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4. 10. 13. 17:33


1960년대 대부분의 국가가 그랬듯, 우리나라도 이공계의 수재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핵발전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때 핵을 전공한 분들 중에 지금도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이, 얼마나 될까요? 미국의 드리마일 핵발전소와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에 이어 관리가 엄격했다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거푸 네 차례 폭발했는데, 아직도 뿌듯해할까요? 심장병과 백혈병에 이어 감상선암이 증가하고, 안심해도 좋을 해산물이 드물어지는 현상을 보고 머쓱해진 분이라면 후회하고 있겠지요. 청년으로 돌아간다면 핵발전 분야를 선택하지 않을 성 싶습니다.


성적이 빼어난 요즘 이공계 학생들이 어느 분야를 선호하는지 모르지만, 한때 생명공학의 인기가 높은 적 있었습니다. 황우석 전 교수가 있지 않은 사실을 논문으로 발표한 추문으로 우리나라의 과학 위상이 세계적으로 곤두박질친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이니,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데, 생명공학도 3의 불로 치장된 핵발전처럼 다음세대를 위한 과학으로 표장되었습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말할 것도 없고, 폭발한 지 30년에 가까워지는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치명적 방사선을 여전히 분출합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에 넣어도 소용없을 텐데, 그 부담은 후손에게 전가되지요. 생명공학은 어떨까요.


요즘은 원자력공학이라고 고쳐서 말하지만 예전에 누구나 핵공학이라 했습니다. 그렇듯 공학이라는 단에 앞에 보통 재료의 명칭을 붙이지요. 원자에서 발생하는 힘은 미약해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없습니다. 핵반응으로 놀라운 에너지가 발생하므로 공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핵공학으로 정의해야 옳지만, 연이은 폭발사고로 워낙 부정적인 인식이 생겼고, 명칭을 의도적으로 바꾼 것이지요.

 

 

다음세대를 위한 생명공학?

 

추상적인 생명은 공학의 연구 재료가 될 수 있을까요? 논리학자는 생물공학이라고 말하던가 아니면 생명과학이라고 칭해야 옳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명공학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생명공학은 생명을 재료로 사용합니다. 바로 후손의 생명입니다.


