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6. 8. 7. 10:53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 지음(2006), 『침묵과 열광』, 후마니타스.


 

최근 ‘한반도’라는 제목의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과 구성에 대해 논란하고 있는데, 속이 후련하다는 관객과 “민족적인 울분을 기반으로 극우 파시즘적인 형태를 주장하고 있”어 위험하다는 전문가의 평가가 장안에 교차한다. “현실적으론 일본에 비해 약소국이지만 영화로라도 한번 이겨보고자”는 소회를 밝힌 감독의 소박한(?) 의도와 달리, “민족주의 문제가 작게는 영화 흥행의 문제지만 크게 보게 되면 우리나라 정치권의 책임회피를 합리화해주는 그럴듯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한 사회학자가 논평하는 한반도, 그 영화는 민족주의에 휩쓸리는 요즘의 시류에 편승하려는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독일월드컵 열기는 덤핑 붉은악마 티셔츠 가격만큼이나 꼬리를 내렸다. 업사이드를 인정하지 않은 주심의 명백한(?) 오심 때문에 다잡은 16강을 놓쳤다고 내심 합리화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 관중 썰렁한 K리그의 현실을 반영해 맥없이 돌아왔다면 감독과 선수들에게 빗발치는 원성을 축구협회는 어떻게 감당할 뻔했을까. 월드컵대회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집요하게 부추겨졌던 애국 열기는 ‘짝짝 짝 짝짝’에 무표정한 채 지나치는 이를 흘기는 풍토를 거리에 만연하게 했는데, 16강 탈락 팀 중 1위라는 위안이라도 없었다면 축구협회는 뒷감당이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16강에 들어갔다면? 상업주의 장단에 맞춘 장안의 애국주의는 평택미국기지 확장과 한미FTA 문제를 아직도 외면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2002년 여름날을 붉게 물들였던 한일월드컵의 붉은악마 신드롬에는 순수한 면이 있었다. 비록 업사이드가 무엇인지 몰라도 열기가 넘실대는 광장에 동참하고픈 젊은이의 순수한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독일월드컵 거리응원과 16강 기원은 초기부터 달랐다. 상업주의가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만큼 거북했다. 그래서 그런지, 16강 경기가 진행 중일 때 우리의 열기는 금방 삭으러들었고, 이어 벌어지는 K리그 관중석은 예전처럼 민망해졌다. 상업주의가 조장한 열기에 여운이 없었던 것인데, 모든 시민들이 평소에 축구를 즐겼다면 사정은 좀 달랐을지 모른다. 어디 축구만 그런가. 야구도 농구도 다 마찬가지다.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배양하는 엘리트 체육의 필연적 한계일지 모른다.

 

LPGA에 입문하려 대기하는 우리나라 소녀가 수 천 명에 이르는 현상을 미국의 어떤 체육인은 한국 특유의 ‘올인문화’에 빗대었다는데, 황우석 사태의 교훈을 잊고 배아복제 연구 지원에 다시 올인하려는 우리 과학기술부의 태도를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독일월드컵 열기를 부추긴 상업주의에 비견할 수 있을까. 다분히 의도적인 열기를 애국주의로 위장하려 든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현실에서 거래되는 월드컵 상업주의는 아직 희망사항에 불과한 줄기세포 상업주의와 분명히 다르다. 부자들의 한바탕 축제를 텔레비전으로 바라보는 가난한 이의 대리만족과 달리, 부자들의 줄기세포 허상을 위해 가난한 이와 다음세대의 생명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스타가 사라진 스포츠계가 일거에 썰렁해지듯, 우리 장안에 불던 줄기세포 열기도 미적지근해졌는데, 황우석 스타 만들기에 열심히 풀무질하던 언론은 자신이 만든 신기루가 사라진 뒤에도 황우석 사태에 대한 반성은커녕 심도 있는 진단마저 외면하고 있다.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무용담을 편집해 발표하고 또 예고할 때마다 한 술 더 떠 광분하던 집단이 바로 우리의 언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침묵하고 있을까. 우리 언론의 본질이 원래 그렇던가.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가 아무리 우리 언론계의 관행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황우석!” 소리만 들리면 입에 거품부터 물고 열광하지 않았던가. 황우석 사태가 사기와 협잡으로 결말이 난 후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 언론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뭉스럽다. 단순 무식해서 그런 걸까.

