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6. 12. 27. 22:22
 

『진보의 패러독스』,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 엮음, 당대, 1999.

『과학기술ㆍ환경ㆍ시민참여』, 참여연대시민과학센터 엮음, 한울아카데미, 2002.



생명안전 및 윤리에 관한 법률이 제대로 제정되었다면 황우석 사태가 발생되었을까. 지난 2001년 5월 22일, 과학기술부장관 ‘생명윤리자문위원회’는 현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의 근간이 되어야 할 ‘생명윤리기본법 골격안’을 발표했다. 각각 5명인 생명공학자와 의사를 비롯하여 인문사회학자 5명, 종교계 3명, 필자가 포함된 시민단체 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정부 입김을 배제한 가운데 의안과 의사일정을 결정했고, 회의록으로 공개했듯 7개월 동안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격론을 벌였다. 생명윤리를 견인할 법 초안을 구상하기 위해 모두 진지했다.

 

대립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어렵게 골격안은 합의되었고, 위원들은 민주적으로 합의된 만큼 골격안은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골격안이 발표되자마자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앞으로 쪼르르 뛰어간 기자들은 취지를 왜곡하는데 앞장섰고, 생명공학계의 노골적인 성화로 골격안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후 윤리ㆍ종교ㆍ여성계와 시민단체에서 빗발치는 논란에 귀를 닫은 정부와 국회는 윤리가 실종된 법을 제정, 2005년 1월부터 가동하게 된 것인데, 황우석 전 교수를 위해 제정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 법은 현재 개정이 논의 중이다. 애초의 골격안을 따랐다면 법을 1년 만에 개정하거나 국제 망신을 자초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의 새벽을 찢은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은, 시민들의 참여가 봉쇄된 과학기술일수록 위험사회를 촉발하고, 규모가 거대할수록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새롭게 각인시켰다.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에서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라고 칸트의 명제를 빌어 주장한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관료들이 입안한 과학 정책은 무모하고, 윤리 없는 과학기술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과학은 기술과 만나면서 호기심의 영역을 벗어났고, 기술은 과학의 지휘를 받으면서 손재주의 영역을 타파했다. 따로 소박했던 과학과 기술이 만난 것인데, ‘과학기술’은 대단히 복잡할 뿐 아니라 전문화되었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도무지 접근할 수 없다. 이론과 용어가 배타적인 까닭이다. 과학기술은 점점 거대해진다. 그만큼 막대한 연구비를 필요로 하고 연구비는 자본과 국가가 제공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은 기업과 국가에 봉사한다. 복잡하고 거대한 과학기술에서 개개의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최후 어떤 결과를 빚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생명공학이나 핵무기에 관계하는 과학기술이 그렇다. 정보통신과 관련하는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거야! 부가가치가 1조 달러가 넘는다고! 자네의 손에 기업이, 국가 운명이 달려 있네! 불치병 난치병을 치료하자는 게 아닌가! 식량과 인구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줄 걸세! 희귀동물 복제로 생태계를 풍요롭게 하고 환경과 에너지 문제도 자네 손에 달렸어!” 거룩한 미소로 다가와 거액의 연구비를 쥐어주는 자본과 국가는 그들이 짜놓은 맥락 속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 과학기술자에게 선지자의 구호를 암송시킨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기자들이 거든다. 그런 과정에 노출된 시민은 과학기술자가 그린 장밋빛 미래상에 각인되었는데, 현대 과학기술은 위험하지 않을까.

 

얼마 전 참여연대에서 독립한 ‘시민과학센터’는 한때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이었다. 그들은 과학기술 정책도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과학센터는 자신들의 주장을 모아 1999년 『진보의 패러독스』와 2002년 『과학기술ㆍ환경ㆍ시민참여』를 발간했다. 현대 과학기술의 정책 결정을 시민에게 맡기라는 주장은 너무 무모할까. 과학기술이 베푸는 이익은 공급자에게 편중되지만 위험은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집중되는데. 소비자인 시민은 과학기술의 정책결정 과정에 소외되어야 마땅할까.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급진적일까. 아니다. 절차가 다소 복잡하기는 해도 과학기술의 민주화가 성공한 사례가 많다. 민주주의가 숙성한 나라에서 앞장섰다.

 

전기를 생산 판매하는 기업에게 장기 전력수급계획의 입안을 맡기면 발전소는 넘치고 전기 효율화는 요원해진다. 우리가 독일, 영국, 프랑스보다 1인당 전기 소비량이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댐과 아파트의 건설 여부도 소비자가 결정한다면 지금의 상황과 사뭇 다를 것이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과학기술을 전달하고, 과학기술을 충분히 이해한 시민의 의사에 따라 과학기술의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는 과하기술에 의하는 피해를 덜 보고 위험사회는 그만큼 멀어진다. 방법은 ‘심의 민주주의’다. 『과학기술ㆍ환경ㆍ시민참여』는 심의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방법과 사례를 소상하게 전한다. 『진보의 패러독스』는 과학기술 민주화에 내한 대중의 이해를 도모하고 민주화가 필요한 과학기술 분야의 실태를 들여다본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첫 실험을 하며 느꼈던 소회도 시민단체의 눈으로 독자에게 전한다.

 

1998년과 1999년, 시민과학센터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유전자 조작 식품’과 ‘생명복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시민들에게 물었다.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심의민주주의 방법 중의 하나인 ‘합의회의’를 최초로 실험해 본 것이다. 2004년에는 핵발전 위주의 전력사업이 과연 타당한지 시민에게 묻는 합의회의를 시민과학센터에서 진행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합의회의에 참여한 시민들이 숙의하여 도출한 결론은 정책결정자들이 반영하지 않았다. 우리의 과학기술 정책 결정자들은 아직 민주화를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핵발전소는 계속 늘어나고, 제2 제3의 황우석이 차례를 기다린다.

 

과학기술에 관여하는 자에 의해 유포된 과학기술 신화에 어려서부터 매몰된 시민들에게 참여민주주의로 자본과 국가권력에 쉽게 현혹되는 낡은 패러다임을 혁신하자고 주장하는 『진보의 패러독스』와 『과학기술ㆍ환경ㆍ시민참여』는 소비자인 독자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것이다. 숱한 환경갈등을 해결할 실마리가 보고 제2 황우석 사태를 막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두 권을 시민과학자로 성장하고 싶은 학도에게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힘을 갖춘 과학기술 민주화 운동가로 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출판저널, 2007년 2월호)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