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5. 7. 3. 15:10
 

아쉽다. 약이 오를 정도다. 주인공을 꼭 죽여야 했나. 처절한 마음으로 마운틴고릴라를 지켰던 다이엔 포시는 밀렵꾼에게 채찍을 휘두를 정도로 사나웠으니 그렇다 치고, 살기 위한 원주민의 밀렵을 이해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다정다감했는데, 다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인데, 저자들은 후련한 후기도 서비스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니 죽는 게 순리일 성싶다. 약은 오르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작가들은 다른 결말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추하러 오면 수백 미터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겠다고 선언한 우와족을 보라. 수천 년 살아온 터전을 지키려고 그들은 미국계 다국적기업 옥시덴털페트롤리엄에게 집단자살을 예고해야 했다. 자본은 석유시추권을 판 콜롬비아 정부는 물론 우와족의 경고도 사실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만 서방 시민단체를 겁낸다. 불매운동이 자칫 적대적 기업합병으로 연결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과 절연된 아프리카에서 제국주의자의 전횡을 가녀린 여성이 어찌 막아낼 수 있으리. 피비린내 나는 종족 분쟁이 발생시킨 난민들을 위해 제 숲을 벌목하겠다는 백인 자본가는 이미 거룩한데, 누가 감히 그의 개발계획을 방해할까. 침팬지 집단 사이의 제노사이드를 간파한 여성 동물행동학자의 눈물어린 호소는 사회다윈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노회한 지주를 성가시게 했고, 소설 속의 생태주의자인 주인공은 광기어린 홍위병에 의해 희생된 문화혁명 시절의 아버지처럼 난민이 내리친 돌에 맞아 제노사이드된 것이다.


미국 워싱턴DC에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섰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몸서리치게 재현한 박물관은 전 세계 유대인들로 발 딛을 틈이 없지만, 구내서점에는 북미원주민들에게 사죄하는 책자 한권 비치하지 않았다. 르완다에서 수십만이 죽은 후투와 투치족 사이의 무시무시한 종족말살의 원인은 제국주의가 제공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을 조장한 후 제국주의자는 빠져나갔고, 뒤를 이은 자본주의의 약탈로 오랜 자급터전을 잃은 아프리카의 종족은 생존을 위해 제노사이드를 감행하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를 아직도 끌어안고 있는 아프리카의 백인 지주는 자신의 작은 숲에 사는 침팬지 집단의 안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넓은 숲이 비참하게 넘어지자 생존을 위해 작은 숲으로 몰려오는 넓은 숲 침팬지 집단은 작은 숲 집단의 수컷들을 한 마리씩 제노사이드한다. 돌로 머리를 내리치며. 작은 숲 집단과 동고동락하며 수화를 연구하던 주인공은 성 노리개로 끌려들어갈 ‘다니’의 운명에 소스라친다. 뜨거운 가슴을 꾹 누르는 제인 구달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묵묵히 기록하지 않고 다이엔 포시처럼 자본가에 도전했고, 제노사이드를 당연시하는 사회다윈주의자는 넓은 숲 침팬지를 흉내내도록 난민들을 매수한다.


‘지식소설’이라.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에서 문학을 전공한 김용규 김성규 형제는 지식을 표방하는 『다니』를 소설로 썼다.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빼어난 문체는 읽는 이를 빠져들게 한다. 한 권의 소설을 위해 인간의 본성, 침팬지와 동물의 생태, 중국의 문화대혁명, 생태주의에 대한 수십 권의 쉽지 않은 책들을 독파한 뒤, 생존공간이 협소해지는 파괴된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제노사이드를 몸서리치게 경고한다. 굳이 드러내지 않지만, 욕망이 빚는 개발행위가 몰고올 한계환경을 생태주의로 극복할 수밖에 없다고 독자들에게 귀띔한다.


자연과 대한 편견을 최초로 뒷받침해준 경작은 자연 파괴의 대가로 잉여를 보장했고, 인구증가로 연결된 잉여는 계급과 계층과 훨씬 지독해지는 편견을 낳았다. 산업혁명 이후 심화된 자연착취는 일부 계층의 배타적 수명을 연장했지만 소외지역의 제노사이드를 부추겼다. 이제 파괴할 자연이 더는 없다. 그러자 과학주의로 무장한 초국적자본은 생명공학을 구상한다.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해 거룩한 애드벌룬을 앞세운 제노사이드로, 후손의 생명이 파괴될 것이다. 후손의 유전자를 사유화한다고 제레미 리프킨은 비난한다.


중동에 퍼부은 벙커버스터보다 제노사이드에 훨씬 유용한 무기는 ‘유전자폭탄’이라고 외신은 예견한다. 특정 유전자를 지닌 인종에게 질병을 안기도록 유전자를 조작하고, 여성과 배아를 희생시켜 부자들의 생명이 연장될 것으로 점친다. 침팬지의 제노사이드를 막으려는 소설 속의 여성은 죽었다. 밀렵꾼이 휘두른 도끼에 이마가 찍힌 다이엔 포시는 죽어서 마운틴고릴라들을 지켰지만, 『다니』의 저자들은 후련한 후기마저 외면했다. 막무가내 개발은 결국 침팬지와 마운틴고릴라도, 그들을 지키려는 생태주의자도 넘어, 결국 자신도 희생시키고 말 테니까.


아쉽고 갑갑한 마음으로 『다니』를 덮고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보니, 이내 편안해진다. 내일을 생각하는 시민운동은 그래도 낙천적이어야 하므로. 실패가 뻔한 환경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지 몰라, “느리게 살자”며 오늘도 바삐 뛰어다니는 생태주의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문장, 2005년 8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