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1. 28. 10:02

 

들어가는 글


십여 년 전 고속도로에서 겪은 일이다. 자동차 계기판이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가까운 휴게소로 들어서니 주유소가 환경단체에서 불매운동을 결의한 ‘호남정유’ 간판을 달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와도 아직 충분하겠다 싶어 다음 휴게소까지 달렸는데 거긴 가스 충진소 뿐이다. 이런, 계기판 바늘은 이미 숫자 영 아래로 내려갔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 휴게소에 도착하기만 해도 고마운 일. 마음 졸이며 경제속도로 찾아간 주유소는 다행히 호남정유가 아니었다.

 

초대형 태풍 페이가 다가오던 1995년 7월 23일. 14만5,000톤급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전남 여수시 남면 소리도 앞 바다에 좌초되었다. 이후 20여 일 동안 5천 톤의 기름을 쏟아 남해안 204킬로미터에 기름띠를 확산시켰고 100만 평이 넘는 양식장이 피해를 입어야 했다. 700억 이상의 재산 피해를 남긴 사상 최악의 국내 해양사고는 태풍 경고를 무시한 항해가 원인이었다. 12년이 더 지난 지금도 인근 바다의 생태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어획고는 사고 직전의 10의1에 불과하고 상당수의 주민은 터전을 버렸다. 기름과 바다에 뜬 기름을 제거하려고 뿌린 유화재가 원인이었다.

 

당시 환경단체는 시프린스 사고를 일으킨 호남정유의 기름을 자신의 차에 넣지 않기로 결의했다. 소비자의 권리, 이른바 ‘불매운동’이다. 납득할만한 사과와 배상은 물론 재발방지를 위한 분명한 조치가 선행되기 전까지 불매운동은 계속할 의지를 천명한 것인데, 안타깝게 소비자의 권리는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환경단체 회원들의 건망증도 한몫했을 것이나 환경단체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 호남정유의 로비가 주효했을지 모른다. 시프린스호 좌초 사고 이후 이름을 바꿔단 ‘엘지 칼텍스’는 환경단체의 사업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고 한 환경단체는 이익의 일부를 기부하겠다는 엘지카드의 유혹에 굴종, 회원들에게 카드사용을 부추기며 화답했던 것이다.

 

유럽의 식품매장에는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그 농산물로 가공한 식품이 없다. 식품회사의 배려 때문이 아니다. 들불처럼 일어난 시민들의 불매운동이 아직 그 효력을 잃지 않은 까닭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사료와 식용유는 물론, 숱한 가공식품과 수입식품이 유전자가 조작된 상태로 버젓이 유통된다. 우리 불매운동의 한계를 간파하는 국내외 업자들이 소비자의 요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요즘 시민들은 물론 대부분의 환경 활동가들도 호남정유 불매운동의 존재 여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식당은 물론 식품매장에서 유전자조작 여부를 묻지 않을 것이다. 이윤을 먼저 헤아릴 뿐인 기업은 우리나라 소비자의 낮은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롯데’에서 진산에 골프장을 지으려할 때 인천의 시민사회단체는 롯데 제품 불매운동을 쉽게 선언했으나 다음 순간 공허했다. 롯데 골프장을 막아내기 위한 토론장에 참석하는 발제자를 위해 주최측이 내놓은 물이 하필 롯데 제품이었다. 가까운 가게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왔단다. 우리 소비자 행동의 수준을 반영한다. 2007년에만 14명의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한국타이어’ 생산 공장의 여러 문제는 국내에서 유럽의 헝가리까지 이어졌다고 최근 한 언론은 집중 보도했다. 노동조합의 설립을 무력화시키고 규정이나 약속과 달리 노동자의 건강과 지역 환경에 치명적인 물질을 사용한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는 거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는 한국타이어 불매운동을 선언했는데, 얼마나 그리고 어느 동안이나 효과가 있을지. 아직 사과는 물론, 납득할만한 후속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는 한국타이어는 불이익 없는 데에도 개과천선할지 자못 궁금하다.

 

중도에 포기하는 불매운동만이 우리 시민사회의 미지근한 환경의식의 전부는 아니다. 환경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은 그 유효기간이 유난히 짧다. 물 건너간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열기는 물론이고 골프장이나 쓰레기소각장에 대한 대응도 이제 거세지 않다. 아무도 시민사회의 행동에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새다. 온갖 징후가 흉흉한 기후변화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떤가. 유럽은 기후변화에 대한 정책의 변화가 눈의 띄고 시민들의 행동도 두드러지지만 우리 사회는 남의 일 보듯 한다. 꿀벌이 사라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잠시 미지근했던 시민단체마저 이내 시들해지니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고,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기업이 앞장서지 않는다.



