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12. 29. 18:23

 

겨울을 맞은 논둑 가장자리는 배어나오는 물을 따라 기다란 얼음판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거기에서 외발썰매를 탔다. 더 어릴 땐 얼음이 넓은 논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양날썰매를 탔지만 자라면서 시시해졌고 좁고 긴 얼음판에서 요즘 스노보드처럼 방향전환이 쉽고 빠른 외발썰매라야 직성이 풀렸던 거다. 뾰족한 쇠막대를 끝에 단단히 박아놓은 긴 작대기를 바짓가랑이에 찔러넣고 썰매에 오르면 우리는 기고만장했다. 바지 허벅지에 구멍이 날 줄도 모르고 썰매 뒤의 얼음을 작대기로 열심히 밀어내다보면 매서운 추위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었다. 얼음과 우리들이 물러날 즈음, 도롱뇽이 그 자리에 알을 낳았다.

 

아침 볕 받으면 살얼음이 슬며시 사라지는 3월이면 도롱뇽의 향연이 벌어졌다. 암컷 한 마리에 꽈배기처럼 들러붙은 수컷들은 서로 밀어내려 애를 쓰고, 마침내 다른 수컷들을 제압한 녀석과 한참 몸을 비비던 암컷은 이윽고 여덟팔자처럼 한쪽 끝이 이어진 완두콩 꼬투리 모양의 알 두 덩어리를 짚이나 낙엽, 작은 가지나 돌에 붙여 낳았다. 투명한 꼬투리 안에 삼사십 개 남짓 소복한 갈색 알은 3밀리미터 정도로 클 뿐 아니라 분열하는 모습이 뚜렷해 대학교 생물학과 학생들의 실험재료로 환영을 받았는데, 요즘은 통 볼 수 없다. 도롱뇽이 사라졌다기보다 관개농업 이후 알을 낳을만한 물이 봄철의 논에서 사라졌고, 산간 계곡까지 도롱뇽 알을 찾으러가는 조교나 학생이 드물어진 거다.

 

그 도롱뇽이 법정에 서려 했다. 물이 차고 맑은 산간계곡에 아직 터 잡고 사는 도롱뇽 중에서 경상남도 양산시 천성산의 둥지를 지키던 도롱뇽이 절박한 마음으로 사람의 법에 호소한 것이다. 활성단층과 그로 인한 파쇄대가 휘감는 까닭에 시리도록 차고 맑은 물이 사시사철 넘쳐흐르는 곳이 천성산인데, 그 천성산을 18킬로미터의 터널이 뚫고 지나가면 계곡의 물과 지하수는 갈수기마다 바싹 마를 터. 경부고속전철을 위해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는 터널 공사를 즉각 시행하지 말아 달라고, 환경영향평가를 받은 지 10년이 지났으니 법규대로 엄밀한 방법으로 재평가를 받은 뒤 대안노선을 찾아달라는 호소를 해야 했던 거다. 하지만 도롱뇽이 직접 소장을 쓸 수 없는 일. 지율스님과 전국의 ‘도롱뇽의 친구’들이 도롱뇽의 안타까움을 대신 전하기로 했다. 2003년의 일이다.

 

하지만 허탈했다. 결국 소송 당사자 자격을 얻지 못한 도롱뇽은 법정 문턱도 넘을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고리타분한 법리 탓인데, 기업을 ‘법인’이라면서 사람이 소송을 대신할 수 있게 하는 법은 자연의 생명가치는 외면해야 할까. 법리는 그 나라의 문화의식의 수준과 직결된다던데, 국가의 품격을 높이자고 목청 높이는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더불어 살아왔던 자연의 뭇 생명가치들은 결국 버림받아야 하나. 그들이 사라진 상처받는 강산에서 사람인들 행복할 수 있을까.

 

일본은 ‘우는토끼’의 생존권을 사람이 대리해서 법에 호소했고 법원은 토끼의 당사자 지위를 인정했다. 미국도 하와이에 사는 새 빠리야와 까마귀, 플로리다의 사슴과 바다오리, 오리건 주의 점박이올빼미들이 당자자로 인정했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자 개발업자는 사업시행에 앞서 자연계 생물들의 생태적 지위를 꼼꼼히 살피게 되었건만, 우리 법원은 아직 그런 계기를 제공하는데 소홀한 것이다. 1998년 낙동강의 재두루미가 문화재청을 고소했을 때 당사자가 아니라며 기각했던 법원은 2000년 어린이날, 새만금 간척으로 자신의 자연자산이 사라지는 데 법정에 항의한 미래세대의 소송도 기각한 적 있다. 그런데 도롱뇽 따위가 감히 사람에게 소송을?

