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5. 9. 1. 14:47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스코트 새비지 엮음, 김연수 옮김, 나무심는사람 2001년



90년대 중반, 강원도 인제군 내린천 골짜기에 돌집을 짓고 사는 서예가를 방문한 적 있다. 어스름 저녁, 도르래로 물건 옮기는 계곡을 거대한 바위를 건너 뛰어 만난 서예가는 해가 뜨면 일어나 농사짓거나 붓을 들고, 해가 지면 책 읽다 잠을 청한다고 일상을 전한다. 벌써 10여 년을 그렇게 산 서예가는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며, 동행한 주민에게 도시 흉내내려고 가랑이 찢으며 고생하지 말고 시골을 만끽하라고 권했다.

 

내린천 깊은 골짜기까지 아스팔트가 뚫리고 전기가 가설되면서 그 서예가는 정든 골짜기를 떠나 한적한 도시로 들어갔다. 전기가 들어온다면 볼썽사나운 나들이 인파가 없는 작은 도시의 변두리가 낫겠다는 기대였는데 거기인들 조용할까. 개발에 소외되었다며 주민들 들쑤시는 건설업자가 아스팔트 깔고 아파트 돋아 올리느라 정신이 없다. 차라리 문 닫아 걸을 수 있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 서예가는 요즘 울적해한다.

 

바둑판처럼 이어진 미국의 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면 좌우로 거대한 쇼핑몰이 줄지어있다. 그런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인적 없는 쇼핑몰? 하지만 그 안은 인파로 바글바글하다. 그런데 차타고 들어가 밥먹고 잠자고 놀고 쇼핑하는 곳의 시간제 종업원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샌드위치를 주문하자 “랄랄라?” 한다. 랄랄라? 그게 뭔 소린가. 어리둥절해 하는 동양인에게 우리 말 잘 하는 미국인이 또박또박 일러준다. “Large? or not?”

 

동네 슈퍼보다 값싼 대형 양판점, 그 때문에 망하는 동네가게와 중소기업, 인건비 착취하러 외국으로 나가는 기업, 그 때문에 실직자는 늘고 노동조합이 붕괴되는 현실에서 서민의 구매력은 줄어든다. 아이들은 커 가는데 모은 돈 다 쓰면 앞으로 어떻게 사나. 비정규직이라도 좋다는 실직 이웃들이 늘어가는데 실력자가 유인한 시골 도시의 비행장은 텅텅 비고, 수백 개 골프장은 거품으로 이어질 건설경기를 책임진단다. 전천후 돔형 인공스키장이 전기 과소비를 예고하는 가운데 수려했던 지리산과 점봉산 자락은 양수발전소로 연실 뭉개진다.

 

양수발전소 건설로 시끄러운 지리산 산청 고운동과 점봉산 주변은 얼마 전까지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다. 주민들의 삶은 불행했을까. 우리나라의 <녹색평론>과 비슷한 미국의 <플레인>이란 잡지는 스스로 러다이트라 말하는 기계 혐오자들이 전기 없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소개한다. 그 글들을 스코트 새비지는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로 엮었다. 과학기술, 자본, 개발로 이어지며 숫한 소외를 낳는 것이 현대문명이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서문에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찾아 스스로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소중한 목소리로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를 소개한다.

 

전기가 없으면 당장 불편하지만 익숙해지면 한결 자유로워진다. 자동차가 없으면 기동력이 움츠러들지만 이웃의 희로애락을 비로소 바라보게 된다. 전기를 버린대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고, 치유하고, 생산하고, 돕고,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의 생기 넘치는 경험담은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희망가일지 모른다. 플러그를 뽑고 읽어보자. (발간 예정 서평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