실패한 반대운동


어릴 적, 집에 쥐가 많았다. 광이나 부엌 바닥에 끈적이는 종이와 강력한 덫을 놓아도 소용없었다. 잡혀 죽은 쥐를 처리하는 일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한 번은 철사로 만든 쥐틀을 놓았다. 과연, 아침에 나가보니 냄새가 진한 멸치를 넣은 틀에 쥐가 잡혀 있었다. 살아 있는 쥐를 처리하는 일은 더욱 불쾌하다. 하는 수 없이 대야 가득 물을 붓고 쥐틀을 그 안에 빠뜨렸다. 질식시켜 죽이려고. 물에 빠진 쥐는 쥐틀을 탈출하려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좀 불쌍하다 싶어 쥐틀을 밖으로 내놓자 위기를 모면한 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살아 있으면 처리하기 곤란해 쥐틀을 다시 물에 넣었더니 이번엔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이내 절명하고 말았다. 긴장 풀린 뒤라서 목숨을 쉽게 놓은 모양이었다.

 

거센 반대운동으로 주춤하거나 반려되었던 개발공사가 다시 준동할 때, 일상으로 돌아간 시민들이 다시 반대운동으로 모이지 못하거나, 모여도 예전과 같은 힘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구청장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모이는 알쏭달쏭한 주민들이 상투적인 지역발전 기치로 찬성하는 인천의 계양산 골프장이 그렇고 막무가내로 밀고나가는 송도신도시의 갯벌 매립이 그렇다. 발전 용량을 계속 증설하는 영흥도 유연탄 화력발전소를 비롯하여 완공을 눈앞에 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사패산 터널 구간, 은근히 모습을 드러내는 전자주민등록증, 특별법으로 더욱 특별히 개발될 거라 믿는 새만금 간척사업, 천성산을 결국 뚫어내고야 만 경부고속전철, 건설업자의 처지에서 시련을 극복한 경인운하, 결국 개발 신호를 올린 시화호, 을숙도의 철새도래지를 가로지르는 명지대교, 천년고도를 천년만년 오염시킬 방사선폐기장 들이 초기 거센 반대를 딛고 넘어 개발의 깃발을 높인 예다.

 

전국은 가히 골프장 투기 열풍이다.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초, 인천의 한 기업에서 골프장을 포함한 위락단지를 조성하려 할 때, 10만 명의 서명운동을 전개한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어렵게 지켜낸 역사가 서린 곳이 계양산이건만 다시 골프장으로 파괴될 위기에 처했다. 파고드는 주택단지와 상가, 송전탑과 군부대에 의해 거듭 잠식되어도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자연공원으로 보전되었지만, 이번엔 재벌급 대기업이 나섰다. 지역 정치인을 앞세운 롯데는 왜곡된 자료를 인천도시계획위원회에 제출, 그린벨트에 골프장 조성을 부정직하게 추진했고, 충분한 논의를 생략한 시 집행부는 표결을 강행, 소신을 바꾼 위원들의 찬성으로 골프장 계획은 기업의 의견대로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되고 말았다. 압력과 로비의 강도에 반비례해 소신이 약해지는 지식인과 지방행정당국의 밀어붙이기 태도로 진산을 지키려는 인천시민 84퍼센트의 의견이 묵살된 것이다(인천신문, 2007년 8월 28일자).

 

실상, 많은 골프장이 수익을 내지 못하건만 골프장 건설은 농지와 그린벨트를 포함하는 전국의 넓은 땅을 잠식하고 있다.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성하는 골프장도 있지만 지역에 따라 찬성과 반대로 나뉜 주민 사이에 갈등이 촉발되는 경우도 있다. 특정 정치인의 의지에 충성하는 계양산 골프장 찬성 주민에게 진정성이 의심되지만, 다른 지역의 찬성 주민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그럴까. 타 지역에 조성된 골프장의 전례를 살펴보았다면 지역경제에 특별한 이익이 발생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일부 주민은 찬성하고 나설까. 찬성 주민 중 상당수는 부재지주이거나 땅을 팔고 터전을 떠나려는 경우라고 남은 주민은 주장한다. 시세보다 높게 책정된 보상비를 받아 빚을 갚고 농사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환경단체의 골프장 반대운동도 시들해졌다. 찾아가야 할 골프장 건설 현장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 때문이 아니다. 지역을 능동적으로 지켜내야 할 주민들의 반대 열기가 미지근한 까닭이다. 지방의 온갖 혁신도시 허상으로 경작지마저 투기열풍에 휩싸여 가격이 앙등, 농사꾼과 귀농인의 의지를 꺾지만, 그 뿐이 아니다. 재정자립도 확충을 내세우는 자치단체장이 찬성 의견을 편향되게 청취하면서, 지역에 남아 문화와 역사와 생태계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열기와 목소리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주민이 나서지 않으면 지역은 지킬 수 없다. 환경단체가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시민단체는 정주의식을 공유할 수 없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문화와 역사가 해체된 지방에서 자치단체장을 끼고 들어오는 자본의 집요한 골프장 투기 열풍은 주민들의 각별한 정주의식이 아니라면 막아내기 어렵다.