인류복지를 앞세우는 생명공학은 식량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것처럼 홍보합니다. 굶주리면서도 늘어나는 가난한 인구를 먹여 살릴 거로 자신합니다. 유전자를 바꿔주면 미꾸라지가 가물치처럼 커지고, 생산량이 늘어나는 농작물로 개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가능할까요? 먹이와 비료를 늘리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력이지만, 더 살필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도 식량은 70억이 넘은 세계의 인구에게 골고루 돌아가고 남을 정도로 넘치지만 많은 인구는 굶주리거나 기아로 세상을 일찍 떠납니다. 많이 먹어 찐 살을 빼려는 인구가 지구촌의 어떤 곳에 넘치지만 다른 쪽은 먹을 게 없습니다. 지구촌에 나눌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웃과 나누던 식량이 사고파는 상품으로 바뀐 이후의 일입니다. 다국적기업이 주도한 일이지요. 식량으로 큰돈을 벌어들일 수 없다면 어떤 자본도 증산에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지구온난화가 심해진다면 세계적 식량위기가 앞당겨질 것으로 예견하는데, 그때가 되면 생명공학으로 식량을 더 생산하려는 다국적기업이 생기겠지만 식량 구입할 돈이 부족한 국가는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생명공학을 평등하지 않은 과학으로 여기는 사람은 윤리와 안전 차원으로 생명공학을 주목합니다. 생명공학이 위험한 이유는 유전자를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GMO’라고 하는 새로운 농산물은 원래 없었던 유전자를 조작해서 넣는 생명공학 기술로 만든 생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극에 사는 넙치 유전자를 넣어 잘 무르지 않는 딸기를 개발하거나 중금속이 섞인 물에서 잘 사는 올챙이의 유전자를 나무에 넣어 가로수로 사용하겠다는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는데, 그런 딸기에 들어간 유전자가 먹는 이의 몸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올챙이 유전자를 넣은 나무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만일 가로수로 심었다면 그 유전자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 건강에 문제를 일으켰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사실 GMO는 농작물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유전자를 가진 생명이라면 조작하여 GMO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도 물론 가능하지만 대부분 돈벌이가 되는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합니다. 어떤 약을 생산하기 위해 미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에는 조작된 유전자를 먹는 것은 아닙니다. 조작된 유전자가 미생물 안에서 만든 물질을 약으로 먹고, 약은 환자만 먹으므로 환경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농작물은 다릅니다. 유전자를 먹게 됩니다. 그래서 GMO 농작물을 특히 안전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조작된 농작물이나 생물에 들어간 유전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생물로 들어가는 일이 생깁니다. 몬산토라는 회사에서 만든 유전자 조작 콩과 유체를 심었더니 그 유전자가 잡초에 옮겨진 일이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생겼습니다. 그 콩과 유채는 몬산토에서 파는 제초제에 이겨내도록 유전자가 조작되었던 건데, 그 유전자가 잡초로 옮겨가는 바람에 잡초들까지 제초제를 뿌려도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 되면 많은 돈을 들어 농사를 짓는 농부는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해충을 죽이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감자를 먹은 쥐가 죽어가는 현상,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먹은 닭이 더 일찍 죽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유전자 조작한 송사리 60마리를 정상 송사리 6만 마리와 섞었더니 40세대 만에 모두 전멸했다는 미국 과학자의 연구는 걱정거리를 크게 안겨줍니다. 덩치가 크게 자라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연어를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 연어의 알이 양식장에서 빠져나가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연어를 가공하거나 요리해서 판매할 거라는 점입니다. GMO라는 표시가 분명하지 않다면 소비자는 먹기 전에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파는 다국적기업은 그런 표시를 한사코 반대합니다. 소비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정부와 의회라면 정확한 표시를 붙이도록 법과 제도를 제정해야 옳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일랜드>라는 미국 영화가 2005년에 우리 극장가에 선보인 적 있습니다. 부자들에게 장기를 이식하기 위해 복제한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이 들어 심장이니 간이 약해지면 심장을 떼어줄 복제인간을 미리 생명공학으로 태어나게 하는 사회는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추악한 일이라고 비난할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는 인간의 복제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장기를 만드는 연구자라면 비윤리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장차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태아나 배아를 죽여야한다면 어떤가요? 아직 사람이 아니므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파란 장미와 줄기세포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은 현대의학으로 치료하기 어려운 인류의 질병을 해결해 인류의 꿈인 수명연장이 이루어질 것으로 장담합니다. 현재가 아니라 많은 연구가 성공적으로 이어진 이후에 그리 될 것이라고 일부 생명공학자들은 확신하지만,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지금 많은 지역의 인구들은 간단한 약품과 시설이 당장 없거나 부족해 생명을 잃습니다. 깨끗한 물이 없어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많은 돈이 필요한 생명공학은 요즘 누구를 위해 연구되던가요? 남성보다 여성, 젊은이보다 노인이나 어린이가 먼저 희생되는 지역 인구의 꿈도 생명연장일까요? 거대한 자본이 계획하는 생명공학은 가난한 계층의 질병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생명공학으로 치료하겠다고 장담하는 병은 사실 그리 다양하지 않습니다. 세포의 재생과 관계가 있으니 젊은이보다 나이든 이에게 혜택이 갈 가능성이 높지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가능성을 살피는 연구 단계라고 보아야 옳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세포의 종류는 꽤 다양해 200여 가지가 되고, 그 세포들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언제나 새롭게 재생합니다.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재생력이 아무래도 떨어집니다. 젊었어도 어떤 세포가 활발하게 재생하지 못하면 병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재생력 있는 세포를 환자의 몸에 충분히 넣으면 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부세포는 피부만 만들고 골수는 피를 만들지 신경이나 심장세포를 만들지 않습니다. 화상을 입어 재생이 불가능해진 환자의 피부를 제거하고 활발하게 재생할 수 있는 피부세포를 이식한다면 치료가 가능해질 것인데, 그러자면 줄기세포로 피부세포를 분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줄기세포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참 복잡합니다.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한 세포를 분화시켜야겠지만 그보다 분화된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안전한 줄기세포는 보통 환자 자신의 몸에서 찾습니다. 한데 나이 든 이의 몸에서 줄기세포를 충분하게 찾기 어렵습니다. 젊은이는 건강하고 안전한 줄기세포를 찾을 수 있다지만, 줄기세포 치료가 필요한 젊은이는 매우 드물겠지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개발 과정에서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유전자의 다양성이 사라진 생물은 환경변화에 매우 약하게 됩니다. 조류독감 때문에 죽는 경우가 드문 철새와 달리 양계장의 닭이 몰살하는 이유와 비슷한데, 유전자를 조작한 생물은 그 정도가 훨씬 클 겁니다. 유전자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농작물이나 가축을 제대로 키우려면 투자비를 크게 늘려야 합니다. 많은 에너지를 동원해 사육이나 재배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니까요.


