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9. 1. 25. 23:58

 

《6도의 악몽》,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세종서적, 2008년.

 

지구가 더워진다고? 눈 덮인 고속도로에서 꽁꽁 언 채 반나절을 버텨야 했던 귀성객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고개를 흔들 노릇이다. 지구온난화에 책임질 일이 없다고 느끼는 시민들은 어렵게 이룩한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유권자의 마음을 읽는 정치인은 물론이고 정치권의 영향 아래 있는 공무권도 인기 없는 정책을 외면한다. 전문가는 경각심을 가졌지만 시민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지 못한다.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많다. 그들은 이전보다 변수를 추가한 모델로 정교한 시나리오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 그렇게 쏟아지는 논문 덕분에 지구온난화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회의론자의 교설은 더는 통할 수 없으므로 이제 시민들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지리학자였던 아버지가 1980년에 촬영한 빙하 사진을 들고 해발 6000미터인 페루의 골짜기를 20년 만에 찾았다 참담해했던 마크 라이너스가 다시 나섰다. 수몰 위기에 몰린 태평양의 투발루에서 영구동토가 녹아 사냥터를 잃어가는 알래스카를 둘러보며 지구의 미래를 걱정했던 그는 수많은 논문을 근거로 《6도의 악몽》을 썼다. 어느덧 두 아이의 아빠가 된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가 맞을 내일이 두려웠을 게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회(IPCC)는 2007년 4차 보고서를 채택했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2100년 지구는 1.1도에서 6.4도까지 평균 기온이 오를 것으로 예견한 것인데, 시민들은 이 경고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날이 최근 10년에 몰려있고 태풍과 허리케인이 두세 배 강해져 피해가 잇따르며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홍수와 가뭄이 교차해 재산과 인명피해가 속출한다는 소식은 지겹다. 과학기술이 제공한 안락한 삶에 길든 시민들을 행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6도 오르면 뜨거운 바닷물은 순환을 멈추고, 차고 무거운 심해에 저장된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녹아 솟구치며 폭발하기에 이른다. 그 열기와 그로 인한 산소부족으로 죽은 동식물에서 황화수소가 발생해 나머지 생명이 절종으로 접어든다. 그 마중물은 이미 부어졌는데, 1도에서 그치면 견딜 만할까. 기후변화를 약한 작은 동식물들이 슬며시 멸종하고 미국 대평원의 곡창지대가 버림받으며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며 사막이 늘어 모래폭풍이 작렬하는 가운데 극지방의 영구동토가 녹고 태평양의 작은 국가들이 침몰하는 시나리오가 나온다. 하지만 온실가스 배출을 지금부터 완벽히 없앤다면 모를까, 1도에서 그칠 가능성은 없다. 최선을 다한다면 2도에서 멈출 수는 있으리라.

 

앞으로 7년 안에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400ppm 이하로 낮춘다면 2도 상승으로 그칠 것으로 2007년에 추정했는데, 그러자면 10년 내에 이산화탄소를 60퍼센트 이하로 배출해야 한다. 2007년 농도가 382ppm인데 가능할까. 2009년을 맞은 오늘도 이산화탄소 배출속도는 늘어나기만 한다. 550ppm으로 안정시키면 3도에서 멈출 확률이 절반이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4도 이상 오르면서 환경이 더욱 급변할 지구는 5도에서 6도로 치솟을 가능성도 예측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50ppm으로 멈추게 할 방안은 없을까. 2030년까지 1인당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지금보다 85퍼센트 이하로 낮춰야 할 텐데, 어떤가.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 세계 에너지 수요는 화석연료 위주로 50퍼센트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나라의 추이를 기준으로 삼자면 수백 퍼센트 늘어날지 모르겠다.

