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6. 8. 7. 10:53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 지음(2006), 『침묵과 열광』, 후마니타스.


 

최근 ‘한반도’라는 제목의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과 구성에 대해 논란하고 있는데, 속이 후련하다는 관객과 “민족적인 울분을 기반으로 극우 파시즘적인 형태를 주장하고 있”어 위험하다는 전문가의 평가가 장안에 교차한다. “현실적으론 일본에 비해 약소국이지만 영화로라도 한번 이겨보고자”는 소회를 밝힌 감독의 소박한(?) 의도와 달리, “민족주의 문제가 작게는 영화 흥행의 문제지만 크게 보게 되면 우리나라 정치권의 책임회피를 합리화해주는 그럴듯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한 사회학자가 논평하는 한반도, 그 영화는 민족주의에 휩쓸리는 요즘의 시류에 편승하려는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독일월드컵 열기는 덤핑 붉은악마 티셔츠 가격만큼이나 꼬리를 내렸다. 업사이드를 인정하지 않은 주심의 명백한(?) 오심 때문에 다잡은 16강을 놓쳤다고 내심 합리화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 관중 썰렁한 K리그의 현실을 반영해 맥없이 돌아왔다면 감독과 선수들에게 빗발치는 원성을 축구협회는 어떻게 감당할 뻔했을까. 월드컵대회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집요하게 부추겨졌던 애국 열기는 ‘짝짝 짝 짝짝’에 무표정한 채 지나치는 이를 흘기는 풍토를 거리에 만연하게 했는데, 16강 탈락 팀 중 1위라는 위안이라도 없었다면 축구협회는 뒷감당이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16강에 들어갔다면? 상업주의 장단에 맞춘 장안의 애국주의는 평택미국기지 확장과 한미FTA 문제를 아직도 외면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2002년 여름날을 붉게 물들였던 한일월드컵의 붉은악마 신드롬에는 순수한 면이 있었다. 비록 업사이드가 무엇인지 몰라도 열기가 넘실대는 광장에 동참하고픈 젊은이의 순수한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독일월드컵 거리응원과 16강 기원은 초기부터 달랐다. 상업주의가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만큼 거북했다. 그래서 그런지, 16강 경기가 진행 중일 때 우리의 열기는 금방 삭으러들었고, 이어 벌어지는 K리그 관중석은 예전처럼 민망해졌다. 상업주의가 조장한 열기에 여운이 없었던 것인데, 모든 시민들이 평소에 축구를 즐겼다면 사정은 좀 달랐을지 모른다. 어디 축구만 그런가. 야구도 농구도 다 마찬가지다.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배양하는 엘리트 체육의 필연적 한계일지 모른다.

 

LPGA에 입문하려 대기하는 우리나라 소녀가 수 천 명에 이르는 현상을 미국의 어떤 체육인은 한국 특유의 ‘올인문화’에 빗대었다는데, 황우석 사태의 교훈을 잊고 배아복제 연구 지원에 다시 올인하려는 우리 과학기술부의 태도를 우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독일월드컵 열기를 부추긴 상업주의에 비견할 수 있을까. 다분히 의도적인 열기를 애국주의로 위장하려 든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현실에서 거래되는 월드컵 상업주의는 아직 희망사항에 불과한 줄기세포 상업주의와 분명히 다르다. 부자들의 한바탕 축제를 텔레비전으로 바라보는 가난한 이의 대리만족과 달리, 부자들의 줄기세포 허상을 위해 가난한 이와 다음세대의 생명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스타가 사라진 스포츠계가 일거에 썰렁해지듯, 우리 장안에 불던 줄기세포 열기도 미적지근해졌는데, 황우석 스타 만들기에 열심히 풀무질하던 언론은 자신이 만든 신기루가 사라진 뒤에도 황우석 사태에 대한 반성은커녕 심도 있는 진단마저 외면하고 있다. 황우석 전 서울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무용담을 편집해 발표하고 또 예고할 때마다 한 술 더 떠 광분하던 집단이 바로 우리의 언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침묵하고 있을까. 우리 언론의 본질이 원래 그렇던가.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가 아무리 우리 언론계의 관행이라고 해도 어디에서 “황우석!” 소리만 들리면 입에 거품부터 물고 열광하지 않았던가. 황우석 사태가 사기와 협잡으로 결말이 난 후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우리 언론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의뭉스럽다. 단순 무식해서 그런 걸까.

 

우리나라 기자들이 단순무식하다? 그럴 리 없다. 적어도 고시에 가까운 입사시험을 통과해 중앙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은 매우 똑똑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황우석 전 교수 앞에서는 언제나 순한 양이었을까. 대립하는 의견이 있으면 양측을 편견 없이 취재해 충분히 검토한 후 보도하는 것이 기자의 본분이거늘 그들은 왜 황우석, 이 석자만 끼면 본분을 송두리째 망각한 것일까. 그를 전지전능한 예언자로 숭배한 것일까. 사실 황우석 사태를 이처럼 부풀린 집단이 기자들만은 아니다. 날조와 협잡으로 얼룩진 자신의 과오를 ‘논문 돌려막기’로 덮으려던 황우석 전 교수의 행태가 만천하에 들어난 지금,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하며 짐짓 고상한 체하는 숱한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시기하는 것으로 비칠까봐 참아야 했다는 핑계를 둘러대지만 그들도 결과적으로 기획된 열광에 동참했다. 알고 있는 문제는 제기해야 학자다운 태도가 아니던가.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인문계와 갈라지는 우리 현실에서 칸트를 모르는 이공계는 열역학을 모르는 인문계와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인문계를 전공하고 어렵사리 고시에 합격한 기자는 과학기술 분야를 취재하기 버겁다. 그래서 기자는 과학자의 입에 의존하는데, 인문계를 불식해온 과학자는 과학기술을 쉽게 설명하기 어려워한다. 아니, 쉽게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전문가끼리 소통하는 전문 언어를 구사하며 인문계의 혼을 빼야 연구비 액수가 늘어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까닭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묻는 기자에게 약어로 구성된 전문용어를 남발하여 자신의 연구를 치장해 보도하게 만들면 민원과 유권자를 의식해야 하는 행정과 정치권에서 반응하고, 그 열매는 달다는 것을 과학자는 간파한다. 황우석 전 교수가 그랬다. 그러자 기자가 열광했고, 그 기사를 읽은 시민들이 차례로 열광했다. 행정과 정치가 열광한 것은 불문가지. 하지만 황우석 전 교수 연구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학자들은 침묵했다. 이제 반성해야 할 기자가, 행정이, 정치가 침묵한다. 시민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하다.


