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5. 4. 25. 09:33
 

먼우금이란 곳이 인천에 있다. 먼오금인데 발음이 편한 먼우금으로 바뀐 것이라 추측하는 곳. 먼 오금인가. 그렇다. 오금을 모으면 오른쪽과 왼쪽 무릎 사이는 한 뼘도 떨어지지 않지만 오른 쪽 무릎의 피가 왼쪽으로 가려면 심장을 거쳐 멀리 돌아야 한다. 그러서 오금 사이는 멀다.


바닷물이 하루에 두 차례 밀고 써는 인천 조간대에는 드넓은 갯벌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에서 기원해 서해로 빠지는 작은 강은 곱디고운 흙과 모래를 수천 년 동안 바닷가에 쌓아왔고, 강물은 깊은 고랑을 남겼다. 이른바 갯고랑이다. 인천시 연수구와 남동구 사이에는 긴 갯고랑이 있었다. 양편 사람들은 갯고랑을 사이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지만 정작 만나려면 십리를 돌아야했다. 그러서 먼 오금이다. 그 갯고랑을 타고 실뱀장어가 수북이 올라왔고 사람들은 갯고랑 양편에서 농어와 망둥이 낚시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2001년 3월, ‘인간시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초행길’이란 시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사람을 수채화처럼 방영했다. 자신을 만나 고생한 아내, 해준 것 없는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며 주위의 모든 사람 곁을 떠나 “베적삼 삼베 바지를 입고 초행길인 이 고개를 홀로 넘는다”고 시를 마친 그는, 누구나 한번은 가야하는 길을 나설 때가 되었다고 담담해 했다. 죽음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그이의 모습은 당시 많은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다.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처럼 그이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늘에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자신은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서시’에서 말한다. 해방을 6개월 남기고 29살의 나이로 옥에서 요절한 그는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으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다.  길지 않은 인생에 선명한 자취를 남긴 그는 자신의 길에 충실했는데, 우리는 시방 하루하루 어떤 길을 재촉하고 있나. 귓가를 스치던 상쾌한 어제의 바람은 오늘의 황색바람과 사뭇 다른데.




식목일에 발생한 강원도 산불은 강풍 경고가 발령되더니 천년고찰 낙산사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500년 역사를 품었던 보물 479호 동종도 녹아내리고 말았다. 경찰은 화재 원인 찾기에 골몰한다지만, 원인을 알아낸다고 잿더미가 된 낙산사가 당장 제 모습을 찾는 건 아니다. 십분 만에 재산을 잃은 수백 이재민들의 시커먼 가슴에 희망의 새순이 덕분에 싹트는 것도 아니다. 북한에서 불씨를 보냈다, 불씨가 남은 상태에서 소방헬기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서 그렇다고 누군가 말하지만, 획일적으로 조성한 소나무 숲은 불길에 유난히 약하다는 사실을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낙엽활엽수로 다양해지는 숲의 자연스런 천이를 송이버섯 채취를 위해 방해하지 않았다면 바람을 탄 화마가 천년고찰로 뛰어들지도 주민들을 길에 나앉게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이란 무엇인가. 이재민들이 나앉아야 할 곳은 필시 아니다. 길은 무엇이든 서로 주고받으며 흐르는 열린 공간이다. 사람은 물론 짐승과 달구지도 바람과 불과 물처럼 길을 따라 그렇게 흐른다. 길은 결이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길은 물길을 막지 않는다. 산을 따라 강은 멀리 감돌아 흐르고 길은 강을 따라 구부러졌다. 구부저진 길을 터벅터벅 걷다보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전설과 함께 어느덧 사람들의 억양이 바뀌고 심은 농작물이 바뀌며 식성과 문화가 바뀐다. 문화, 즉 ‘삶의 방식’이 바뀐다. 꼬부랑꼬부랑 계곡을 따라 고갯길을 넘다보면 새소리가 바뀌고 자라 올라가는 나무들이 바뀌며 생태계가 변화한다. 길은 시간을 따라 흐른다. 삶의 방식이 변화하는 역사도, 생태계가 바뀌는 천이도, 길에 의존한다.