 

2도 오르면 열사병으로 노약자가 몰살하고 곡창지대가 메말라 전쟁이 빈발할 텐데 북극항로가 열리니 기쁘게 받아들어야 하나. 북극항로 아래의 석유를 탐하는 자들은 벌써부터 신이 났다. 아마존이 화재로 소실돼 사막으로 변하고 슈퍼허리케인이 도시를 강타하며 타버린 호주를 비롯해 세계가 식량 부족으로 시달릴 3도 상승은 견딜만할까. 그린란드가 녹으면 해수면이 7미터 이상 상승하고 남극까지 녹으면 우리나라 매립지는 당연하고 고지대를 제외한 곳은 안전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4도 오른 상황이 그렇다. 5도 오르면 모든 농토는 메마르고 폭풍우로 해안이 붕괴하며 사람이 유일하게 살만한 북극을 차지하려는 전쟁을 끝으로 인류는 괴멸할 것이 예상된다.

 

핵을 하나의 대안으로 인정하는 한계를 가진 마크 라이너스는 2도 상승으로 그치길 순진하게 희망한다. 3도가 넘으면 그 관성으로 4도 이상 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분수령이라 해석할 수 있는 이른바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를 넘으면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 2도에서 그치게 하는데 특별한 과학기술이 동원될 필요는 없다. 아니 더 위험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아는 상식을 제안한다. 풍력이나 태양과 같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발굴하는 한편 이동거리를 줄이고 생활습관을 자연스럽게 바꾸며 탄소배급제를 채택한다면 세세만년 《6도의 악몽》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응급책이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는 저자의 생각에서 진정성이 엿보인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나중으로 연기할 수 있는 위협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도록 조건지워 있”다는 어느 학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마크 라이너스는 과학기술이라는 ‘백마 탄 왕자’를 막연히 기다리는 건 무모하다면서, 석유자본이 반길 정도로 편집한 자료를 내밀며 “기후변화는 헛소리다!”외치거나 “그래도 나는 일 때문에 승용차가 필요하다!”는 회의주의자를 여전히 경계한다. 행동하려는 시민들을 맥빠지게 하지 않던가. 현 금융위기에 퍼붓는 비용이 물경 2조 달러를 부었지만 미국 시민사회의 반발이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사회는 순식간에 전시체계로 바꿀 수 있었으니 《6도의 악몽》에서 깨어날 희망은 충분하다. 자식 키우는 이 모두 절박한 행동에 옮겨야 한다. 그 행동에 우리도 물론 예외가 아니지만, 지구온난화의 원인을 제공한 부자들부터 행동에 솔선해야 한다. 이제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 (우리와다음, 2009년 3-4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 11. 21:06

 

사우디아라비아의 속담이다. “내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셨지. 나는 자동차를 탄다네. 아들은 비행기를 타는데, 모르긴 해도 아들의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타야 할 게야.” 단, 그때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 낙타가 남아 있어야 한다.

 

북미원주민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7대 손까지 생각한다고 한다. 왜 하필 7대 손일까.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자나 손녀가 결혼하기 전에 늙지만 어떤 이는 살아생전에 증손자나 증손녀를 안아본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대부분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품에 안겼던 기억을 갖지만 경우에 따라 증조할머니나 증조할아버지가 안았을 수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4대가 같은 시대를 산 셈이니 합하면 7세대가 된다. 북미원주민은 마음에 담아야 할 기억의 범위를 7대까지 셈했을지 모른다.

 

떠들썩했던 2000년 새벽. 세계는 0시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새천년을 축하했는데, 이제 1년이 더 지나면 새천년도 10년이 지난다. 새천년에 가졌던 각오를 인류는 제대로 실천하고 있을까. 유엔 산하 기후변화위원회(IPCC)는 2007년 4번째 보고서를 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를 회피하려면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며, 10년 이내에 낭비적 삶을 돌이키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고였다. 전문가들이 이른바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로 주장하는 분수령을 넘어서면 온난화 시나리오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인데, 세계는 어떤 행동에 나서고 있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한 세대 전 우리는 현재의 환경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한 세대 후,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맞게 될까. 30년 전의 과학기술 수준이 낮아 예상이 어려웠던 건 아니다. 지금의 과학기술도 30년 이후의 환경을 짐작할 수 없다. 최고의 슈퍼컴퓨터를 돌려도 3일 앞의 기상을 정확하게 예보할 수 없는 과학기술의 한계는 30년 뒤에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환경변화 요인에 변수가 많다는 건데, 분명한 것은 30년 전보다 환경변화 속도가 시방 훨씬 빨라졌건만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행동은 굼뜨기만 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7대 손의 환경과 삶은 온전할 수 있을까.

