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8. 17. 00:14

 

세계 인구는 현재 69억을 향한다. 머지않아 70억을 돌파할 인구 중 10억은 만성 기아에 허덕이고 그보다 적은 4억은 비만이다. 지구촌의 식량위기를 유전자조작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문제를 일으킨 생명공학은 21세기의 어려운 과제로 비만 치료제 개발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추세로 2015년이면 7억 명이 비만이 될 텐데 그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시금 드높인 건가.

 

비만은 질병인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하고 적당히 운동한다면 비만은 오지 않겠지만 눈앞에 놓인 음식의 유혹을 뿌리친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 평화(平和)는 공평하게 밥을 먹는 행위다. 함께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밥상을 차리는 이, 밥상에 오르는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이의 마음까지 담아야 한다. 쌀 한 톨에 농부 99방울의 땀이 서렸다고 어른은 말씀하셨다. 밥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고 배웠다. 먹고 싶은 양의 80퍼센트에서 참으라고 흔히 충고하지만 그게 쉬운가. 잔뜩 차려놓고 거푸 권하는 친지의 배려 앞에 굳은 마음은 이내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비만이 질병이라고?

 

상식이 있는 국가라면 질병의 예방에 노력할 뿐 아니라 질병을 유포하려는 자의 행동을 제재해야 한다. 비만이 질병이라고 하니, 밥상 앞을 오래 머무는 자를 환자 후보로 분류해 합당한 조치가 필요하겠다. 그에게 많은 먹을거리를 안기는 이를 처벌해야 하나, 아니면 더 먹으려는 마음을 다스려야 하나. 머리와 코에서 신호를 받아들이는 뇌는 혀에서 거듭 전달되는 매혹적 신호에 현혹돼 식탁을 떠나지 말 것을 신체에 요구하고 그에 따라 손은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런 자는 정신병원에 처박아 뇌를 치료해야 하나.

 

“비만은 습관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질환!”이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왔나. 젓가락을 놓지 않는 자가 밥상 앞에서 주장했다면 사람들이 웃었을 테고, 아무래도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의 입에서 나왔을 텐데, 그들은 학술적 근거를 앞세운다. 그런데 그 결과를 내놓은 그들의 연구는 누가 지원했을까. 제약회사가 아닐까. 성장호르몬을 개발한 회사에서 작은 키를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세미나를 후원했는데, 비만은 아니 그럴까.

 

시장조사 전문기관의 전망을 토대로 어떤 언론은 2008년 현재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 5개국에서 판매한 비만 치료제로 제약회사는 자그마치 5억1천31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전했다. 그 정도면 세계의 기아를 상당히 해소할 비용일 텐데, 정작 그 시장조사 기관은 늘어나는 비만 인구에 비해 치료제 시장의 성장이 정체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제약회사는 더 벌 돈을 챙길 수 없다는 툰데, 그 이유로 치료제의 안정성을 들었다. 치료제들이 우울증에 이은 자살충동을 일으킨다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21세기 생명공학의 과제는 비만 치료제의 안정성 확보일까. 누구에게 당연한 논리일까.

 

미국인의 비만이 최근 15년 사이에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비만이 원인이 되는 질병으로 사망하는 환자 역시 비슷하게 늘어나는 모양인데 특이한 것은 흑인 여성의 비만이 가장 늘었다고 한다. 흑인 남성, 히스패닉이 그 뒤를 이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밝힌 질병통제예방센터는 비만을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흑인 여성의 비만이 왜 더 늘었는지 굳이 분석하지 않았다. 아니, 분석은 했을 테지만 발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왜 흑인 여성의 비만이 백인보다 더 늘었을까. 그렇다면 생명공학은 흑인 여성에게 효과 있는 치료제를 별도로 개발해야 하는 걸까.