 

우리나라 기자들이 단순무식하다? 그럴 리 없다. 적어도 고시에 가까운 입사시험을 통과해 중앙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매우 똑똑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황우석 전 교수 앞에서는 언제나 순한 양이었을까. 대립하는 의견이 있으면 양측을 편견 없이 취재해 충분히 검토한 후 보도하는 것이 기자의 본분이거늘 그들은 왜 황우석, 이 석자만 끼면 본분을 송두리째 망각한 것일까. 그를 전지전능한 예언자로 숭배한 것일까. 사실 황우석 사태를 이처럼 부풀린 집단이 기자들만은 아니다. 날조와 협잡으로 얼룩진 자신의 과오를 ‘논문 돌려막기’로 덮으려던 황우석 전 교수의 행태가 만천하에 들어난 지금,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하며 짐짓 고상한 체하는 숱한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시기하는 것으로 비칠까봐 참아야 했다는 핑계를 둘러대지만 그들도 결과적으로 기획된 열광에 동참했다. 알고 있는 문제는 제기해야 학자다운 태도가 아니던가.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인문계와 갈라지는 우리 현실에서 칸트를 모르는 이공계는 열역학을 모르는 인문계와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인문계를 전공하고 어렵사리 고시에 합격한 기자는 과학기술 분야를 취재하기 버겁다. 그래서 기자는 과학자의 입에 의존하는데, 인문계를 불식해온 과학자는 과학기술을 쉽게 설명하기 어려워한다. 아니, 쉽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전문가끼리 소통하는 전문 언어를 구사하며 인문계의 혼을 빼야 연구비 액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까닭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묻는 기자에게 약어로 구성된 전문용어를 남발하여 자신의 연구를 치장해 보도하게 만들면 민원과 유권자를 의식해야 하는 행정과 정치권에서 반응하고, 그 열매는 달다는 것을 과학자는 간파한다. 황우석 전 교수가 그랬다. 그러자 기자가 열광했고, 그 기사를 읽은 시민들이 차례로 열광했다. 행정과 정치가 열광한 것은 불문가지. 하지만 황우석 전 교수 연구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학자들은 침묵했다. 이제 반성해야 할 기자가, 행정이, 정치가 침묵한다. 시민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하다.


 

 

초창기부터 황우석 사태를 가까이에서 주목하고 목소리를 내던 젊은이들이 있다. 연출된 민족주의 열광 속에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소심하거나 비겁한 과학자들과 달리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진 비판을 무릅쓰고 기록하고 발표했다. 황우석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온 지난 7년의 상황을. 인터넷 신문의 기자로, 과학기술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단체의 간사로,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추구하는 정당의 연구원으로 떨어져 활동하지만 한때 같은 시민단체에서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이 그들로, 그들이 다시 모여 『침묵과 열광』을 펴낸 것이다. 저자들은 절박한 문제의식으로 황우석 전 교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무렵부터 몰락한 현재까지, 황우석 사태가 배태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적 열광과 침묵을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황우석 사태가 우리사회에 미친 영향을 반성적으로 살펴본다.

 

“책임 있는 자가 침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열광하는 자가 성찰하지 않을 때 어떤 비극이 빚어지는지를 강조하고자” 의기투합한 3명의 젊은이는 황우석 사태를 두 단어, ‘침묵’과 ‘열광’으로 요약한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나 일본의 토건세력에 견줄 수 있는 우리의 ‘과학기술동맹’에 주목하는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네 단계로 구분한다. 차세대 성장 동력을 생명공학산업에서 찾는 과학기술부에 복제 소 영롱이를 발표한 황우석 전 교수가 간택된 1999년까지를 1단계로 본다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문신용 교수,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과 ‘황우석 사단’을 구축, 정치, 경제, 언론계와 밀월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며 동물복제에서 인간배아복제 전문가로 변신한 2003년까지를 2단계로 보았다. 3단계는 사이언스에 배아복제 줄기세포 분화가 성공했다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약 세계적 학자로 주목받은 황우석 전 교수가 국가적 지원과 찬사를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2005년까지로, 이른바 황우석 신화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2005년 겨울부터 마지막 4단계로 나눈다.