1970년대, 원주 시내를 빠져나간 완행버스는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흙먼지 일으키며 치악산 구룡사로 향했다. 버스 한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산길을 헐떡이며 오르내리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양지바른 곳마다 대여섯 호의 집들이 오순도순 모였고, 마을 사이에 작은 길이 정겹게 이어졌다. 작은 길은 찻길로 연결돼 아침저녁으로 학생들이 버스에 왁자지껄 오르고, 나른한 오후, 양손에 보따리 든 아낙들이 한가한 버스에 올라타 수다로 몸을 풀었다. 산기슭 마을들을 연결하는 길이 실핏줄이라면 구룡사에서 원주 시내를 연결하는 그 비포장도로는 가는 동맥이고, 영동고속도로는 대동맥이리라. 그런 길을 따라 마을과 도시는 서로 농작물을 나누고 맥주보리와 가전제품을 교환하며 장돌뱅이도 관광객도 보따리 든 주민들과 함께 흐르면서 반가운 소식도 주고받았을 것이다.


황망하게, 떡과 수다를 주고받던 길에 나앉았던 강원도 양양 주민들은 아스팔트도로에 나와 크고 작은 자동차에서 건네는 구호품을 받고, 복구에 팔걷어부쳤다. 이웃들과 농번기엔 논배미로, 농한기엔 송이버섯 따러 나섰던 길을 삽과 곡괭이를 들고 다시 나온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촉촉이 비가 내리니 어느덧 초록 새순이 돋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새들의 울음소리가 교교하다. 산불은 땅 속에서 기다리던 씨앗을 자극해 터뜨린다. 비가 내리면 모처럼 햇살 받은 새순은 뿌리를 깊게 내리고 경쟁자가 싹트기 전에 힘차게 자라오를 것이다. 새들이 새로운 씨앗을 똥으로 떨어뜨리고 산짐승들이 짝을 찾아 두리번거릴 즈음, 몸과 마음을 추스른 주민들은 허물어진 집터를 손질하고 있다. 또 시간은 그렇게 지나고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생명들은 잠시 어긋났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친구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어떤 서생이 몇날며칠 설레는 길을 걸어 친구 집 앞에 당도했는데, 정작 친구 집 앞에 와서 되돌아갔다고 한다. 보고 싶은 마음이 과정 속에서 충족되자 큰 소리로 “왔노라!” 외쳐 버선발로 맞는 친구와 굳이 술잔 기울이지 않아도 충분했다는 이야기인데, 첫 사랑을 만나고 싶은 중년의 마음도 어쩌면 그와 비슷할지 모른다. 그렇게 터벅터벅 걸었을 길은 슬금슬금 확장되어 아스팔트가 깔렸고, 넓거나 곧을수록 아스팔트는 과정보다 속도를 숭상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목표를 지향하고, 목표에 경쟁이 붙자 이제 길은 속도에 점령됐다. 과정을 동행하던 이웃들은 휙 지나치는 경관처럼 버림받았다.


인편과 봉수대가 알리던 소식을 전화와 전보를 넘어 인터넷과 인공위성이 떠맡자 우린 빛보다 빠른 정보의 바다에 날마다 허우적거린다. 박정희가 아직도 대통령이라고 믿는 봉화의 어떤 할머니와 달리, 생중계되는 남의 나라 전쟁과 프로 운동경기에 열광하는 네티즌들은 머라이어 캐리가 새 애인과 열애 중이라는 소식에 그때그때 솔깃한다. 인터넷으로 두는 바둑으로 기력의 기준이 국제적으로 명확해지고 서열이 분명해지자 후미진 건물의 담배연기 뽀얀 시내의 기원들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은퇴한 노인들은 딱히 갈 곳이 없고 지하철의 젊은 승객들은 만화책도 읽지 않는다. 디엠비 멀티미디어를 꿈꾸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온라인 게임하기 바쁘다. 통신료가 가계부담의 선두자리를 차지하면서 전자와 전파가 다니는 길도 숨가쁘게 확대 확장되었다.


뭉게구름 올라와 잠시 퍼붓던 소나기는 찌는 여름의 오랜 관행이었다. 더위를 식히려는 숲속 나무 잎과 근교 논밭의 농작물이 내뿜는 엄청난 수증기가 뭉게구름을 만들고 이내 빗물로 떨어졌던 것인데, 도시가 가없이 확장된 요즘, 뭉게구름과 소나기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깊은 산속에서 간간히 알현할 따름이다. 그래도 한여름 계곡 야영은 조심해야 한다. 산중에 후드득 비가 내리면 파란 하늘 보고 친 텐트라도 후다닥 옮겨야 한다. 언제 “쏴-”할지 모른다. 순식간에 불어난 물이 계곡을 휩쓸며 강으로 내려갈 것이다. 28년 전 조난당했던 설악산에서 그랬다. 소나기가 그치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해진 계곡을 따라 첨벙첨벙 걸던 우리는 이틀 만에 심마니를 만나 안심을 했고, 구조대 편성하려는 설악동으로 가서 실컷 야단맞았는데, 그때 우리를 안내한 계곡 길은 속초를 지나 연어가 올라올 채비하는 동해로 접어들었다.