 

갯벌 매립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미약해진 지 오래다. 환경단체를 포함한 시민사회들이 막아내려 연대하며 몸부림쳤던 새만금 간석사업이 환경권을 반영하지 못한 법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자 반대 행동은 더욱 힘을 잃었다. 시민들의 눈치를 보며 반대하는 시늉을 내던 국회의원들은 이제 새만금특별법을 거리낌 없이 통과시켰다. 농사를 목적으로 질식사시킨 새만금 일원의 갯벌은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데도 지자체 마음대로 용도를 변경할 수 있으며 앞으로 얼마든지 막개발 될 위기에 처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물론, 언론도, 환경단체도 조용하다. 일부 어민과 시민단체의 회원들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새만금 개발을 막기에 어림없다. 갯벌이란 갯벌이 위기다. 갯벌 매립을 우려하며 인천공항을 반대하던 목소리가 없지 않았지만, 이제 기억조차 없다. 인천 송도신도시의 갯벌 매립도 마찬가지다. 시화방조제로 드러난 갯벌도 ‘송산그린시티’라는 이름으로 줄곧 개발될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세계 최대의 스튜디오와 위락시설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시민사회는 개발에 앞서 치열했던 논쟁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내용은 물론 논란되었던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화력발전은 어떤가. 시민들의 반대로 2기만 유연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더 필요하다고 합의될 경우 액화천연가스를 사용하도록 하겠다고 인천시와 맺은 약속을 헌신짝으로 버린 ‘영흥화력’은 합의 없이 증설한 2기에 다시 4기를 제멋대로 추가, 모두 8기의 유연탄 화력발전소를 고집한다. 8기 유연탄 화력은 환경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증설을 반대하는 인천시와 달리 영흥도의 화력발전소를 소유하는 ‘남동화력’ 담당자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윤에 우선하는 남동화력은 경제논리를 펴며 불가피를,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비춘 인천시는 반대를 표명하지만, 왠지 미덥지 않다. 2기를 증설하려 할 때 미온적이었던 인천시의 태도를 인천의 시민사회는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불안한 것은 애초 반대운동으로 뜨거웠던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조용하다는 점이다. 전원개발특별법은 전력회사에 유리하다. 남동화력은 그래왔던 것처럼 합법을 주장하며 결국 8기의 화력발전소를 모두 세울 것이며 시민사회는 막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시민사회의 반대 목소리가 전원개발특별법의 개정을 요구할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의 옛 화력발전소 터에 액화천연가스 발전소를 추진 중이다. 천연가스라서 친환경이라고 강조하니 어떤 주민도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어떤 발전 방식이라도 예외 없이 발생하는 온배수로 갯벌과 바다가 망가지지만 질문하지 않은 주민에게 그런 정보를 찾아가 알려주는 전력 개발업자는 없다. 강화 일원의 갯벌을 파괴할 것이 분명한 강화조력 발전도 사업자의 경제성 평가를 근거로 인천시에서 추진 중이다. 조력이므로 친환경이라는 일면적 구호를 앞세우지만, 갯벌의 환경적 가치는 무시되었다.

 

에어컨이 혼수품목에 들어간 마당에 한국이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일인당 전기 사용량이 많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광고에 길든 시민들은 오염된 대기를 공기정화기로 해결하려 할 테고, 그래서 그런지 전기가 더 필요하다는 공급자의 주장에 대개의 소비자는 쉽게 수긍한다. 다만 돈이 없는 자는 소외되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단다. 곧 완전 개통될 경부고속전철과 서울외곽고속도로도 마찬가지다. 떠들썩했던 지율스님의 단식이나 사패산 터널 반대운동과 무관하게 속도와 목표만을 숭상하는 고속 교통정책은 한국인의 교통비를 높여 지엔피 상승에 기여할 게 틀림없다. 대야에서 나가 긴장을 푼 쥐틀 속의 쥐에게 다시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발흥하는 개발


