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5. 11. 17. 09:06


지난 가을부터 올해 가뭄은 가혹하다. 가을비가 주중 도심을 촉촉이 적시지만 쩍쩍 갈라진 수원지는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데 4대강의 대형 보는 죽어가는 녹조를 끌어안은 채 출렁거린다. 목 타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4대강의 오염된 물그릇은 찬란했던 생태계를 비참하게 단순화시켰다. 녹조와 큰빚이끼벌레가 들끓는 강에 죽어가는 누치와 꾸구리가 이따금 보일 뿐이었는데, 흐름을 멈추고 썩어가는 모래에서 흰수마자는 사라졌다.


예견된 일이었다. 현장을 나오지 않은 대부분의 생태학자는 강의실에서 입을 닫았고, 강 흐름을 연구하는 토목학자는 학생 앞에서 교과서 들추기 민망했을지 모른다. 흐름이 막히는 강은 썩고, 썩으면 생태계가 도륙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정권 최고위층이 강력하게 주장하는 허무맹랑한 발언에 숨죽이며 공개된 장소에서 아무런 반론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신과 같은 연구 분야에서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정권 최고위층과 코드를 맞춰 왜곡 선동을 내놓아도 모르는 체한 까닭일 것이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농산물이 가진 고유 유전자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극단적으로 획일화시켰다. 황우석 전 교수가 실험했던 줄기세포는 성공 여부가 사실상 불투명하고 성공한다면 더욱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비윤리적 연구라는 거, 그 방면 연구자들이 가장 절실하게 알고 있었지만 적지 않은 연구비를 받는 대학의 전문가 중 그 누구도 문제를 삼고 비판하지 않았다. 유사한 연구를 하는 한 학자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는 연구비가 즉각 중단되는 현실을 만나야 했고 결국 전공까지 바꿔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곧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5주기를 맞는다. 내년 311일이다. 그 날에서 한 달 보름이 더 지나면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30년을 맞는다. 강력한 리더십의 강요로 쓰나미가 잦았던 지진대 위에 만든 핵발전소였건만 수명을 함부로 연장한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태평양을 오염시켰고, 먹이사슬을 타고 기하급수로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물고기는 사람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한다. 뒤덮은 콘크리트 틈으로 아직도 방사능을 뿜어내는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하급 연구자의 만류를 억압한 상급자의 고집으로 가동 2년 도 못돼 폭발하고 말았다.


지난 1023일 대전에서 폐막한 세계과학정상회의에서 채택한 결의문이 역사책 국정화에 대해 문제의식 있을 법한 과학자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으로 채택한 과학기술 혁신과 미래창조를 위한 우리의 다짐이라는 제목의 결의문은 정권 핵심에 아부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우리 과학기술 수장들의 자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너절하고 하나마나한 내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다짐인 국가 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하고, 과학적 합리적 국정운영을 펼치도록 적극 협조하고 노력할 것대목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다.


과학은 정치의 시녀!” 1995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거셀 때, 시민단체의 거듭된 추궁에 당시 과학기술부 차관이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굴업도는 흠 없는 단일 응회암이므로 핵폐기장 최적지라고 뚜렷한 사전 조사 없던 정부는 주장했지만 실측한 결과 지진 흔적이 산재하고 갈라진 틈이 명백했다. 그 사실을 들이밀자 핵폐기물 처분장 결정에 합리성을 잃은 당시 정부는 정치가 결정하면 과학은 그저 합리화에 동원될 따름이라고 실토했던 것인데, 그런 현상은 4대강에서 재현되었고, 우리는 그 피해와 위험에 노출돼 있다.


역사책 국정화 논의도 맥락이 비슷할 텐데, ‘강력한 리더십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은 GMO를 낳았고 꿀벌을 사라지게 했으며 바나나를 멸종위기로 몰아넣었다. 조류독감이 돌면 유전다양성을 없앤 닭들이 떼로 살처분되는 이유는 기계화다. 하루 100만 마리를 처리하는 자본의 정교한 기계는 오차범위 내에 닭들이 들어와야 한다고 요구한다. 들쭉날쭉하면 기계가 고장나고, 고가의 기계를 고장나게 한 농가는 계약이 취소돼 퇴출되고 말 것이다. 고기용 돼지와 소도 물론이지만 바나나도 꿀벌도 사정이 비슷하다. 어떤 강력한 리더십에 굴종한 과학기술이 빚은 비극이다.


