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7. 5. 7. 20:22
 


《나무의 죽음》, 차윤정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7.

《나무와 숲의 연대기》, 데이비드 스즈키ㆍ웨인 그레이디 지음,

이한중 옮김, 김영사, 2005.



1990년대 중반, 군사종합훈련장 부지로 예고된 강원도 인제군의 한 깊숙한 산을 식물생태학자들과 찾아갔다. 극상림. 그곳은 극상림이었다. 식물생태학자가 탄식하는 극상림에 처음 들어간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안아야 할 정도로 두꺼운 줄기가 까마득하게 높게 이어지는 나무들이 저마다 햇빛을 차단하며 드문드문 서 있는 곳. 오래 전에 넘어진 나무가 군데군데 뒹굴고 위에 이끼가 푹신한 극상림은 적막하면서 포근했다. 오래된 숲이었다.

 

오래된 숲에선 무슨 일이 펼쳐질까. 《숲의 생활사》와 《신갈나무 투쟁기》에서 숲에서 전개되는 생태계의 생명활동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했던 차윤정이 이번에는 ‘오래된 숲에서 펼쳐지는 소멸과 탄생의 위대한 드라마’를 독자에게 내놓았다. 나무가 죽는다는 것은 숲에 기대 사는 무수한 생명의 탄생과 생장을 의미하는 것. 한 그루의 나무가 죽으며 생태계에 남김없이 기여하는 과정을 식물생태학자의 시선으로 설명하면서 마지막으로 《나무의 죽음》을 애도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쉘 실버스타인은 과일과 그늘을 주던 나무는 목재를 잘라주며 사람의 탐욕을 채워줄 뿐 아니라 늙어 돌아온 사람에게 남은 그루터기까지 쉼터로 내준다고 이야기한다. 차윤정은 숲에서 사람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사람이 개입한 순간 숲은 상처를 입고, 병들어 쓰러지지 않던가. 고성산불을 보라. 송이버섯을 노리고 소나무만 획일적으로 심자, 작은 불씨에도 드넓은 숲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단일 품종의 소나무를 몰아 심은 곳에서 확산하는 재선충은 어떤가. 숲의 자연스런 천이를 방해하는 사람은 무서운 질병을 안겨주곤 한다.

 

차윤정의 화두는 ‘희생’이다. 늙거나 상처받은 나무가 죽는 과정에서 딱정벌레와 동고비, 버섯에 자신을 내어주며 쓰러져 도롱뇽이나 다람쥐의 안식처가 되다, 나중에 미생물이 깃드는 흙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반면, 데이비드 스즈키와 웨인 그레이디는 ‘공생’이 화두다. 산불이 휘몰아친 뒤 어렵게 싹이 튼 한 그루의 나무가 제 수명대로 자라고 죽어 한줌의 흙으로 사라질 때까지 숲속 다른 생물들과 맺는 공존을 아름답게 풀어낸다. 그들도 숲에 개입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삼간다. 오래된 숲을 지키려는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한 독자는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의 《나무 위의 여자》(가야넷, 2003)를 읽으면 좋겠다. 《나무와 숲의 연대기》에서 기계톱 드는 사람이 낄 자리는 없다.

 

오두막에서 해변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비스듬하게 자란 수령 400년의 더글러스-퍼 소나무는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쓸 때 태어났다. 하지만 사실, 35억년에 걸친 지구 진화의 역사를 온전히 품고 있다고 《나무와 숲의 연대기》 저자들은 주장한다.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말이다. 번개 맞아 타버린 숲에 뿌리내린 더글러스-퍼는 제 자리를 지키며 자라고 성장하지만 혼자가 아니다. 뿌리에서 줄기, 줄기에서 나뭇잎까지, 주변의 생물과 연대한다. 덕분에 건강하다. 어린 뿌리는 진균과 양분은 나누고, 두꺼워진 줄기는 딱따구리와 솔잣새에게 먹이를 내어주면서도 보호를 받으며, 나이 든 뿌리는 도롱뇽과 늑대의 보금자리를 내어주며 천수를 누린다. 그러다 쓰러지면 《나무의 죽음》에서 차윤정이 주목한대로 흰개미에 마지막 부스러기마저 다 내어주는 더글러스-퍼의 전기. 우리 참나무와 그리 다르지 않은 생태계의 오랜 서사시다.

 

더글러스-퍼나 우리의 참나무나 자연에 뿌리를 내려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우연이다. 나중에 먹으려고 볼주머니에 넣었던 도토리를 땅 속에 파묻은 다람쥐의 짧은 기억력 덕분이다. 많은 씨앗 중에 하필 그 더글러스-퍼는 번개 맞아 화염에 휩싸일 숲에 떨어졌고 마침 비가 내리지 않았던가. 독수리가 둥지를 쳐 줄기를 갉으려는 비버를 차단한 것이나, 오색딱따구리가 줄기를 쪼아 매미 유충을 잡아먹은 것은 필연이 아니다. 그들의 만남은 다분히 우연이다. 그렇게 삼라만상은 얽히고 섞였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은 좀 겸손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나라의 터줏대감인 참나무나 북아메리카에 자생하는 더글러스-퍼는 살아서나 죽어서 많은 생물종과 공생을 한다. 생태학자는 참나무는 700여 종류의 생물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한다. 더글러스-퍼도 마찬가지일 것. 생태학자가 쓴 《나무의 죽음》과 《나무와 숲의 연대기》는 재미있다. 생물종의 다양성의 가치와 그들이 서로 연대하며 순환할 때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것을 쉽게 이야기한다. 인간사회의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고, 그 의견이 민주적으로 논의될수록 사회는 건강하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사회에 병이 많다는 건 국내외의 숱한 역사가 증명한다.

 

최근 참나무시들음병이 돌고 있다고 한다. 산림 당국은 소나무 재선충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지만 생태적으로 참나무의 질병을 가볍게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생물이 많은 참나무는 능히 질병을 견뎌내리라 믿는다.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분포하는 ‘참’ 이라는 벼슬을 가진 나무답게 품이 유난히 넓기 때문이다. 차윤정은 《나무의 죽음》에서 참나무를 지칭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계없다. 오래된 숲에 자생하는 나무라면 많은 생물종과 공생 테니, 살아서든 죽어서든 내일의 생태계에 기여할 것이다.

 

살아서 생태계를 교란하는 사람은 죽은 몸도 생태계에 온전히 보시하길 꺼린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미디어, 2003)에서 작은나무의 할아버지 친구 윌로 존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나 죽거든 내게 바람과 그늘을 준 저 나무 아래 묻어주게. 일 년 치 거름을 충분할 걸세.” 부탁했는데, 우리는 시신을 화장해 나무 아래 묻는 수목장도 호화판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죽음》과 《나무와 숲의 연대기》를 읽고 많이 느낄 필요가 있겠다.

 

사진을 곁들인 《나무의 죽음》과 달리 《나무와 숲의 연대기》는 멋진 그림으로 나무와 숲의 공생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사진보다 그림의 설득력이 빼어나지만 우리 출판계는 아직 그림을 채용할 준비가 덜 되었을 것이다. 아쉬움을 느끼지만, 좋은 책이 계속 출간되는 점은 위안이다. 이제 독자의 역할이 남았다. (출판저널, 2007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