의 베란다 새시가 깨졌고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내고 누웠다. 연수구가 특히 심했는데, 그건 매립한 소금 땅에 나무들의 뿌리가 깊지 않은 탓일지 모른다. 그날 어린이 놀이터에 넓은 그늘을 드리워주던 미루나무가 널브러졌다. 몇 달 전, 제주도 곶자왈에 가야 운 좋은 자에게 제 자태를 보여주는 삼광조가 앉은 나무였다. 한동안 방치하더니 그만 잘라내고 말았다. 숲을 떠나지 않는 아열대의 아름다운 새는 다시는 찾지 않을 게 틀림없어지고 말았다.


아름다운 새와 다음 세대의 아기와 엄마들, 그리고 노인과 청소년들이 이따금 찾아와 쉬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야말로 아파트에 태부족하다. 주차 공간이 모자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차를 세우지 못했다는 이 없었다. 어린이 놀이터를 없앤 자리에 고작 20여 대의 승용차가 더 주차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정도로 주차난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주차장을 아무리 넓혀도 자동차 수가 늘어난다면 소용없는 일인데, 굳이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야 했을까. 비록 구청에서 비용을 지원했다지만, 제 아이와 이웃의 아이들, 그리고 이웃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놀며 쉬던 녹지를 꼭 시커먼 아스팔트로 뒤덮어야 했을까.


아이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아이들을 선행학습에 몰아넣지 않아야 한다는 거, 웬만한 부모들은 동의한다. 국회에서 선행학습 통제하는 법을 제정하려고 벼를 정도로 그 부작용은 심각하다. 많은 학자들은 말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상상력을 키울 틈도 없이 학습에 매달리게 하지 않으려면 밖으로 나가 뛰어놀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놀이터마저 없는 동네에서, 학원가지 않을 아이들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컴퓨터게임이어야 하나.


     주차장이 모자란다는 민원을 주차장 없애는 대응으로 풀어낸 유럽의 도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숲과 자전거가 대안이었다는데, 우리는 등 뒤에 자동차가 없다면 마음이 편하다. 사람은 녹지에서 여유를 찾는다. 비로소 웃으며 이웃을 마주할 수 있다. 아이들과 이웃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존 주차장을 녹지로 바꾸지 못할망정 알량한 놀이터마저 없애다니. 어른의 횡포에 고개를 차마 못 들겠다. (요즘세상, 2012.7.22)

너무동감합니다
서울은 도시가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