인류의 과도한 화석연료 낭비는 지구온난화를 일으켰는데, 농업에서 낭비하는 화석연료도 상당합니다. 그러므로 유전자 조작은 지구온난화를 악화시킬 겁니다. 예전에 드물던 기상이변은 어느새 일상화되었는데 기후학자들은 더욱 심각해질 거로 예견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유전자가 단순해진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온난화된 환경에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도태된다면 지구촌 식량위기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려받은 기름진 땅에서 조상은 안전하고 건강한 농작물을 재배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농작물로 입맛에 맞는 고유 음식을 국가와 지방마다 다양하게 먹어왔습니다. 농작물이 단순하다면 음식도 다양하기 어려울 텐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독점적으로 파는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왜 우리가 위험에 빠져들어야 하는 걸까요. 다국적기업의 광고에 속아 앞으로 밥상에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가공한 식품이 가득하게 된다면 후손의 삶은 어찌될까요? 자기 땅에 어울리는 농작물을 잃은 만큼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맥없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환경오염을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생명공학자도 있습니다. 특별한 오염을 제거하는 미생물을 만들어 폐수를 정화할 수 있다는 주장인데, 실현되었다는 소식은 여태 들리지 않습니다. 한데 꽃말이 불가능인 파란색 장미는 생명공학으로 개발돼 대단히 비싸게 팔린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페튜니아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넣었던 겁니다. 개발한 기업의 돈벌이에 도움을 주겠지만 그 장미가 인류복지를 향상시키는 건 아닙니다. 폐수는 물론이고 핵폐기물도 정화하는 생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명공학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물, 그리고 그 생물이 가진 유전자가 제 자리에 멈춰 있지 않을 테니까요.


석유가 고갈되면 생명공학으로 사탕수수나 옥수수와 같은 농작물, 그리고 파래와 같은 바다 식물을 효율적으로 개량해 바이오연료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명공학자는 희망합니다만, 그런 식물을 막대하게 재배하는데 들어가는 영양분은 대부분 석유로 가공합니다. 가공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까지 감안한다면 생명공학으로 개량한 식물에서 얻는 바이오연료의 에너지가 고갈을 앞둔 석유보다 많을 거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바이오연료도 태우면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가 배출됩니다.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식물을 생명공학으로 개발하겠다는 호언장담이 아직 없는 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줄기세포를 먼저 유도하고, 그렇게 얻은 줄기세포로 치료 가능한 세포를 분화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한 만큼 비용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라도 안전하고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줄기세포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줄기세포가 연구되고 있는 정도인데, 돈이 아주 많으면서 운이 좋아야 치료할 수 있는 생명공학을 인류의 복지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줄기세포로 나를 문제없이 치료할 수 없습니다. 아무 장기를 이식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면역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나아질 수 있을까요?


내 몸이든 남의 몸이든, 사람의 몸에서 찾는 줄기세포는 보통 안정적입니다. 나이든 사람의 몸에서 나온 줄기세포가 아니라면 치료할 세포로 분화된 이후 암과 같은 다른 세포로 바뀌는 경우가 적다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만 완전하지 않으므로 불안합니다. 그래서 위험하기도 합니다. 면역 거부반응 뿐 아니라 한번 분화한 뒤 엉뚱한 세포로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줄기세포로 세포 재생을 도와 치료하는 생명공학은 아직 연구 단계일 뿐인 겁니다. 치료를 장담해서 현재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유혹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비윤리적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유도하는 줄기세포보다 시험관에서 만든 배아로 줄기세포를 유도하려는 생명공학자도 있습니다. 배아는 아직 사람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어도 성인 여성의 자궁에 착상하면 사람이 될 수 있는 상태의 생명입니다. 그런 배아는 흔히 시험관아기라고 말하는 기술로 아기를 임신하게 하는 불임클리닉에서 많이 만듭니다. 황우석 전 교수는 인간복제 기술로 만들었다고 논문을 썼는데, 사실이 아니었지요. 불임클리닉의 시험관에서 난자와 정자를 수정시킨 뒤 여러 차례 분열하면 배아가 되는데, 일부 생명공학자는 아직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자궁에 착상시키지 않은 배아를 파괴해 줄기세포를 유도하는 것이지요. 생명공학자의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배아를 생명이 아닌 세포 덩어리라고 정의해야 옳을까요?