 

30년 전의 기억은 현실 세계에서 꽤 멀다. 여름철 무더위가 내리 쪼이면 뭉게구름이 어느덧 몰려와 한바탕 소나기가 내렸다거나 겨우내 논두렁에서 외발썰매 타던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성애와 서릿발은 물론, 고드름조차 본 적 없는 이 땅의 아이들은 일제히 하품할 것이지만 어른도 마찬가지다. 고향의 정취가 말살된 뇌리에 남은 30년 전은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일 따름이다.

 

10년 전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으로 들끓었던 굴업도에 대기업에서 골프장을 추진하지만 시민사회는 조용하기만 하다. 골프장을 위해 핵폐기장을 막은 게 아닌데 그렇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어떤가. 농경지를 만들겠다고 눈을 부릅뜨던 정부가 약속을 어기고 개발로 방향을 바꿨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율스님의 고독한 단식으로 세상에 알려진 천성산 터널의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않고 공사는 진행될 뿐이다.

 

1년 전의 기억은 오롯이 남아있던가. 조류독감은 안심할 수 있나. 철새가 날아드는 1월 즈음 발생했던 예년에는 발생 지점에서 반경 300미터 이내의 닭과 오리, 그리고 돼지를 모조리 살처분했지만 고병원성이었던 작년에는 반경을 3킬로미터로 확장해 죽여야 했다. 철새가 떠난 4월에 발생했다는 점이 작년의 걱정이었다. 조류독감이 토착화되었을 가능성 때문이다. 담당 공무원이 과로사할 지경으로 해마다 방제에 열중했으니 올해는 그냥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조류독감의 발생 원인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에서 비롯된 광우병 파동은 한술 더 떴다. 제기되는 문제를 거들떠보지 않고 수입해 팔지 않던가.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 시민들의 정당한 행동과 목소리를 군사독재 시대에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억압한 정부가 미국과 그 나라 수출업자의 구미에 맞는 논리를 내세우며 수입했으니 이 땅의 소비자는 주권을 잃었다. 강압적 공권력으로 진실을 한동안 감출 수 있겠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부메랑이 돌아올까 두렵다. 광우병의 진원지인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증명되듯, 소비자에게 나타나는 광우병은 사육 방식의 근본 개선이 없는 한 예방할 수 없는 법이거늘.

 

전국을 소용돌이치게 했던 멜라민 파동도 벌써 잊혀간다. 멜라민은 일부 중국 축산농민의 일탈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닌데, 중국 사법당국의 가시적인 조처와 영아의 치명적 신장결석이 줄어든다는 외신이 보도된 이후 우리 사회의 냄비는 어느새 차가워졌다. ‘기준치’로 규정하는 변명거리가 마련되지 않는 한, 멜라민은 분유와 그 가공식품에서 당분간 검출되지 않겠지만, 식품 문제는 멜라민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멜라민보다 훨씬 위험한 수많은 첨가물이 기준치라는 장막에 가려져 무차별적으로 흡수되고, 그를 방조하는 식품산업 구조는 여전한 실정이다.

 

가축의 본성을 무시한 공장식 축산에서 비롯된 조류독감이나 광우병의 원인은 식품첨가물이 빚는 질병과 일맥상통한다. 소비자의 문화적 다양성을 감안하지 않는 탐욕스런 자본에 의한 부메랑이다. 멜라민 사태도 마찬가지다. 얼굴을 알고 지내는 이웃과 나눠왔던 농축산물이 경쟁적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나타났다. 2008년에 여러 부작용이 한꺼번에 곪아 터졌지만 처방은 표피적으로 그치거나 문제없다는 정부와 자본에 의해 문제 자체가 얼버무려졌다. 2009년 이후 어떤 일이 드러날까.