 

 

초창기부터 황우석 사태를 가까이에서 주목하고 목소리를 내던 젊은이들이 있다. 연출된 민족주의 열광 속에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소심하거나 비겁한 과학자들과 달리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진 비판을 무릅쓰고 기록하고 발표했다. 황우석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온 지난 7년의 상황을. 인터넷 신문의 기자로, 과학기술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단체의 간사로,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추구하는 정당의 연구원으로 떨어져 활동하지만 한때 같은 시민단체에서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이 그들로, 그들이 다시 모여 『침묵과 열광』을 펴낸 것이다. 저자들은 절박한 문제의식으로 황우석 전 교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무렵부터 몰락한 현재까지, 황우석 사태가 배태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적 열광과 침묵을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황우석 사태가 우리사회에 미친 영향을 반성적으로 살펴본다.

 

“책임 있는 자가 침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열광하는 자가 성찰하지 않을 때 어떤 비극이 빚어지는지를 강조하고자” 의기투합한 3명의 젊은이는 황우석 사태를 두 단어, ‘침묵’과 ‘열광’으로 요약한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나 일본의 토건세력에 견줄 수 있는 우리의 ‘과학기술동맹’에 주목하는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네 단계로 구분한다. 차세대 성장 동력을 생명공학산업에서 찾는 과학기술부에 복제 소 영롱이를 발표한 황우석 전 교수가 간택된 1999년까지를 1단계로 본다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문신용 교수,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과 ‘황우석 사단’을 구축, 정치, 경제, 언론계와 밀월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며 동물복제에서 인간배아복제 전문가로 변신한 2003년까지를 2단계로 보았다. 3단계는 사이언스에 배아복제 줄기세포 분화가 성공했다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약 세계적 학자로 주목받은 황우석 전 교수가 국가적 지원과 찬사를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2005년까지로, 이른바 황우석 신화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2005년 겨울부터 마지막 4단계로 나눈다.

 

황우석 전 교수를 정점으로 했던 과학기술동맹이란 무엇인가. 논문 조작이 드러난 뒤 “나도 피해자”라고 발뺌했던 정부, 언론, 재계, 그리고 의학과 과학계의 핵심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뜻을 모은 동맹이었다. 그들은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부와 언론과 재계를 현혹시킨 의학과 과학계 인사, 인문사회를 모르는 의학과 과학계가 편집한 현란한 기호에 속은 정부와 언론과 정계의 인사로 구성되었다. 황우석 교수의 신기루를 ‘과학이 아니라 감전될만한 마술!’이라 추켜올렸던 청와대를 비롯하여 여야 정치권과 각부 장관들, 앞 다투며 연구비를 제공한 재계와 황우석 전 교수와 연줄을 대기 바빴던 학계 인사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어떻게 열광했고 지금 왜 침묵하는지 『침묵과 열광』은 낱낱이 증언한다.

 

기자들은 어떠했던가. “복제 개 탄생이 갖는 여러 가지 의미”를 시민들을 대신해 캐물어야 할 기자가 기자회견장에 나와 황우석 전 교수와 덕담을 주고받는 데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어떤 연구를 하여 무슨 논문을 쓰겠다고 황우석 전 교수가 예고하면 당장 성공한 듯 화답하는 언론은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연구에는 예견이 불가능하지 않던가. 한데 우리 언론은 황우석 교수에 관한한 언제나 화답 이상이었다. 침소봉대로 일관했다. 호랑이를 복제하겠다고 했더니 신생대 공원을 재현할 듯 수선을 떨어 독자들을 현혹시키는데 앞장섰고, 광우병의 원인도 모르는데 광우병 걸리지 않는 소를 개발했다는 황우석 전 교수의 주장을 예상 부가가치까지 추산하며 열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낯 뜨거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황우석 전 교수의 발표를 왜곡 과장하는데 조금도 거리끼지 않은 우리 언론은 황우석 전 교수와 어느 정도 유착했을까. 『침묵과 열광』을 펼치면 알 수 있다.

 

2000년 과학기술부장관 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서 10개월 여 논의한 끝에 생명윤리법 골격안을 발표했을 때였다. 우리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듯 황우석 전 교수에게 쪼르르 달려가 평가를 의뢰했고, 황우석 전 교수의 의견을 근거로 골격안을 일제히 비판했다. 그러자 장관이 바뀐 과학기술부는 당황했고, 장관이 다시 바뀌자 과학기술부는 자문위원회의 골격안 자체를 폐기하고 말았다. 황우석 교수는 당초 그 위원회에 위원으로 추천되었지만 시민단체에서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당사자라고 지적해 제외된 바 있다. 그래도 황우석 전 교수는 위원회에 외부인으로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고, 연구 실적이 우수한 생명공학자 5명, 의사 5명, 인문학자 5명, 종교계 3명, 시민단체 2명이 포함된 위원회는 20여 회가 넘는 격론 끝에 생명윤리법의 골격안을 어렵사리 합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황우석 전 교수의 입김이 작용하게 되었을까. 초기부터 표방한 노무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 정신이 그때 살아있어 골격안대로 생명윤리법이 통과되었다면? 과거를 가정할 수 없지만, 만일 그랬다면, 황우석 사태와 같은 씻을 수 없는 망신은 국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교활한 머리가 빼어나거나 빽이 든든해야 한다. 황우석 전 교수의 발표에 미심적인 부분이 많았고 모순이 수두룩했어도 수십 명의 국내외 과학자, 정치권과 청와대가 포함된 행정부, 언론들이 입을 맞추어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해 줄 것으로, 국가 부가가치를 반도체 이상 증진시켜 줄 것으로 열광해 마지않는데, 누가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를 감히 사기라고 의심할 수 있을 텐가. 그래서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가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넘어 허위라는 것을 취재한 PD수첩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인지, 협잡에 가까운 사기극이 백일하에 속속 드러나도 열광은 그치지 않았고, 사이비 종교처럼 열광적인 팬들의 극성은 도를 넘었다. 그 와중에 월드컵과 지방선거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토론회가 열릴 때마다 나타나 추태를 보이던 황우석 전 교수 지지자들은 서울대학교 총장 차 밑에 기어들어가는 행동을 검찰총장에게 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하늘을 찌를 듯한 황우석 전 교수의 열광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과정의 전말은 어떠할까. 『침묵과 열광』의 저자들은 경험이 묻은 생생한 기록을 전한다.