배아로 얻는 줄기세포를 유도하려면 여성은 생명공학 연구자에게 난자를 먼저 기증해야 합니다. 난자와 배아는 다음세대를 상징합니다. 정리하자면, 다음세대의 생명을 희생시켜 현 세대의 생명을 연장시키겠다는 연구인 겁니다.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일부 부자를 위해 후손을 희생하는 의료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평등합니다. 정의롭지 못합니다.


배아로 얻는 줄기세포는 다음세대로 성장할 수 있는 세포를 파괴하는 윤리적 문제만 노출하는 건 아닙니다. 위험하므로 치료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환자의 몸에 들어갈 경우 암세포로 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전 교수가 사실을 왜곡해 국제적으로 물의를 빚은 2004년과 2005년의 논문은 배아를 파괴하여 만든 줄기세포가 쥐의 몸에 들어가 암세포로 돌변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생명공학자는 많은 연구가 축적된다면 안전성을 갖출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우리는 안전이 확인되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법입니다.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얼마나 강조했던가요. 30년 전 과학을 지금 살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시 기대가 대단했을지 모릅니다. 성과가 찬란해 보이는 지금의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안전성을 찾지 못하는 생명공학은 영원히 안전하지 않을 것으로 생물학을 전공한 저는 확신합니다.

 

 

비윤리적이고 불평등하며 안전하지 않은

 

생명공학의 안전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전자 조작 연구와 생명복제 연구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유전자를 조작해 고기에서 과일 향이 나는 소를 개발해 복제할 수 있습니다. 우스개였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서 닭에 개 유전자를 넣어 날개를 다리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생명공학자도 있습니다. 그런 닭을 복제하여 보급한다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생명공학은 윤리와 안전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는 아직 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가능성이 보인다면 다국적기업이 가만히 있을 리 없겠지요. 바로 이익추구로 연결할 겁니다. 그럴 경우 후손이 직접 피해를 입는 불행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줄기세포로 배아를 파괴하든, 유전자 조작 농산물로 건강한 생태계와 삶을 위협하든, 모두 다음세대에게 위험하고 비윤리적입니다. 불평등하므로 정의롭지 않습니다.


내 땅에 오래 적응된 농작물을 건강하게 먹고 자라면 줄기세포도 불필요합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유전자자 조작된 농산물을 먹은 동물의 몸에 이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사람 몸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명공학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식량 자급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먹는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합니다. 그러면서 해마다 20조 원 이상의 음식쓰레기를 버린다고 합니다. 수입하는 농산물이나 가공식품이 몸에 좋을 리 없겠지요.


물 맑고 공기 좋으며 먹을거리가 건강한 환경이라면 질병이 늘어나지 않습니다. 줄기세포 치료는 불필요해집니다. 나이 들어서 생기는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노인은 치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른 나이에 세포에 노화가 생기는 질병은 대부분 건강하지 않은 환경에 오래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오염물질과 방사능이 많은 환경, 스트레스와 피로에 젖는 환경을 그대로 두고 생명공학부터 연구할 이유는 없습니다. 핵발전처럼 나중에 후회할 생명공학이라면, 지금부터 경계해야 합니다. (환경정의 발간, 우리와 다음을 생각하는 청소년 환경정의 교과서, <환경정의, 니가 뭔지 알고시퍼> 기고문)

반갑습니다.
황사가 심한 월요일입니다.
외출 시 각별히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소중하고 유익한 자료 감사히 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2. 2. 7. 14:57

 

