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2. 7. 15:22

 

스콧 니어링은 행복한 죽음을 꿈꾸었고 실현했습니다. 100년 하고 3주일을 더 산 그는 죽음을 이쪽 항구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지요. 이쪽 항구에서 손수건 배웅을 받고 수평선 아래로 사라져간 배는 저쪽 항구에 서서히 모습을 드려낼 것이라면서. 저쪽 항구에서 기다리는 배는 이쪽 항구에서 떠나야 나타날 테지요. 생명은 그런 거라며,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던 스콧 니어링. 그는 자신이 평소 존경하던 부인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초창기 개업 의사였던 한 원로는 제자와 바둑 한 수 두고, 자식들에게 덕담 남긴 뒤, 잠자리에 들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데, 90에 삶의 즐거움을 내려놓은 그는 천수를 누렸지만 홍성훈 선생은 달랐습니다. 70이라는 아쉬운 나이에 자신의 삶을 접었습니다. 당신이 의사면서 온몸으로 펴져가는 암세포를 약물로 방사선으로 그리고 수술로 막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었기보다, 최첨단 의료장비에 둘둘 말려, 의식도 없이 기계에 맡기며 연장되는 수명을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차라리 그 시간을 아끼던 친구와 동료, 선후배, 그리고 가족과 나누고자 했을 테지요.

 

작년 1223, 선생의 오랜 단골인 구월동의 한 식당에서 <인천in> 시민편집인과 편집기자들이 운영위원들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 몸이 불편하다 일찍 일어나며 선생은 무척 미안해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이 든 남성에게 많은 전립선 비대증정도로 알았는데, 115, 해안동 아트플랫홈의 삶과 여행 이야기사진 전시장에서 적잖게 당혹스러웠습니다. 불과 3주 만인데, 선생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고, 행사가 진행되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뭔지 모를 차분함과 숙연함이 전시장을 감쌌습니다. 게다가 가는 나뭇가지의 잎사귀 대신 붙은 노란 종이마다 쾌유를 빌고 있는 게 아닌가요. 모두 알고 있는 선생의 질병을 그때까지 저는 몰랐던 겁니다.

 

경인고속도로의 도화 출입구 근처, 선생께서 30년 동안 환자를 보았던 그 병원의 2층을 소박하게 쓰는 선생의 차남 상의는 낮아도 차분하게, 선생의 병세와 진단 과정을 천천히 또렷하게 설명하면서 약간의 아쉬움도 전했습니다. 자신도 의사인데, 암세포의 진행을 거의 완강할 정도로 막으려하지 않는 당신의 고집에 어찌 야속함이 없을까요. 하지만 받아들이는 아들의 모습에서 의연함과 따뜻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노란 종이에 곧 쾌차하실 거라는 문구를 써넣기 싫었습니다. 그저, 저와 여기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가슴에 선생이 깊게 남길 바랐습니다.

 

그날 방문한 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서명을 한 사진집을 나누어주며 극도로 피곤한 가운데 일어섰던 선생은 다음날 한결 쾌활해진 모습으로 호인수 신부와 두 분의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근처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겼지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어도 피로와 고통이 보통은 넘었을 텐데, 당신은 자신의 삶을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어쩌면 암 진단을 받은 작년 29일부터 남은 삶을 그렇게 정리하리라 마음먹었던 건 아닐까요. 결국 한달 만에, 당신의 삶을 가족과 친지의 축복 속에 마감했습니다. 가까이 만나던 친구들과 마지막 점심을 들며 좋아하던 막걸리까지 곁들었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오려는 자식들까지 마다하며, 평생을 반려한 분께 당신 곁에서 죽으니 행복하다 했다면서요.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장을 가며 들은 부고는 두 달 이상 남았을 거라던 풍문을 믿으며 안부 전화 걸지 않은 저를 문책하게 했습니다만, 어쩌면 청첩장과 의미가 중첩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날 결혼식장에는 신혼부부의 일가친척이 낳은 아기들이 엄마와 아빠 품에 안겨 있었으니까요. 스콧 니어링이 말한 이쪽과 저쪽 항구 비슷한 거라는 바로 그 느낌입니다. 그날 하루 종일 제게 파노라마처럼 다가온 장면은 참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선생다운 풍경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었습니다.

 

수봉산 기슭에 집터 잡으신 뒤, 내내 다녔을 제물포성당에 차린 빈소의 풍경은 역시 편안했습니다. 원숙해진 나이로 같은 전공의사인 친구와 보름 씩, 대부분이 노인인 환자를 나누어 진료하면서, 내팔, 산티아고, 킬리만자로, 그리고 세계와 한반도 구석구석의 전설과 독특한 경관이 주절주절 달린 곳을 걷고 또 걸었을 거라는 이야기,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을 몸소 실천하며 아낌없이 지원하던 이야기, 떼돈을 벌어들이려 하지 않는 선생의 신념에 매료된 다른 의사와 심지어 세무 공무원 이야기, 선생의 고집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톨릭 평신도와 교계를 지원한 이야기, 사심과 숨김없는 삶에서 우러나는 가족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우애 이야기들이 빈소에 감돌았습니다. 그리고 조문객들의 결론은 한결같이 선생은 평생 행복했다!”는 것이었지요. 한마디로 부럽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자식 같이 대하던 선생의 오랜 젊은 소리 선생님을 마지막 길에 자신의 둘째 며느리로 맞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선생의 속마음을 채운 상의에게 제가 왜 고마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떠나기 전에 서둘러 혼인하고 싶었을 그 며느리는 평소 둘레길 걷듯, 따르는 무리 기다릴 여유도 주지 않고 떠나셨다고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당신은 참 복도 많았습니다. 선생의 뜻을 따르겠다고 모인 이가 빈소에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을 선생은 만 70에 자신의 길을 홀연히 재촉했지만, 남은 우리는 그저 마냥 부러워만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거, 선생은 미처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아쉽고 아쉽게, 더 깊게, 더 오래, 더 많이 자신의 의지를 현생에서 펼칠 기회를 마다하셨어도, 선생의 삶은 분명 우리보다 행복했을 겁니다. 빈소 뿐 아니라, 선생과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충분히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선생에게 기대고 싶은 우리는 그냥, 선생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기댈 언덕을 잃고 맥없이 선생을 배웅하고 말았습니다. 저쪽 항구는 기쁘겠지만, 이쪽 항구의 우리는 메울 수 없이 허전합니다. 가슴에 분명 남겼어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서둘렀던 선생은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선생의 삶과 정신에서 기댈 언덕을 구했던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배웅만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선생은 홀연히 이쪽 항구를 떠났더라도, 선생이 이승에서 보여준 삶의 면모가 무엇인지 알기에, 허전해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그 모두를 염두에 두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선생이 보여준 삶을 결코 잊지 않는 만큼, 우리는 선생의 자세를 흉내내려 합니다. 사실 그렇기에 빈소가 따뜻했을지 모릅니다. 선생께서 굳이 들려달라했다는 며느리의 상여 소리도 진정 슬프지 않았습니다. 마중 나온 저쪽 항구의 환영 소리였으니까요.(인천in, 20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