 

당장 큰 이익을 줄 것 같았던 광우병 내성 소는 어떤 거짓인지, 이식용 장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의 희망으로 치장되었던 이종 장기는 어떤 거품인지 『침묵과 열광』은 그 내막을 밝힌다. 과학기술동맹이 추진하는 의료시장화의 내용은 어떻게 추진된 허상인지 전말을 밝히는 젊은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몰고온 우리 사회의 앞날을 걱정한다. 민주주의와 휴식이 없는 대학 실험실 문화는 위험하지 않을까. 여타 과학기술동맹이 여전히 막강하게 건재한데 과학계 스스로 황우석 사태를 성찰할 수 있을까. 황우석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까. 생명공학계만이 아니다. 거액의 세금이 투여되는 연구에 진실성만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건만 정부는 진실성 판단 여부에 변죽울렸을 뿐, 얼마 전 과학계를 격려한다며 생명복제 분야에 작년보다 증액된 연구비를 책정한다고 발표했다.


 

 

학술 토론회에서 한 학자는 황우석 사태를 박정희 식 개발독재의 산물로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개발만이 살 길이라 시민들을 세뇌하고, 과학기술이 그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어려서부터 각인시킨 군사독재정권은 ‘하면 된다!’ 구호를 신조로 반대의견을 강압적으로 묵살해왔다. 군사독재가 사라진 뒤 과거와 같은 물리적 억압은 사라졌지만 “경제!”하면 자지러지는 상황에서 “세계 최초로 원천기술을 확보하게 된 대한민국을 세계최대의 부자나라로 만들어주겠다”는 근거 없는 호언은 민족주의로 충만한 희대의 사기극을 배태하게 만들었다. 대통령도 지적했지만, 돈이 권력을 쥔 세상이니 당연한 노릇일까. 돈보다 진지함이 거세된 세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기보다 중앙에서 주어지는 겉만 화려한 편의에 몸과 마음을 말초적으로 빼앗긴 까닭은 아닐까.

 

겉을 화려하게 편집한 영상문화는 보는 이의 얼을 빠지게 하기에 유용하다. 네티즌을 끌어모으는 인터넷 문화가 대개 그렇다. 현장을 살펴본 기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클릭 수를 늘이려 뉴스를 배치하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접속하면 텍스트의 진정성보다 시각적 신호에 화살표 커서가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큰 제목과 사진만 바라보는 독자는 신문보다 텔레비전을, 텔레비전보다 인터넷에 친숙하다. 종합뉴스보다 연예인 소식에 눈을 돌리는 세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텍스트보다 편집된 영상에 마음을 빼앗긴다. 황우석 전 교수가 화려한 언사로 발표하는 진실의 전모를 진지하게 파악하기보다 말초적 치장에 열광하는 사회가 황우석 사태를 몰고온 것은 아닐까. 『침묵과 열광』의 젊은 저자들은 이 땅에 황우석 사태가 배태될 수밖에 없는 토양을 포괄적으로 고발하고 민주화된 과학의 진정성과 윤리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과학기술동맹에 대한 검토 없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황우석 개인에게 돌리려는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와 검찰조사가 미칠 사태를 걱정한다. 그래서 반복될 제2, 제3의 황우석 사태를 막을 수 없을 것으로 우려한다.

 

『침묵과 열광』을 쓴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은 가벼움을 추구하는 인터넷 영상문화와 이 땅의 천박한 과학문화를 비교하며 논의하지 않았지만 과학기술동맹을 파악하지 않는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와 검찰 조사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래서 고맙다. 이윤을 노리는 자본과 패권을 염두에 둔 권력에 과학기술이 종속되는 한, 아무리 연구윤리를 제도화하고 강화한다고 해도 연구부정과 비윤리적인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과학의 신비화에서 싹이 튼 과학기술동맹은 자본과 권력의 비호 아래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작금의 우리 상황은 또 다른 황우석 사태를 충분히 예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깨어있는 시민운동이 아닐까. 과학기술을 막연히 좋은 것으로 어려서부터 기대하다 민족주의로 위장된 과학기술동맹에 부지불식간에 덜미 잡힌 독자를 깨어나게 하는 『침묵과 열광』은 그래서 참 소중하다 아니 할 수 없다. (환경과생명, 2006년 가을호)

 
 
 

서평·추억

디딤돌 2006. 5. 2. 17:56
 

지난 3월 10일,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는 “황우석 사태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주최했다. 그런데 그 토론회는 문을 열자마자 난장판이 되었다. 첫 발제자가 발표하기도 전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간 한 청중이 마이크를 빼앗으며 소란을 피었고, 미리 방청석에 앉아 있던 일단의 청중들은 주최측에 거세게 사과를 요구하며 토론회 진행을 방해한 것이다. 발제자 중 한명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황우석 전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사기’로, 날조와 거짓이라는 증거가 거듭 드러나는 데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황우석 전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광신자’로 규정했는데, 그에 대한 거친 항의였다.


많은 사람들은 황우석 전 교수를 무턱대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줄기교’ 신도에 비유했다. 속칭 ‘황빠’로 불리는 그들은 교주의 아들이 난잡한 성적 행각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아 구속되자 법원에 몰려나가 죄가 없다 아우성치는 사이비종교의 행태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학술토론회장에까지 몰려나와 학자의 신념을 폭력으로 대응하려는 부류를 광신자로 비유한 것은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황우석 전 교수는 줄기교의 교주에 비유해야 타당할 것이다.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숱한 증거들을 눈앞에 펼쳐 놓아도 합리적인 논의는커녕 눈을 억지로 감고 고개를 돌려 보려하지 않는 기막힌 충정은 단순한 지지를 넘어서지 않는가.