일찍이 토머스 쿤은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는 오직 한 가지이므로 과학이 밝힌 진리는 시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는 폐기해야 한다고 1962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설파한 것이다. 분명해 보였던 학설은 도전하는 학설과 경합하게 되고, 경합하다 밀리면 새롭게 변하게 된다는 그의 주장은 과거는 물론 현실에 적용된다. 가치중립이라면 과학 교과서는 수정될 필요가 없지만 그런가? 수많은 변수, 상호작용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붙잡을 수 없다. 철두철미한 임상실험으로 안전을 장담했던 의약품 중, 10년이 지나도 부작용이 없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요즘 세간의 명성과 연구비 높낮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과학기술은 순수하기 어렵다. 돈을 지불하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순종하고, 비판을 억압하는 만큼 권력에 아부하는 과학이라면 차리라 청부과학또는 아부과학이라고 말해야 타당하리라. 새로 나온 의약품의 효능을 왜곡하고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침소봉대하는 과학기술만이 아니다. 독립과학자의 접근을 차단한 가운데 핵발전소의 안전을 되뇌고 다음세대를 위한 에너지인양 만면에 웃음을 짓는 과학기술, 심화되는 지구온난화가 빚는 기상이변과 환경변화에 속수무책인 GMO를 식량부족의 대안인양 홍보하는 과학기술이 그렇다. 그들이 강력한 리더십에 충성맹세를 한다.


농업진흥청에서 개발한 유전자 조작 쌀을 산업용으로 심겠다고 다짐하는 가운데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라는 악명을 떨치는 몬산토는 한미FTA를 등에 업고 우리 땅에서 어떤 사업을 준비하려 들까? 거기에 더 끔찍한 하나. 반도체의 한계를 생명산업으로 극복하려는 삼성이 몬산토와 손을 잡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대법원도 무서워하지 않을 기업과 강력한 리더십이 만나 청부과학에 길든 과학기술인들을 거느리면 국정 교과서만 읽어야 할 우리는 어떤 내일을 만나야 하나. 두렵다. (지금여기, 20151116)

 
 
 

서평·추억

디딤돌 2010. 3. 15. 00:15

《청부과학》, 데이비드 마이클스 지음, 이홍상 옮김, 아마고, 2009.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창회 자리에서 만나는 대학생들.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이 한 쪽으로 편중돼 있다는 걸 어렴풋 느낀다. 다시 말해, 이공계는 이공계와, 인문계는 인문계와 대화를 나누는 거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갈린 ‘두 문화’는 자신의 전공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만나기 어려운 강을 건넌 셈이다. 대학생이 된 ‘두 문화’는 동창회에서 이따금 마주 앉지만 상대의 이야기가 어렵거나 재미없고, 때로 공허하게 들린다. 그래서 이내 자기 문화로 돌아가게 된다. 어차피 친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이공계는 흔히 인문계의 이야기가 따분하다고 하는데, 인문계가 듣는 이공계의 이야기는 어떨까. 천박하지 않을까. 그런 인문계에 ‘사회학’이란 분야가 있다. 사회 현상을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해석한다고 주장하는데, 섣부르거나 외골수인 이공계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을 새삼스레 짚거나 구름 잡는 이야기를 쓸모없이 늘어놓는 내용”으로 간단히 넘겨버릴 수 있겠다. 아무튼, 사회학을 ‘사회과학’이라 말하려는 이가 많아서 그런지, 사회학에도 분야가 다양하다. 농촌을 연구하면 ‘농촌사회학’, 여성을 연구하면 ‘여성사회학’, 음식을 연구하면 ‘음식사회학’이다. 노동사회학, 정치사회학, 환경사회학이 있고 과학을 연구하면 ‘과학사회학’이다.