 

물 속 바위나 돌, 낙엽 속에 10센티미터 가까운 흑갈색 몸을 감추고, 밤에 계곡 주변에서 거미와 곤충들을 잡아먹는 도롱뇽은 머리에 볼록 올라온 작은 눈을 크게 뜨고 짧은 네발을 허우적거리며 걷지만 물속에선 제세상이다. 몸통 길이의 꼬리를 휘저으며 퍽이나 빠른데, 피부호흡에 의존하는 까닭에 늘 척척해야 한다. ‘제주도롱뇽’은 아래턱의 이빨이 많아 육지의 도롱뇽과 구별된다지만 그건 전문가의 생각이고, 생긴 모습은 물론이고 생태적 습성이 거의 같다. 고리핵발전소 인근에 분포하는 ‘고리도롱뇽’도 마찬가지인데, 사람에 의해 삶터가 위축되는 점은 모든 종류에 어쩜 그리 똑같을까.

 

알을 가진 몸통이 동강나기도 한다. 인천녹색연합의 도롱뇽 친구들은 껌과 초콜릿으로 큰돈을 번 대기업이 하필 골프장을 지으려는 계양산에서 위령제를 지내야 했다. 2008년 봄에 많은 도롱뇽의 알을 찾아냈기에 이듬해에도 보호를 위해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느닷없이 그 자리에 철조망이 가로막히더니, 어느날 도롱뇽들이 삽날에 난자당하고 알 무더기들이 흙으로 메워진 게 아닌가. 열쇠는 그 기업이 관리했고 철조망 안에 굴삭기 흔적이 완연했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기업 관계자도 관리관청 담당자도 나 몰라라 했다. 하는 수 없어 도롱뇽 친구들은 사죄하는 위령제를 지낸 것이다. 다행히 봉변을 면한 도롱뇽 몇 마리가 알을 낳았는데, 올 봄에 낳은 알은 건강하게 부화되어 내년을 기약할 수 있을지 도롱뇽 친구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더러 도롱뇽을 반갑게 맞는 관료도 도시에 있다. 도롱뇽이 분포하는 곳마다 가느다란 물줄기를 보존하며 물웅덩이를 만들어주자 도롱뇽과 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산새들이 모여 목욕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사람의 냄새를 피한 자연의 생명가치들이 작은 공간에서 모처럼 기지개를 편 것이다. 서울시에서 도롱뇽이 서식하는 계곡을 우수생태지역으로 지정해 보존하자 도롱뇽들은 마음 놓고 알을 낳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도롱뇽으로 이어지는 그곳 생태계의 연결망은 튼실해졌을 테고.

 

천성산 터널로 지하수 유출을 크게 걱정한 지율스님을 거대한 언론이 모독한 일이 있다. 지율스님은 그 언론을 상대로 10원 소송을 제기했고, 어렵게 승소했다. 그렇다고 천성산의 도롱뇽들이 위안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파괴된 삶터에서 계곡물과 지하수가 밖으로 콸콸 새나가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더라도, 당사자 지위를 여전히 획득하지 못한 도롱뇽은 소송 승리를 계기로 사람들이 제발 자연의 생명가치에 눈을 뜨기를 바랄지 모른다. (전원생활, 2010년 3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6. 7. 2. 23:42
 

천수만 간월호에 겨울이면 가창오리 떼가 찾아와 군무를 한다. 누구의 지휘를 받는지 모르지만 수십만 마리가 일사분란하게 어우러지며 현란하게 오르내리는데 신기하게도 한 마리도 충돌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평원을 질주하는 누우 떼, 밀밭을 초토화시키는 메뚜기 떼들도 마찬가지다. 마라톤에 나선 한 무리의 시민들도 부딪히지 않지만 부딪혀도 큰 상처를 입지 않는다. 타고난 한계 내에서 움직이는 까닭이다. 한데 자동차나 선박의 충돌은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개발한 자연에 없는 속도는 화를 부른다.

 

한 농민은 뜻밖의 경험에 놀란다. 멧돼지가 주문이 약속된 유기농 복숭아만 따먹은 것이다. 목줄 끊어져라 사납게 짖어댄 백구가 아니었다면 한 해 농사를 망칠 뻔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겨우 설득해 유기농으로 전환한 이웃의 복숭아까지 지분거린 것이다. 한데 멧돼지는 밀가루에 바구미가 붙지 않는 것처럼 농약 묻은 관행 복숭아는 건드리지 않았다. 농약이 묻은 과일은 자연 감각을 잃은 사람만이 따거나 사 먹을 따름이다. 성장호르몬에 왁스까지 때깔 좋게 바른 것을. 2004년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던 남아시아의 관광객은 쓰나미를 예감하지 못했지만 원주민은 알았다. 왜 그럴까.