 

미국에서 사회적 약자의 비율이 흑인 여성에서 가장 높다는 걸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이들이 밥을 더 먹기에 남보다 살을 더 찐다고 상상할 수 없다. 아이를 키우며 일해야 하는 그들에게 편안하게 앉아 느긋하게 밥상을 대할 시간은 몹시 부족할 것이다. 배가 고픈데 돈도 시간도 없으니 값싸고 금세 먹을 음식, 다시 말해 햄버거나 음료수와 같은 패스트푸드에 의존하기 쉬울 텐데, 문제는 미리 조리돼 오래 저장된 패스트푸드에 칼로리는 넘치지만 몸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영양분이 결핍되었다는 거다.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는 계층은 결국 사회적 약자일 가능성이 높고, 그들은 영양 불균형으로 비만이 된다고 관련 학자들은 해석한다. 그래서 서구사회에서 비만은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 지독한 역설이다.

 

치료제를 생산해 놓고 비만이 질병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할 제약회사는 임상실험의 기간을 늘리고 실험 대상자도 확대할 예정이라면서 부작용에 실망한 소비자를 다시 유혹하려 든다. 생명공학을 동원하면 안전성 확보한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걸까. 어느 정도 그럴지 모른다. 지금 유통되는 약품보다 효능과 안전성을 다소 개선할 수 있을 건데, 그런다고 비만 인구는 줄어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고혈압의 기준을 낮추려는 학자의 연구비, 관련 학회와 세미나에 들어가는 거액을 지원해온 제약회사의 행위는 거룩한 사명감의 소산이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광고 내용처럼, 고혈압으로 질병이 늘어나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일 리 없다. 혈압을 내리는 의약품의 처방이 두세 배 늘자 그 회사의 주식의 가격이 치솟았다는 소식은 무얼 웅변하는가. 제약회사 농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혈압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와 아주 밀접하다. 환자의 식단을 살피고 건강하게 바꾸도록 유도하는 일은 제약회사의 몫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환자는 딱히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비만과 혈압은 상관관계가 있다. 당뇨와 고지혈과 같은 성인병도 마찬가지다. 쓰레기 음식이라고 부자들이 경멸하는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으면 성인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든 말든, 성인병이 늘어야 판매고가 증가하고, 그래야 주식 가격이 올라 투자자가 돈을 벌어들이는 제약회사는 광고에 열중한다. 비만은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고. 높은 혈압의 기준을 내려야한다고. 그러자 가난한 이에 대한 의사의 치료제 처방전을 늘어난다. 치료제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도 늘어난다. 쓰레기 음식의 소비도 덩달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제약회사는 하등의 책임질 일이 없는 걸까.

 

각국정부는 제약회사의 수익에 정당한 세금을 부여하고 가난한 계층이 일에 치어 패스트푸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사슬을 풀어내는데 노력해야 한다. 거액 투자자의 목소리에 좌지우지되는 다국적 제약회사와 식품회사의 중역이 정부 요처에 임명돼 정책을 만들어가는 ‘회전문’이 만연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공허한 요구일 수 있겠으나,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을 수밖에 없는 계층은 깨어나기 위해서라도 요구할 건 해야 한다. 그리고 ‘지독한 역설’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행동에 스스로 나서야 한다. 다국적기업이 파는 패스트푸드를 거부하고 일터든 집 마당이든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일이다. 건강한 농산물을 구하려는 노력에 나서거나 내친 김에 함께 농사짓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비만이든 뭐든, 다국적기업이 광고하는 치료제의 신기루에 더는 속지 말아야 한다. (작은책, 2010년 10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9. 7. 21:21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분석을 인용한 한 언론은 신종플루 사망자의 80퍼센트 이상이 5살 이상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4세 이하의 영아나 유아 사망률이 50퍼센트가 넘은 일반 계절 독감과 다른 현상이라는데, 5살 이상에서 신종플루가 많은 이유로 학교나 캠프 활동에서 바이러스와 접촉할 기회가 많다는 점을 들었다는데,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주로 밖에서 감염되는 계절 독감은 왜 다른 감염 양상을 보이는 걸까.