19991231. 40대 중반을 달려가던 우리는 부부동반으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카페에 앉아 샴페인을 주문했다. 곧 자정을 맞을 터. 무심한 시간에 매듭은 없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고자 따뜻한 아파트에 아이들 재워놓고 모인 우리는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새로운 마음을 다질 시간을 나눌 참이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서 잔을 높이 든 일행은 어떤 기대감에 젖었는데,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콰과광!” 폭음이 쏟아졌다. 지구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니라,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새천년을 맞는 축포였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금. 40대 중반을 향하던 일행은 50대 중반을 돌파했다. 나이 들면서 빨라지는 시간의 화살은 60세를 향해 가는데, 노스트라다무스와 마야 달력의 저주를 뿌리친 새 밀레니엄은 그간 별고 없었나. 올림픽과 월드컵 열기로 각 3차례 뜨거웠던 시간을 거치면서, 지난 세기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각, 부모가 슬그머니 나간 아파트에 고이 잠들었던 아이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취직 걱정 때문에 졸업을 망설이는 그들의 앞날은 새천년 초기 기대했던 희망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가.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몰아쳤던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작지의 개발과 사막화가 늘어나는 만큼 식량위기는 점점 가시화되는데, 경제성장을 위해 아이를 더 낳으라고 가임여성 닦달하는 우리나라는 젊은이의 취업률만 빈약한 게 아니다. 기득권이 표준을 정하는 세상에서 거대 자본과 재벌은 나날이 번창하지만 다양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와 농어촌은 내년을 기약하기 힘겹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들은 살아가기 버겁다. 대기업에 근무한다고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수보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인 만큼 투기 자본이 춤을 추는 글로벌 경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경쟁에서 소외되는 순간, 대기업 사원도 언제 감원 대상이 될지 모른다.

 

지금은 제 먹을 것 갖고 태어나는 호시절이 아니다. 획일적 표준이 요구하는 경쟁력에 생존이 좌지우지되는 요즘, 남의 다채로운 개성을 배려하는 삶은 사치가 되었다. 12년 지난 새천년, 경쟁력이 밀어붙인 경제성장의 과실을 기득권이 독점하는 세상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에게 아이는 모험을 동반할 각오가 아니라면 낳기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식량도 자급하지 못하는 좁은 국토에 넘치는 인구의 소비 수준은 전 같지 않더라도 태어난 아이는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할 텐데, 경제든 환경이든 부모 맘 같지 않다. 자식에게 미안한 세상이 되었다. 기대감으로 출발한 새천년. 시작은 이렇듯 암울한데, 내일은 창대할 수 있을까.

 

 

 

새천년을 벽두부터 우리 사회를 달아오르게 한 생명공학으로 경제성장을 끌어가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늘어만 가는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주고 지구온난화를 이겨낼 식량을 증산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생명공학은 언제나 부가가치와 국가 경쟁력을 앞세운다. 위험성과 비윤리성을 이유로 만만치 않게 터지는 반대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생명공학은 성과도 올리고 있다. 막대한 연구비에도 불구하고 치료에 사용할 만한 줄기세포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어도 유전자를 조작한 콩과 옥수수는 세계의 식량 기반을 개편할 정도로 재배 면적이 확대된 것이다. 싫든 좋든, 요즘 지구촌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 그 농산물을 재료로 가공한 식품, 그런 사료를 먹여 키운 가축의 육가공식품과 낙농제품을 먹는다.

 

1990년대 말부터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생명공학은 크게 두 분야로 구별해 생각할 수 있다. 흔히 GMO라 칭하는 농산물이 대표하는 유전자 조작과 줄기세포로 대표되는 생명복제가 그것이다. 생명공학에 비판적인 시민단체와 종교계는 안전성 차원에서 유전자 조작 분야와 윤리 차원으로 생명복제 분야를 바라보는데, 그를 반영한 것일까. 개정에 개정을 거듭하고 있지만,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현재 국내에 제정돼 운영되고 있다. 안전과 윤리만은 아니다. 개개인의 유전자를 분리 분류해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감시도 생명공학으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아직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다.

 

생명공학은 불치병과 난치병의 근원적인 치료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획기적인 식량 증산으로 기아 문제를 해결할 것을 약속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에너지 부족과 생태계 파괴를 완화할 것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새천년 들어 대학과 연구소마다 유난스럽게 연구해왔지만 기존 질병은 더욱 치명적으로 돌변했을 뿐 아니라 아토피나 과잉행동장애증후군과 같이 전에 없던 질병이 생겨났다. 식량 사정은 더욱 열악해졌을 뿐 아니라 석유는 공급의 정점이 지나 가격 앙등만 남았고 생태계 파괴는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린다. 생명공학의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생명공학의 성과와 무관하게, 경제성장을 위한 경쟁 사회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나 생태계 보존 따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이 신뢰할만한 성과를 올린다면 장차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불치병과 난치병을 유발하는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몰두하는 생명공학 연구가 누구의 어떤 질병을 얼마나 치유할 수 있을까. 성체줄기세포든 배아줄기세포든, 환자 개개의 몸에 부작용이 없는 줄기세포로 분화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계층은 깊은 위화감으로 몸서리치며 치료를 포기하는 자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사회적 병리현상은 심화되겠지.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유전자 조작 연구는 이제까지 농산물의 증산에 관심이 없었다. 식량이 돈이 되지 않는 한, 그런 연구에 시큰둥할 텐데, 증산에 나선다 해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굶주리는 지역은 대개 돈이 없다. 팔다 남는 식량은 지금처럼 사료로 전용할 테니, 부자들의 고기 식단은 더욱 풍성하게 될 게고, 육식에 의한 질병은 늘어만 날 테지.

