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1. 11. 7. 13:01

 

진화의 종말, 폴 에얼릭, 앤 에얼릭 지음, 하윤숙 옮김, 부케, 2011.

 

 

지난 1031, 세계 인구는 드디어 70억 명을 돌파했다. 199910월 이후 12년 만에 10억이 늘어난 것이다. 이런 추세로 21세기 말이면 100억을 넘길 것으로 학자들은 전망하는데, 그때까지 살지 못할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100이 넘는 인구의 아비규환은 지금부터 돌이켜야 할 텐데. 70억을 돌파하면서 언론은 사라예보에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축복을 받은 60억 번째 아기의 삶을 주목했다. 참 고달팠던데, 70억 번째 아기는 인구가 80억을 돌파할 때에도 건강한 삶을 구가하고 있을까.

 

1960년대 신맬서스주의자들이 퍼뜨린 인구폭탄망령이 재현되려는지, 언론마다 새삼 환경과 자원 문제를 짚고 나섰다. 에너지 과소비에 의한 지구온난화, 그리고 세계의 인구와 식량 부족을 걱정했지만, 우리의 인구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4000만이 넘을 때엔 큰일이다 눈을 부라리더니, 5000만을 넘긴 현재 더 낳으라 다그쳐도 괜찮은 건가. 식량의 4분의3과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하면서 더 낳으라는 우리. 세계 인구가 우리처럼 소비한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지, 어떤 언론도 우리의 끔찍할 내일을 경고하지 않았다.

 

1968년 폴 에를리히는 인구폭탄을 썼다. 18세기 맬서스처럼, 폴 에를리히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식량이 먹이지 못한다면 사회 혼란을 맞을 수 있다고 무섭게 경고하며 세계적 산아제한 정책을 옹호했다. 그로부터 40, 그는 제 아내와 진화의 종말로 우리 출판사가 2011년 의역한 제목의 책 The Dominant Animal2008년에 출간했다. 록펠러와 포드재단의 지원으로 세계 인구의 증가를 제한하려 미국이 가난한 국가들을 쥐 잡듯 볶아댈 때, 미국 대학의 젊은 생물학자 폴 에를리히는 신맬서수주의자의 선봉에 섰는데, 요즘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언뜻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게, 제목을 진화의 종말로 의역한 출판사 부케는 저자들의 성을 에얼릭이라 했지만 독일 태생이므로 에를리히라 해야 옳다. 그는 자신의 성을 독일 발음인 에를리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맬서스주의가 풍미했던 1960년대, 풍요로운 미국의 삶에 익숙해진 에를리히는 늘어나는 세계의 가난한 인구를 주목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삶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웠고 80세에 다가서면서 쓴 진화의 종말에서 미국식 삶을 비판하게 되었다. 지구 최상위 포식자마저 지배하는 인간의 수는 현재 지나치게 많다. 그러므로 이제와 확! 줄일 수 없다면, 대안적 삶을 모색해야 한다.

 

에를리히는 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다. 그는 인간이 큰 두뇌를 앞세우고 지구촌에 나타나 인구를 한없이 늘리면서 발생한 생태적 변화부터 주목한다. 진화돼 나타난 숱한 생물종들은 예측할 수 없는 환경변화에 적응하거나 도태되면서 명멸했지만 자연스러웠는데, 인간 등장 이후 급변했다. 커다란 두뇌로 엮어나간 문화는 이윽고 과학을 만들어내 이론과 기술을 새롭게 얹어나가더니, 자신만을 위한 과학기술로 확장하면서 사단을 일으켰다는 거다. 진화를 연구하는 원로학자다운 차분한 설명은 이어진다. 진화와 문화가 환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한 일반 독자는 물론, 환경변화에 무덤덤한 생물학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한마디로 환경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문화에 편견이 개입되면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거다.

 

젊었을 때 인구 문제를 잘 못 건드려 적잖게 혼났던 에를리히는 다시 인구 문제를 천착한다. 자신의 치기를 만회하려는 듯, 늘어난 인구가 추구하는 탐욕스런 개발로 위기에 처한 지구촌을 다방면으로 들어다본다. 내일을 걱정하는 원로학자의 모습이다. 1만 년 전, 농사를 갓 배웠을 때 인간은 고작 500만에서 1000만 정도. 최근 투쟁에 가까운 산아제한이 전개되었건만 어느새 70억을 돌파하고 말았다. 그들은 대개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흥청거리는 삶을 동경한다. 미국이 퍼뜨린 장밋빛 문화가 그렇게 우릴 유혹하지 않던가. 한데, 과학기술을 앞세우며 자신의 수명을 배타적으로 연장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생태계의 흐름마저 거부한다. 생태계까지 독점하려 든다.

 

독점? 그런 욕심과 무관한 사람들은 파괴된 생태계에서 물려받은 문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하기도 벅차다. 가난한 이를 향해 인구폭발의 원흉이라며 산아제한을 강요하던 부자들이 가난한 이를 구제한다며 도입한 과학기술, 다시 말해 녹색혁명은 흥청거리는 인구를 조금 늘렸지만 굶주리는 인구를 대폭 늘렸다. 늘어난 식량이 부자들의 식도락에 전용되었기 때문이다. 생물다양성을 위축시키고 대수층을 고갈시킨 탐욕은 가난한 지역의 150배의 소비를 자행한다. 부자들이 먹어치우는 가축은 사람의 무게를 능가했고, 생태계가 생산하는 총량의 절반을 가로챈 대가로 가난한 지역의 질병은 만연되고 지구는 온난화되더니, 아뿔싸! 이제 단순화된 생물종과 농업은 내일을 불안하게 만들고 말았다. 탐욕의 부메랑인데, 어처구니없게 그 부메랑은 가난한 이부터 위협한다.

 

생태계의 순환마저 방해해는 독성물질을 함부로 버리는 인간의 탐욕은 제 발목을 잡을 지경이 되었다. 이제 사람의 생태발자국은 지구 전체를 덮었다. 미국 평균의 삶을 위해 지구는 5개가 더 필요한데, 우리는 할리우드 평균처럼 살고 싶어 안달한다. ‘한미FTA’가 그 증건데, 돌이킬 대책은 더 착취적인 과학기술에서 찾아야 할까. 생명공학으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유전자가 획일적인 작물로 증산하는 대안일까. 미국에서 존경받으며 살아온 에를리히는 어쩔 수 없었는지, 책 말미에서 상투적이지만 개과천선한 결론을 내놓는다. 70억의 인구 중에서 가장 살자는 자들부터 자연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삶으로 돌아가자는 거다.

 

진화의 측면으로 볼 때, 인간의 내일은 어떨 것인가. 에를리히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인간은 변화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억 년 동안 5번 보여준 대량 멸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멸종한다는 뜻인데, 피하거나 멸종을 최대한 늦추려면? 역시나, 탐욕스런 계층부터 산아제한하며 흔쾌히 가난하게 살기가 아닐까. 맥 빠지지만 이 마당에서 달리 대안이 없다. 공허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와다음, 2011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