황우석 사태 이후, 상식 있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황우석 전 교수가 퍼뜨린 신화에 빼앗긴 정신을 되돌리고 줄기세포의 거품을 걷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워낙에 큰 기대를 품었던 까닭에 아직도 줄기세포의 신화가 사실이길 바라는 사람들도 황빠 외에도 적지 않다. 그렇게 된 데에는 선정성에 기댄 언론이 큰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고, 황우석 전 교수를 이용하려던 정치권도 책임도 크다. 하지만,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침묵했던 전문가들도 일말의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어리둥절했고,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줄기세포 연구를 멈출 수 없다고 선언한다. 세금으로 조성한 거액의 연구비를 황우석 전 교수가 일으켰던 문제의 줄기세포 연구에도 퍼부을 태세를 멈추지 않는다. 황우석 전 교수가 유포한 신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이다. 다만 이제 연구에 진실성을 갖추라고, 외국도 그런다고 생뚱맞게 요구한다. 지금까지 진행한 우리의 줄기세포 연구에 진실성이 없었다는 걸 실토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실토 여부는 둘째 치고, 연구자가 바뀌고 연구 진실성을 제대로 감독하기만 하면 연구의 정당성과 생명윤리의 문제는 앞으로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정부는 확신하는가. 연구 진실성을 황우석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큰 원인을 제공한 과학기술부에서 맡겠다는데, 반성도 없는 과학기술부의 진실성을 믿어주어야 하나. 줄기세포 연구는 지난날 열광했던 신화를 재창조해낼 수 있을까. 연구자가 바뀌고 연구에 투명성이 보장된다고 줄기세포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을 텐데.


황우석 사태를 전후하여 생명공학의 문제를 윤리와 안전 차원에서 다루는 몇 권의 책이 출간돼 나왔다. 필자를 포함하여 국내외 저자들이 보통 시민들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의 책을 선보인 것이다. 그런데, 황우석 사태가 불거기지 전부터 저자거리의 중대형서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그런 책들이 독자의 손에 넘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동영상과 영상을 골라보는 인터넷 세태라서 그런지, 대개 일간신문의 신간 소개 란에서 소상히 알려주었어도 일반 시민들은 물론, 생명윤리를 말로 걱정하는 성직자들도 거의 읽지 않는다. 논문으로 다룬 전문서적이 아니라 그런지 많은 전문가마저 외면한다.


골라 볼 수 있도록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초기 화면에 뉴스를 배치하는 세태에서 보통 시민들은 생명공학 신화 앞에서 허약할 수밖에 없다. 화면을 통해 선정적으로 전하는 메시지에 충실한 시민들은 텍스트로 재미없이 전하는 생명공학과 줄기세포의 문제점을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정부에 의해 줄기세포에 대한 열광이 편집돼 재현된다면 시민들은 다시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하면 생명공학 연구에 내재하는 태생적인 비윤리성과 위험을 시민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행동할 수 있을까.


시민운동이고 행동이다. 황우석 사태가 계기가 되었든 아니든,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환경운동 활동가가 되었든 성직자가 되었든 시민에 다가갈 용의가 있는 전문가가 되었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고, 문제의식을 성실하게 가지려면 관련 책들을 충실히 읽어야 한다. 그래서 세금만 내고 열광을 강요당하는 시민들을 깨워야 한다. 들어간 돈이 아까워 더 큰돈을 퍼부어대겠다고 선언하는 정부의 부당성을 자식 키우는 시민들이 의당 알아야 하지 않겠나. 생명공학에 내포된 비윤리성과 위험성을 각인하는 시민들이 후손의 환경과 생명을 행동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 급한 서생의 생명공학 인식론

『파우스트의 선택』, 박병상, 녹색평론사 2004.


2000년 10월 18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14층 로비에 모인 아시아와 유럽의 시민단체는 ‘아셈2000 민간단체포럼 워크숍2’를 개최,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그 농산물을 가공한 식품의 재배와 판매를 반대해온 이제까지 운동의 경험을 나누고 향후 대책을 토론하는 자리를 진지하게 가졌다. 유럽을 대표하여 독일에서 온 그린피스 담당자는 1996년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유럽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고 반대운동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유럽에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식품이 시장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발표하였는데, 이에 반해 홍콩과 인도에서 온 시민단체 활동가는 유럽에서 판로를 잃은 다국적기업이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고 있음을 고발하여 우리의 경각심을 고조시켰다.


‘생명안전․윤리 연대모임(이후 연대모임)’이 활동한 지 8년, 우리의 사정은 어떤가. 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듭 선언한 다국적기업 네슬레가 “표시제에 따를 뿐”이라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취급하지 말라는 연대모임의 요구에 불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던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표시제도가 강력한 까닭이 아니다. 허술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거듭된 요구에 의해 정부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포함되었는지 여부를 밝히는 표시제도를 시행하기는 한다. 하지만 규제가 느슨할 뿐 아니라 예외조항이 하도 많은 그 제도가 얼마나 철저하게 운용되는지를 소비자는 알기 어렵다. 따라서 표시제도에 의존하기보다 불매운동과 같은 시민운동이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식품을 시장에서 몰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힘은 초라하다. 수백만에 달하는 시민단체 회원이 주목하고 있는 그네들과 달리 시끄럽기만 할 뿐, 십여 명의 활동가가 고작이 아닌가. 우리의 현실을 간파하는 식품회사나 농산물 수출입상은 우리 시민단체의 불매운동 엄포를 여전히 무시한다.


참여가 핵심이지만 의식 없는 참여는 지치기 마련인 법, 절실한 의식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시민들의 의식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나.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객관적 시각은 이럴 때 무미건조하다. 그린피스는 먼저 모성애를 자극, 어머니의 이름으로 판매중단을 단호히 요구했다. 그렇다고 모성을 감성적으로 자극한 것만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충분히 타당한 논리를 쉽게 설명하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메시지가 선정적 포스터와 강렬한 성명서 계속 발표하고, 쉽게 풀어 쓴 소책자와 만화자료, 그리고 전문가의 의견과 논리를 바탕으로 시민 홍보용 책자를 거듭 발간하였으며, 문제의 농산물을 실은 대형선박을 소형 선박으로 위태롭게 가로막거나 시험농장을 불사르는 식의 직접 행동을 곳곳에서 감행, 시민들의 경각심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1998년부터 1년 만에 연대모임의 목소리는 효과가 있었다. 대다수 시민들은 유전자 조작 식품의 해악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유전자 조작 두부 파동 때 두부 매출이 한 때 격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유명무실화된 연대모임은 물론, 초기에 관심을 보였던 여타 시민단체의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은 요즘,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나 식품의 국제와 국내 유통은 어떤 상황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생명공학으로 인한 위험성은 유전자 조작으로 그칠 리가 없다. 후손의 생명안전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배아복제와 같은 생명복제 분야 역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황우석 사태 이후 경각심이 배양되어야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줄기세포의 가능성만이 호도된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시민들이 행동이 필요한데, 일부 시민단체의 고독한 아우성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절실한데.


