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7. 3. 21. 13:48


20차 촛불집회를 가지 못했다. 날이 풀리면 참석하리라 다짐했지만 약속 자리를 함께 한 이의 위로로 대신해야 했다. 그 전날, 310일 오전 1121, 퇴임을 사흘 앞 둔 이정미 헌법재판관이 주문을 낭독한 뒤, 식구가 없는 텔레비전 앞에서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쳤을까? 하루가 지나도 목이 컬컬하고 손바닥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경험 많은 재판관들의 이성을 믿었기에 탄핵인용을 내심 확신했지만, 권위주위 정권 하에서 왜곡되는 판결을 하도 보아서 그런지 불안한 마음을 불식할 수 없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이가 많을 텐데, 탄핵이 확정된 순간, 광장의 젊은이처럼 기쁨을 발산한 것인데, 며칠 지나면서 차분해진다. 박정희 체제의 종언을 의미하는 촛불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근원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탄핵 순간부터 언론들은 대통령 선거에 나설 후보들의 면모와 약속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비교하는데, 촛불의 의미와 가만히 중첩해본다. 그들의 약속들은 촛불의 명령을 수렴할 자세를 가지고 있을까? 박정희 체제의 종언에 부합하는 자세일까? 후보는 물론이고 후보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의 됨됨이와 경험을 비판적으로 살피니 긍정하기 어렵다. 광장에 나온 유권자의 판단을 어지럽힌다.


비신실세를 동원하는 표독스런 독재는 반복되지 않겠지만 촛불은 그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 다시 말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비로소 지평을 열 수 있을까? 후보들의 약속은 쏟아지는데, 그 약속들은 당선 뒤 민주주의를 반영하며 실행될 수 있을까? 표를 의식하는 약속이 남발되는 시기라는 걸 양해하고 싶지만, 상당한 약속은 촛불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 아이와 광장에 나온 민중은 자본이나 권력을 호명하지 않았는데, 민중을 다시 소외할 약속들이 허공을 점유한다. 백댄서의 추임새 같은 맹목적 구호는 비판을 봉쇄할 태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국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촛불은 숱하게 되물었다. 후보들은 촛불이 누구에게 물었다고 생각하는가? 진실은 침묵하지 않는다고 했거늘, 민중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천명했거늘, 후보들의 자세에서 촛불의 정신을 온전히 읽기 어렵다. 선거철이면 시장바닥에 넙죽넙죽 큰절 마다하지 않던 선량후보의 민망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촛불의 준엄한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살피려는 자세와 거리가 먼 약속들이 선거 분위기를 선점하려 아등바등하고, 때로 거들먹거린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6주년이 된 지난 토요일 광화문에 봇물처럼 쏟아진 유권자들의 요구는 무엇일까? 내용은 다채로워도 정치권이 무엇을 해달라는 특정 계층의 이권과 거리가 멀다. 자식 키우는 민중이 정의롭게 참여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살피지 않았던 분야의 정책을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논의하자는 광장의 외침이다. 비선실세와 자본, 정치세력과 기득권의 이해를 우선 배려하려고 민중을 소외해왔던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함성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덮어놓고 거론하는 국가발전과 성장 약속은 누구의 몫에 우선하는지 진정성 있게 고민해야 한다. 새만금 개발과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도입은 장차 민중이 향유해야 할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줄까? 핵발전소와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그리고 4대강 사업은 어떤가? 촛불의 정신을 잇는 대통령을 지향하는 후보라면 반드시 살펴야 한다. 그런데 후보와 더불어 시방 후보 주변에 모여드는 인물들은 촛불의 명령을 수용할 자세로 충만한가?


지난 정권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거론되는 경제성장과 개발과 일자리 확보 약속은 진정 촛불 정신의 훼손 없이 수용될 수 있을까? 화석연료 과다 사용으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상이변은 이제껏 추진해온 경제성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의 과실은 희생이 강요된 민중의 몫과 거리가 멀었다. 토해내는 약속들은 지난 정권과 얼마나 다르게 실현할 것인지, 다르다면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를지 납득 가능할만한 설명이 없다. 불쾌했던 숱한 경험을 이번에도 잊어야 하나?


경제성장은 석유의 뒷받침 없으면 불가능한 가정인데, 세계의 석유 보유량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자급자족 기반을 턱없이 잃은 식량도 석유 없이 생산은 물론 수입도 여의치 않을 텐데 후보들은 어떤 약속을 준비하고 있는가? 매장량이 바닥을 보이기 무섭게 가격이 치솟을 석유는 머지않아 수많은 일자리를 절벽에 떨어뜨릴 텐데, 이후의 대책은 무엇이어야 할지 경제성장을 되뇌는 후보들은 고민하고 있는가?