댐과 하구언은 연어나 뱀장어와 같은 회유성 어류의 모천을 차단하고 오랜 물길을 사정없이 왜곡한다. 졸졸 또는 콸콸 흐르던 계류는 속도를 잃고 댐에 갇히면서 바닥에 토사를 내려놓는데, 경관을 독점으로 즐기려는 인파는 주변에 오수처리 부실한 식당과 러브호텔을 집중시켰다. 전에 없이 오염된 팔당댐의 물은 1주일이면 수도권 수돗물을 위해 취수구로 빠져나가고, 팔당호 하류는 수력발전 터빈을 돌린 댐 물과 주변 계곡과 도시에서 흘러든 맑거나 탁한 물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향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강은 그만 생물이 떠나는 도랑으로 전락하고 만다. 넓게 사행하는 하천부지를 공단과 주택단지로 활용하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이 하천 양안을 콘크리트 블록으로 절도 있게 싸발라 직선으로 유도하고, 수많은 생물이 서식하던 모래와 자갈을 퍼가자 그렇게 되었다. 비가 오면 떠내려오는 고랭지채소밭의 찢어진 멀칭용 비닐은 노도 같은 오염된 흙탕물을 타고 바다로 토해지고, 더욱 높아지는 댐 바닥은 부유물질로 뒤덮인다.


하구에 뱉어진 수많은 쓰레기는 어패류의 오랜 산란장인 모래톱과 갯벌을 오염시키고 강변 공단지대를 스친 강물의 토사는 흐름이 느려지면서 중하류 하천 바닥에 내려앉아 주민들에게 악취를 전달한다. 지자체의 눈가림 노력과 관계없이 바닥오니가 그대로 있는 중랑천과 안양천이 그렇다. 과거에 흔전만전했던 온갖 물고기들이 자취를 감춘 대신 빨간 실지렁이와 장구벌레가 오물거린다. 해마다 수억 마리나 찾아왔던 서해안의 황금조기와 한강 하구의 진객 황복이 자치를 감춘 이유가 남획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강에서 쏟아지는 오염물질로 산란장과 모천을 잃은 망향가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고향은 물론, 고향으로 가는 길조차 잃은 생명들이 구천을 떠돌다 쌍끌이 선단에 남획돼 일거에 사라졌는지 모른다.


알락꼬리마도요가 찾아와야 봄을 느끼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우리의 갯벌매립에 신경이 곤두서는데, 정작 우린 무엇으로 봄을 반길까. 청명 곡우를 지나 보리와 밀밭이 파릇파릇해질 즈음 파란 하늘에서 멈칫하며 우지지는 노고지리가 봄을 알렸을 테지만 요즘은 아니다. 노고지리가 사라진 요즘, 노출을 부추기는 텔레비전 광고가 봄을 유혹한다. 등산로가 개방되자마자 돌 아래 숨겨졌던 도롱뇽 알이 수난당하는 계곡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밀려드는 인파로 멧새와 곤줄박이는 도무지 짝 찾을 틈이 없다. 손바닥만한 산에 올라 여기저기에서 야-호-! 어-이! 호연지기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천수답에 물을 대던 방죽이 주택단지로 매립돼 사라지면서 산란장을 잃은 두꺼비는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그를 염려한 청주시민들이 원흥이방죽과 뒤편 산지 사이에 넓은 이동통로를 마련해주었지만, 이른 봄 두꺼비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다. 자연의 길을 인간이 대신할 수 없다는 증거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십 수 군데의 고층습지에 안정된 생태계의 상징인 끈끈이주걱이 활착하는 천성산은 맑고 시린 물이 풍부한 십여 계곡을 자랑한다. 해발 900미터에 불과한 천성산에 물이 많은 것은 비단 숲이 안정적인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3개의 활선단층이 파쇄대와 함께 지나가는 지형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그런 천성산 계곡에 대표적인 멸종위기 양서류인 꼬리치레도롱뇽이 산다. 꼬리치레도롱뇽의 가녀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지율스님은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터널 공사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100일 단식을 수행했고, 스님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여 현재 환경영향 재조사가 준비 중이다. 그에 대해, 대형 국책사업이 단식 따위로 방해받을 수 없다는 인터넷 안티지율 카페 참여자들은 꼬리치레도롱뇽의 서식사실을 부정하고, 경부고속전철 당국이 일방적으로 계산한 2조5천억 원의 손실을 근거 없이 강조하지만, 현 생태계에서 점차 희귀해지는 꼬리치레도롱뇽은 곧 후손의 열악한 생존 환경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는다. 현 세대의 한시적 이익을 위해 후손의 생태계를 뿌리째 교란하는 행위를 망각한다.