 

과학사회학에서 푹 발효되었을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과학이 아직도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그 묵은 이야기는 “‘과학’은 진실을 파헤치는 영역이고 ‘기술’은 손재주의 영역이라는 과학자의 믿음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대중목욕탕의 욕조에서 불현듯 부력의 원리를 찾아낸 아르키메데스가 기쁨에 넘친 나머지 미처 옷을 입지 못한 상태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다는 ‘과학’ 신화와 그리고 주둥이로 먹이를 먹고 배설까지 하는 자동 오리인형을 만드는 르네상스 장인의 ‘기술’ 신화가 주도하는 시대에서 지금은 멀리 벗어났다고 지적하는 과학사회학은 호기심 영역인 과학과 손재주 영역인 기술이 ‘과학기술’로 만나면서 거대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개개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유지를 위해 거액의 연구비를 요구하는데, 그를 위해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자본과 결탁하거나 패권을 먼저 생각하는 국가의 지배 품에 안기게 되었거나 반대로 자본과 국가의 요구에 응하려고 몸집을 부풀렸는지 모른다. 거대해진 만큼 사회와 소통되는 공간이 좁아진 과학기술은 그들만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공간에서, 다시 말해, 이른바 ‘암흑상자’ 안에서 정책이 결정된다고 과학사회학은 간파한다. 이윤과 패권을 챙기는 자본과 국가와 달리 소비자와 유권자는 소외될 따름이다.

 

과학자는 아직도 가치중립을 과학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을까. 밝힌 이론과 갈고 닦은 재주로 빚어낸 도구가 문명의 이기로 이용될 테지만 경우에 따라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데 과학자나 과학사회학자가 선뜻 동의한다. 그러면서 과학사회학자는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동원했을지라도 도구 자체는 응징할 수 없다”는 주장을 아직도 과학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간직하는지 묻는다. 언젠가 언론은 여성의 하이힐이 살인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보도했다. 뾰족한 뒤축으로 정수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한 남성이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당연히 문제의 구두를 압수하고 범행을 저지른 여인을 구속했을 테지만, 그 구두를 만든 기술자까지 찾아내 가담 여부를 추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이권을 다투는 조직폭력배끼리 서로 휘두른다고 야구 방망이를 팔거나 만든 이를 검찰은 피의자로 몰아가지 않을 것이다. 도구의 가치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이기 때문이다.

 

한데, 생각해보자. 상대 조직을 위협하거나 제압하려고 야구 방망이를 변질시켰다면 우리는 문제의 도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무에 못들을 날카롭게 박아달라고 주문해 납품받은 방망이라도 가치중립이므로 양해해야 하나. 질투에 눈이 먼 여성에게 은근히 다가간 기술자가 뾰족한 뒤축을 단단하게 처리한 구두를 살인을 위한 도구로 팔았더라도 용서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서슬 퍼런 경찰과 검찰은 변질된 야구 방망이를 주문한 자와 뾰족한 구두의 뒤축을 개조한 기술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질시킨 야구 방망이나 구두는 기술 영역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여전히 가치중립일 뿐일까. 미국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과학기술과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청부과학》에서 다시 묻는다.

 

한때 클린턴 행정부에서 에너지부의 환경ㆍ안전ㆍ보건 분야의 차관보를 역임한 적 있어서 그런지, 그는 패권을 위해 국가가 주무르는 과학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지만, 기업에 종속된 과학은 경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가 공직에서 벗어난 뒤 권력을 이어받은 부시 정권이 기업을 두둔하던 사례는 더러 지적하기는 한다. 아무튼, 그가 생각하기에 기업의 이해에 충성하는 과학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해 ‘진실 흐리기’에 앞장선다는 것이다. 담배와 석면 산업이 그랬다고 고발하는 그는 플라스틱과 납과 크롬에 얽힌 사례를 밝힌다. 심지어 극장에서 파는 팝콘에 기생한 과학의 실체를 벗긴다. 기가 막힌 것은 제약회사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담배회사는 자신의 제품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으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사실을 날조하고 진실을 회피하는데 과학을 사용했다고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폭로한다. 홍보회사와 과학자를 고용해 ‘건전 과학’을 내세우는 뻔뻔함까지 과시했다고 덧붙인다. 이른바 ‘쓰레기 과학’이다. 1950년대 담배 피우는 사람이 피우지 않는 이보다 50배 높은 폐암 발생 확률을 가진다는 논문이 《영국의학저널》에 발표되자 담배회사가 고용한 과학은 어떠한 결과물을 거푸 생산해냈던가. 물론 과학적 방법을 가장했지만 정직과 거리가 멀었다. 제조된 결과의 목록은 길기만 하다. “폐암 증가는 결핵 감소와 관련이 있다”던가, “가족적 요인이 폐암의 원인”이라던가, “담배 속의 타르가 부작용의 주범”아라던가, 심지어 “대머리는 폐암이 드물다”는 얼토당토아니한 자료까지 늘어놓았다. ‘불확실성’으로 대응하면서 정상 과학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담뱃갑의 경고문 삽입 의무화를 업계의 승리라고 본다. 경고문이 붙었으므로 흡연자는 담배회사가 자신을 속였다고 항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럴싸하다.