촛불의 요구는 근거 없는 신기루로 유권자 유혹하는 구호와 대체로 거리가 멀다. 민중의 다양한 논의를 차단하는데 자신의 이력을 소비한 자들을 측근으로 띄우며 경제성장과 석유가 뒷받침할 일자리를 들먹이는 후보들의 약속이 난무하는 상황이 실로 걱정이다. 정의로운 논의가 전제되지 않는 약속은 비선실세를 동원하는 독선보다 나을 거란 확신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표독스런 독선보다 점잖거나 부드러운 고집이 조금은 낫겠지만 촛불의 정신에 만족스러울 리 없다. 광장의 촛불은 다음세대의 행복을 행한다, 다음세대가 행복하려면 정치나 경제가 지금보다 훨씬 정의로워야 한다, 다음세대의 건강을 위해 추가할 사항이 있다, 생태정의를 생략하면 안 되는데, 시방 후보들은 생태정의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거 같다. 그래서 촛불 이후를 기대하면서도 무척 불안하다. (지금여기, 2017.3.20.)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6. 12. 30. 16:21


 

촛불의 힘에 의해 탄핵된 이가 탄핵 전 3차담화를 발표했을 때 정국이 잠시 어수선했다. 4월에 스스로 물러서면 탄핵 절차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일각에서 제기했기 때문인데, 이후 한층 분명해진 민의가 광화문을 뜨겁게 달궜고 법원은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집회를 허용했다. 하지만 170만의 인파는 법이 허용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다다갈 수 없었다. 명함 한 장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차벽이 정문과 담을 막았기 때문이다.


집회가 없을 때 모이는 시민이나 관광객도 청와대를 허가 없이 들락거릴 수 없다. 담이 높고 정문이 굳게 닫혔기 때문인데, 제왕적으로 군림하는 대통령이 지배하는 국가라면 비슷하겠지. 유권자가 잠시 빌려준 권력을 사회적 합의 없이 휘두르는 자는 허심탄회한 소통을 두려워할 테고, 거주 공간에서 멀리 떨어진 범위에 높은 담을 쌓아 드나드는 이를 선별 통제할 게 틀림없다. 대통령만이 아니다. 권위를 내세우는 의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통을 차단하는 담은 담 밖의 사정을 무관심하게 만든다. 담 높은 주택에서 우월의식에 젖은 사람은 찬바람 부는 달동네에서 음식 나누는 이웃의 따뜻함을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차창 닫는 고급 승용차 뒷좌석의 우리 국회의원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국회의원만큼 유권자와 자유롭게 소통하지 않을 것이다. 크고 빠를수록 자동차 안의 사람은 차 밖의 사정에 관심 기울이기 어렵다. 걸을 때 보이는 아기자기한 풍경과 이웃의 희로애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동차가 담이 되는 까닭이겠지.


도심 구간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는 높은 방음벽이 소음을 차단한다. 소음만 아니라 주위 도로와 연결을 단호히 뿌리친다. 1969년 개통된 경인고속도로가 그렇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인천시 서구까지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며 달리다 서구에서 인천 남구 용현동까지 좌우로 가르며 높은 방음벽으로 시야마저 차단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정체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방음벽 밖의 사정에 도무지 관심을 갖지 못한다. 방음벽이 가린 마을의 삶이 얼마나 피폐한지 살필 겨를이 없다.


7월이면 한국도로공사에서 인천시로 관할권이 이전될 인천 남구 용현동 기점에서 서구까지 10.4킬로미터의 경인고속도로 구간을 걸었다. 방음벽 너머 좁은 도로는 평탄한 고속도로와 달리 급한 경사를 오르내리며 울퉁불퉁했다. 과속방지턱이 거푸 이어지며, 벌어진 아스팔트 바닥은 꼼꼼히 메워지지 않았는데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 사이를 요령껏 건너는 주민들은 방음벽 옆에 낡은 자동차를 세우거나 쓰레기를 버렸다.


고가도로가 고속도로 위를 가끔 이어주고 지하의 보행자 통로가 이따금 좁게 이어주지만 주민에게 고속도로는 담이다. 소통을 차단한다. 방음벽 옆에 주차된 차는 먼지를 뒤집어썼고 바퀴가 주저앉기도 했다. 배터리를 잃고 방치된 차 옆의 냉장고와 소파는 한 때 요긴했겠지만 지금은 불법 배출을 고발하겠다는 경고판 옆의 온갖 쓰레기와 더불어 아무렇게나 나동그래져 있다. 높은 방음벽이 관심을 차단하지 않는다면 벌써 치워졌을 것이다.