 

우리도 사정이 비슷하다. 영아나 유아에 대한 통계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청장년층이 노년에 비해 감염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건 사실이다. 신종플루는 독특한 면역적 특징을 갖는 걸까. 평소 건강했던 사람이 증세를 보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사례가 있으니 걱정은 증폭된다. 나도 예외일 수 없지 않은가. 손 잘 씻고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을 삼간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의사도 처방이 어려울 것이다.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처방이 늦어 사망한 사례가 보도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함부로 처방했다 역가가 떨어지면 정작 감염되었을 때 치료가 어려워질 수 있지 않던가. 대부분의 신종플루 환자가 일반 감기약으로 치유된 사례가 훨씬 많은 현실을 의사로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 계절 독감에 대한 통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발표되지 않아 그렇지 신종플루 사망자는 같은 기간에 발생한 계절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을 테고, 그 기간 동안 교통사고로 사망한 수에 비한다면 아주 드물 게 틀림없을 텐데, 우리는 신종플루에 특별한 반응을 보인다. 높은 감염속도에 비해 초기 증세만으로 확실한 진단이 어렵다는 한계보다 신종플루의 면역적 특징이 분명하기 않게 때문일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보건당국은 신종플루에 대한 면역을 높인다는 건강식품 광고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시의적절한데, 왜 평소 건강했던 젊은이들이 신종플루에 잘 감염되는지 여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독감에 대한 면역을 백신보다 3배나 끌어올린다면서 초유(初乳)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사람의 초유는 매우 고가일 테니 시중 제품은 주로 동물에서 얻는다. 새 생명에 돌아가야 할 면역을 성인이 가로챈다는 점에서 마음 편하지 않은데, 미국 뉴욕에서 김치가 독감을 예방한다는 문구와 배추김치 사진이 있는 마스크가 선보였다고 한다. 치명적인 호흡기 질환인 사스로 사망자가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로 퍼져나갈 때 유독 한국인에게 발병이 없는 이유의 하나로 김치를 꼽았던 전문가들이 많았다는 점을 착안한 모양이다. 사실 김치가 먹는 이의 면역을 증강시킨다는 보고는 많다.

 

신종플루도 포함해 많은 질병은 면역이 떨어질 때 몰려든다. 영아나 유아, 환자나 노인, 그리고 임산부 들이 질병에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그렇다. 젊은이는 면역이 당연히 높아야 한다. 한데, 요즘은 그리 단정하기 어렵다. 자연스럽지 않은 삶을 사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음식이 특히 그렇다. 지역에서 전통 방식으로 재배해 식구와 천천히 요리해서 함께 먹는 음식을 등한시하는 비율이 젊은이에게 현저히 높은 건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말초적인 미각에 호소하는 가공식품이 면역을 떨어뜨린다는 건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는 이론이다. 안전성을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첨가물이 범벅인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만이 아니다. 흰 밀가루와 설탕과 같은 정제된 탄수화물, 환경호르몬이 들어간 음식에 젊은이들이 더욱 익숙해 있지 않던가. 우리나라에도 김치를 외면하는 젊은이가 많고, 다른 나라도 제 나라의 전통음식을 꺼리는 젊은이가 많다.

 

애초 돼지독감이라 했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름을 어색하게 바꾼 신종플루는 자연스럽지 못한 양돈농가에서 비롯되었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돼지 수백만 마리를 정제된 사료로 속성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의심한다. 돼지보다 사람을 주로 공격하는 신종플루도 비슷하다. 자연스러움을 잃은 젊은이에 집중된다. 신종플루를 계기로,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전통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충분하다. 음식, 축산,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요즘세상, 2009년 9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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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4. 14. 09:09

 

