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7. 4. 8. 22:58
 


《진보와 야만》, 클라이브 폰팅 지음, 김현구 옮김, 돌베개, 2007.



1999년 12월 31일 자정. 노스트라다무스가 지구의 종말을 예언한 바로 그날 그 시각. 아이들을 따뜻한 아파트에 재워놓은 일단의 부부들은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둘러앉았다. 포도주를 한 잔씩 받아 들고, 자정을 알리는 텔레비전 시보에 맞춰 일제히 잔을 들었다. “이 세상 마지막 밤을 함께 마치기를 위하여, 건배!” 과연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이내 우르릉 쾅쾅! 대포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렇게 가는구나!” 누군가 비장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하늘엔 춤추던 불꽃이 우수수 형형색색 떨어진다. 새 세기를 알리는 불꽃놀이였다.

 

20세기 중반이 막 지났을 때 태어난 일행이 제각기 기쁘고 서러웠던 기억을 나누며 21세기 첫 시간을 흘려보낼 즈음, 아내는 20세기 첫 사사분기 초 세상에 나왔다 작년에 하직한 시아버지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20세기의 모진 풍상을 온몸으로 겪었던 그분. 이 시간 편히 잠들어 있으시려나. 20세기가 10년 여 남았을 때 태어난 녀석들은 나중에 제 부모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까. 개발이 진척되고 인구가 늘어날수록 심해지는 갈등으로 20세기가 19세기보다 다사다난했듯 21세기는 20세기보다 훨씬 어려워질 공산이 큰데.

 

20세기, 21세기라 함은 서구적 관념이라고 《진보와 야만》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을 주장한다. 맞다. 우리는 현재 단기 4340년이고 일본은 헤이세이 19년이다. 누군가 시간에 매듭이 없다고 했듯, 서기 2000년을 맞으며 지구를 한 바퀴 돌던 전 세계의 축하 마당은 실제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시간을 딛고 역사는 계속 펼쳐진다. 따라서 지나간 세월을 되짚어보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겠다. 결국 역사는 내일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른다.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역사는 편견이라고 주장한다. 없는 사실을 꾸며내지 않겠지만, 사료 수집에 편견이 작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료에 대한 문제의식도 같을 수 없으므로, 역사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차라리 편견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클라이브 폰팅도 《진보와 야만》에서 비슷한 말을 전한다. 같은 자료를 수집한 역사가라도 자신과 다르게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1991년 《녹색 세계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A Green History of the World》를 출간해 개발의 필연적인 이면을 적나라하게 들춰냈던 클라이브 폰팅은 이번에도 남다른 시각을 선보인다. 오랜 세월 영국 국방성의 고위관료로 일하던 그는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의 비화를 폭로해 기소되었지만 그를 계기로 《알 권리 The Right to Know》를 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데, ‘20세기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태어난《진보와 야만》도 막연히 ‘발전이면 좋은 거려니’ 믿어온 독자에게 작지 않은 각성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이의 인생역정은 어떠했을까. 국운이 스러져가는 나라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민중의 열화 같던 삼일운동을 경험한 후 625 민족상잔에 이은 좌우대립의 소용돌이를 용케 헤치고 국가 건설에 뼈 빠지게 일하다 반쪽이나마 나날이 발전하는 국가의 모습을 목전에 두고 그만 세상을 떠났을까.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람을 상정해본다. 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점령을 경험한 그는 20대에 내전에 의한 대량살육과 광범위한 기아를 목도하고, 무자비한 집단농장에 대규모로 굶주려 죽지 않았어도 스탈린주의 테러의 참극에 치를 떨어야 했다. 2차 세계대전에 강제 동원돼 굶주림을 체험하다 독일에 재점령된 조국에서 포로수용소를 전전해야 했고, 구소련에 의한 노예노동에 시달리다 늘그막에 안정되었을 때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에 대한 공포를 경험했었을 것이다. 그 시절 중심부 세계는 비약적으로 진보했다. 그는 진보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고 클라이브 폰팅은 기술한다.

 

아랫목이 계속 따뜻해지면 차가운 윗목도 서서히 데워진다고? 정부 지원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단칸방 세입자의 방에도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있다. 그걸 과거에 비해 따뜻해진 증거라고 해석한다면 세입자는 아마 저항하고 싶을 것이다. 상대적 가난은 그 정도가 심해진 까닭이므로. 가난한 건 게으르거나 무능력했기 때문이라고? 아이엠에프 때 직장을 잃고 빈민이 된 대다수는 능력이나 게으름과 무관했다. 오히려 경영자의 잘못이 컸는데 망해가던 회사의 경영자는 오늘날 다시 떵떵거린다. 왜? 거액 정부 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지원금에는 빈자에게 돌아갈 몫의 세금이 대거 포함되었다. 그래서 부자와 빈자의 거리는 더 멀어졌는데, 윗목이 따뜻해지길 기대하며 아랫목만 불 지펴야 하나.