방음벽에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의 일부는 햇빛이 새어들기 어려운 다세대주택에 촘촘하게 산다. “즉시대출을 알리는 현수막과 이삿짐센터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고속도로 옆 주택들은 버스종점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다. 초등학생들의 천진함은 여느 거리와 다르지 않지만 어른들의 고단함은 남달라 보이는데, 고속도로 관할이 인천에 이관되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뀔까? 방음벽이 치워질 테니 고속도로로 차단된 좌우의 마을은 연결될 것인데, 소외되었던 삶은 밝아질까?



<사진: 경인고속도로에 의해 단절된 인천시. 고속도로의 높은 방음벽 주변의 쇠락한 모습.


통영시 동피랑과 서피랑은 벽화로 철거될 위기에 있던 마을을 활기차게 만든 모범사례로 손꼽힌다. 철거되었다면 큰돈을 요구하는 번듯한 아파트에 밀려 내쫓기고 말았겠지만, 주민들은 마음을 모아 벽화 그리기에 나섰고, 마을은 하루 수천 명이 찾는 명소로 변모했다. 담이 관광객을 끌어들인 것인데 인천시의 동화마을은 다르다. 가난한 산동네 좁은 골목의 담에 동화가 그려졌지만 일련의 과정에 주민의 참여는 생략되었다. 소외된 주민들은 카메라를 들고 불쑥 들어서는 관광객 때문에 이만저만 불쾌한 게 아니다. 알록달록 채색된 담이 마음의 담을 오히려 높였다.


담은 집안의 부끄러운 점을 가려주기도 한다. 담이 있기에 사사로운 일을 벌일 수 있는데 그때 낯모르는 이가 불쑥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얼마나 놀랄까? 여름철 마당에서 몸을 씻는 동화마을의 아낙은 소스라칠 텐데, 주민과 합의해 벽화를 그렸다면 다를 것이다. 대문은 열어놓은 주민들은 차 한 잔 권할 여유와 웃음으로 방문객을 맞을 게 틀림없다. 사적인 공간을 개방하지 않더라도 호의적 대접을 받은 관광객이 공연히 관심 기울일 까닭이 없다. 경인고속도로 인천 구간이 개방되면 방음벽 주변 마을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인천시민은 경인고속도로의 일반화를 환영한다. 고속도로가 사라지면서 좌우가 오랜만에 소통되고 방음벽 옆의 차와 쓰레기가 사라지는 모습에 긍정적인데, 이제까지 고단한 삶을 강요당한 고속도로 주변 주민의 삶도 산뜻해질까? 인천시에 이관될 고속도로 구간이 일반도로로 바꿔 승용차와 버스가 교차할 가능성이 있지만 많은 시민들은 녹지로 가꿀 것을 요구한다. 자동차가 편리해지는 일반도로보다 소통이 활발해지는 공원으로 개과천선하길 강하게 원한다.


고속도로 방음벽에 가려진 주민의 고달픈 삶을 그들의 처지에서 살펴야 한다. 이관될 경인고속도로가 어떻게 변모할지 아직 분명하지 않고, 논의 끝에 결정되어도 갈 길이 멀겠지만, 일반도로든 나무와 풀과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어우러진 공원이든, 변화에 앞서 변두리 아닌 변두리에 숨어 지내던 주민들의 참여가 적극 보장되어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변화된 공간에서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소통을 위해 치워야 할 담은 청와대와 국회에서 그치지 않는다. 분별없는 비선실세에 검은 자양분을 제공하던 청와대의 담과 마찬가지로 경인고속도로 주변의 담도 말끔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변모할 고속도로에서 주민들이 소외되지 않을 방안은 무엇일까? 주민들의 생각부터 허심탄회한 들어보자. (작은책, 20171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6. 12. 19. 11:55


민간이 운영하는 교도소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당할 수 없자 미 정부의 옛 유력인사가 훈수를 두었다고 한다. 흑인을 거세하면 예산을 줄일 수 있다고. 농담이었을까? 농담이라 해도 어처구니없는데, 백인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흑인이 교도소 입소자의 절반에 달한다는 걸 이유로 든 그 유력인사는 평소 흑인이 살아가는 사회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게 분명하다.


얼마 전까지 대학은 기말고사 시즌이었다. 칠판에 한 문제를 써놓고 자신의 생각을 답안지에 써넣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군데군데 기침과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독감이 유행이라고 언론이 보도하더니 젊은이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조류독감으로 한 달 만에 근 2천 만 마리가 죽었다는데, 대부분 조류독감에 감염되지 않았지만 살처분되었다. 조류독감 원인균이 발생한 지역과 가까운 것에서 사육된다는 이유로.