 

 

 

생명공학은 경쟁이 낳은 부작용이다. 남보다 빨리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한 경쟁은 많은 이윤을 얼른 제공하는 시설을 위해 농경지와 갯벌을 거듭 매립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배타적 속도와 목표만을 위한 에너지 과다 소비로 이어져 대기권에 온실가스 농도를 높였고, 사막화와 지구온난화로 이어졌다. 환경변화로 이어지는 필연적 기상이변은 농작물의 작황을 악화시켰고, 녹색혁명의 실패 이후에 등장한 생명공학은 식량 증산이라는 명분으로 몇 안 되는 다국적기업에 의한 가혹한 독점과 획일화로 이어졌다. 이제 세계의 콩과 옥수수는 똑같은 유전자다. 다양성을 잃었기에 재배 방식은 오로지 다국적기업에 문의해야 한다. 그렇게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위해 유전적 다양성을 가진 전통 씨앗을 포기한다면 환경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지구촌은 돌이킬 수 없는 식량난을 초래할 수 있다. 식량 자급률이 25퍼센트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더할 게 틀림없다.

 

육류와 가공식품이 넘치는 세상은 질병을 늘어나기만 하는데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가스 과소비는 쏟아지는 자외선의 양을 늘렸다. 그뿐인가.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는 핵분열로 충당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방사능을 생활권에 만연시켰고, 때때로 핵발전소가 폭발해 치명적인 방사성물질을 대기와 바다와 토양에 퍼뜨린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중앙 권력의 획일적 의지에 따라 빠르게 돌아가는 경쟁적 산업 시스템은 교통사고와 작업장 사고를 빈발하게 했으며 나아가 국가 사이에 테러와 전쟁도 이따금 발생하게 했다. 그 일련의 결과로 늘어나는 개개인의 불치병과 난치병을 줄기세포로 치료하겠다는 발상은 과연 타당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명공학자의 장밋빛 청사진에 현혹된 자본과 국가들이 막대한 연구비를 퍼붓고 있지만, 아직까지 개개인에게 보편적으로 처방할 수 있는 줄기세포는 명징하게 개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만 해도 해마다 100억 원을 10년 동안 퍼부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나오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1004억 원을 계속 지원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 늘어나고 고질화되는 질병의 원인을 방치하거나 부추기지 않던가. 생명공학 중 줄기세포 연구는 아직 연구자의 축제에 지나지 않는다. 노화를 줄기세포로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호도하는 태도는 연구비 지속적 획득을 노리는 생명공학자의 이기심에 가깝다. 예나 지금이나, 노화는 받아들여야 할 과정이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 아니다. 의료행위로 연장하는 수명은 개인은 물론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

 

줄기세포 치료는 여벌을 찾고자 하는 부유층에 의해 자칫 생명경시 풍조를 사회에 깃들게 할 가능성이 있는데, 유전자 조작은 어떤가. 농작물의 조작된 유전자가 엉뚱한 생물에 들어가는 부작용이 미국의 경작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만연되고 있다. 조작된 유전자를 섭취한 동물에 치명적이 부작용이 나타나는 사례는 불길한 전조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생명공학은 배타적 이윤을 추구하는 거대 자본이나 패권을 노리는 국가권력이 고집한다. 그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받을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은 어떤 대안을 모색해야 할까. 본격화된 지 10여 년 만에 치명적 한계를 드러내는 생명공학을 외면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 그런 사회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낭떠러지 아래 최첨단 병원을 마련하고 있으니 내리막길이라도 안심하고 페달을 더 빨리 밟으라고 권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함께 여행하는 이와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다정히 나누려면 목표보다 과정을 속도보다 그 순간을 즐겨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득권이 설정한 표준을 향해 도열하는 경쟁 사회에서 생명공학의 대안은 찾기 어렵다. 배타적 경제성장으로 하늘과 땅과 물이 오염되고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며 자외선과 방사능이 농도를 갱신하면서 질병은 늘어난다.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중앙 집중식 식품산업체제의 대안은 생명공학일 수 없다. 생물다양성이 회복되는 생태계, 유전적 다양성이 보전된 농작물,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우정과 환대로 이웃과 생태계를 보살피는 행동이 대안이어야 한다.