 

“갑자기 공장 바닥에 쓰러져 죽지 않고 다만 그저 숨을 쉬려 안간힘을 쓰다가 시야에서, 마음속에서 사라진” 석면 노동자의 고통은 과학이 철저하게 농락했다는 걸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이어 고발한다. 기업의 청부에 응한 과학의 실체는 데이터 마사지! 불리한 자료를 통계에서 빼는 수법을 사용한다. 조사관이 들이닥치기 전에 석면폐증 앓는 노동자를 대거 해고한다면? 졸지에 수입을 잃은 노동자는 병원에 가서 진단과 치료받을 여력조차 잃지만 기업은 편안한 결과를 챙길 수 있다. 더는 회피할 수 없게 석면의 문제가 드러나자 업체는 흡연에 원인을 전가한다. 인과관계를 흐려놓으면 놓을수록 석면을 오래 팔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석면회사는 결국 피해보상 때문에 파산하고 말았다는데, 보상금을 받는다고 고통스런 노동자의 건강이 회복되는 건 아니다. 방광암 발병 위험을 알면서 30년 동안 판매한 염료의 성분인 베타-나프틸아민도 마찬가지였다. 그 물질을 생산하는 다국적기업 듀폰이 내세운 ‘과학적 알리바이’가 주효한 까닭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사례는 넘치고, 결국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면서 규제기관과 관련 법률들이 연이어 만들어졌지만 ‘사전예방 원칙’에 의거하지 못하는 규제는 노동자나 시민들에게 만족할만한 안전과 안심을 약속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미국 이야기다. “강력한 규제가 노동자와 대중은 말할 것도 없이 업계에도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건만, 기업에서 과학을 지독하게 제멋대로 이용했기 때문으로 《청부과학》의 저자는 풀이한다. 규제의 기준치 제정도 주먹구구였다. “처음에는 부인으로 일관하며 혼란을 유발하다 노골적인 기만으로 옮겨”가는 업체에서 검열을 하니 오죽하겠는가.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세대보다 더 똑똑한 이유를 가솔린과 페인트에 납이 제거된 데에서 찾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대중을 혼란시키려는 목적으로 기업은 ‘납’ 대신 ‘에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분노한다. 문제의 제품명이 ‘테트라에틸납’이었던 거다. 우리나라는 좀 나을까.

 

겉으로 과학인 듯 위장하는 보고서는 불확실성을 퍼뜨리는 과학자들이 기업을 위해 양산한다. 진행을 방해하여 당국의 규제 과정을 더디게 하려는 업계의 과학은 순풍에 돛단 듯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며 성장해갔다. 이른바 ‘제품 방어 산업’이다. 담배, 석면, 베타-나프틸아민, 납에서 그칠 리 없다. 염화비닐, 크롬, 먼지…, 제품 방어 산업의 아이템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자료를 마사지할 뿐 아니라 취사선택하는 ‘쓰레기 과학’의 작품들이다. 그들이 제조해내는 자료는 터무니없이 방대하다. 그래야 과학에 무지한 배심원과 판사가 호의적으로 바라볼 거라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결과를 주로 출간하는 학회까지 창설하니, 법원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팝콘의 버터 향료에 들어가는 휘발성의 디아세틸 유기합성물이 폐암을 유발한다는 의혹이 구체화되었을 때, 규제기관이 업계의 방패막이가 되기도 했다. 산업안전보건부는 “우리가 기준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관할 범위가 벗어난다.” 며 회피했고 식품의약품은 “증거가 없으니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며 버틴 것이다. 기업 친화적 정권 시절이었다. “데이터를 수입하지 마라. 그러면 부상자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이게 당시 규제기관의 신조였다고 《청부과학》의 저자는 꼬집는다.

