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5. 13. 23:06

 

거의 주말마다 ‘낙동강 순례’를 떠나는 지율스님이 50페이지가 되지 않는 책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지난 3월 녹색평론사에서 발간한 《낙동강 before and after》가 그것이다. 그는 체험으로 구한 감성적 언어로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행동이 필요하다는 각오를 억누를 수 없게 만든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강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만일 내개 본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면 눈이라도 빼서 보여주고 싶다.”고 한 지율스님은 “무엇보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강가에 물드는 보랏빛 낙조를 보여주고 싶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 휘돌아 가는 물길, 물길을 거슬러 오는 바람, 저문 강에 떨어지는 달빛, 새벽 강가에 하얗게 오르는 물안개, 물가에 그림자를 놓는 수변의 숲들, 그곳에 깃들고 둥지를 트는 생명들, 흰 모래사장에 꼬리를 끌고 지나간 수달의 발자국, 허리 굽은 농부의 깊은 한숨, 그곳을 배회하는 외로움 맘까지 모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 3월 4일, 서울시청 근처의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불교환경연대와 에코붓다의 공동주최로 열린 “4대강 개발, 다른 대안은 없는가?” 라는 제목의 공개 심포지엄에서 신경림 시인은 “정부가 대운하를 포기하고 4대강 살리기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안도했다. 그러나 현장을 가보고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달았다. 지금 4대강 유역에는 천벌을 받을 짓이 행해지고 있다. 이 전면적인 자연파괴를 추진하는 것은 물론, 이것을 막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것도 천벌받을 일임을 나는 확신한다.” 고 말했다. 흉포한 독재정권과 온몸으로 맞섰던 작은 체구의 연로한 시인은 생명을 받은 자의 의무를 절절하게 전했다.

 

터널로 산을 뚫어야 한다면 가장 짧아야 최선이라는 건 상식이다. 지하수를 포함한 물의 흐름이 교란되는 걸 최소화할 수 있고 생태계의 충격도 그만큼 작다. 한데 경부고속전철은 천성산을 가장 길게 뚫고 지나간다. 공사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실시하는 환경영향평가는 천성산에 터널공사가 시작되기 10년 전에 조사했다. 그렇다면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해야 한다. 법에 그리 규정돼 있다. 새로운 기술과 이론으로 다시 평가한다면 영향을 더욱 줄일 수 있기 때문인데 철도공단은 벌금 몇 푼으로 법 정신을 외면했다. 정진 중에 천성산 생명들의 두려움을 인식한 지율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300일이 넘는 단식을 수행해야 했다. 이제 그이는 ‘4대강 사업’의 낙동강 공사현장에 와서 물려받은 금수강산의 경관과 자연의 이웃들이 어떻게 파괴되며 살해되는지 우리에게 보라고 당부한다.

 

양심을 깨우는 시어로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을 물러가게 하는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시인은 진작 ‘살리기’라는 정부의 말을 막연히 기대했지만 현장에 와서 보니 기막혔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행동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분노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은 "언어가 철저히 뒤집혀진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두렵다"고 최근에 발간된 《녹색평론》 112호 서문에 썼다. 흐르는 물을 정화할 뿐 아니라 숱한 생명가치들의 삶터이자 산란장이 모래와 자갈이다. 그 모래와 자갈을 강바닥에서 6미터 이상 퍼내고 10미터가 넘은 콘크리트 보로 영겁을 이어온 흐름을 계단처럼 열여섯 번 차단하며 제방을 틀어막는 전대미문의 토목공사를 ‘살리기’라니,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찾아가서 눈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분노할 게 틀림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닌가.