독일 스투트가르트는 ‘바람골’로 유명하다. 분지지형에서 정체되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넥타강을 통해 교외의 숲으로 내보내고 도심은 구릉지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로 채우는 이른바 바람골은 시민들의 동의와 참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도로를 지하로 내려보내고 그 자리를 나무가 무성한 녹지공원으로 조성하는 행정은 많은 세금이 들어가야 했다. 구릉지에서 도심을 거쳐 넥타강으로 연결되는 바람길을 위해 구릉지의 기존 주택들을 바람 방향에 맞게 재건축했는데 이는 시민 각자가 개인 돈을 크게 부담해야 했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바람골을 통해 부는 초속 8미터 바람이 도심의 정체된 대기를 교외의 숲으로 밀어내고 조용하고 상쾌한 도심 공원에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자 시민들은 크게 환영했고, 시민들의 성원에 발맞추어 스투트가르트의 바람골은 절찬리에 확장하고 있다.


편서풍을 맞아야하는 인천은 바닷가에 조성된 거대한 화력발전소와 공단들의 대기오염물질이 도심에 정체된다. 한강이 가로지르는 서울은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로 대기는 불량하다. 그럴 때 스투트가르트와 같은 바람골이 요긴할 테지만 고층빌딩과 도로는 녹지축을 거푸 가로막는다. 그래서 도심 속에 섬처럼 떠있는 녹지에 새들이 찾지 못하는데 불용예산 문책이 두려운 항공방제는 남아있던 참새와 비둘기마저 달아나게 한다. 바람은 물론 소나기조차 없는 도심은 오존주의보에 속수무책이고, 이에 발맞춘 고성능 실내공기정화기 광고는 텔레비전을 성가시게한다.


짜릿한 쾌감을 만끽하기 위한 패러글라이딩은 바람을 타며 하늘을 자유롭게 오르내리지만 어디 솔개만할까. 그런데 파란 하늘을 오랫동안 선회하는 솔개는 요즘 통 보이지 않는다. 먹이가 없기보다 아무리 날개를 펴도 오염된 하늘에서 타고 날 바람길이 분명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솔개가 날던 길, 꼬리치레도롱뇽이 사는 길, 두꺼비가 알을 낳고 부화 변태한 어린 성체가 이동하는 길이 그렇게 방해받고 있다. 회유성 어류를 가로막는 댐과 하구언처럼 가을철 산허리를 휘감는 뱀그물은 동면하러 가는 뱀의 길을 차단하고, 길목에 감춘 크고 작은 올무는 멧돼지에서 멧토끼까지 산짐승의 씨를 말리는데, 토막난 백두대간은 야생동물의 이동통로를 옥죈다. 30개가 넘는 도로만이 아니다. 산기슭까지 파고드는 골프장과 스키장과 가족호텔을 빙자한 콘도미니엄, 종합휴양지로 위장한 그곳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도로는 인간 냄새를 혐오하는 대형동물의 접근을 봉쇄하고, 근친교배에 의존한 야생동물은 악성 유전자 축적으로 점차 사라져간다. 인간의 속도와 편의를 위한 길이 생태계의 오랜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다.


알류산열도가 고향인 물범은 어쩐 일로 백령도에 터 잡았을까. 춘삼월 거대한 유빙을 타고 제주도 인근까지 내려온 물범이 고향을 찾아 허겁지겁 헤엄치다 길을 잘 못 들어 인적이 드문 백령도에 정착한 것은 아닐까. 백령도의 물범 말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땅에 들어온 외래동물은 적지 않다. 거대한 호소와 중상류 하천을 점령한 배쓰와 블루길,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농경지를 석권한 황소개구리, 동네 연못까지 차지해버린 붉은귀거북이 그들이다. 돈벌이를 위해 들여왔다가 신통치 않거나 싫증이 나자 방치하거나 방생해 전국에 퍼졌다. 이젠 싫던 좋던 우리 생태계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퇴치를 위한 이벤트가 간혹 펼쳐지지만 효과는 신통하지 않다. 수달과 족제비가 사라진 산하에서 미군 숟가락만한 황소개구리 올챙이를 즐겨먹기 시작한 백로와 왜가리의 활약을 새롭게 기대하는데, 복원 사업 중인 황새는 아직 개체수가 적다. 그런데 문제는 밀렵군의 분별없는 총질이다.