 

황우석 전 교수를 정점으로 했던 과학기술동맹이란 무엇인가. 논문 조작이 드러난 뒤 “나도 피해자”라고 발뺌했던 정부, 언론, 재계, 그리고 의학과 과학계의 핵심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뜻을 모은 동맹이었다. 그들은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부와 언론과 재계를 현혹시킨 의학과 과학계 인사, 인문사회를 모르는 의학과 과학계가 편집한 현란한 기호에 속은 정부와 언론과 정계의 인사로 구성되었다. 황우석 교수의 신기루를 ‘과학이 아니라 감전될만한 마술!’이라 추켜올렸던 청와대를 비롯하여 여야 정치권과 각부 장관들, 앞 다투며 연구비를 제공한 재계와 황우석 전 교수와 연줄을 대기 바빴던 학계 인사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어떻게 열광했고 지금 왜 침묵하는지 『침묵과 열광』은 낱낱이 증언한다.

 

기자들은 어떠했던가. “복제 개 탄생이 갖는 여러 가지 의미”를 시민들을 대신해 캐물어야 할 기자가 기자회견장에 나와 황우석 전 교수와 덕담을 주고받는 데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어떤 연구를 하여 무슨 논문을 쓰겠다고 황우석 전 교수가 예고하면 당장 성공한 듯 화답하는 언론은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연구에는 예견이 불가능하지 않던가. 한데 우리 언론은 황우석 교수에 관한한 언제나 화답 이상이었다. 침소봉대로 일관했다. 호랑이를 복제하겠다고 했더니 신생대 공원을 재현할 듯 수선을 떨어 독자들을 현혹시키는데 앞장섰고, 광우병의 원인도 모르는데 광우병 걸리지 않는 소를 개발했다는 황우석 전 교수의 주장을 예상 부가가치까지 추산하며 열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낯 뜨거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황우석 전 교수의 발표를 왜곡 과장하는데 조금도 거리끼지 않은 우리 언론은 황우석 전 교수와 어느 정도 유착했을까. 『침묵과 열광』을 펼치면 알 수 있다.

 

2000년 과학기술부장관 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서 10개월 여 논의한 끝에 생명윤리법 골격안을 발표했을 때였다. 우리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황우석 전 교수에게 쪼르르 달려가 평가를 의뢰했고, 황우석 전 교수의 의견을 근거로 골격안을 일제히 비판했다. 그러자 장관이 바뀐 과학기술부는 당황했고, 장관이 다시 바뀌자 과학기술부는 자문위원회의 골격안 자체를 폐기하고 말았다. 황우석 교수는 당초 그 위원회에 위원으로 추천되었지만 시민단체에서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당사자라고 지적해 제외된 바 있다. 그래도 황우석 전 교수는 위원회에 외부인으로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고, 연구 실적이 우수한 생명공학자 5명, 의사 5명, 인문학자 5명, 종교계 3명, 시민단체 2명이 포함된 위원회는 20여 회가 넘는 격론 끝에 생명윤리법의 골격안을 어렵사리 합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황우석 전 교수의 입김이 작용하게 되었을까. 초기부터 표방한 노무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 정신이 그때 살아있어 골격안대로 생명윤리법이 통과되었다면? 과거를 가정할 수 없지만, 만일 그랬다면, 황우석 사태와 같은 씻을 수 없는 망신은 국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교활한 머리가 빼어나거나 빽이 든든해야 한다. 황우석 전 교수의 발표에 미심적인 부분이 많았고 모순이 수두룩했어도 수십 명의 국내외 과학자, 정치권과 청와대가 포함된 행정부, 언론들이 입을 맞추어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 줄 것으로, 국가 부가가치를 반도체 이상 증진시켜 줄 것으로 열광해 마지않는데, 누가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를 감히 사기라고 의심할 수 있을 텐가. 그래서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가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넘어 허위라는 것을 취재한 PD수첩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인지, 협잡에 가까운 사기극이 백일하에 속속 드러나도 열광은 그치지 않았고, 사이비 종교처럼 열광적인 팬들의 극성은 도를 넘었다. 그 와중에 월드컵과 지방선거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토론회가 열릴 때마다 나타나 추태를 보이던 황우석 전 교수 지지자들은 서울대학교 총장 차 밑에 기어들어가는 행동을 검찰총장에게 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하늘을 찌를 듯한 황우석 전 교수의 열광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과정의 전말은 어떠할까. 『침묵과 열광』의 저자들은 경험이 묻은 생생한 기록을 전한다.