 

재래 화장실에 수입밀가루를 뿌리면 구더기가 발생하지 않는다는데, 사람은 그런 밀가루로 음식을 해먹는다. 향료, 색소, 감미료에 기계에 들어붙지 않도록 숱한 첨가물을 넣고서. 그런 빵을 파리와 곰팡이는 기피하지만 청소년들은 즐긴다. 아기 때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초등학생의 절반이 아토피와 천식을 앓는다. 주변을 에워싼 방수제, 접착제, 발색제가 뒤덮인 아파트와 교실도 말초적 자극에 충실한 음식과 음료수도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도 자연에 적응되었는데, 자연의 질서를 교란하는 개발이 부메랑으로 다가오자 더는 견디지 못한다. 불치병과 난치병의 목록은 점점 늘어만 간다.

 

전기로 인한 전장과 자장은 신체의 리듬과 균형을 깨어 질병을 유발한다. 송전탑 인근에 많이 발생하는 백혈병과 뇌종양이 그렇다. 누군가 전기를 ‘잠 도둑’이라 했다. 시계에 따라 책상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신체는 고달프다. 시계는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잘 수 없게 만든다. 작업장 사고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고 교통사고는 신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쇳덩어리와 부딪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없는 교통수단에는 고도의 시설과 규칙을 동반한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 최첨단 전쟁과 무역도 마찬가지다.

 

자연에서 대략 100만 년 전 세상에 진화된 인간은 1만 년 전 경작을 시작하기 전까지 자연과 합일했다. 요사이 제어할 수 없는 화석연료와 파멸적 핵에너지로 자연을 마음대로 재단하면서 제왕으로 군림하지만, 그리 된지 500년도 되지 않는다. 99퍼센트의 세월동안 자연에 동화한 것인데, 자연을 착취하면서 편견과 계층을 낳고 낭비를 일삼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거의 잃었다. 이반 일리치의 지적처럼, 자동차 없이 이동할 수 없고, 병원 없이 치유되지 않으며 학교 없이 교육할 수 없다. 이제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타락하고 말았다. 탕자처럼.

 

자연을 잃고 기계에 삶을 의탁하면서 나약해진 인간은 에너지의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기계 속도에 맞춘 신체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지치고, 불치병과 난치병, 미세먼지와 아토피에 시달리건만 인간의 신체를 지배하는 자본과 이윤은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며 남은 자연을 남김없이 파괴할 것을 명한다. 과정보다 목표, 더욱 빠른 속도를 지향한다. 필요하면 가장 짧고 안전한 지점을 찾아 터널을 내야 하건만 20분 빨리 가려는 고속전철은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겠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 물이 마르면 도롱뇽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연 파괴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면 기계의 속도에 의탁하며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온존할 수 없다.

 

감나무가 북한에 없듯, 사람은 히말라야나 사막에서 생존하지 못한다. 자연에 사는 모든 생물체는 자신에 맞는 환경을 가진다. 그렇게 적응되었다. 자연에서 진화된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지고 건강하다. 인간도 간혹 인위적으로 재단한 자연의 자리에 미적 감각을 도입한 건축물을 세워 구경꾼을 몰려들게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템스 강가의 ‘런던 아이’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잠시 눈요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피라미드나 타지마할의 경관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알프스에 케이블카를 깔아 노약자도 쉽게 등반하지만 그 때문에 산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졌다. 히말라야까지 케이블카를 놓는다면 알프스처럼 망가질 것이다.

 

어깨띠를 매고 긴 집게를 든 일단의 인간은 등산로에 모여 자연을 보호하자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외친다. 버린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버리지 않는 게 옳지만, 인간이 감히 자연을 보호할 수 있나.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지 않던가. 결국 인간을 위해, 건강해야 할 다음 세대를 위해, 도롱뇽이 살 수 있는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단층대와 파쇄대가 지나가는 천성산에 긴 터널을 함부로 뚫지 말라고 주장하는 환경단체에 대해, 어떤 이는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지 무조건 보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조화라. 내 주장에 따라주는 것이 합의라고 고집하는 노회한 정치인의 거북한 논변을 듣는 것 같다. 이미 파괴될 만큼 파괴된 자연인데, 도대체 어떻게 조화를 이루겠다는 것일까.

 

이윤을 노리는 자연파괴는 조화와 다르다. 멧돼지가 사는 곳에 과수원을 만드는 것도 물이 풍부한 작은 산을 종축으로 뚫는 터널도 철새가 깃드는 곳을 매립하는 것처럼, 조화와 거리가 멀다. 전에 없던 기상이변과 질병이 난무하는 현재, 자연을 뚫고 메우고 파내며 도륙하는 인간은 각성해야 한다. 인공을 모두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나약해진 인생일지라도, 후손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오늘과 같은 삶을 반성하고 자연 앞에 제발 좀 겸손해야 한다. 존경심 없이 자연에 대한 평화는 물론 인간 사이의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의 걷잡을 수 없는 아토피는 그 마지막 경고다. (환경미디어, 2006년 8월호)

