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2. 3. 11. 11:30

 

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 고이데 히로아키 지음, 김원식 외 옮김, 녹색평론사, 2011.

원자력의 거짓말, 고이데 히로아키 지음, 고토 다이스케 옮김, 녹색평론사, 2012.

 

은퇴 뒤 오키나와로 가기 전, 도쿄대학교 우이 준이라는 존경받는 노교수는 평생 조교수의 지위를 결코 넘지 못했다. 유기수은으로 인한 미나마타 만 중독 사건에 뛰어든 대학원생 이래 그는 출세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보수적인 학계가 그렇다고 한다. 학교나 학계를 지배하는 사상과 다른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사회적 존망을 받더라도 결코 승진할 수 없다고 한다. 대학도 인간이 사는 세상이므로 유럽이나 미국도 어느 정도는 그럴 테지만 일본은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하겠는데, 우리는 어떤가. 주류 사상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를 받아주는 대학이 있긴 있나.

 

고이데 히로아키는 핵발전의 안전성을 부정하는 학자다. 그도 학창시절 에너지 자원을 찾는 일본과 인류에게 핵이 큰 희망으로 다가올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 들어가 연구를 시작하면서 곧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연구를 거듭할수록 핵발전의 치명적 위험성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해왔다. 학교나 사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거리낌 없이 펼쳐냈다. 그래서 그는 승진할 수 없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여전히 학교에 교원이자 연구원으로 근무하지만, 아직도 조교다. 우리나라와 같은 직급은 아니지만 최하위 교원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고, 벗어날 생각도 한 적 없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구가할 따름이다.

 

작년 311일 후쿠시마에서 도쿄전력의 핵발전 단지에서 4기의 반응로에 폭발이 일어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고이데 히로아키는 사고 전에도 실험실에서 핵발전의 위험성을 연구하며 여기저기 기고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강연을 요청하는 이 없어 그 전에는 마냥 한가로웠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핵발전소를 가동한다고 대내외적으로 자랑하던 일본에서 사고가 없으니, 아니 드러나지 않았으니, 답답하지만 발언할 기회가 없었던 그. 사고 후 그를 우리나라에 초청해 실감나는 이야기 듣고 싶은 단체가 많기에 미안해 어쩌지 못해 했다던데, 그의 책이 드디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고이데 히로아키가 작년 311일 이전에 쓴 책과 이후에 엮은 책을 최근 녹색평론사에서 출간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반핵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운동가인 김원식 선생이 노구에도 번역에 나섰고, 우리나라에 정착해 힘겨운 시민운동에 전념하는 고노 다이스케가 마음을 다해 번역한 두 권의 책은 짐작하듯, 거짓말 없이 한시도 지탱할 수 없는 핵발전소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다. 옹진군의 굴업도와 부안의 위도에 핵폐기장을 만들겠다 하여 사회가 들끓었을 때 반짝 출간했던 핵발전 관련 책들이 한동안 서점가에 부재해 핵의 위험성을 잊고 살았는데, 긴장해야 한다는 걸 고이데 히로아키는 다시금 강조한다.

 

일본도 주춤하고 독일은 폐쇄를 선언했건만 이번 기회를 도약의 계기로 삼자고 나서는 핵동맹이 여전히 설치는 우리나라에서 두 권의 책은 우리 독자들에게 핵발전의 추악한 협잡과 거짓과 위험성을 제발 귀담아 들으라고 설득력 있는 쉬운 말로 이야기한다. 일본의 사정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일본만의 상황일 리 없다. 고이데 히로아키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위험성을 강도 높게 지적하며 핵안전을 연구하는 이가 대학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일본은 그나마 우리보다 낫다. 일본도 핵동맹이 독점하는 핵발전에 관한 정보를 속속 깊게 알기 어려워하지만 우리나라는 오리무중이 아닌가.