 

남의 나라의 동물인 코요테나 이미 멸종된 매머드를 복제해 동물원에 가둘 게 아니라 시방 이 나라의 생태계에 가녀리게 살아남은 생물들의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획일적 재배 조건을 요구하는 다국적기업의 유전자 조작 씨앗이 아니라 조상이 물려준 전통 씨앗으로 예기치 못할 환경변화에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약물이나 의료 장비에 묶인 채 쓸쓸히 나이든 생명이 스러지는 세상보다 보살피던 식구와 이웃의 따뜻한 성원과 감사함이 묻어나는 축제의 마당이 되어야 세상은 한결 환해진다. 배타적 경제성장보다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이 확장된 것이다. 귀농운동본부를 끌어가는 한 농민은 치매에 들어선 노모를 도시에서 시골로 모시고 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노모가 땅에서 활동하면서 회복되는 모습을 똥꽃이라는 책에서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행복은 그만큼 연장되었다.

 

생명공학이 불필요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건축이 할 일은 없을까. 나와 내 식구를 다정하게 돌보는 이웃과 친지가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갑게 살 수 있는 마을은 건축이 충분히 구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평화(平和)밥을 평등하게 나누는 일이라고 한다. 평화를 위해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마을을 어떻게 구상하면 좋을까. 앞뒤 위아래 집에서 일면식 없이 몇 해를 살아가는 회색 아파트 구조에서 벗어나 얼굴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고 텃밭을 함께 일구며 나눌 수 있는 녹색 공동주택을 도시에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 “친구가 아니라 적이라며 입시학습에 매달리기보다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다채로운 생명이 어우러지는 생태계를 만끽하는 우정 어린 마을도 건축이 구상할 수 있으리라. 이웃이 나와 내 식구를 배려하는 마을이라면 생명공학에 목말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새천년 들어 거액을 연구비를 정부에서 거푸 받아내던 우리나라의 생명공학계는 다시 1004억 원을 챙길 모양이다. 그런다고 생명공학계에 천사는 왕림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배타적 성장을 향해 경쟁하는 사회에 천사가 찾을 리 없지 않은가. 유전자를 조작하고 복제하는 생명공학은 자연에 울타리 치며 사유화하던 18세기 산업혁명 자본가의 엔클로저를 능가한다. 21세기의 생명공학 엔클로저는 후손의 생명에 울타리를 친다. 청사진이 근사한 생명공학은 21세기의 신기루다. 경쟁사회가 빚은 삭막한 환경을 치유할 듯 거룩한 표정을 관리하며 나타난 생명공학은 후손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미 암울하게 시작된 새천년의 건강한 행복은 경쟁보다 서로의 배려로 행복을 나누는 행동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은 아니다.(건축, 2012년 1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0. 1. 17. 23:54

 

쌀을 생산한다고 말하는 우리는 밥은 짓는다고 한다. 한 톨의 씨앗이 봄부터 적당한 햇빛과 바람과 물을 받으며 가을에 수십 배 늘어나는 게 쌀이다. 우리는 쌀로 밥이 지어 먹는다. 농민의 땀방울을 머금으며 알곡으로 늘어난 쌀은 그래서 농산물이지만 밥은 그저 변형인 것이다. 한데 전자레인지로 데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슈퍼마켓의 밥을 사람들은 생산물로 착각한다. 대기업이 밥을 생산했다는 겐가. 감히?

 

공장 식으로 밀집 사육한 가축을 도축 포장해 파는 요즘의 부드러운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생산과 거리가 멀다. 고기용으로 사육하는 가축은 아주 어릴 때 도축한다. 사람과 비교하면, 사춘기는 고사하고 첫 영구치가 나올 즈음 도살되는 거다. 성장호르몬 때문에 빨리 자란 만큼 빨리 죽은 어린 가축에게 생산의 기회는 박탈된다. 대신 그런 고기를 위해 평생 정액을 쏟아내야 하는 씨수컷과 평생 난자를 내놓아야 하는 씨암컷, 그리고 시험관에서 수정해 분열시킨 난자를 기계처럼 착상해 평생 새끼만 낳는 대리모는 제 수명을 마치지 못하고 기진맥진해 죽는다. 사람이 강요하는 생산의 대가가 그렇다.