 

작년 전국을 달아오르게 한 ‘한반도대운하’는 ‘4대강 정비’로 명칭을 바꾼 채 다시 뿅망치 게임의 두더지처럼 떠올랐다. 드러난 무수한 문제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생략된 채 법적 절차까지 무시하고 착공하는 과오가 저질러졌다. 막대한 세금이 투여되건만 시민의 의견수렴은커녕 물론 반대의견을 억압하더니 올해 경인운하부터 추진하겠단다. ‘한국형 뉴딜’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액의 예산을 동원하자 침 흘리며 달려드는 건설회사들의 이익을 위해 경인운하부터 바칠 따름이건만, 논란 과정에서 시민과 맺은 약속을 독단적으로 폐기한 정부는 입맛에 맞게 편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경인운하의 경제성을 왜곡 날조하며 장밋빛 환상을 남발한다. 시민을 어린애 취급하며 내일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투명하지 않은 연구로 결과를 왜곡 날조한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교수는 국제적 망신을 초래해 우리나라 과학의 신뢰까지 잃게 만들었으며 그의 호언장담을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와 시민단체의 의견을 진작 경청했다면 그런 일을 없었을 것이다. 서울 복판을 흐르는 청계천은 시방 복원된 것인가? 천만의 말씀. 겉보기 근사한 배수시설에 불과하다. 지천의 유입이 차단된 현재, 복원은 오히려 멀어졌다. 하지만 청계천을 복원이라 주장하는 이는 경부운하의 내용과 비용을 베낀 4대강 정비로 돌이킬 수 없는 생태적 파국을 예고한다. 강은 생태 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시공을 초월해 연결되는 공간이거늘, 오가는 배를 위해 바닥을 긁어내고 자전거를 위해 주변에 아스콘 포장되어야 하는 배수구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황우석 전 교수가 더럽힌 신뢰는 다시 회복될 수 있지만 치명적으로 교란된 생태계는 여간해서 복원되지 못한다. 안정된 생태계에 기대 문화와 역사를 일궈온 인류와 생명가치들은 건강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가진 자의 탐욕이 원인이 된 요사이 세계 경제위기를 ‘녹색성장’으로 극복하겠다는 형용모순이 정부에 의해 제기된다. 녹색은 개념상 성장과 어울릴 수 없다. 과실을 일부 계층이 독점하는 게 성장인데 어찌 다양성이 배려되는 개념인 녹색으로 수식할 수 있나. 녹색을 진정 원한다면 ‘녹색분배’를 추구해야 옳건만 녹색성장이라는 마패를 든 정부는 조력발전으로 서해안의 갯벌을 파괴하려 든다. 조류를 차단하는 조력발전은 수많은 어패류의 산란장이자 육지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의 정화장인 갯벌의 생태와 환경적 가치를 황폐화한다. 갯벌에 깃든 식물성플랑크톤의 탄소동화작용으로 이산화탄소가 제거되며 발생하는 지구온난화 방지 기능을 차단한다.

 

조력발전과 더불어 핵발전마저 녹색성장으로 왜곡하는 정부는 수소와 바이오연료를 추진한다. 발전소에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는다지만 핵연료의 채굴, 정제, 운송,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발전 폐기물로 인한 위험성이 혜택과 무관한 자자손손에게 이어지는 점은 주목하지 않는다. 수소로부터 에너지를 얻기 위해 들어가야 하는 별도 에너지를 고려한다면 수소에너지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왜 생략하는가. 연료로 사용하려는 농작물의 경작을 위해 투입하는 석유 에너지는 그 농작물로부터 얻는 에너지보다 훨씬 많다는 점은 고려하는가. 에너지 대안은 에너지 과소비일 수 없다. 경제위기와 지구온난화와 환경위기를 자초한 삶을 과감하게 바꾸지 않는다면, 그 어떤 대안도 의미가 없다.