맥도널드 햄버거의 맛은 만국 공통이다. 세계적으로 3만 군데의 가맹점이 있고 1분마다 새로운 가맹점이 문을 여는 맥도널드 사에서 파는 햄버거 메뉴들은 맛 뿐 아니라 크기와 생김새와 조리방법이 같고 재료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가격은 다르다. 그래서 빅맥지수가 생길 수 있었다.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986년부터 분기마다 발표하는 빅맥지수는 맥도널드 사 햄버거의 한 종류인 빅맥의 가격을 미국 기준으로 비교해 각국의 통화가치를 산정하는 지표다. 빅맥지수로 볼 때 우리의 원화는 실제 구매력보다 조금 낮게 평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방영한 맥도널드 햄버거의 광고는 다른 국가와 달랐다. 손자손녀에게 사주겠는 꼬부랑 할머니가 햄버거를 머리에 인 광주리에 담는 내용이었는데 이후 매출이 늘지 않았는지 예의 만국 공통의 광고로 되돌아갔다. 출연배우는 다를지언정 맥도널드 햄버거의 광고가 보여주려는 개념은 세계가 같은데 왜 우리나라만 달랐을까. 어느 나라든 가맹점을 개설하는 순간, 매출 순위 1위로 올랐던 맥도널드 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 다시 말해 한국 상표의 햄버거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소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를 주목한다. 단순히 본점의 영업 방침에 따르는 프랜차이즈가 확산되는 현상만으로 그리 규정하는 건 아니다. 맥도널드 사는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자동화를 통한 통제, 이상 4가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시유시, 2004년)에서 주장한다. 4가지 사항은 단지 맥도널드 사와 관계하는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햄버거에 들어가는 살코기 패티와 빵의 재료인 밀가루, 감자와 소스, 그리고 식당을 이용하는 손님의 행동까지 두루 포함된다. 주차장에 주차료 내고 주차해서 카운터에 줄을 서 주문을 한 손님은 아까부터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좁고 불편한 식탁의자에 앉아 후다닥 먹고 제 쓰레기까지 정리한 다음 빠져나가면서도 마치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게 먹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다른세상, 2008)에서 마이클 폴란은 빨리 먹어치우는 패스트푸드는 사전 준비가 어떤 음식보다 길고 복잡하다는 걸 간파한다. 보라. 한 장의 쇠고기 패티를 고객에게 내놓기 위해 방대한 목장에서 옥수수 사료를 먹여 사육한 소를 도살하는 과정을, 햄버거 패티에 적합한 쇠고기를 일정하게 분쇄하고 맛과 향기를 한결같게 유지하도록 독특한 첨가물을 개발하는 과정을, 옥수수 사료를 위해 광활한 농장에 끝도 없이 심은 옥수수 물결을, 길이가 일정한 감자칩을 만족시키는 품종의 감자를 생산하는 방식을, 패스트푸드와 곁들여 마시는 음료수에 넣는 옥수수 시럽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렇게 많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전 세계 매장의 주방에 준비된 재료를 조리하는 방법 역시 맥도날드화 되어 있는데, 정작 패스트푸드를 조리하는 시간을 아주 짧고 먹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다. 맥도날드화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통 음식은 맥도날드화 될 수 없다. 음식 문화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고 조리방식도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다채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업원의 의상은 물론 인사말과 주문받는 태도까지 정형화한 맥도날드화는 그런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실제로 맥도널드 사는 미국에 햄버거 대학을 설치, 자사 브랜드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맥도날드화 하기 위해 연구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를 위해 음식 재료를 생산하는 자연과 더불어 그 음식을 만들어서 차려 먹는 사람의 자연스러움은 억압되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농작물과 축산물의 유전자를 획일적으로 만들어 예측 가능하게 사육하거나 재배해야 하고 동일한 맛을 위해 독특한 첨가물을 주조해 넣어야 한다. 그래야 계산이 명확해진다.