‘공유수면 매립법’을 제정한 일제가 이 땅에서 쌀을 탈취하고자 수립한 ‘국토 U자화’ 정책의 혼령은 아직 죽지 않았다. 매립하는 자에게 매립지를 소유하도록 규정된 공유수면매립법으로 재산을 증식하려는 세력이 일제의 청산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탐욕의 그림자는 물려받은 리아스식 해안을 직선으로 만드는 대역사를 정책적으로 구상한다. 그렇게 파이를 키우겠다고 선언한다. 아이엠에프 이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터져 나온 소외계층의 불만을 경제성장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지역의 문화이자 역사인 갯벌은 자체로 자립의 바탕이었건만 개별 소유권이 없는 ‘공유수면’이라며 무시된다. 경제성장을 내세우는 국토 U자화 정책은 갯벌의 가치를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를 타고 타당성을 자가 발전한다. 제조업 활성화, 저렴한 택지공급, 관광사업과 국토안보를 위한다며 갯벌의 지구온난화 방지 기능, 정화기능, 어패류 산란장 기능은 당연히 외면한다. 현실의 돈벌이에 눈이 뒤집힌 경제가 내일의 생존을 대비하는 환경을 짓밟으면서 비롯된 몰상식이다.

 

경부운하는 물 건너갈 것인가. 경부운하는 새만금 간척사업 이상의 반대운동에 직면할 게 틀림없지만 건설족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토목건설 자본에 막대한 이윤을 보장할 게 틀림없지 않은가. 도시마다 초고층빌딩도 붐을 이룰 전망이다. 석유정점이 지나면 전기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초고층빌딩은 얼마 안 가 신기루가 될 가능성이 큰데, 밑도 끝도 없는 두바이 신드롬은 60층 아파트 단지와 100층이 넘는 랜드마크를 도시의 자존심인양 추동한다. 때를 같이 하여 한국의 초고층빌딩 신축 붐을 소개하는 뉴욕타임스가 “선진국 진입에 대한 열광을 반영하는 과시욕”으로 평가 절하했지만, 나무보다 높이 올라가는 초고층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화초가 잘 자라지 못한다.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답답할 뿐 아니라 강제 순환시키는 공기가 정체돼 식구의 건강을 위협한다. 허위의식을 반영하는 만큼 전기누진세와 종합부동산세가 큰 초고층빌딩보다 숲으로 가득한 지평선이 눈에 넓게 들어오는 도시를 자랑스러워하는 유럽의 시민사회를 우리는 언제나 타산지석으로 여길 것인가.

 

‘남북경제협력’이라는 마패는 무소불위다. 남북경제협력을 위한다면 환경은 당연히 하위에 처져야 한다는 배짱이다. 남북경제협력에 필요한 전기를 위한다면 송전탑을 세워 국토의 생태계를 유린하도 무방하고, 주민들의 호흡기 질환을 유발시키는 화력발전소를 편서풍 지대의 서편에 누적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야 옳다는 투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호전되어 통일기반을 구축하자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그 결국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경제협력을 위해 생명의 안위를 담보하는 환경마저 거덜내야 옳을까. 남북경제협력으로 추진되는 사업 중에 디엠제트 개발도 걱정이지만 남북한이 합의한 한강 하구 개발이 큰 문제다. 세계가 주목하는 디엠제트는 생태계의 보전을 고려하면서 개발할 가능성이 높지만 모래와 자갈을 퍼낼 궁리로 가득한 한강 하구 개발은 일대의 경관과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게 파괴하고 말 것이다. 경제협력에는 대안이 많지만 한강 하구의 보전은 대안이 없다. 한강 하구는 많은 갯벌 생물의 터전이자 산란장인데 과거 정권이 철근과 콘크리트로 직선화한 한강에서 발생하는 생태적 폐해를 답습하려 들다니. 세세만년 지속되어야 할 후손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개발 과정에서 빚어진 논란과 환경 피해는 남북경제협력의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시행착오는 줄일수록 좋다. 앞으로 전개될 금강산과 백두산을 비롯한 북한 산하의 개발에 타산지석이 될 수 있도록 개발의 뒤를 따르는 환경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해안과 강변의 공업단지와 주택단지의 개발도 마찬가지다. 개발업체의 이윤에 치밀할 게 아니라 내일의 지속가능성을 먼저 모색해야 한다. 북한을 남한 경제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통일 이후의 북쪽 경제와 환경을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한데 현재 남북한이 논의하는 개발계획에 환경 대책이 빠져 있어 걱정이 크다. 개발에 앞서 북한 주민과 그 후손의 처지에서 충분히 고민해야 하겠지만 기후변화를 대비해 일방적인 개발보다 보전에 무게를 두는 남북경제협력이 고려되지 않아 몹시 아쉽다.