쓰자. 서생의 직접 행동은 글로 호소하는 법. 쓸 수 있을 데까지 써보자. 누 차례의 토론회 공청회 그리고 워크숍, 여기저기의 신문과 잡지, 지면이 허락하는 한, 청탁이 들어오는 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자라는 시간을 더 쪼개서라도 써야 했다. 그렇게 원고는 쌓였고, 진정 감사하고 영광스럽게도, 두 달에 한번 무능한 서생의 생태주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녹색평론사’에서 출판을 의뢰해왔다. 조급한 마음, 급진적 문구, 근본적 시각으로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분노하며 써 내려간 10여 편의 에세이는 그래서 한 권의 책으로 2000년 묶였고 그 개정판이 2004년 다시 묶였다. 생명공학은 절대 아니어야 한다는 결론을 맺고 있는 한편 한편의 글, 다소 거칠고 내용이 꽤 중복되지만 논리만은 명백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현기증 나게 빨리 변하는 생명공학 기술,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위험한 생명공학의 문제는 연구비를 투여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보급하는 한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정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들의 쿠데타’라고 생명공학을 표현한 제레미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바이오테크 시대』에서 생명공학 선택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판 파우스트의 거래에 빗대었다. 38억 년 동안 조화로웠던 생태계를 이기적으로 재단한 인간은 생태계의 희생을 대가로 자신의 수명을 80세까지 연장시켰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제레미 리프킨은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들의 쿠데타’로 해석했지만, 생명공학의 실체는 그 이상이다. 부자를 위해 가난한 자를 소외하는 점은 물론 명백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것은 부자들의 생명연장을 위해 생명공학은 후손의 생명을 노린다는 점이다. 자신의 부와 배타적 생명연장을 위해 22세기 후손의 생명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팔아먹는 21세기의 『파우스트의 선택』, 책의 제목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자식 키우는 어머니들이 냄비뚜껑을 두드리며 집단행동한 산본은 소각장을 예정된 자리에 세우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초기 단계에 머뭇거렸던 목동에서는 소각장이 그 자리에서 가동 중이다.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식품이 우리나라에 와서 큰소리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시민들의 행동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각인된 과학기술의 신화는 연대모임의 목소리에 경각심이 생겼던 시민들의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 까닭이다. 그렇다면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파우스트의 선택』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인식을 바탕으로 자식 키우는 시민들이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인도하지 않을까.


생명공학기술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고 설파한 역대 대통령과 행정당국은 우리에게 파우스트의 선택을 종용한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만연한 가운데 인간복제 연구가 아무런 통제 없이 진행되는 마당인데 더는 머뭇거릴 수 없는 노릇이 아닐까. 『파우스트의 선택』이 마음 조급한 서생의 인식론적 하소연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생명공학 세기에 맞설 감성적 대항과학서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 박병상 지음, 책세상 2002.


황우석 전 교수를 포함한 일부 생명공학계의 집요한 방해에 의해 현재 실행중인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 거의 참조하지 않았지만, 서정욱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은 국가생명윤리기본법 골격안 마련을 위한 ‘과학기술부장관 생명윤리자문위원회’를 가동한 바 있다. 2000년 11월부터 열여덟 차례, 한 차례에 대여섯 시간 이상 앉아 뜨거운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위원회는 어렵사리 합의된 보고서를 과학기술부장관에게 제출했고, 임기를 마감했다. 생명공학자, 의사, 인문사회학자, 법학자, 그리고 종교와 시민단체를 대표한 위원들이 모인 까닭에 의견 차이가 첨예했지만, 과학기술의 균형발전과 국가 경쟁력을 희생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명윤리와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법률 골격안을 반드시 합의하자는 의지로 위원들은 참여했고 민주적으로 합의된 법의 골격안은 보기 좋게 폐기됐고 황우석 전 교수는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최선을 다했던 위원들은 위원회의 해체가 못내 아쉬워 잠시 ‘생명사랑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시민단체 대표의 자격으로 그 위원회에 참석했던 나는 생명사랑회 첫 모임에서 갓 출간된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을 한 권씩 돌렸다.


“내일을 거세한다구요? 아니 그럼, 내일이 ‘고자’ 된다는 뜻인가요?” 위원회가 열릴 때마다 부딪혀야 했던 생명공학자들과도 덕담 나누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인 까닭에 아무도 도전적 책제목에 이견을 달지 않았는데, 하필, 같은 마음으로 서로 협력했던 회원 한 명이 재미있다는 듯 한마디 툭 던졌고, 일순 조용해진 좌중은 내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말았다.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네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생명공학은 후손을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한다는 뜻이지요” 했다. 그러자 이번엔, 책제목을 보고 땡감 씹은 표정으로 “고맙다” 사례했던 생명공학자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그럴수록 꼭 읽어보시고 평가해주십시오” 공손히 부탁하며, 분위기를 되돌리기 위해 사족을 애써 달아야 했다. “출판사는 선명한 제목을 좋아합니다.” 그러자 누군가, “출판사는 원래 제목을 그렇게 정하지요. 그래야 잘 팔리잖아요!” 했고.


말뚝을 박아 자연을 사유화한 산업혁명 시대의 유럽을 상기하며 제레미 리프킨이 “자연에서 뽑아 낼 돈이 부족하다고 여긴 자본은 이제 유전자에까지 말뚝을 박으려 든다”고 산업혁명 초기의 엔클로저에 비유했지만, 생명공학은 화려한 애드벌룬으로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애드벌룬을 띄운 생명공학자나 행정관료들은 자본의 강력한 입김에 구속돼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무국장으로 있던 ‘생명안전․윤리 연대모임’에서 누누이 강조한바 있지만, 생명공학은 유전자 조작과 생명윤리 차원에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38억 년 이상 생태계에서 상호작용하며 안정된 상태로 유전과 진화를 거듭해온 생물종의 유전자를 불과 몇 년 사이에 불안정하게 만드는 유전자 조작, 그리고 존엄성을 고려하지 않은 동물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 생명의 시작을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생명복제, 그 두 측면으로 바라보면 생명윤리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생명공학은 배고픈 제3세계 인구의 증가를 걱정하는 초국적자본이 식량증산을 위해 노심초사 연구해낸 기술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 농작물과 그 농산물로 가공한 식품은 자본에게 충성할 따름이다. 그럴싸한 명분으로 위장한 자본은 자신들의 부가가치를 위해 유전자를 가진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 대상으로 여기는데, 조작 대상에서 예외가 아닌 인간은 마냥 기뻐해야 할까. 조작된 유전자는 종의 경계를 넘나들며 돌연변이를 전파할 수 있는데 생태계는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멀쩡한 유전자가 돌연변이 될 정도로 오염이 극심해 불치병 난치병이 늘어나는 환경에서, 유전자 조작된 생물로부터 값비싼 의약품을 생산한다고 환경이 보전될까.