 

많은 이는 패스트푸드를 정크푸드, 다시 말해 칼로리는 많을지언정 영양분이 거의 없는 쓰레기라고 깎아내린다. 그도 그럴 것이 맥도날드화 되는 과정에서 영양분이 파괴될 뿐 아니라 음식 쓰레기가 많이 발생되고, 햄버거에 들어가는 쇠고기 패티는 스테이크용으로 내다팔기 어려운 살코기를 가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미국의 소비자 단체가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를 보자. 질병에 걸렸을 것으로 의심되는 앉은뱅이 소, 이른바 ‘다우너’(downer)를 사용한다는 의혹은 여기에서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우유를 평생 생산하다 지쳤거나 송아지를 낳고 또 낳으며 늙어버린 소를 도축해 활용하거나 유럽에서 광우병 위험물질로 분류해 폐기하는 이른바 ‘선진회수육’, 다시 말해 강력한 물을 쏘아 뼈에서 떼어낸 살코기를 모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그런 살코기는 질겨 다량의 지방을 섞지 않으면 안 된다.

 

햄버거 용 쇠고기 패티 하나에 400마리 이상에 해당하는 쇠고기가 포함되고 운송된 거리를 합하면 6000킬로미터 이상일 거라고 한다. 다량의 살코기와 지방을 한꺼번에 뒤섞기 때문일 텐데, 일정한 크기와 모양으로 제작해 냉동한 햄버거 패티는 간혹 식중독 균에 오염되기도 한다. 가공하는 과정이 청결하지 못하거나 제거되어야 할 부위가 포함될 경우, 살모넬라균이나 리스테리아균, 경우에 따라 치명적인 0-157대장균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인데, 문제는 희생자가 발생해도 원인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출처가 다양한 재료가 뒤섞였고 최종 소비자까지 전단되는 동안 2중 3중으로 가공된 까닭이다.

 

프랜차이즈 시장에 다수를 점하는 햄버거와 치킨, 피자와 샌드위치를 비롯한 패스트푸드는 종류가 다양하고 가맹점의 수가 많으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고,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한 광고는 맛과 영양을 과장하기 일쑤다. 자극적 광고에 이끌려 특정 패스트푸드를 먹는 소비자를 놓치지 않으려면 말초적 입맛을 기억하게 만들 필요가 있고, 그런 패스트푸드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계층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성인병이 만연하게 되었다. 비단 그런 부작용은 미국에서 퍼진 패스트푸드에서 멈추지 않는다. 컵라면이나 일회용 그릇에 담긴 우리의 각종 즉석 요리도 세칭 환경호르몬이라 말하는 내분비교란물질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많은 경우 첨가물로 인한 아토피를 염려하게 한다.

 

식사, 다시 말해 밥 먹는 일은 단순히 음식을 식도로 넘기는 행위로 그칠 수 없다. 밥은 식구와 이웃이 나누는 것이다. 공동체의 따스함을 체험하는 시공간인 밥상머리에서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져 내 앞에 놓였는지 깊이 생각하며 감사해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따라서 식사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연을 억압한 패스트푸드는 식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데 이제 교육이 맥도날드화 되고 자연조차 맥도날드화 되고 있다. 내일이 걱정일 수밖에.

 

인천 앞바다의 쓰레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살펴보려 소래포구에서 작은 고깃배를 타고 덕적도 인근 해역을 나가본 적 있다. 물때를 맞춰 이른 아침 출발한 고깃배는 4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아침과 점심까지 후다닥 먹은 어부들은 바닷물이 썰어 낮아지면서 드러나는 ‘낭장망’이라는 정치망을 정신없이 끌어올려 그 안에 든 물고기를 뱃전에 털어냈는데, 잡혀 올라온 물고기보다 쓰레기가 훨씬 많았다. 어선에서 버린 폐그물과 밧줄이 눈에 띄었지만 도시에서 휩쓸려온 온갖 생활쓰레기가 상당히 많았고 중국과 북한에서 버린 쓰레기도 적지 않았다. 인천 앞바다의 어부는 차라리 바다의 환경미화원이라 부르는 게 나을 지경인데, 안타까운 현실은 기껏 건져올린 쓰레기들을 도로 바다에 던져버린다는 것이었다.

