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15. 9. 30. 17:22


93일 역사적인 황새 방사 행사가 있었다. 1994년 이후 사라진 이 땅의 텃새 황새 이후 다시 텃새가 될 사명을 갖고 황새 8마리가 자신들을 정성스레 보살핀 우리를 떠난 것이다.


1994년은 다리가 길고 날씬했던 왕년의 국가대표 축구선수, 현 황선홍 감독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을 안기게 한, 이 땅의 마지막 황새에게 조문을 드린 첫해였다. 1971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짝을 잃은 마지막 황새가 과천 동물원에서 무정란만 낳다가 쓸쓸한 삶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덩치가 커 그랬을까? 몸이 하얗기에 그랬을까? 예로부터 길조로 여기던 황새는 농촌 어귀의 고목에 둥지를 틀고 예로부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온 텃새였다. 이후 625 동족상잔에서 빗발치던 총탄과 60년대에 성행했던 밀렵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어도 구불구불한 논둑과 주변 물웅덩이가 고향의 정취를 폭넓게 유지하는 곳에서 길조라는 명맥을 유지해왔다. 1994? 아니 1971년까지의 일이다.


농촌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황새가 자손을 낳지 못하게 된 언저리부터 우리의 농촌도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졌다. 하늘만 바라보던 구불구불 천수답은 미개한 농촌의 전형인 양, 교과서마다 뭇매를 때리던 시절 이후의 일이다. 이른바 선진농업을 위해 기계화를 서두르면서 습지와 휴식, 생태와 문화를 잃은 농촌은 획일화되고 메말라갔다.


개구리와 왕잠자리만 잃은 게 아니었다. 지역의 농산물들을 이웃과 나누며 자급자족하던 농심이 숨죽이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단작이 물웅덩이를 몰아내면서 농촌은 삭막해졌다. 기계화는 농작물만 단순하게 만들지 않았다. 갈무리하던 씨앗마저 기업에 의존하면서 농촌의 환경은 기업 프렌들리하게 변해 온갖 농약과 비닐로 어지러워졌고 겨울이면 찾아오던 커다란 철새, 시베리아 황새의 방문까지 탐탁지 않게 여기게 만들었다.


~ 다행이라 해야 하나? 메마른 환경에서 외로움이 사무쳤을까? 전문가들이 세계적으로 하루 150종이 멸종한다고 경고하는 가운데, 복원이 추진되는 생물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정부가 애드벌룬을 높게 띄운 것이다. 천연기념물 199호로 지정 보호되는 황새가 그 첫 대상이다.


1996년부터 전문가들이 모였다. 복원에 몸 바쳤던 고 김수일 교수와 현 박시룡 교수를 중심으로 교원대학교 안에 설립한 한국 황새복원연구센터가 그곳이다. 이후 일본과 러시아와 공동으로 황새 복원계획을 수립, 600마리가 남아 있는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서 암수 개체를 도입하여 황새를 이 땅에 텃새로 다시 정착할 수 있도록 지금도 공을 들이고 있다.


짝을 지은 암수가 알을 낳고, 낳은 알을 품어 부화되면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주는 행위는 자연에서 아주 자연스럽지만 사람이 개입해야 하는 복원은 어렵다. 사육 과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황새복원연구센터에서 6단계로 진행되는 황새의 자연번식 과정은 현재까지 순조롭게 이어진다.


1996년 어린 황새 두 마리로 복원을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개체수를 150여 마리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이들 가운데 첫 방사용으로 선발된 암수 각 세 마리는 2013년 봄 황새생태연구원에서 태어났고 별도로 마련된 야생화훈련장에서 생존 훈련에 투입했단다. 높이, 멀리, 그리고 오래 날 수 있는 날개 힘을 키워야하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미꾸라지와 메기 같은 먹잇감을 잡아먹는 기술을 익히는 과정을 거치지만 거기에 그치는 게 아니다. 장차 낳을 새끼들에게 먹이를 걷어 먹일 능력까지 배양해야만 한다. 이후 복원은 궤도에 진입할 것이다.


20124월에 태어난 황새, 일본에서 찾아온 황새를 만나러 포천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도연스님이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 땅에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선사한 봉순이는 일본에서 방생했는데, 저 홀로 800킬로미터를 날아 찾아왔다. 일본 복원센터의 모범생이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의지를 지니지 않았나.


황새 한 쌍이 가족을 건사하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면적이 30만 평이라고 하니 대략 여의도의 3분의1이 조금 넘어야 하는데, 효고현 토요오카시의 농경지가 아무리 넓어도 장차 꾸릴 자신의 가족까지 건사하기에 비좁을 거로 봉순이가 판단했는지 모른다. 철새든 텃새든, 대개의 황새가 그렇듯, 건강한 먹이가 충분한 공간을 찾아 가족과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는데 봉순이가 봉하마을을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닌가.


하필 봉하마을에 내린 봉순이. 우연일까? 유기농업으로 자리를 잡은 지역답게 주변 화포천은 주민들의 정화작업으로 깨끗해졌고 생태계가 살아나면서 황새의 먹이가 될 생물이 충분히 늘어났다는 걸 감지한 능력 덕분이겠지.


하지만 이제 봉순이는 봉하마을에 없다. 1년 만에 고향으로 결국 되돌아갔다. 우리 환경운동가의 적극적인 보호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주변 호수를 찾는 사람들이 버리는 낚시도구에 위험을 느꼈거나 봉하마을의 유기농업 범위로 자신의 가족을 건사할 자신이 없었을지 모른다. 봉하마을은 좁다. 가족을 꾸린 뒤 안심할 장소를 더 물색하고 싶었는데 찾지 못했기에 먼 길 되돌아갔을지 모른다.


봉하마을에서 자신이 살 방법을 찾고 있었을 무렵 시베리아에서 겨울에 방문한 철새 황새무리와 잠시 머물며 같이 날아다니던 봉순이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일본으로 돌아갔다. 시베리아 청년들과 사귀고 봉하마을에 정착하기 바랐는데, 시베리아도 날아간 것도 아니다. 낯선 초청에 응하지 않았기에 봉순이가 다시 우리 땅을 찾을 가능성은 남았다. 봉순이도 분가를 시켜야 할 것이므로.


아직 짝이 없는 봉순이는 토요오카시가 마련한 건강한 생태계에 천연덕스럽게 살며 가끔 그리움으로 들리는 도연스님을 비롯한 우리 환경단체 활동가를 먼발치에서 만난다. 기억력 높고 오래 사는 만큼 가끔 먼 길 여행도 마다하지 않겠지. 그 전에 교원대학교의 황새복원연구센터에서 추적창치를 등에 이고 방사된 8마리, 그리고 방사를 기다리는 황새들이 건강하게 정착할 농촌마을이 전국 곳곳으로 반드시 확장되어야 하고, 일본처럼, 아니 그 이상, 황새가 정착한 농촌에서 생산한 농작물이 많이 비싸더라도 흔쾌히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늘어야한다. (작은책, 2015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