 

서슬이 퍼런 독재정권일수록 정부와 그 하수인은 시민들의 사회참여를 방해한다. 그래야 자신의 의도대로 예산을 집행하며 집권할 수 있지 않은가. 그를 위해, 불의를 보면 피가 끓는 젊은이들이 현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 필요가 있다. 다짜고짜 물리적일 필요는 없다. 이른바 ‘3S’ 정책, 다시 말해 스포츠, 섹스, 스크린과 같은 말초적인 자극으로 관심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면 되는데, 이따금 소용없는 녀석이 나타나면 그때 무시무시한 공권력을 동원해야겠지.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 우리 군사독재 정권이 그랬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며 양심에 어긋나는 굴종을 강요당했다. 이제 군사정권은 물러갔다. 피가 끓는 젊은이의 멈추지 않은 행동을 물리적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행동하는 젊은이가 이 땅에 드문 건 불의가 사라진 까닭인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는 경제성장”이라 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한다는 소명의식, 뒤쳐지면 낙오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벌이에 몰두하라는 위기 조장이 시민들의 양심을 짓누르는 시대가 되었다. 자본이 독재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거다. 군홧발보다 한층 교활한 자본 역시 시민들의 사회참여를 방해한다. 표준화한 시험으로 서열화하면서 저항을 포기하도록 길들인다. 자본의 하수인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말을 잘 들으면 성공할 것이고 아니면 국물도 없다는 걸 각인시킨다. 거기에 언어의 마술이 동원된다. ‘4대강 사업’을 모독된 언어로 강행하는 현 정권은 그 전범이다. 자본에 포섭된 언론의 간계로 시민의 눈과 귀를 막고, 이따금 저항하는 시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한다.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선거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의견 표명을 제한한다. 어떤가. 유권자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선거가 민주사회에서 의미를 가질까. 유권자의 행동을 억압하는 정권을 민주적이라고 평가할 역사는 없을 것이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이어 ‘4대강 사업’에 대한 젊은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현 정부의 태도는 선거철마다 북한 위협설을 유포시켰던 과거 독재정권의 태도와 다르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조계사 앞에서 수천 명이 모여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지적하는 수륙제를 수행해도, 명동성당 앞에서 만여 명이 모여 같은 목적의 시국미사를 거행해도 언론은 침묵했다. 일제고사와 토익 점수에 매달리다 심신이 지친 젊은이는 틈나는 대로 영상문화에 몰입하는데, 연예인들의 시시덕거림을 쏟아내는 건 손바닥 안의 전화기도 예외가 아니다. ‘4대강 사업’은 쉬지 않고 문제점도 드러내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피가 뜨겁다는 걸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4대강 사업’으로 토목 자본에 막대한 세금을 몰아주는 정부는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 이어 섬진강까지. 이 땅의 혈관이자 젖줄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정체시킨다. 문화와 역사를 간직해온 4대강이 유구했던 흐름을 멈춘다면 이 땅에 생명을 의탁할 젊은이는 내일은 기약할 없다. 대학입시와 취업과 승진을 위한 표준화된 시험에 주눅이 든 젊은이를 뒤집힌 언어로 회유하면 피를 식게 해 행동을 차단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정부는 2년 전 촛불집회에 참여한 젊은이에게 반성을 요구했다. 자본이 지휘하는 돈바람과 화려한 영상문화에 길든 젊은이를 굴종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는 것인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매를 보는 순간 꿩은 낙엽 더미에 대가리를 박는다. 그런다고 매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내장까지 파고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너무나도 쉽게 허리춤을 낚아채는 매는 칼날 같은 부리로 살점을 뜯어낼 것이다. ‘4대강 사업’을 외면한다고 추악한 본질과 드러난 환경 폐해가 사라질 리 없다. 뒤집힌 언어로 젊은이의 눈귀를 교란하며 행동을 막는다고 다음 세대의 생태계가 보전되는 게 아니다. 연예인의 이름과 취향은 두루 꿰지만 내 지역 선량 후보의 이름과 그 됨됨이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이여! 차분히 생각해보라. 누구의 말에 자신의 내일을 맡길 것인가. 뒤집힌 언어에 굴종하며 자신의 피가 맥없이 식어가도 좋은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지율스님은 저항의식을 잃지 않은 젊은이들과 낙동강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신경림 시인은 현장에 가서 강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현장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행동을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라면서. 그렇다. 우선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에 힘이 생긴다. 거기에 하나 더. 백문이 불여일견이지만 백견이 불여일행이다. 백번 본다고 ‘4대강 사업’이 중단되는 건 아니다. 실상을 알았으니 피가 끓을 터. 양심이 이끄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행동이 이 땅을 독재로부터 다시 구해낼 수 있다. 행동은 여러 가지다. 민의를 반영해야 마땅한 선거도 그 중의 하나인데, 지방선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세상, 2010.5.30)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12. 29. 18:23