예견되는 부작용은 물론 드러난 부작용까지 은폐하는 자본에 충성하며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고집하는 생명공학은 국가 부가가치를 빌미로 세금 내는 시민들을 압박한다. 질병의 원인인 오염된 환경은 그대로 두고 그래서 발생되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환경을 더욱 교란하는 연구개발을 위해 거액의 세금을 요구한다. 유전자 정보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자본은 수명연장이라는 미신을 빌미로 여성의 몸을 착취하고 후손의 생명가치를 마음껏 유린한다. 후손의 마지막 생명줄인 생명윤리마저 자본이 주도하는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하려 든다.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은 불평등이 화두다. 자신이 오염시킨 환경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는 자본과 권력이 돈과 패권을 위해 추구하는 생명공학의 치명적인 문제를 근본 차원으로 검토한다. 윤리가 머뭇거릴수록 현기증 나게 앞서나가는 생명공학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후손에 대한 치명적 불평등을 주목한다. 이를 바탕으로 일반 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자 노력했다. 흩어진 글을 모은 『파우스트의 선택』을 통해 누차 강조한바 있지만, 과학기술을 가치중립이라고 여전히 믿는 순박한 시민들에게 생명공학의 위험성과 비윤리성을 인식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은 현재의 환경에서 가장 건강할 후손의 생명을 전면 부정한다. 따라서 생명공학은 시민의 생명운동으로 통제해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도 이미 경고한 바와 같이 생명공학의 21세기로 마감한 인류가 아니길 바란다면, 22세기 한참 이후까지 건강해야 할 생명가치들을 위해, 생명공학이 불필요한 내일을 위해, 자식 키우는 우리가 적극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은 ‘생명공학’ 소리만 들어도 지례 어렵다 생각하며 고개 돌리는 환경운동 활동가들도 읽기를 기대하며 썼다. 그들이 분노해 작금의 생명공학에 대항하는 시민운동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은 시민을 위한 감성적 대항과학 책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수상한 생명공학과 한판 붙다

『수상한 과학』, 전방욱 지음, 풀빛 2004년.


다행스럽게도, 환경운동하는 전문가가 태부족한 우리의 풍토에서 한 생물학자가 생명공학이 수상하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식물생리학을 강의하는 전방욱 교수가 그 주인공으로, 다른 생물학자들이 연구비 지급의 단위가 큰 생명공학에 줄을 대기 위해 애쓰는 상황임에도, ‘이단아’ 소리를 염려하지 않으며 거침없는 생명공학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아 생명공학 문제를 쉬운 용어로 구체적이면서 따끔하게 지적하는 생물학자를 만난 것은 전문가의 참여가 절실한 시민운동가에게 큰 힘이 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더욱 감사한 것은 “생명공학의 위력이 우리의 삶을 점점 더 지배해가고 있는 이때” 생명공학의 상품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효용과 가치만을 역설하는 생명과학자 중의 어느 누구도 그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책 제목을 수상한 과학』으로 붙였다고 저자는 말한 것이다. 패거리문화가 판치는 우리 과학계에 남아 있는 문제점까지 포함하여, 시민운동가들이 파악해야 할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전문가의 식견으로 계속 전파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생명공학의 발전을 위한다면 수혜자이자 지지자요 비판자인 대중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저자는 “대중이 생명공학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는 행위자”라고 주장한다. “생명공학이 농업과 의학에서 상당한 진보를 가져올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자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사회․경제․정치적인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통제되지 않는 과학기술은 위험하다는 믿음으로 ‘대중의 과학 이해’를 위한 글을 썼다고 밝힌다. 하지만 생명공학은 발전해야 할까. 그리고 정치인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는 ‘발전’은 반드시 좋은 것인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2)에서 ‘발전’이라고 번역하게 된 development라는 단어는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세계를 미국화하려는 의도로 사용한 용어라고 주장하던데. 아마도 현직 교수이자 과학자의 한계일지 모른다. 연구비를 많이 받기에 목소리가 큰 생명공학자들을 교정에서 자주 마주치기 때문인지 모른다.


전방욱 교수는 유전자 조작에서 생명복제까지 다양한 관심을 나타낸다. 옥수수를 성스럽게 여기는 멕시코에서 벌어진 유전자 오염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집단 재배지에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자생하는 토종 옥수수까지 조작된 유전자로 오염된 실상이 발견되면서 빚어진 논쟁을 소상하게 소개하며 다국적기업에 종속된 대학의 거래를 고발한다. 유전자 조작 위험성의 과학적 증거를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생태계와 소비자의 건강이 오염된다는 걸 지적하며 유전자 조작은 결국 다국적 기업을 위한 과학기술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유전자 조작 뿐 아니라 생명복제 문제도 살핀다. 인간배아복제가 가진 윤리와 안전문제를 피할 수 있는 성체줄기세포와 탯줄혈액을 소개하고, 장기 이식용 돼지 복제의 현황과 한계, 자본과 얽힌 생명공학계의 어두운 실상을 많은 예를 들며 정리한다. 언론에 각광받는 한 스타 과학자의 비윤리적이자 정치적인 행위를 비판하며 시민 참여를 통한 생명공학계의 반성과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의 회복을 기대한다. 생명공학은 그 자체가 수상하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인류복지’를 앞세우던 생명공학은 최근 경쟁적으로 파란색 장미를 유전자 조작으로 연구한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파란색 장미는 ‘불가능’이라는 꽃말을 가진다. 그런 꽃을 먼저 개발해 시장에 내놓으면 큰돈을 벌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경쟁한다. 인류복지가 아니라 돈 때문이다. 선명성도 일부 작용하겠지만 돈이 먼저다. 자본이 제공하는 연구비는 인류복지를 위해 지불되지 않는다. 돈이 농산물의 분배를 매개하면서 세계는 물론 미국에도 굶주리는 인구가 줄어들지 않는 현상을 보라. 이제껏 한 차례도 식량증산에 연구비를 책정하지 않은 생명공학은 배아와 줄기세포로 인류복지 운운하지만 실상은 부가가치를 노린다. 인간배아를 희생시키는 생명공학자들이 내세우는 부가가치의 크기에 따라 생명공학의 정책이 결정되어도 좋은 것인가.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 판매를 보류하자는 ‘사전예방원칙’보다 과학기술의 ‘윤리적 동등성원칙’을 제안하는 전방욱 교수는 생명공학의 올바른 발전을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은 현재 수준을 반영할 따름이다. 세상의 어떤 과학도 앞으로 개선될 과학에 주도권을 넘기지 않은 경우는 없다. 현재 수준의 과학기술이 볼 때 문제가 없어도 새로 등장한 과학기술로 볼 때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는 사례는 차고 넘치는데, 내일의 기술로 검토할 때 천박하고 위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생명공학이라면, 독단으로 추진되는 발전은 무모하지 않을까.