 

황우석 사태 이후 잠잠해진 생명공학이 다시 춤을 출 기세를 보인다. 태국에서 연구 중인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교수의 근황이 언론에 소개되자 제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박세필 전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 소장의 발언이 새삼 신문에 실린다. 한 마디로, 돈이 되는 배아줄기세포 기술에 정부의 투자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거다.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할 것처럼 상투적으로 되뇌는 바와 관계없이 기실 여성과 후손의 생명을 착취하는 기술이건만 거액의 연구비를 원하는 생명공학자는 외국에서 들려온 한두 가지 성공사례를 과장한다. 생명공학이 윤리적 기준까지 재단하려는 모습마저 드러내기까지 하는데, 유전자조작 분야도 개발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 석유 없이 경작이 불가능한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단작은 환경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오늘의 유전자조작은 내일의 식량안보를 위협하고, 줄기세포에 대한 환상은 내일의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

 

미세분진보다 작은 입자를 환경에 노출시키는 나노기술이 실용적으로 다가올 때 인체와 생태계는 안전할 수 없다고 해외 전문가는 경고하건만 우리 사회는 그에 대한 문제의식과 절연된 모습이다. 도대체 경각심이 없다. 사회적 통제 없는 과학기술은 안전할 수 없다. 생명공학과 나노기술이 그렇다. 우주개발은 타당할까. 망가진 지구를 떠나 안락하게 살 도시를 우주에 과연 만들 수 있고, 가능하다면 만들어야 할까. 에어컨과 승용차와 골프를 우주에서도 포기하기 싫은 사람은 우주 정복에 막대한 비용을 퍼부을 것인데, 차라리 그 비용을 지구 생태계의 보전에 전용하는 것이 멀지 않은 내일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데, 전남 나로도에 우주센터를 건립한 우리는 우주개발에 나설 예정임을 자랑스레 여긴다. 자랑이라. 무엇이 우리를 현혹했을까. 우리도 해냈다는 자존심일까. 자존심이 기후변화를 극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데. 대륙 간 탄도미사일로 패권을 쥘 생각이 아니라면 우주개발은 환경위기 시대에 전혀 시급하지 않다. 그리고 미사일 공격과 방어는 주변 국가에 더 큰 유혹과 위협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환경 불감증


2007년 2월 영국의 인디펜던트지는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6.4도 상승하면 극지방으로 피신한 운 좋은 인류를 포함한 대부분의 생명이 사라질 것으로 경고했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정리한 시나리오는 이제와 같은 추세로 자원을 소비하며 온실가스를 계속 내보낸다면 지구는 100년 만에 멸종의 회오리에 빠져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기온이 평균 6.4도 상승하면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심해의 메탄하이드레이트에 불이 붙어 대기권은 호흡할 수 있는 산소가 부족해질 것이고, 경험해보지 못한 폭풍우로 지표를 잃은 지구에서 인류 모두와 대부분의 생물은 멸망하게 될 것으로 경고한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은 10년 남았다고 보도하는 인디펜던트지는 우리의 경각심을 서둘러 요구한다. 남은 10년 이내에 이제까지 고민 없이 낭비하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 권위지의 경고와 관계없이 뻔뻔스러운 상업주의는 지구온난화 펀드를 개발한다. 물이 말라 쩍쩍 갈라진 호수에서 선탠을 즐기는 젊은 여인의 사진을 광고로 보여주며 지구온난화를 기화로 돈을 벌라고 꼬드긴다. 지구온난화 방지 기술이 장차 돈이 될 테니 그쪽에 투자하라는 건데, 이는 이미 국제 사회에 벌어졌다. 국가 사이에 ‘탄소배출권’을 거래할 뿐 아니라 투기하는 것이다. 지구의 위기 상황에서 탄소배출권이라는 권리는 터무니없는데 그것으로 돈벌이에 나서다니.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돈으로 망친 환경을 돈거래로 치유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늘어나는 질병도 돈으로 치료하겠단다. 과연 가능할까. 수많은 불치병과 난치병의 원인이 오염된 환경이다. 전쟁과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와 스트레스와 피로도 결국 탐욕으로 망친 환경이 원인이다. 휴식과 안전이 도모되는 자연스런 환경이라야 질병이 없고, 치료도 필요 없다.

 

남보다 더 먼저, 더 빨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는 탐욕이 빚는 환경재앙. 그로 인한 질병은 다분히 구조적이며 제도적이다. 배타적인 탐욕은 획일화된 생산방식을 농업 분야까지 확산시키려 한다. 환경 조건에 따라 재배하는 종자가 다양하던 전통의 농업마저 획일화시켰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할 교육은 특정 대학의 입학 조건에 맞춰 극도로 획일화되었다. 이제 사람도 종자처럼 획일적으로 시작한다. 유전자가 단순한 종자는 기후변화를 이기지 못한다. 흔해빠진 바나나가 장차 멸종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수확 품종으로 획일화된 까닭에 변화될 기후에 적응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다. 닭도 돼지와 닭도 획일화되어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이 돌면 한꺼번에 죽는다. 획일화는 경쟁을 낳는다. 정책과 제도와 유행과 언어와 사상과 습관과 질병이 패권 국가와 비슷해지면서 많은 국가들은 협력보다 경쟁을 일삼는다.