 

소와 돼지의 사료로 가공되는 곡물, 다시 말해 미국의 광활한 농토에서 수확하는 요즘의 옥수수와 콩은 분명히 땅에서 재배하지만, 생산이 아니라 변형으로 치부해야 할 정도로 많은 투입을 요구한다. 석유다. 파종과 수확에 동원되는 무거운 농기계에 들어가는 석유만이 아니다. 곡식의 수송과 저장에 들어가는 석유의 양도 무시할 수 없지만 화학비료와 농약 살포양이 막대하다. 모두 석유로 가공한 거다. 드넓게 파종한 단일작물은 석유 없이 재배가 아예 불가능한데,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옥수수 100칼로리를 수확하려면 미국의 농부는 1000칼로리 이상의 석유를 부어야 한다. 고기용 소는 옥수수 10킬로그램 이상을 먹어야 살코기 1킬로그램을 내놓는다. 돼지는 대략 소의 절반이고 닭과 계란과 우유는 3분의1 정도다. 따라서 육식, 특히 쇠고기로 배불리 먹으면 그 10배 이상의 곡식을 낭비한 셈이고 곡물 10배 열량의 석유를 태워버린 꼴이 된다. 세계 식량은 남아돌아도 굶주리는 인구가 좀처럼 줄어들지 못한다. 우리는 국제곡물상의 불합리한 분배에 관심을 가져야하지만 거기에서 멈출 수 없다. 육식이 느는 만큼 지구온난화는 거세지고 석유 위기가 앞당겨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998년 우리나라의 한 대학에서 400그램에 달하는 미꾸라지를 개발한 적 있다. 당시 한 중앙언론은 식량 부족의 대안으로 보도했지만 어처구니없었다. 자연에서 채집할 수 있고 양식도 가능한 보통 미꾸라지보다 40배 이상 커진 이른바 ‘슈퍼미꾸라지’는 사료를 40배 이상 축내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유전자를 변형시킨 까닭에 알이나 가공 부산물은 물론, 배설물까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게다가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좁은 만큼 사육조건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미꾸라지의 변형 유전자가 먹는 이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 파악된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섣불리 식량 해결을 점친 당시의 기사는 위험했다. 소비자에게 생명공학의 위험성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얼마 전 네덜란드 과학자들이 줄기세포로 돼지고기를 만들었다는 외신이 보도되었다. 가리비처럼 단단하지만 축축하고 질퍽한 질감의 고기 1센티미터를 분화시켰다는 거였다. 그 소식에 한 전문가는 앞으로 돼지 한 마리로 100만 마리 분량의 고기를 만들 수 있을 테니 기아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 뿐이 아니다. 그 기술을 소나 양, 그리고 닭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 ‘시험관 고기’에 생선의 줄기세포로 만든 오메가-3지방산을 첨가한다면 심장마비를 예방하는 햄버거, 건강에 좋은 소시지까지 시장에 나올 거로 한술 더 떴다는 게 아닌가.

 

외신은 고기를 어떻게 100만 배나 늘릴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밝히지 않았지만, 한술 더 뜬 전문가는 돼지의 줄기세포가 저절로 증식할 듯 호들갑을 떨었다. 줄기세포의 안정성은 아직 확보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확보되리라 믿고 일단 지나가자. 다시 말해, 고기로 변한 돼지 줄기세포가 사람의 위장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물질로 돌변할 가능성을 앞으로 제어할 수 있으리라 막연히 믿기로 하자는 거다. 모든 줄기세포는 영양을 공급받는 만큼 늘어날 수 있는데, 만 배 이상 키우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영양물질은 어디에서 어떻게 조달할 텐가. 비용은 돼지 100만 마리 사육하는 것보다 적게 들어갈까. 돼지와 생선 줄기세포들이 만나 엉뚱한 물질로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을 거로 자신할 수 있을까.

 

유전자조작 기술까지 접목하면 돼지고기에 사과 맛까지 나게 만들 거로 떠벌일 수 있을 텐데, 벌써 공장에서 배양할 그 돼지고기로 개도국 중산층을 먹일 수 있다며 서방의 언론은 예단한다. 생산이 불필요한 만큼 온실가스 배출과 물 사용량이 줄어들 거라는 어설픈 예상은 둘째 치고, 서방의 연구자와 언론인들은 과연 맛과 향이 개선될 줄기세포 돼지고기를 먹으려 들까. 생태 질서를 허무는 식량 제조 기술이 초래할 재앙을 그들은 정녕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야곱의우물, 201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