『수상한 과학』은 국내보다 외국의 사례가 잘 소개돼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아직 국내 실태가 충분히 파악되지 않아 소개하지 못했을 테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작금의 생명공학을 우리 시민들이 제어할 수 있도록 국내 사례도 충분히 조사 분석한 개정판을 기대하면서, 『수상한 과학』을 읽는 독자가 늘어나길 희망한다. 자식 키우는 시민들이 ‘수상한 생명공학’과 한판 붙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우석이 지배한 나라에서 쓴 기자의 반성문

『황우석의 나라』, 이성주, 바다출판사 2006.


황우석 전 교수는 마술과 같은 언어와 주술로 대한민국의 언론도 사회도 정치도 지배했다. 대한민국의 언론은 황우석 전 교수의 말만 듣고 줄기세포 신화를 능동적으로 유포하기 바빴고, 언론의 장단에 세뇌된 시민들을 정치가 또 부추겼다. 황우석 전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치외법원적 지위를 누렸다. 그래서 우리나라 굴지 언론사의 의료전문기자는 자신이 보고 느낀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10년 이상 다녔던 신문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황우석 전 교수의 사기와 날조행각이 밝혀지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시민에게 알리려는 기자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우리 언론의 씁쓸한 자화상인 모양이다.


2005년 11월 22일에 방영된 엠비시 피디수첩이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윤리에 문제를 제기한 이후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몰아쳤고, 분별없던 애국주의가 횡행했다. 이때 우리 젊은 과학자들의 용기어린 인터넷 상의 고발은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를 열리게 이끌었고, 이어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었다. 추문의 한 가운데 있는 황우석 박사는 인사위원회를 거쳐 결국 서울대학교 교수직에서 파면되고 말았지만, 떠들썩했던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은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바꾸었고 이제 황우석 사태는 과거지사가 된 느낌이다. 이제 지방선거 국면이다.


한동안 신문지상을 독점한 황우석 관련 보도는 경마보도를 연상케 수선을 떨었고, 다음날 신문을 펼쳐드는 시민들은 누구의 어떤 발언으로 무슨 반전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만큼 역동적이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우리 사회는 반성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빠들의 소란이 이따금 고개를 드는 가운데 10권에 가깝던 황우석 전 교수의 위인전이 서점에서 일제히 자취를 감춘 요즘, 파편적 사례를 편집해 기상천외한 음모론으로 황우석 사태를 밑도 끝도 없이 꿰맞춘 『덫에 걸린 황우석』(고준환 지음, 도서출판 답게, 2006)이 황우석 전 교수의 복귀를 염원하는 이에 의해 출간됐지만, 황우석 사태는 점점 잠잠해진다. 그래서 걱정이다. 교훈 없이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황우석의 나라』를 쓰기 위해 동아일보사를 사직한 이성주 전 기자는 황우석 사태를 몰고온 큰 이유 중의 하나로 언론의 무뇌아적 행태를 꼬집는다. 그리고 그 사례와 과정을 소상하게 이야기한다. 피디수첩 이후 전개된 긴박했던 상황을 현장감 있게 전하며 언론인임을 포기한 기자의 태도를 개탄하며 반성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국내 언론의 현실과 그 한계를 듣자면 소신을 갖기 어려운 우리 언론의 구조, 소통이 무시되는 의사결정구조의 문제를 확연히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무책임하게 열광하기보다 황우석 전 교수에 관한 보도를 성찰적으로 수행한 언론도 일부 존재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으면 안 된다.


황우석 전 교수의 입에 의존해 열광했던 우리 언론은 줄기세포의 한계를 지적하고 윤리적인 문제를 우려하는 외신을 한결같이 외면했다. 황우석 전 교수의 눈치를 보아야 연구비를 받을 수 있는 과학계는 문제의식을 가져도 침묵했고, 오히려 줄서기 바빴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윤리위원회를 황우석 전 교수 임의로 가동시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떠했던가. 대통령이 직접 찾아와 “과학이 아니라 마술!”이라며 확실한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나. 그 과정 과정마다 황우석 전 교수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 정도 연구라면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내며 많은 토론과 사유가 필요하건만 온갖 경조사를 개근한 황우석 전 교수는 마술처럼 언론과 과학과 국가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성주는 그에 관련한 내용을 전해주며 다시는 그런 사태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황우석의 나라』를 읽으면 작심을 한 한 과학자가 어떻게 사기극을 연출할 수 있는지, 그런 사기극이 통하는 사회의 허술함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황우석 사건은 한국인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묻는 저자는 우리의 과학과 정치와 언론을 비난하려고 책을 쓴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한국의 과학과 정치, 언론이 된 황 교수 사태의 상처를 좋은 보약으로 삼아 더욱 발전하기를 목 빼 고대”하는 저자는 직장을 잃은 관계로 당장 배고프겠지만 자신의 양심과 용기가 언젠가는 제대로 평가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당연히 그의 역할은 평가되어야 한다. 『황우석의 나라』를 계기로 우리의 과학계와 언론계, 그리고 천박한 정치계도 반성하고 돈과 명예와 열광을 쫓는 과학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과학정책을 어떻게 전재해야 하는지 관련자들은 고민해야 마땅할 것이다.


비단 줄기세포 연구에 한정하는 게 아니다. 시민들도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호기심 영역을 넘은 ‘과학’, 손재주의 틀을 벗어난 ‘기술’은 이윤을 요구하는 자본과 패권을 노리는 국가권력의 지원에 의해 ‘과학기술’로 통합되면서 거대해졌고 관련 연구자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게 전문화되었으며 정책결정 과정이 암흑화되었다. 혜택은 자본과 권력이 챙기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나 시민의 몫이고, 후손에 치명적으로 전달된다. 그래서 과학기술 정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시민들에게 먼저 묻는 과학정책을 주문한다. 그 방법론은 많이 연구돼 있다.