 

‘택시 기준’은 또 무엇인가. 핵산업에서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는 희소 금속 베릴륨이 매우 낮은 농도에도 폐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핵산업에 관계하는 전문가들이 택시 뒷자리에 앉아 기업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범위에서 기준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처럼 엄격한 역학적 증거도 없이, 기업의 이해와 무관하지 않는 자들이, 생색내려는 목적으로, 적당히 만들어낸 기준치를 ‘택시 기준’이라고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냉소한다. 문제는 그렇게 창조한 기준치를 사수하려고 업계는 ‘쓰레기 과학’을 총동원한다는 건데, 거기에 예의 불확실성이 적극 활용되는 건 불문가지! ‘펀딩 효과’는 제약회사가 과학자에 주로 구사한다. 연구비를 제공하는 제약회사의 요구에 맞춰 결과를 납품하는 연구가 그것이다. 납품하는 자들은 ‘전략적 무지’를 선호한다. 당연한 연구를 생략하는 거다. 부작용을 아예 모르는 편이 속편하지 않은가. 뇌졸중을 일으키는 식욕 억제제, 자살을 부르는 항우울제, 《청부과학》의 저자는 목록을 지면상 그 정도로 줄였지만 훨씬 더 많을 게 틀림없다.

 

문제가 있다는 걸 완벽하게 밝히도록 규정한 법조항이 오히려 문제를 증폭시킨다고 주장하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대안도 제시한다. 새로운 분석 방법에 의해 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이론이 도출돼 기존 이론에 도전할 때, 강고한 기존 이론에 밀려 새 이론이 패퇴하거나 치열한 경합 끝에 기존 이론을 전복하는 게 과학 패러다임의 진면목이거늘, 누가 감히 완벽한 이론과 증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겐가. 판사의 명령에 따라 피해자인 원고가 거대과학의 문제점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려다 그만 재산을 탕진하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면, 앞으로 청부과학이 저지르는 피해로부터 노동자와 시민들은 누가 어떻게 보호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묻는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정보공개와 독립적 연구의 보장, 그리고 기업과 규제당국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금 강조한다. 규제당국의 눈높이를 기업과 국가, 그들의 과학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대중에 맞춰달라는 부탁이요 호소다. 아울러,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심판자가 되는 법원은 노동자와 대중의 처지에 서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피해자와 기업 사이에 만연된 비밀 합의를 중재하지 말아줄 것을 법관에서 신신당부한다. 숱한 경험으로 볼 때, 그런 비밀 합의는 문제를 근절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키지 않았던가.

 

고위 공직자 출신인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과학 전부를 백안시하는 건 물론 아니다. 돈을 쥐어주는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결과를 납품하는 《청부과학》과 그에 탐닉하는 과학자를 비난하는 것이다. 다만, 국가 권력이 좌지우지하는 과학의 실체는 들추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책에도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듯, 과학도 좋거나 나쁠 수 있다. 《청부과학》은 ‘나쁜 과학’이다. 한데 표지만 보고 책이 나쁜지 좋은지 잘 모른다. 내용을 읽어도 전문가가 아니라면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게다가 전문가끼리 좋다 나쁘다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과학은 특히 그렇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평가를 이해관계가 있는 동료 과학자에 맡기는 건 위험할 수 있다. 독립적인 과학자는 물론, 사회와 역사와 문화와 법과 윤리의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어야 실수가 줄어들 것이다. 바로 인문사회다. 다음세대의 처지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중요하고 과학기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문사회의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과학기술’에 ‘사회’라는 창문을 달자는 제안이 과학사회학에서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청부과학》의 저자 데이비드 마이클스는 새삼 언급하지 않았지만, 《청부과학》과 같은 ‘나쁜 과학’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지 않으려면, 이공계와 인문계는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바탕으로 서로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울리히 벡은 1986년 4월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핵발전소 폭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칸트의 명제를 빌어, “과학적 성찰 없는 사회는 맹목이고 사회적 성찰 없는 과학은 위험하다”고 설파했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2학년부터 소통을 가로막는 우리의 이공계와 인문계 분리는 이제 중단해야 옳지 않을까. (녹색평론, 2010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