 

핵발전은 평화적 이용이고 핵폭탄은 무기인가. 그 둘은 차원이 다른 문제인가. 거듭 이야기하지만 핵발전은 핵폭탄을 전제로 가동하는 파멸적 에너지에 불과하다. 핵은 무한한 에너지인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과 같이 발전소를 유지한다면 석유나 석탄보다 한계가 빨리 올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처럼 더욱 늘린다면 금방 고갈될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발생하는 플루토늄을 가공한다면 훨씬 오래 쓸 수 있다는 가정은 그 비용과 위험성을 고려할 때 즉각 기각되고 만다는 사실을 고이데 히로아키는 일본의 사례를 들며 실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왜 세계의 여러 정부와 자본은 핵발전을 고집하는가. 물론 핵발전을 원하지 않는 시민이 집약된 힘을 정치권에 보여주지 못한 데에 그 이유가 크겠지만, 핵발전에 관련한 범 세계의 막대한 투자를 한 자본은 국내외적으로 운영되는 기간 동안 막강한 이권을 독점적으로 누리려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막대한 자본도 감당할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할 때 벌어질 수 있다. 그때 발생한 피해와 그 보상은 어떤 자본도 감당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정부는 어느 이상의 피해보상을 면제해주었다. 그렇다면 정부가 보상을 떠맡을 것인가. 겉으로 일부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지만 결국 외면하고 말 공산이 크다. 온갖 거짓과 협잡과 위협으로 유야무야시킬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사례를 미국의 드리마일과 구소련의 체르노빌에서 보았다. 일본도 결국 마찬가지였다.

 

작년 11월 일본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무려 4300명에 달하는 복구 노동자가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도쿄전력에서 3억 엔의 돈을 쥐어주며 발설하면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사실까지 후쿠시마 현의 한 의원이 밝혔는데, 고이데 히로아키는 핵발전은 처음부터 아직 누구도 끝을 알 수 없는 그 끝까지 거짓으로 점철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실증을 들어 이야기한다. 지구온난화를 완화한다는 주장 따위는 약과다. 위험성을 감추지 않으면 노동자가 찾아올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감언이설로 찾아온 노동자의 건강은 어떻게 참담해질 것인가. 그 가족은 어찌 될 것인가.

 

핵이 없으면 산업이 마비된다면서 안전을 강조하는 핵발전소는 수도권에 절대 들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의 사고는 반경 30킬로미터의 생명과 재산권을 즉시 없애버린다. 우리나라는 그 도가니 속에 있다. 빠져나갈 수 있는가. 고이데 히로아키의 책을 읽고 각성한 시민들이 나서서 행동하면 가능하다. (우리와다음, 2012년 봄호)

 
 
 

자원·에너지

디딤돌 2005. 11. 8. 01:02
 

원전센터로 분칠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선정 주민투표의 결과가 나온 지난 11월 2일, 유력한 신문의 독자투고란에는 비슷한 주장이 일제히 실렸다. 투고자는 대부분 전력관련자들로 ‘투표결과를 수용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기본자세’라는 요지도 한결같았다. 원전센터를 황색도 아니고 ‘녹색병원’이라고 전날까지 요란하게 시간을 도배했던 텔레비전 광고는 거의 최면술이었다. 찬성 투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방사성폐기물처분장과 관련이 없는 지역 주민들도 동사무소에 가서 찬성으로 투표할 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녹색병원 건설에 찬성한다면 발전기금 3천억 원을 준다고 말해보자. 누가 반대하겠는가. 하지만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들어서면 동네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바뀌고 방사능에 오염될지 모른다며, 3천억 원도 인구수로 나누면 일인 당 백만 원에 불과한데 몇 년에 걸쳐 당신이 아닌 지방자치단체에 지불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찬성할까.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짓고 싶은 이는 어차피 한 군데는 확정될 수밖에 없었던 이번 주민투표의 결과를 승복하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주민들을 억압할 수 없는 한 갈등은 남을 것이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 다수결이라고 말하지만 그리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수결로 결정하자는 합의를 전제해야한다. 녹색병원으로 지독하게 분칠한 이번의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선정에는 납득할만한 합의 절차가 없었다.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공급자가 주민들에게 찬성을 강권했을 뿐이다.


이해당사자가 많다면 다수결 실시를 위한 사전 합의과정은 길고 지루할 것이다. 하지만 존중해야 한다. 시간을 줄이려면 심의민주주의를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주민 각계각층의 의견을 대리할 수 있는 시민패널을 관심 있는 주민들 가운데 불편부당하게 선발하고, 그들이 깊이 숙고하며 민주적으로 도출한 의견을 정책결정자들이 존중하도록 이끄는 제도를 말한다. 작년 시민과학센터는 원자력 위주로 구성된 우리나라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합의회의’라는 심의민주주의로 물은 적 있다.