아직도 우리 기후와 생태계에 맞지 않는 남의 나라의 많은 야생동물이 간단한 검역절차만 거치고 애완용으로 분별없이 들어오고 있다. 이구아나와 열대성 뱀과 개구리가 아무 제한 없이 가정으로 팔려나가고, 사육하다 죽으면 아무렇게나 버려지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목재와 농산물 수입과정에서 무임승차해 우리의 파괴된 생태계에 뿌리내린 귀화식물은 전국이 공통이다. 그런데 그런 생물들은 천적이 없어 일단 정착하면 토종 동식물에 여간해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지만 안정된 전통 생태계에 거의 파고들지 못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구잡이 개발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생태계는 현재 만신창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전통 생태계는 자신의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증가하는 아토피와 강화되는 항생제 내성, 젊은이에게 더욱 심각한 기형 정자와 정자 수 감소, 줄어들지 않는 환경호르몬과 새집증후군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왔던가를 강하게 웅변한다. 전에 없던 질병과 각종 증후군은 생명체인 사람이 자신의 생명현상의 길을 스스로 교란했다는 사실을 무섭게 실증한다. 이제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를 향해 쉭쉭거리며 다가오는 것이다. 자연에 없는 유전자조작 생물을 양산해 생태계에 함부로 방출하는 생명공학은 어떤가. 조작된 유전자가 생태계를 오염시킨 이후 우린 어떤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까. 강력한 방사선을 쪼인 농산물은 농약 묻은 농작물보다 안전할까.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질사료를 먹여 발생한 광우병, 공장식 밀집 축산이 빚는 구제역, 24시간 불 밝힌 비좁은 철망상자 속에 갇혀 발톱이 자라 철사에 감기도록 일 년 열두 달 달걀만 낳아야 하는 닭, 남보다 빨리 많은 열매를 매달게 하려고 일찌감치 성장호르몬을 바른 과일나무, 한 해 한 차례 꽃피는 장미에 춘화처리를 해서 6번 꽃망울을 달게 만드는 원예 과학, 겨울을 여름답게 여름을 겨울답게 만드는 에너지 과소비들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 그 생명의 길과 어울리지 못한다. 노인을 환자라고 고집하는 생명공학은 부자의 수명부터 불안하게 연장하겠지만 환경오염이 필연적으로 빚은 질병의 근본 원인을 천착하지 않는다. 38억년 유구했던 지구생명의 흐름을 크게 교란하려 집요하다.


절차라는 길도 왜곡되기는 마찬가지다. 배타적인 이익을 한시적으로 노리는 일부 개발세력이 밀실에서 의사결정한 비자연스런 절차가 합법으로 위장된 채 강제로 집행된다. 문제 제기하는 시민들을 향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남발하는 전문가들은 똑똑한 자신들에게 맡겨달라고 권위 있는 표정을 거룩하게 관리하지만 연구비를 받아야 움직이는 그들은 소비자인 시민이 아니라 생산자인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을 애써 감춘다. 감언이설로 찬성하는 자를 꼬여내는 공급자는 반대하면 지역이기주의자로 몰다 안 되면 공권력을 제멋대로 동원하는 전횡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전기 사업자가 발전소를 계획하고, 주택업자가 주택경기를 예단하고, 자동차가 넘친다는 핑계로 건설업자가 산하 파헤치는 격자형 고속도로를 설계하고, 물이 부족하다며 공급자가 다목적댐의 필요성에 핏대를 세운다. 소비자는 편의를 하사받지만 응분의 돈을 지불해야 마땅하다.