 

겨울을 맞은 논둑 가장자리는 배어나오는 물을 따라 기다란 얼음판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거기에서 외발썰매를 탔다. 더 어릴 땐 얼음이 넓은 논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양날썰매를 탔지만 자라면서 시시해졌고 좁고 긴 얼음판에서 요즘 스노보드처럼 방향전환이 쉽고 빠른 외발썰매라야 직성이 풀렸던 거다. 뾰족한 쇠막대를 끝에 단단히 박아놓은 긴 작대기를 바짓가랑이에 찔러넣고 썰매에 오르면 우리는 기고만장했다. 바지 허벅지에 구멍이 날 줄도 모르고 썰매 뒤의 얼음을 작대기로 열심히 밀어내다보면 매서운 추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었다. 얼음과 우리들이 물러날 즈음, 도롱뇽이 그 자리에 알을 낳았다.

 

아침 볕 받으면 살얼음이 슬며시 사라지는 3월이면 도롱뇽의 향연이 벌어졌다. 암컷 한 마리에 꽈배기처럼 들러붙은 수컷들은 서로 밀어내려 애를 쓰고, 마침내 다른 수컷들을 제압한 녀석과 한참 몸을 비비던 암컷은 이윽고 여덟팔자처럼 한쪽 끝이 이어진 완두콩 꼬투리 모양의 알 두 덩어리를 짚이나 낙엽, 작은 가지나 돌에 붙여 낳았다. 투명한 꼬투리 안에 삼사십 개 남짓 소복한 갈색 알은 3밀리미터 정도로 클 뿐 아니라 분열하는 모습이 뚜렷해 대학교 생물학과 학생들의 실험재료로 환영을 받았는데, 요즘은 통 볼 수 없다. 도롱뇽이 사라졌다기보다 관개농업 이후 알을 낳을만한 물이 봄철의 논에서 사라졌고, 산간 계곡까지 도롱뇽 알을 찾으러가는 조교나 학생이 드물어진 거다.

 

그 도롱뇽이 법정에 서려 했다. 물이 차고 맑은 산간계곡에 아직 터 잡고 사는 도롱뇽 중에서 경상남도 양산시 천성산의 둥지를 지키던 도롱뇽이 절박한 마음으로 사람의 법에 호소한 것이다. 활성단층과 그로 인한 파쇄대가 휘감는 까닭에 시리도록 차고 맑은 물이 사시사철 넘쳐흐르는 곳이 천성산인데, 그 천성산을 18킬로미터의 터널이 뚫고 지나가면 계곡의 물과 지하수는 갈수기마다 바싹 마를 터. 경부고속전철을 위해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는 터널 공사를 즉각 시행하지 말아 달라고, 환경영향평가를 받은 지 10년이 지났으니 법규대로 엄밀한 방법으로 재평가를 받은 뒤 대안노선을 찾아달라는 호소를 해야 했던 거다. 하지만 도롱뇽이 직접 소장을 쓸 수 없는 일. 지율스님과 전국의 ‘도롱뇽의 친구’들이 도롱뇽의 안타까움을 대신 전하기로 했다. 2003년의 일이다.

 

하지만 허탈했다. 결국 소송 당사자 자격을 얻지 못한 도롱뇽은 법정 문턱도 넘을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고리타분한 법리 탓인데, 기업을 ‘법인’이라면서 사람이 소송을 대신할 수 있게 하는 법은 자연의 생명가치는 외면해야 할까. 법리는 그 나라의 문화의식의 수준과 직결된다던데, 국가의 품격을 높이자고 목청 높이는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더불어 살아왔던 자연의 뭇 생명가치들은 결국 버림받아야 하나. 그들이 사라진 상처받는 강산에서 사람인들 행복할 수 있을까.