1998년 한국유네스코위원회에서 개최한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합의회의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했다. 과학 지식이 일천한 시민패널도 충분히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유전자조작식품의 안전성과 위험성을 주장하는 양측 전문가들의 토론과 주장, 그들에 제공하는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시민패널은 이윤에 눈먼 공급자가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소비자이기 때문이었다.


작년 합의회의에서 도출된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정책결정자와 공급자의 눈부신 찬성투표 유도로 결국 역사의 고도인 경주에 방사성핵폐기물처분장을 들어서게 됐다. 가라앉지 못한 갈등은 앞으로 과정마다 속출할 것이다. 다수결에 앞선 민주적 합의가 배제된 까닭이다. 관권과 금권의 승리를 챙긴 공급자는 신뢰할만할까. 아이가 경주로 수학여행 간다면 나는 교장실로 전화해서라도 말릴 것이다. 숫한 경험을 미루어, 시민 무서워 않는 행정이 핵폐기물 운송을 철저하게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공대신문, 2005년 12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5. 9. 1. 14:25
 


《시민과학자로 살다》, 타까기 진자부로오 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0년



《시민과학자로 살다》를 쓴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이공계 지성인이다. 리영희 선생은 이 사회에서 진정 필요한 존재는 지식인보다 행동하는 지성인이라고 말하는데, 사회가 갈망하는 지성인은 인문계에 비해 이공계에서 턱없이 부족하다. 문제를 저질러 놓고 뉘우쳤던 노벨이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만이 아니다. 문제를 인식한 대부분의 이공계 연구자는 패권주의에 무릎 꿇거나 가치중립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버린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자연스레 이공계를 지망했다. “일본은 과학 측면에서도 미영(美英)에 패했다” 또는 “과학이 낳은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망했다”라는 당시의 신화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학’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핵화학을 전공한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1960년대 대학시절, 양심의 정언명령을 학습한다. ‘안보투쟁’을 남들처럼 참여할 때였다. 시위 중에 숨진 학생을 놓고 과학의 가치중립을 들먹이면서 침묵하거나 냉소로 일관하는 교수들의 태도에 분개하면서도 결국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기억이 깊은 상처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원자력 사업’에 취직했지만 오래갈 수 없었다. 핵시대의 연금술로 자화자찬했던 플루토늄의 ‘위험한 마성(魔性)’을 집요하게 연구하려하자, 핵발전소 장사를 계획하던 상사는 회사에서 필요한 일이 아니라며 ‘옆으로 나란히’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잠재했던 양심은 보장된 직장과 안정된 대학교수 자리를 거푸 걷어차게 만들고 말았다.

 

불도저 같은 국가권력 앞에 나리따 공항 부지의 농토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원성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국가권력의 거대 시스템에 속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농민운동가이자 문인이었던 마야자와 켄지의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을 우리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고뇌를 읽고 정신을 환기한다. 그 길로 대학교수를 그만둔 그는 시민과학자의 고난의 길을 자청했다.

 

원자력자료정보실을 창설 운영하면서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아찔했던 1973년의 미하마 핵발전소 사건의 전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후 1979년 미국 드리마일 핵발전소 노심 용융 사고,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를 직시했고, 수많은 반핵 비정부기구의 전문가와 참여하는 시민으로 정렬을 쏟았다.

 

플루토늄의 위험성을 세계에 알리고 시민 처지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흔히 대안 노벨 평화상이라 일컫는 ‘바른생활상(Right Livelihood Award)’을 1997년에 수상한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무리한 탓에 대장암에 이어 간암 수술을 자초했지만, 죽음을 예감하는 가운데 ‘체념에서 희망으로’ 나가자고 힘주어 말한다. ‘과학의 비무장화’를 주장하는 이공계 지성인답게 시민과학자 양성하기 위한 타까기 학교를 창설한다.

 

언제 어디서나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교만떠는 인간은 사실 과학기술 도움 없이는 한시도 아무 데에도 살 수 없다. 생태계 도움 없이 인간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타까기 진자부로오는 고민 끝에 생태주의를 이야기한다. 《시민과학자로 살다》, 유혹을 기다리는 예비 과학자의 필독서이길 바란다. (발간 예정 서평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