 

경쟁으로 우열을 결정하는 문화에서 다양성은 퇴출 대상이다. 특정 환경이 요구하는 특징만이 우대받을 따름이다. 퇴출되지 않으려면 표준에 제 몸과 습관을 억지로 맞춰야 한다. 뒤쳐지지 않으려 경쟁하는 사회에서 이웃을 배려할 여유는 없다. 남보다 빠른 선행학습으로 경쟁하는 현재의 교육이 그렇다. 건강한 이에게 팔려나가는 약품을 개발하는 의료와 투기를 부추기는 주택산업이 그렇다. 늦으면 퇴출된다는 위기의식을 조장하며 이윤을 챙기려는 공급자의 의도에 소비자는 대책 없이 빠져든다. 과정보다 목표를 숭상하는 경쟁 사회에서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는 낯설다. 속도를 추앙하는 문화에서 서울외곽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이 주변 생태계를 난폭하게 파괴하는 건 아주 당연하다.

 

여성의 난자를 파괴하는 배아줄기세포 기술과 조작된 유전자를 퍼져나가게 하는 생명공학 기술은 다음 세대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특별법으로 더욱 위태로워진 새만금 일원의 갯벌은 기후변화 시대의 후손을 질식시킨다. 농토를 메워 만든 자동차와 반도체 공장으로 돈을 벌어 외국에서 밥 사먹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요즘의 농경사회는 얼마만큼의 식량을 보전할 수 있을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건만 식량은 돈이다. 투기자본이 석유에 이어 곡물시장에 손을 댄 요즘, 세계 곡물가격은 부시 미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춤을 춘다. 그가 바이오에너지 운운하자 국제 옥수수 가격이 일제히 상승하고 세계 난민들은 먹을 게 더 줄어들었다. 수확된 곡물이 당장 줄어든 것도 아닌데. 선물거래는 투기를 부른다. 앞으로 농작물과 수산자원이 줄어든다면 후손의 고통은 참을 수준을 넘을 텐데, 우리 시대의 환경 불감증은 제 궤도를 수정할 줄 모른다. 반도체와 자동차와 생명공학으로 생명의 대안을 찾을 수 없다.



개인의 역할


꿀벌이 사라진다고 유럽과 미국의 언론이 걱정을 태산 같이 할 적에 우리 언론은 남의 사정으로 치부했다. 우리 과수농가도 꿀벌이 날아들지 않자 일일이 붓으로 가루수정을 하곤 했건만 어느 언론도 시민의 경각심을 끌어내지 못했다. 꿀벌이 사라지면 사람은 4년을 견디지 못한다는데, 꿀벌이 사라지는 원인으로 파악하는 농약 사용량은 현재 줄어드는가. 붓으로 가루수정하던 농부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농약 뿌리기에 바빴다. 그럴수록 몸은 엉망이 되건만. 농약 살포는 어제 오늘의 사정이 아니다. 꿀벌은 왜 갑자기 사라져가는 걸까. 학자들은 최근에 부쩍 늘어난 유전자조작이나 핸드폰 전파에도 혐의를 둔다. 결국 자연스럽지 못한 ‘삶의 방식’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건데, 그 가능성을 전해들은 생명공학자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유전자조작 연구를 중단하고 국가는 관련 연구비 지급을 즉각 중단할까. 소비자는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식품을 시장에서 즉시 몰아낼까. 핸드폰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는 기업은 핸드폰을 당장 수거해 폐기하려고 나설까.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긴장해야 할 것은 꿀벌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있다. 인과관계가 밝혀지기 전에 대책을 반드시 세워야한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자본은 물론 개인도 꿀벌이 사라지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도 다 하는데 뭐.”, “설마 별 일이 있겠나.”, “과학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주겠지.” 하며 행동을 미루지 않겠는가.

 

동네 구멍가게를 망하게 한 대형 양판점에 차를 몰고 들어가는 시민은 지역의 돈이 중앙의 한줌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걸 깨닫지 못한다. 낮은 가격을 위해 노동자가 착취돼, 작업장 사고와 질병이 늘어나는 걸 감지하지 못한다. 자원이 낭비되어 지구온난화가 가속되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값이 싸서 더 사고, 더 샀으니 낭비하고, 돈을 많이 썼으니 일을 더 해야 할 따름이다. 이웃은 물론 가족과 대화할 시간을 줄어든다.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파업이 시민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한다. 그도 노동자이며 그의 아이도 노동자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다.

