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2. 12. 15. 11:07

   역지사지로 배려하는 아주 좁은 공간

 

생추어리농장, 진 바우어 지음, 허형은 옮김, 책세상, 2011.

 

 

남녀 젊은이들 짝 맞추기 프로그램은 언제나 인기리에 방영된다. 요즘 방영하는 그런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이름을 생략하고 1, 2호라 부른다. 그래서 어색한데,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하면 객관적으로 시청하기 어렵다고 제작팀이 판단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동물을 입양하면서 이름을 붙인다. 그래야 반려동물에 사사로운 감정을 북돋을 수 있다. 저명한 침팬지 학자 제인 구달은 침팬지에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선배의 비난을 받은 적 있다. 1호 침팬지 2호 침팬지라 해야 연구 결과가 객관적일까.


비슷비슷한 반려동물을 여럿 입양한 사람은 한 마리 한 마리를 구별한다. 개성이 있기 때문일 텐데, 집안이나 울타리 안에서 쓰다듬는 동물이라면 오래 키우며 개성을 구별할 수 있지만 가끔 방문하는 객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동물이 제 이름을 얼마나 기억하고 간직하는지 궁금한데, 그 여부와 관계없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개성이 배려되는 공간에서 살아간다면 객관을 위장한 번호보다 사사로운 감정을 바탕으로 정하는 이름이 필요할 것 같다.


한 마리의 소에 개성이 있을까. 당연하다. 젖소를 십 여 마리 키운 친척은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새벽에 주인 발소리를 반기며 다가오는 젖소마다 별명을 붙여 구별했다. 새침이, 욕심이, 고집통, 그런 식이다. 닭 우리에 새로운 무리를 넣으면 난리가 난다. 서로 쪼아대지만, 서열이 정해지면 다시 조용해진다. 닭은 99마리의 서열을 기억한다고 하니, 술만 마시면 선후배 사이에도 멱살을 잡는 사람은 머쓱할 밖에. 한데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동물의 개성을 살필 기회가 없다. 한 마리만 키우는 반려동물에 구별할 개성이 없지만, 요사이 목장은 농부가 일일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축을 사육한다.


제가 낳은 자식도 많으면 언제나 애지중지할 수 없는데, 가축은 사람에게 오죽할까. 지난 구제역 파동 때, 목장주들은 가족처럼 사육한다고 말은 꺼냈지만, 살처분할 때 무참했다. 자식의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공들여 키우던 소 한 마리라면 아쉬운 마음으로 도축업자에게 넘길 테지만, 수많은 가축을 모아놓고 사육하다 일제히 도축업자에 넘기는 요즘 목장이야 어디 그런가. 가축의 개성을 구별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함부로 다뤄지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가축들이 다치거나 죽는다. 공장에서 불량 부품이나 파손된 제품을 마구 버리는 것처럼. 하지만 이름이 붙지 않은 가축들도 살아 있고 개성이 분명히 있다. 기계 부품처럼 다뤄지는 과정에서 가축들은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진 바우어는 동물, 그 중에 가축의 개성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개성을 말살하며 사육하는 목장에서 다쳤거나 그런 상태에서 방치되는 동물을 구조해 안전한 공간으로 옮겨 보살핀다. 타고난 개성을 발산하며 남은 수명 동안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는 일을 미국에서 시작했다. 사육 가축이 대단히 많은 미국에서, 물론 그 혼자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장식 축산 과정을 볼 기회가 없고, 보더라도 외면하겠지만 그는 직시했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마음을 모아 고통 받는 동물을 구조하는 일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통 농장에서 한두 마리 키우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공장식 축산이 일으키는 가축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고기를 위해, 또는 가죽을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므로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진 바우어는 달랐다. 비록 살코기를 위해 사육하고 어린 나이에 도축될 운명이라고 해도,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닌가. 살아 있는 동안 타고난 개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온당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사육장을 돌아다닌다. 어린 상태에서 몸집이 부풀려진 가축들이 폭력에 가까운 사육으로 기진맥진해 쓰러진 모습을 보고 분노하고, 그런 가축들을 구조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인도적인 사육과 도축을 위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아무런 제지 없이 경제적 방식으로 사육해왔던 목장주들은 돈만 많은 게 아니라 권력도 크다. 로비력을 총동원해 진 바우어가 개선하려는 동물학대 방지 법률을 차단하는데 번번이 성공한다. 물론 그런다고 포기할 진 바우어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성 프란체스코라는 호칭에 걸맞게, 언론을 통해 축산 환경의 문제를 지적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의원을 설득해 법률 개정으로 이끈다. 비단 동물의 학대 방지에서 그치는 건 아니다. 그런 축산환경에 종사하는 이의 인성도 황폐화되지 않던가. 하지만 어렵게 개정한 관련 법률은 변죽만 울린 뿐이다. 탐욕스런 축산, 고기를 탐하는 사람들의 식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동물의 눈높이에서 만족스런 개선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진 바우어가 제아무리 성탄절의 산타클로스처럼 동분서주한다고 해도, 미국 땅에서 사육되는 가축의 일부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다. 즉각 생추어리농장으로 옮겨도 그 혜택은 일부 가축만 받을 뿐이다. 땅을 아무리 확보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구조된 동물의 일부를 진 바우어는 살갑게 소개한다. 개성이 배려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모습을 독자에게 전하는데, 우리는 어떤가. 미국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가축을 사육하는 우리는 동물의 개성을 배려하고 있을까. 개나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을 구조하는 기관이 없지 않지만 목장에서 사육하는 가축은 방치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축의 개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최근 정부는 멧돼지는 한 마리에 10만원, 고라니는 2만원, 꿩은 3천원이라고 수렵인들에게 고지한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알 자연의 이웃은 사람의 객관적 가격을 되묻고 싶을 텐데, 일부 사람들은 동물을 물건처럼 가격으로 거래하고 피해 보상하는 동물보호법을 개정하려 애쓴다. 하지만 아직 개정을 확신할 수 없는 동물보호법 개정안은 가축을 여전히 소외한다. 진 바우어 같은 이가 이 땅에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동물인데, 진 바우어처럼 동물의 처지를 역지사지할 수 없을까. (우리와다음, 201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