아토피는 선전 포고 일 뿐. 지구라는 생명체가 인간의 탐욕으로 그 질서를 교란 당하면, 돌아 버리겠지.
돌아버린 눔이 무슨 짓인 들 못할까.
질서란 비정하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의 우둔이 , 그 카오스가
댓가를 치르리...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6. 6. 27. 14:11
 

한 농민은 뜻밖의 경험에 놀란다. 멧돼지가 내려와 주문이 약속된 유기농 복숭아만 따먹은 것이다. 사납게 짖어댄 백구가 아니었다면 한 해 농사를 망칠 뻔 했다. 게다가 겨우 설득해 유기농으로 전환한 이웃의 복숭아까지 지분거린 것인데, 수입 밀가루에 바구미가 붙지 않는 것처럼 멧돼지는 관행 복숭아는 건드리지 않았다. 자연 감각을 잃은 사람만 농약이 묻은 과일을 따 먹을 따름이다. 더구나 성장호르몬까지 바른 것을.

 

재래 화장실에 수입밀가루를 뿌리면 구더기는 발생하지 않는다는데, 사람은 그런 밀가루로 음식을 해먹는다. 향료, 색소, 감미료에 기계에 들어붙지 않도록 숱한 첨가물을 넣는다. 그런 빵에 파리와 곰팡이가 기피하지만 청소년은 즐긴다. 아기 때부터 익숙해졌다. 그래서 초등학생의 절반이 아토피와 천식을 앓는다. 자연에 없는 방향제, 방수제, 접착제, 발색제가 뒤덮인 아파트와 교실도 말초적 자극에 충실한 음식과 음료수도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은 더는 견디지 못한다.

 

전기로 인한 전장과 자장은 신체의 리듬과 균형을 깨어, 질병을 유발한다. 백혈병과 뇌종양이 그렇다. 시계에 따라 책상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신체는 고달프다. 작업장 사고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교통사고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쇳덩어리와 부딪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없는 교통수단에는 고도의 시설과 규칙을 동반한다. 잠시라도 소홀히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 최첨단 전쟁과 무역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 27일자 인천신문은 존경하는 동국대학교 이철기 교수의 칼럼이 실렸다. ‘북한은 되고 일본은 안 되나’라는 제목의 논평은 가슴 한 부석의 의구심마저 시원하게 몰아냈다. 명백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그의 주장은 지식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많은 독자들은 북한 미사일에 대한 미국의 속셈을 눈치 챘으리라. 한데, ‘인간이 중심이다’로 제목의 6월 13일자 인천신문 이 교수의 칼럼은 좀 아쉽다. 천성산에 관한 전후사정을 전공처럼 고민할 수 없어 그랬을까.

 

자연에서 대략 100만년전 세상에 진화된 인간은 1만년전 경작을 시작하기 전까지 자연과 합일했다. 이후 제어할 수 없는 화석연료와 파멸적 핵에너지로 자연을 마음대로 재단하면서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그리 된지 500년도 되지 않는다. 99.9퍼센트의 세월동안 자연에 동화한 것인데, 자연을 착취하면서 편견과 계층을 낳고 낭비를 일삼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거의 잃었다.

 

자연을 잃고 기계에 삶을 의탁하면서 나약해진 인간은 에너지의 고갈을 눈앞에 두고, 기계 속도에 맞춘 신체는 피로와 스트레스, 불치병과 난치병, 미세먼지와 아토피에 시달리건만 자본과 이윤은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며 남은 자연을 남김없이 파괴한다. 필요하면 가장 짧고 안전한 터널을 선택해야 하건만 20분 빨리 가려는 고속전철은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겠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 물이 마르면 도롱뇽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연파괴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면 기계에 의존하는 사람도 안전할 수 없다.

 

감나무가 북한에 없듯, 사람은 히말라야나 사막에서 생존하지 못한다. 탬즈 강가의 ‘런던 아이’는 눈요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경관도 오래가지 못한다. 히말라야까지 케이블카를 놓으면 알프스처럼 망가질 것이다. 이윤을 노리는 자연파괴는 조화와 다르다. 멧돼지가 사는 곳에 과수원을 만드는 것도 철새가 깃드는 곳을 매립하는 것처럼, 조화와 거리가 멀다. 인간의 눈으로 자연보전을 외칠 수 없다. 자연이 인간을 보호하지 않는가.

 

전에 없던 기상이변과 질병이 난무하는 현재, 인간은 각성해야 한다. 인공을 모두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더라도, 후손의 건강한 생명을 위해 이제와 같은 삶을 반성하고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인간 사이의 평화도 자연에 대한 존경심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아토피는 그 마지막 경고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인간의 반성 없이 불가능하다는 절박함을 이철기 교수와 나누고 싶다.(인천신문, 2006년 6월 29일)

퍼다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