미 국무성의 한 비밀 보고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세계적 재앙을 살벌하게 경고한다. 멕시코만 난류가 북극 언저리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영국이 시베리아처럼 얼어붙고, 기상이변과 해수면 상승으로 식량 수급에 이상이 생긴 국가들이 핵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국도 그런 국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근거를 들며 예상한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동강의 도도한 물길을 거대하게 차단할 영월댐 축조를 역사와 문화와 경관을 보전하려는 시민들과 환경운동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막아냈듯이, 의식 있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차단된 자연의 길을 다시 흐르게 만들리라 믿는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만경강과 동진강의 흐름을 차단하고 어패류의 산란장을 광활하게 매립할 예정이라지만, 환경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은 위기의 순간을 뒤로 미루는데 일단 성공했다. 자연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승화한 한 비구니의 범접할 수 없는 단식수행은 쇠힘줄보다 질긴 개발세력을 설득해 환경영향 재조사를 공개적으로 실시하게 이끌었다. 이처럼, 아직은 미약하지만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국책사업을 등에 업은 개발세력의 막무가내 절차는 시민들의 저항으로 어느새 무소불위의 힘을 잃어간다. 입안 단계부터 합의의 길을 따르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며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정부와 개발세력은 서서히 이해하고 있다. 삐걱거리는 노사정위원회만이 아니다. 환경갈등 해결을 위한 논의도 정부와 시민사회 일각에서 조심스레 시도되고 있다. 생명공학이나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 공급 체계에 대한 찬반 질문을 각계 소비자에게 공정하게 묻는 이른바 ‘합의회의’가 합의정신에 따라 공개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시작에 불과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시작이 반’이다. 북미 원주민처럼 7대 후손의 건강한 생명의 눈높이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일부 시민들의 행동은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만들었던 생물이동통로도 이동해야 하는 생물의 생태 조건에 맞게 설치되고, 절도있는 직선형 하천을 자연형으로 복원하려는 움직임도 힘을 받고 있다. 오염과 피로에 찌든 도시의 회색인생을 접고 시골로 향하는 귀농인파가 부쩍 늘어나고 있으며 유기농산물 직거래 운동과 함께, 유전자조작 사료와 항생제에 의존하는 육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민들도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제철 제고장 농산물로 자급자족하는 편이 가장 건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소비자들이 슬로우푸드의 가치를 자식 키우는 이웃에게 전파하고 있다. 눈앞의 이익을 좇던 많은 시민들이 자연스러움을 찾는 길로 자신의 삶을 돌이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제인 구달이 안타까워하듯,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도법스님은 작년부터 탁발순례를 다닌다. 호주 원주민들과 맨발로 120일 동안 사막을 건넌 말로 모건이 자연스런 삶의 가치를 절절히 깨달았듯, 도법스님은 상처난 산하를 걸으면서 평화를 희구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여성과 남성, 주류와 비주류, 나와 타인의 종교를 서로 존중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만이 아니다. 인간과 생태계 사이의 평화도 설파하며 걷고 또 걷는다.


모든 길은 통한다. 로마로만 통하는 게 아니다. 먼우금이든, 울고 넘는 박달재든, 구름도 쉬는 새재든, 사람의 길도 새들과 짐승들의 길도, 하늘과 바람과 물의 길도 다채롭지만 모두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어제의 길이 오늘을 스쳐 내일로 이어지듯.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후손의 길이 행복할 수도,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환경과생명, 2005년 여름호)

맞다 맞다...!
어릴 때는 하늘을 보면서 자연책에서 배운 구름 종류를 맞춰내느라 바빴지요.
그런데 정말 요즘은 그 많은 구름들을 제대로 볼 수 없네요.
뭉게구름은 물론이고.
그게 환경 탓인 줄 몰랐네.
에고, 내 딸내미는, 그러면 책에서 사진으로만 배운 구름 종류를 실제로 볼 기회를 점점 잃고 있는 거구나...
아마존 밀림의 높은 나무에 올라 보면 하루에 80번 정도 순환되는 뙤약볕과 뭉게구름과 소나기를 보 수 있다고 저명한 생태학자 미국 하버드 대학 에드워드 윌슨이 자신의 책 <생명의 다양성>(까치)에서 주장합니다. 부러운 일이죠.
97년부터 패러글라이딩을 즐기고 있습니다. 자연을 이용한 레져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연, 특히 바람과 구름에 관심이 많습니다.
처음 시작한 당시만해도 주말이면 80%이상 비행을 했는데 요즘은 쉬는 날이 더 많습니다.
확실히 바람 냄새가 이상합니다. 비행인들은 모두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바람....최근 2~3년 전부터 급격하게 이상해졌습니다.
비행인들은 모두 환경 탓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참 걱정이 많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