 

봄이면 황사가 어김없이 극성이다. 지구온난화와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되는 삶이 황사의 근본 원인이므로, 사막에 풀이나 나무를 심는 행동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본질적 대책일 수 없다. 에어컨과 지나친 난방으로 반복되는 여름 같은 겨울과 겨울 같은 여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면서 이제까지 아무 생각 없이 누렸던 낭비적 삶을 반성하고, 자연스럽던 예전의 삶을 새롭게 되살려 실천해야만 한다. 겨울은 추워야 정상이다. 자연스런 날씨에 수만 년 이상 견뎌온 우리는 에어컨과 보일러가 없을 때 몸도 마음도 사회도 건강했다.

 

얻는 에너지보다 월등하게 많은 에너지를 투여해야 경작이 가능한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그 가공식품은 그 자체로 위험하고, 에너지 위기나 지구온난화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피해야 한다. 무책임한 개발로 식량 자급기지를 잃은 상황에서 몽골에 식량기지를 확보하려는 당국의 구상은 수경재배로 경작하는 아파트형 농장을 세우겠다는 발상보다 현실적이긴 한데, 한시적일 뿐이다. 상호 신뢰가 유지되어야 실효를 갖는 타국의 식량기지는 식량주권과 거리가 멀다. 바이오연료로 석유를 대체하기보다 자동차 위주의 교통체계를 개선하고 이동거리를 최소화하는 도시, 숲으로 덮여 쾌적한 주거공간을 가꿔야 한다. 가진 자의 수명을 배타적으로 연장하는 생명공학보다 자손의 축복 하에 건강한 생명을 후손에 넘기는 자연스런 삶이 내일을 위해 더욱 행복하다. 생명보다 중요한 경제는 없고, 건강한 후손 없는 행복한 내일은 없지 않은가.

 

일본의 대안과학자 타까지 진지부로오는 인류는 나이아가라폭포를 향해 맹렬하게 노를 젓는다고 말했다. 내리막길에서 넘어질 수 없다며 자전거 페달을 더 빨리 돌리는 형국이라는 거였다. 채식운동을 펼치는 전직 공장식 축산업자 하워드 리먼은 낭떠러지 아래 최첨단 병원이 있으니 안심하고 자동차 가속페달을 밟으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자고 시민에게 주문한다. 자연스런 삶에서 희망을 찾자는 주장이다. 프랑스의 농민이자 저명한 환경운동가인 피에르 라비는 더욱 처참해질 환경을 물려받을 자식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환경운동을 멈출 수 없다고 고백한다.

 

신호를 무시하는 자동차 때문에 긴 횡단보도를 선뜻 건너지 못하는 노인은 제 자식을 위해 젊음을 희생시켰고 덕분에 이 땅은 휘황찬란해졌다. 주도권을 놓은 이를 배려하지 않는 공간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노인은 머지않을 내 모습이다. 식량과 에너지 자원을 거의 써버린 환경과 수많은 생명체를 잃은 생태계를 물려받은 자식들은 주도권을 놓은 부모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어떤 일을 했냐고. “너도 알다시피, 네 애비는 이런 파국을 막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단다!”하고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환경운동을 멈출 수 없다는 피에르 라비의 경고는 점점 유효해진다.

 

지구는 우주의 닫힌 섬이다.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녹색분배는 오늘의 탐욕을 포기하는 데에서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지구 안에서 생태계가 안정되어 순환할 수 있어야 인류의 내일도 건강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낙타는 그 수를 잃어가는데 우리는 시방 티핑포인트를 향해 질주한다. 7대 손은커녕 한치 앞도 내다보려 하지 않는 자세로는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2007년 유엔 기후변화위원회가 잡은 10년의 유예기간은 점점 줄어든다. 이제 행동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라면, 늦기 전에 7대 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한다. (기획회의, 200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