 

당장 큰 이익을 줄 것 같았던 광우병 내성 소는 어떤 거짓인지, 이식용 장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의 희망으로 치장되었던 이종 장기는 어떤 거품인지 『침묵과 열광』은 그 내막을 밝힌다. 과학기술동맹이 추진하는 의료시장화의 내용은 어떻게 추진된 허상인지 전말을 밝히는 젊은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몰고온 우리 사회의 앞날을 걱정한다. 민주주의와 휴식이 없는 대학 실험실 문화는 위험하지 않을까. 여타 과학기술동맹이 여전히 막강하게 건재한데 과학계 스스로 황우석 사태를 성찰할 수 있을까. 황우석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까. 생명공학계만이 아니다. 거액의 세금이 투여되는 연구에 진실성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건만 정부는 진실성 판단 여부에 변죽울렸을 뿐, 얼마 전 과학계를 격려한다며 생명복제 분야에 작년보다 증액된 연구비를 책정한다고 발표했다.


 

 

학술 토론회에서 한 학자는 황우석 사태를 박정희 식 개발독재의 산물로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개발만이 살 길이라 시민들을 세뇌하고, 과학기술이 그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어려서부터 각인시킨 군사독재정권은 ‘하면 된다!’ 구호를 신조로 반대의견을 강압적으로 묵살해왔다. 군사독재가 사라진 뒤 과거와 같은 물리적 억압은 사라졌지만 “경제!”하면 자지러지는 상황에서 “세계 최초로 원천기술을 확보하게 된 대한민국을 세계최대의 부자나라로 만들어주겠다”는 근거 없는 호언은 민족주의로 충만한 희대의 사기극을 배태하게 만들었다. 대통령도 지적했지만, 돈이 권력을 쥔 세상이니 당연한 노릇일까. 돈보다 진지함이 거세된 세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기보다 중앙에서 주어지는 겉만 화려한 편의에 몸과 마음을 말초적으로 빼앗긴 까닭은 아닐까.

 

겉을 화려하게 편집한 영상문화는 보는 이의 얼을 빠지게 하기에 유용하다. 네티즌을 끌어모으는 인터넷 문화가 대개 그렇다. 현장을 살펴본 기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클릭 수를 늘이려 뉴스를 배치하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접속하면 텍스트의 진정성보다 시각적 신호에 화살표 커서가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큰 제목과 사진만 바라보는 독자는 신문보다 텔레비전을, 텔레비전보다 인터넷에 친숙하다. 종합뉴스보다 연예인 소식에 눈을 돌리는 세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텍스트보다 편집된 영상에 마음을 빼앗긴다. 황우석 전 교수가 화려한 언사로 발표하는 진실의 전모를 진지하게 파악하기보다 말초적 치장에 열광하는 사회가 황우석 사태를 몰고온 것은 아닐까. 『침묵과 열광』의 젊은 저자들은 이 땅에 황우석 사태가 배태될 수밖에 없는 토양을 포괄적으로 고발하고 민주화된 과학의 진정성과 윤리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과학기술동맹에 대한 검토 없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황우석 개인에게 돌리려는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와 검찰조사가 미칠 사태를 걱정한다. 그래서 반복될 제2, 제3의 황우석 사태를 막을 수 없을 것으로 우려한다.

 

『침묵과 열광』을 쓴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은 가벼움을 추구하는 인터넷 영상문화와 이 땅의 천박한 과학문화를 비교하며 논의하지 않았지만 과학기술동맹을 파악하지 않는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와 검찰 조사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고맙다. 이윤을 노리는 자본과 패권을 염두에 둔 권력에 과학기술이 종속되는 한, 아무리 연구윤리를 제도화하고 강화한다고 해도 연구부정과 비윤리적인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과학의 신비화에서 싹이 튼 과학기술동맹은 자본과 권력의 비호 아래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작금의 우리 상황은 또 다른 황우석 사태를 충분히 예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깨어있는 시민운동이 아닐까. 과학기술을 막연히 좋은 것으로 어려서부터 기대하다 민족주의로 위장된 과학기술동맹에 부지불식간에 덜미 잡힌 독자를 깨어나게 하는 『침묵과 열광』은 그래서 참 소중하다 아니 할 수 없다. (환경과생명, 2006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