 

좁은 뱃전에 쓰레기를 모아 둘 공간이 없고, 일이 고된 반면 수입이 적은 어부를 지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일손도 부족하며, 다시 소래포구로 돌아오는 동안 쓰레기 사이에 끼어 올라온 물고기를 골라내느라 시간도 없었지만, 수거된 쓰레기를 바다에 던지는 이유는 포구에 가지고 간들 치워줄 사람도 관련 제도도 없다는 점이었다. 소래포구의 200여 척 고깃배들이 날을 잡아 작심하고 끌어올린 쓰레기를 포구에 쌓아놨더니 더운 날씨에 벌레가 끓고 악취가 진동하는 데에도 아무도 치우는 않았고, 민원에 시달려 결국 불태우고 말았다지 않던가. 어획물이 점점 줄어드는 마당에 쓰레기 수거한 만큼 중앙이나 지방정부에서 지원해준다면 바다도 살리고 어부의 일자리도 보전되며 시민들의 식생활도 한층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긴 어망은 밀물과 썰물에 휩쓸리던 물고기를 밤새 담고 있었고, 뱃전으로 끌어올려 털어내자 인천 앞바다의 풍성했던 기억이 펼쳐졌다. 농어, 숭어, 광어, 우럭, 갈치, 복어, 밴댕이, 서대, 박대, 커다란 망둥이, 그리고 크고 작은 새우들…. 끌어 올린 그물 잡으랴, 방향타와 엔진 출력 조정하랴, 한눈팔 사이 없이 뱃전을 뛰던 어부들은 20여 개의 낭장망을 다 털어내곤 잠시 짬을 내었다. 고맙게도 광어회를 뜨고 펄떡펄떡 뛰는 왕새우의 껍질을 벗겨 아까부터 거치적거리던 조사자에게 내주었던 거다. 그 맛이란! 깔끔한 식당에서 예의를 차리고 먹는 생선회와 차원이 달랐다. 강한 태양 아래 짜디짠 인천 앞바다 속살의 내음이 온전히 입으로 딸려들어오는 느낌이랄까. 어부의 억센 팔과 땀으로 끌어올린 바다의 맛은 기억에서 평생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고마움과 아쉬움으로 헤어진 후 들고나는 고깃배를 바라보며 기울이는 술잔. 노을이 붉어지는 소래포구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정취를 선사했는데, 그때가 벌써 10여 년 전이다. 아파트단지로 둘러싸인 요사이 소래포구는 사람들로 북적여도 쓸쓸하기만 하다. 식당골목은 낯모르는 손님을 향한 호객소리로 시끄럽고 지역과 관계없는 온갖 젓갈들은 예가 소래포구라는 걸 잊은 지 오래다. 주변 갯벌이 매립돼 거의 사라졌어도 소래포구는 아직 제 자리를 지키건만 추억의 멋과 맛, 그리고 갯내음 가득했던 낭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양식 회부터 새우튀김까지, 포구를 흉내내고 있을 뿐, 바다를 오롯이 기억하는 곳은 아니다. 거기에도 패스트푸드 가맹점이 가장 많은 손님을 끌어들인다.

 

모름지기 음식에는 조리한 이의 노고가 담기고, 음식에 들어간 농작물과 수산물과 축산물을 재배하고 잡고 키운 이의 땀 냄새가 깊게 배어 있어야 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먹은 왕새우, 갯벌에서 맨손으로 채취하던 이가 따준 백합, 목장에서 손으로 짠 한잔의 우유, 산간 밭뙈기에서 방금 캐낸 하지감자로 부친 감자전의 맛이 그렇다. 생산현장에 함께 있기에 그 맛은 더욱 빛난다. 그런 음식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감사히 먹을 뿐, 한 톨도 남길 수 없다. 비단 현장이 아니라도 같은 마음가짐으로 대하게 되는 음식이 더 있다. 이웃 농가에서 사온 푸릇푸릇한 채소로 어머니가 차려주던 아침상, 장모가 잡은 씨암탉 점심, 텃밭을 다녀온 아내가 내놓는 저녁상이 그렇다. 이른바 ‘슬로푸드’다.