 

자동차도로가 위험하다고 자전거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는 보행자를 위협한다. 자전거도로에 주차하는 자동차 운전자와 대중목욕탕에서 샤워 꼭지의 온도 유지하기 위해 물을 마냥 쏟아내는 시민의 자세는 서로 다르지 않다. 새만금 특별법 통과를 축하하는 자본이나, 그 떡고물을 탐하는 개인이나, 지구온난화와 대기오염과 먹는 물을 에어컨과 공기정화기와 개별 정수기로 대비하려는 시민이나, 밭떼기로 팔자고 농약을 마구 치는 농심이나, 향기와 맛을 유지하려고 색소와 첨가물을 마구 넣는 식품사업자나, 그런 불량식품을 알면서 파는 상점 주인이나, 단지 식도락을 위해 가축의 본성을 억제하며 사육하고 도살하고 폐기하는 자본이나, 그런 육식의 폐해를 나 몰라라 외면하는 소비자나,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는 똑같다. 이웃은 내 주변의 인물로 한정할 수 없다. 나를 세상에 나오게 한 조상, 내 삶의 습관과 언어를 안겨준 그들의 문화와 역사, 나를 이을 후손, 후손의 삶을 건강하게 도모할 생태계도 이웃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웰빙은 혼자만의 행동으로 불가능하다. 내 웰빙을 보장하는 이의 웰빙이 두루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웰빙은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는 생태사회에서 구현 가능하다. 농산물을 손수 재배하기 어렵다면 내 얼굴과 개성을 기억하고 배려하는 농사꾼이 재배한 신선한 농산물을 직접 구매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 그런 농사꾼을 알지 못한다면, 신뢰로 농산물을 판매하는 가게, 다시 말해,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유기농매장을 활용하는 것이 좋다. 맛과 향기와 칼로리가 세계 공통인 패스트푸드보다 개성이 가득한 ‘슬로우푸드’로 웰빙을 추구할 수 있다. 먹을거리만이 아니다. 문화에 따라 제도와 습관이 다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의 문화, 남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내 개성을 찾는 일에서 지속가능한 웰빙은 가능해진다.

 

곡물을 가공하는 바이오에너지는 친환경이 아니다. 그런 곡물은 거대한 단작으로 재배할 수밖에 없고, 단작은 석유 없이 유지가 불가능하다. 현대의 단작은 곡물로 얻는 에너지의 10배 이상의 석유 에너지를 소비한다. 지구온난화의 주요 원인을 제공하는 화력발전이나 치명적인 핵폐기물을 자자손손 물려주는 핵보다 재생 가능한 햇빛과 바람을 활용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지만 효율이 개선된 기기를 사용하고 무엇보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재활용보다 재사용이 낫고, 재사용보다 아예 사용하지 않는 삶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언론이 가슴 설레며 소개한 심해의 메탄하이드레이트는 대안이 아니다. 채굴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훨씬 많다. 그러므로 소비자들이여. 공부하지 않는 언론의 선동에 속지 말자. 언론은 핵융합 가능성도 기대했지만 순진한 단견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범을 보라. 에너지가 넘치면 폭력적이 될 공산이 크다. 타인의 자원에 욕심이 생길 것이다.

 

단지 놀이를 위해 자신은 물론 모든 생물의 기반인 생태계를 파괴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골프와 스키는 자제, 또는 포기하는 것이 내일을 위해 책임 있는 개인의 행동이 될 것이다. 한미FTA는 우리 땅과 문화에 맞지 않는 미국식 삶을 강요한다. 이윤을 노리는 자본의 한미FTA 계시록에 따를 게 아니다. 자신이 뿌리내린 지역의 문화에 기대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며 건강하다. 대안은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개성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에서 우정과 환대로 이웃을 맞는 생태사회다.



나가는 글


이윤을 예측 가능하게 챙기려고 속도와 목표와 과정까지 획일적으로 재단하는 요즘, 개성을 잃은 개인과 전통 문화를 잃은 집단은 생활 속의 환경 위기와 문화 속의 환경 불감증을 고질적으로 끌어안게 되었다.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양성이다. 이제와 같은 방식으로 건강한 내일을 연장하기 어렵다는데 동의한다면, 길들여진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걸 인정한다면, 중앙에서 제공하는 획일적 편의를 과감하게 버리고 행동해야 한다. 혼자 어렵다면 시민운동에 기댈 수 있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소비자의 굴종을 강요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입하기 거부하는 불매운동은 중요한 시민운동 중의 하나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는 경제성장”이라고 명민하게 지적했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인 시절, 우리는 싸워야 할 상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명과 재산을 잃을 수 있었지만 행동했다. 인생을 망칠 수 있었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움직였다. 싸워야 할 대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렵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내 안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럴수록 행동해야 한다. 내발이 닿아 있는 현실을 기반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더라도 이상은 멀리 볼 수 있다. 하지만 들여오는 소식은 흉흉하다. 희망을 찾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며 행동을 재촉한다.