 

18세기 말까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상대적 부의 격차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의 세계를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로 나누어 분석한다. 물론 경제적인 잣대로 진보를 규정하지만, 그렇다고 중심부의 경제적 성과를 결코 추켜세우지 않는다. 그들의 진보 대가로 반주변부와 주변부가 겪어야 했던 야만의 실상을 폭로한다. 윗목이 있어야 아랫목이 있는 법. 야만이 있어야 진보는 가능하다. 중심부가 진보하면 할수록 반주변부와 주변부의 고통은 크다는 걸 《진보와 야만》은 다각도로 증언한다.

 

흑인종은 근육이 발달돼 강제로 일을 시켜야 하고 지각능력이 약해 마취 없이 수술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경험만 인정하는 중심부는 사회진화론을 내세우며 착취를 정당화했다. 중심부 국가들은 배타적인 자본과 과학기술로 주조한 무기를 앞세워 반주변부와 주변부의 자원을 독차지하면서 그 지역 사람들을 멋대로 지배했다. 그 결과 자원 소비와 영양, 질병과 수명의 현저한 차이를 가져왔고, 에너지 소비와 생산의 격차는 심화되었다. 주변부를 소외하는 무역의 증가로 중심부의 부는 한층 집중되었으나 주변부의 상대적 빈곤은 악화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환경문제를 자본과 과학기술로 중심부가 최소화하는 만큼 주변부의 환경은 피폐해지고 말았다.

 

클라이브 폰팅은 연대기에 따라 20세기 역사를 기술하길 거부한다. 《진보와 야만》은 국제사와 국내사적으로 20세기를 주제 별로 들추어낸다. 그를 위해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중심부와 반주변부와 주변부 사람들에게 미치는 고통의 크기, 생산력과 환경 피해의 격차, 무역이 증가하면서 발생하는 경제와 사회적 불평등을 살펴본다. 이어, 국가 간의 제국주의 경쟁과 그로 인해 유발된 식민지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원인을 추적하고, 중심부가 설정한 국가와 허구가 지배하는 민족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투쟁과 전쟁을 짚어본다. 중심부는 중심부대로, 반주변부와 주변부는 그들대로 국가 간 벌어지는 욕망과 갈등은 진보를 위한 피치 못한 투쟁이라기보다 끔찍한 야만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국내의 전통은 보수화하는 정치와 경제 권력이 만들어 낸 결과일 때가 많다. 야만의 극치였던 나치즘과 파시즘은 단지 과거사가 아니다. 중심부든 반주변이나 주변부든, 권력을 쥔 자들의 욕망을 위한 독재와 그로 인한 불평등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참다못한 혁명세력이 민중의 환호를 받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파시즘으로 귀결되고, 민주주의는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숱한 희생을 바탕으로 중심부에서 반주변부로 민주주의는 조금씩 자리 잡는데, 주변부의 민주주의는 여태 시행착오가 끝나지 않았다. 이는 차별과 억압을 넘어 끔찍한 제노사이드까지로 이행하는데, 그 대목을 읽은 독자는 진보의 탈을 쓴 인간의 야만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야만이 결국 진보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걸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종과 남여편견에 이은 생태계 편견은 후손의 생명을 식민지로 하는 21세기를 지나고 있다. 다가올 20세기를 낙관적으로 보고 또 음울하게 읽은 두 시인의 시를 소개한 클라이브 폰팅은 “20세기 동안 세계가 진화해온 길과 세기말 경제력과 정치력의 분포를 고려해볼 때, 세계는 다음 수십 년 동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소수에게는 진보로, 압도적 다수에게는 야만으로 다가올 공산이 크다.”면서 700페이지에 가까운《진보와 야만》을 맺는다.

 

최근 잉카 후예들이 과거 자신의 금을 탈취한 스페인에게 투자에 대한 이자를 요구한다고 한다. 중심부가 진보를 위해 반주변부와 주변부에 저지른 야만에 대해 배상한다면 현재의 경제성과는 더는 유지되지 못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반주변부로 위상을 달리한 우리는 누구를 착취했고 현재 착취하려 드는지 반성해야 한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는 경제개발이라고 주장하는데.

 

중심부에서 주변부까지, 20세기 이전부터 21세기마저, 진보를 위해 농업이 착취되는 측면을 추적하지 않은 아쉬움은 남지만 《진보와 야만》은 진보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젖은 우리에게 성찰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경제!” 하면 모든 가치들이 하위로 쳐져야 한다고 믿는 ‘거꾸로 된 세상’에서,《진보와 야만》은 책 두께만큼이나 기대를 갖게 한다. 지구온난화라는 부메랑이 다가오는 21세기를 극복할 내일을. (신동아, 2007년 5월호)

지나가다 자취를 남겨 봅니다.. 잘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