 

마이클 폴란은 풀만 먹으면 되는 초식동물이나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과 달리 잡식동물인 인간은 모든 걸 먹을 수 있지만 아무거나 먹다 자칫 치명적인 독소로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 하긴 독수리는 아무리 썩은 고기도 마다않고 소는 들판의 모든 풀을 다 뜯어먹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제법 가리는 종류도 있다. 아무리 허기져도 상한 고기를 외면하는 육식동물이 있고 초식동물도 독초는 피한다. 서해 무인도에 풀어놓은 흑염소는 절대 천남성은 건드리지 않는다. 그걸 본 우리 조상은 사약을 만들기 위해 천남성 뿌리를 푹 고았는지 모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경험으로 제가 먹을 음식을 차린다. 흑염소 새끼는 제 어미의 몸짓에서 배울 테고, 사람도 들로 산으로 뛰어놀다 동네의 어른과 언니와 오빠, 누나와 형에게 배울 것이다. 그러므로 두꺼비 알이나 독버섯을 먹어 사망하는 이 일찍이 없었다. 하지만 경험할 기회가 없다면, 마이클 폴란이 걱정한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음식에 대한 뿌리를 잃었기 때문이리라.

 

경험은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바닷가 음식이 산골의 식단과 같을 리 없다. 지역에 따라 짜고 싱겁고 맵고 신 음식의 특징은 독특한 문화의 차이일 수 있어도 우열은 결코 아니다. 중요한 건 삶의 방식이 달라 벌어진 다양한 개성이다. 환경에 따라 자연스레 뿌리가 깊어진 문화요 역사다. 전주비빔밥은 전주에서, 갈치회는 제주도에서, 삼치회는 전남 나로도 인근 바닷가에서 먹어야 비로소 제 맛이 난다. 도시에서 활어회로 먹으려면 수족관에 항생제를 넣어야 한다. 전어도 가을철 바닷가에서 먹어야 항생제 없는 맛을 즐길 수 있다. 산채비빔밥은 산골에 가서 먹고 은어회는 여름철 하동 쌍계사에서 맛보는 것이 좋겠다. 한데 요즘 팔도 음식의 냄새는 대도시 아파트단지의 부녀회 난장에서 한꺼번에 진동을 한다. 정성도 문화도 없는 천편일률의 난장판이다.

 

제철 제고장에서 나온 재료를 사용해야 제 맛이 나는 슬로푸드는 재료가 무엇인지, 누가 재배했는지 훤히 아는 음식이다. 슬로푸드를 먹으면 아무 탈도 없지만 탈이 나도 그 원인을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이른바 ‘엄마표 식단’이 대개 그렇다. 어떤 재료로 조리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음식일수록 안전하다. 그에 반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른 채 홀로 찾아와 얼른 먹어치우고 마는 패스트푸드는 음식에 대한 모독이다. 패스트푸드는 불가피할 때 이외에는 기웃거릴 대상은 아닐 것이다.

 

요즘 세계화 물결로 외국의 전통 음식을 맛볼 기회가 잦아졌다. 다양한 음식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길 수 있겠지만 가끔 맛보는 외국 음식이 덮어놓고 고급이거나 우리 음식보다 우월한 것일 리 없다. 외국의 음식을 우리의 입맛에 맞게 변형한 식단과 외국과 우리 음식을 적당히 섞은 이른바 ‘퓨전음식’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고유의 풍미와 문화를 느낄 수 없게 만든 ‘국적 없는 비빔밥’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작지 않지만 재료와 음식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있고 함께 먹는 이와 다정한 눈길을 마주할 수 있다면, 음식의 다양성을 맛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지역마다 개성이 넘쳤던 그런 음식이 새삼 그리워졌다. (사이언스올, 2009년 4월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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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식도 세계화시킨다고 하데요. 댓글을 비공개로 해 놓았군요. 이유가 있겠지만 찾아오는 블러거들을 위해 공개로 하심이 어떨른지요?
아니 그럴 수가, 공개 비공개를 어찌 설정하는지요? 비공개로 바꾸지 않았는데, 어찌 된거죠? 내 컴퓨터에서 이상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