 

신념과 긍지로 움직이는 시민운동에 재미와 감동이 더 필요하다. 재미와 감동이 없으면 지속적인 행동이 가능하지 않다. 연대가 끈끈하지 못하다. 내일의 문화는 생태적이어야 한다. 생활 속의 환경 위기와 문화 속의 환경 불감증은 재미와 감동으로 연대하는 생태적 문화운동으로 극복해야 한다. (환경과생명, 2007년 겨울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7. 7. 10. 16:13
 

 

오랜만에 생태학 관련 학술대회를 참석했다. 발표 논문을 포스터에 요약해 놓고 질문에 답변하는 연구자들이 대부분 젊었다. 젊은 연구진이 늘어난다는 건 틀림없이 좋은 일이다. 많은 논문이 생태계 교란에 의한 생물종 감소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상하다. 연구자에게 질문도 해보았는데, 뭔가 허전하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논문에 분노는커녕 안타까움도 없다. 조사할 때 생태계 파괴를 확인했을 텐데, 연구자는 결과만 묵묵히 제시한 것이다. 과학자는 감성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지킨 셈인가.

 

하긴, 환경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나도 그랬다. 통계적으로 유의할 수준으로 분석하려면 20마리 이상 잡아야하는데, 당시 개체수를 채집하기 어려운 것이 안타까웠을 뿐, 생태계 파괴 자체에 분노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파괴된 생태계를 바라볼 때 가슴이 아프다. 그런 심정으로 발표 논문을 읽다보니 허전한 거지, 학술대회장의 젊은 연구자들은 옛날 나와 비슷하겠지. 젊은 과학자들은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 가치를 감성적으로 부여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배웠을 것이므로.

 

환경활동가를 위한 생태학 강의를 마칠 무렵, “언제부터 환경운동을 하셨어요?” 한 활동가는 묻는다. 환경운동에 나선지 몇 년 되었는가를 알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학자가 무슨 이유로 환경운동에 나서게 되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 스스로 환경운동가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생태학을 공부한 나는 왜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을까. 순수한 학자라고 생각했던 나는 언제부터 자신을 환경운동가로 다짐하기 시작했을까. 무슨 계기로 환경운동을 하는 학자가 되었을까.

 

환경운동가와 골프장 예정 지역을 조사할 때였다. 식물을 조사한 선배는 주민들에 이끌려 막걸리를 마시자고 권유했다. 희귀동물이 출현하니 골프장으로 부적당하다는 조사 결과를 환경단체에 제공하고 집으로 가려다 엉거주춤 술상에 앉았는데, 주민들의 절절한 하소연이 가슴을 후볐다. 그만 분노의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조사 현장과 연구실만 왕래하던 생태학자의 시각으로 환경문제의 근원과 실상을 바라볼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더 알아야 했다. 인문학과 사회학의 결핍을 절실히 느꼈다.

 

생태학적 지식은 모자랐다. 희생이 강요되는 사람을 만난 환경운동의 현장에서 생태학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그래서 인문사회 전공자의 고민을 읽었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쉬운 철학책을 찾아 읽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읽었다. 읽으면서 썼다. 객관적 사실을 건조하게 쓰지 않았다. 감성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세상 사람에게 현장의 고통을 생태학은 물론 인문사회적 시각으로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문사회를 공부하면서 과학은 가치중립이 아니라는 시각을 얻었다. 객관적 결과를 묵묵히 기록하는 게 아니라 누가 연구를 지원하고 지시했는가에 연구방향이 좌우된다는 걸 짐작하게 되었다. 막대한 돈과 시설과 연구자가 동원되는 현대과학은 자본이나 패권을 노리는 세력의 요구에 쉽게 굴복한다는 인문사회학자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핵무기와 핵발전소는 다른 게 아니고 물이 모자라 다목적댐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는 데 동의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인문사회의 시각을 놓치지 않고 환경운동을 하는 생태학자로 바뀌게 되었다. 누군가 물으면 말한다. 지금과 같은 나를 만든 건 8할이 책이라고. 나머지는 현장이겠지.

 

책을 읽으면 많은 경험과 그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배우고, 배운 만큼 성숙한다. 노자와 소로우와 간디를 만났고, 장일순 선생의 따뜻한 가르침을 받았다. 학술대회에서 허전하게 만난 젊은 생태학자에게 인문사회 방면의 책을 권하고 싶다. 내일을 생각하는 가슴 뜨거운 생태학자로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빠져죽을 만큼 넘치는 지식의 바다에서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소중한 까닭이다. 많은 분야가 그렇지만 시민운동의 힘도 책에서 나온다. 환경운동의 힘, 책의 도움이 크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웹진, 2007년 7월)

제주도로 귀농한지 2년째가 되어갑니다. 초보농사꾼의 좌충우돌......경황이 없었다고 변명해봅니다. 그동안 너무 소흘한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다시 힘을 내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