 

일본은 ‘우는토끼’의 생존권을 사람이 대리해서 법에 호소했고 법원은 토끼의 당사자 지위를 인정했다. 미국도 하와이에 사는 새 빠리야와 까마귀, 플로리다의 사슴과 바다오리, 오리건 주의 점박이올빼미들이 당자자로 인정했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자 개발업자는 사업시행에 앞서 자연계 생물들의 생태적 지위를 꼼꼼히 살피게 되었건만, 우리 법원은 아직 그런 계기를 제공하는데 소홀한 것이다. 1998년 낙동강의 재두루미가 문화재청을 고소했을 때 당사자가 아니라며 기각했던 법원은 2000년 어린이날, 새만금 간척으로 자신의 자연자산이 사라지는 데 법정에 항의한 미래세대의 소송도 기각한 적 있다. 그런데 도롱뇽 따위가 감히 사람에게 소송을?

 

물 속 바위나 돌, 낙엽 속에 10센티미터 가까운 흑갈색 몸을 감추고, 밤에 계곡 주변에서 거미와 곤충들을 잡아먹는 도롱뇽은 머리에 볼록 올라온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짧은 네발을 허우적거리며 걷지만 물속에선 제세상이다. 몸통 길이의 꼬리를 휘저으며 퍽이나 빠른데, 피부호흡에 의존하는 까닭에 늘 척척해야 한다. ‘제주도롱뇽’은 아래턱의 이빨이 많아 육지의 도롱뇽과 구별된다지만 그건 전문가의 생각이고, 생긴 모습은 물론이고 생태적 습성이 거의 같다. 고리핵발전소 인근에 분포하는 ‘고리도롱뇽’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에 의해 삶터가 위축되는 점은 모든 종류에 어쩜 그리 똑같을까.

 

알을 가진 몸통이 동강나기도 한다. 인천녹색연합의 도롱뇽 친구들은 껌과 초콜릿으로 큰돈을 번 대기업이 하필 골프장을 지으려는 계양산에서 위령제를 지내야 했다. 2008년 봄에 많은 도롱뇽의 알을 찾아냈기에 이듬해에도 보호를 위해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느닷없이 그 자리에 철조망이 가로막히더니, 어느날 도롱뇽들이 삽날에 난자당하고 알 무더기들이 흙으로 메워진 게 아닌가. 열쇠는 그 기업이 관리했고 철조망 안에 굴삭기 흔적이 완연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기업 관계자도 관리관청 담당자도 나 몰라라 했다. 하는 수 없어 도롱뇽 친구들은 사죄하는 위령제를 지낸 것이다. 다행히 봉변을 면한 도롱뇽 몇 마리가 알을 낳았는데, 올 봄에 낳은 알은 건강하게 부화되어 내년을 기약할 수 있을지 도롱뇽 친구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더러 도롱뇽을 반갑게 맞는 관료도 도시에 있다. 도롱뇽이 분포하는 곳마다 가느다란 물줄기를 보존하며 물웅덩이를 만들어주자 도롱뇽과 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산새들이 모여 목욕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사람의 냄새를 피한 자연의 생명가치들이 작은 공간에서 모처럼 기지개를 편 것이다. 서울시에서 도롱뇽이 서식하는 계곡을 우수생태지역으로 지정해 보존하자 도롱뇽들은 마음 놓고 알을 낳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도롱뇽으로 이어지는 그곳 생태계의 연결망은 튼실해졌을 테고.

 

천성산 터널로 지하수 유출을 크게 걱정한 지율스님을 거대한 언론이 모독한 일이 있다. 지율스님은 그 언론을 상대로 10원 소송을 제기했고, 어렵게 승소했다. 그렇다고 천성산의 도롱뇽들이 위안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파괴된 삶터에서 계곡물과 지하수가 밖으로 콸콸 새나가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더라도, 당사자 지위를 여전히 획득하지 못한 도롱뇽은 소송 승리를 계기로 사람들이 제발 자연의 생명가치에 눈을 뜨기를 바랄지 모른다. (전원생활, 2010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