독감에 걸린 사람은 옆 사람에게 닭이나 오리나 메추리보다 쉽게 감염시킬 테지만 우리는 훌쩍이고 콜록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경계하지 않는다. 걸려도 금방 나아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인데, 한 방송사는 촛불집회 때문에 독감이 늘어난 것으로 뉴스 시간에 추정한 모양이다. 하긴 어렸을 때, 감기가 유행하면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선생님이 당부하곤 했지.


주말을 빼앗은 촛불집회는 우리에게 독감을 얼마나 안겼던가? 그 뉴스를 듣지 않았으니 전문가가 합당한 근거를 제시했는지 알지 못한다. 뜻밖의 독감 증가와 촛불집회의 상관관계를 의심하는 건 합리적인가? 그 방면 문외한이니 알 수 없지만, 수업 시간에 20분 이상 늦은 학생이 지하철 파업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때, 합리적이 아니라고 핀잔을 준 적 있다. 기관사의 파업 때문에 출퇴근 이외 시간에 배차 시간이 길어지는 점 죄송하다고 정거장마다 방송했지만 그건 현상이었다. 근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과급제를 반대하는 파업을 주목해야 했다. 경영진과 달리, 주어지는 일을 수행하는 노동자에게 성과급은 합리적인가?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 수당을 더 주겠다는 유혹은 자칫 작업장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취업준비생들은 그만큼 한숨이 길어질 것이다. 그런 성과급제를 노동자들이 반대하는 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지각은 기관사들의 파업이 아니라 지하철 경영자의 성과급제 고집 때문이었다. 점점 추워지는 주말마다 광장을 메우게 만드는 촛불집회가 독감환자를 늘였는가?


조류독감은 왜 2003년 이후 폭발했는가? 2003년 이전에 조류독감은 없었을까? 그럴 리 없다. 조류독감을 철새들이 옮기는 경우가 많다는데, 2003년 훨씬 이전 겨울에도 철새들이 어김없이 날아왔는데, 조류독감은 왜 요즘에 와서 난리를 부를까? 관료들의 안일한 대처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일본보다 우리 관료가 치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어왔는데, 일본도 올겨울 100만 마리 가까운 가금류를 살처분했다. 일본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관료의 안일함 이외의 무엇, 죽인 닭, 오리, 메추리의 마릿수와 다른 무엇이 더 있는 건 아닐까?


2003년 이전과 이후, 우리 가금류 사육방식의 변화는 없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세계 각국의 모든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점보다 조금 더 많다는 우리 치킨 체인점에서 해마다 소비하는 치맥용 닭은 8억 마리에 가깝다고 한다. 전에 없던 현상인데, 8억 마리라, 하루에 200만 마리가 넘는다. 그런 닭은 기계로 처리할 테고, 기계는 크기와 무게에서 오차범위 이내의 닭을 요구할 것이다. 기계의 요구에 응답하는 양계장마다 더 많은 이익을 경쟁적으로 남기려면 닭의 복지 따위는 살필 겨를이 없겠지. 그런 환경에 조류독감이 전파된다면?


수천 킬로미터 날아온 철새들은 기력이 쇠했다. 몇날 며칠 쉬지 못하고 일한 사람처럼, 충분히 먹으며 휴식을 취해야 면역력을 회복할 수 있다. 2003년 이전에도 그랬을 텐데, 2003년 언저리부터 철새들이 쉬던 갯벌이 크게 위축되었다. 새만금 일원의 갯벌도 인천공항 주변의 갯벌도 송도신도시의 갯벌처럼 사라졌다. 갯벌에서 쉽게 먹던 먹이도 일거에 자취를 감췄다. 그뿐이 아니다. 낙곡도 사라졌다. 고기와 우유를 남보다 빨리 많이 생산해야 하는 목장의 사료용으로 철새들이 오기 전부터 둘둘 말렸다. 커다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비닐 포장으로 잔뜩 쌓아놓은 들판의 건포 사일리지가 그것이다.


사람의 독감은 머지않아 물러날 것이다. 살처분 인부의 과로사를 부르는 조류독감도 둔화될 테지만 내년 이후에는 어떨지. 내년 겨울에 주말마다 촛불집회를 위해 광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라 믿는다.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성과급제가 철회되었으니 지각하는 학생은 줄어들 텐데, 독감 환자도 줄겠지. 한데 조류독감은 반복될지 모른다. 우리가 쇠고기와 치맥 소비를 자제하지 않으니. (지금여기, 201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