『황우석의 나라』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과학이면 다 된다”는 이른바 ‘과학주의’를 반성하자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문가에 의탁된 과학을 시민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까지 안내하지 않는다. 하지만 황우석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사회의 제 문제를 충분히 직시하게 한다. 황우석 사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던 전직 의료전문기자의 반성문인『황우석의 나라』는 우리의 반성문이기도 하다. 반성은 같은 실수의 반복을 막게 해주어 가치가 있다. 『황우석의 나라』를 계기로 과학 사기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고, 아울러 과학기술 분야의 민주주의를 위한 논의가 우리 사회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생명공학은 나쁜 과학이다

『나쁜 과학』, 매완 호 지음, 당대 2005.


영국의 한 개방대학 교수인 매완 호는 전공이 생명공학이다. 문학에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 있듯, 과학에도 좋고 나쁜 과학이 있는데, 생명공학이라는 과학은 나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구체적인 과학적 논리를 제기하면서 악몽과 같다고 고개를 흔든다. 생물학을 전공했고 유전학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도 생명공학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끼리 유통하는 생명공학의 지식과 논리를 상당 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최근 논의되는 주제를 확실하게 알지 못해 생명공학자들과 벌이는 논쟁에서 목소리를 줄여야 할 경우가 많다. 『나쁜 과학』은 그런 내게 큰 힘이 되었다.


1970년대 중반 학부에서 유전학을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생명공학의 문제를 제기할 때 불안했던 사항, 생명공학 기술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그 치명적인 문제점은 사실 상식에 의존했지만, 『나쁜 과학』은 그 과학적 근거를 알려준다. 유전자 조작에 사용하는 플라스미드라는 유전자는 무엇이고 어떤 문제가 있고 그 문제는 왜 위험한가. 수평이동이다. 어떤 생물이 가지고 있는 특정 유전자를 플라스미드 유전자 사이에 끼워 넣고, 그 플라스미드를 다른 생물종의 유전자에 통째로 넣는 기술이 유전자 조작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인슐린을 생산하게 하는 유전자를 어떤 플라스미드의 유전자 사이에 끼워 넣고, 그 유전자가 있는 플라스미드를 대장균에 성공적으로 넣는다면 대장균은 사람의 인슐린을 생산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유전자 조작이 그런 기술이다. 그런데 사람의 인슐린이 들어간 플라스미드가 대장균에서 빠져나가 다른 생물에 전이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조작된 유전자는 생태계에서 그렇게 수평이동할 수 있다. 중금속이나 방사능을 잘 제거하는 유전자가 토양미생물을 타고 식품에 전달돼 방금 태어난 아기의 몸에서 반응한다면 그 사실을 뒤늦게 안 부모는 소스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완 호는 그와 같은 가능성을 『나쁜 과학』에서 과학적으로 제기한다.


유전자 조작된 농산물이라도 먹으면 문제없다고 생명공학자는 말한다.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장에서 소화된 유전자가 분해되어 흡수되므로 괜찮다고 우리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한 과학자는 주장하는데, 매완 호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쥐의 장을 통과한 조작된 유전자가 혈액과 혈구에서 발견되고, 임신한 쥐에서 전달돼 결국 유전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정 제초제에 내성을 가진 콩이나 옥수수를 먹은 여성이 아기를 낳았을 때, 그 아기까지 제초제에 저항성을 가지면 우리는 좋아해야 할까.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파란 장미를 선물로 주어 애인과 드디어 결혼했는데, 몽고반점이 파란 아기가 태어난다면 우린 과학기술의 승리를 더불어 만끽해야 하는 것일까. 핵무기나 방사성 핵폐기물보다 유전자를 조작하는 생명공학이 훨씬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매완 호는 “이 치명적인 유전자의 노심이 용해되기 전에 우리가 행동한다면, 아직 희망이 악몽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시간이 있을 것”으로 희망한다. 그러자면 그 사실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유전자가 바뀌면 표현형도 반드시 바뀔까.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은 머리 좋게 만드는 유전자, 롱다리 유전자, 치매유전자, 유방암유전자도 찾아낸다고 광고한다. 미국의 어떤 엄마는 유방암유전자가 있다는 벤처기업의 진단에 놀라 4살 먹은 아이의 유방을 미리 떼어냈다던데, 그 부모와 그 의사는 유전자 결정론에 속았다. 유전자는 유전자와 유전자 관계,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 나이, 건강들에 따라 발현이 다양하고, 유방암에 관련된 유전자는 몇 개인지, 어떤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더구나 밝혀졌다 주장하는 그 유방암유전자는 정상인에게 99퍼센트 발견된다. 그 유방암유전자를 가진 99퍼센트의 여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정상이라는 것이다. 『나쁜 과학』은 그 유전자 결정론의 문제와 그 폐해를 소상히 전한다.


유전자 조작은 줄기세포와 관련이 밀접하다. 줄기세포로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려면 먼저 줄기세포의 유전자를 조작해야 한다. 황우석 전 교수가 제 업적으로 치장한 이른바 ‘맞춤형 줄기세포’는 유전자 조작이 없으면 장담하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환자의 유전자는 이미 병원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병원성 부위를 유전자 조작으로 치환해야 하는 것이다. 황우석 전 교수는 돼지장기를 사람에게 넣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하는 불행을 막을 것으로 장담했지만 매완 호의 주장에 따르면 어림도 없다. 돼지의 유전자 속에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돼지바이러스가 장기를 타고 사람에게 전달되면 그 환자 뿐 아니라 식구와 이웃에게 돼지바이러스가 에이즈바이러스 이상 무섭게 창궐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돼지의 유전자 속에는 진화 과정에서 들어왔다 융합된 바이러스 유전가가 수천 가지 정도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 그 중 단 한 가지의 유전자가 인체에 들어와도 에이즈나 조류독감 이상의 문제를 일으킬 텐데, 돼지의 장기를 사람에 이식한다니, 『나쁜 과학』을 읽으면 생명공학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므로 거액을 동원해 국가부가가치를 높이겠다는 정부의 과장된 호언을 어처구니없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나쁜 과학을 거부하자”는 매완 호는 “유전공학 저 너머의 지속가능한 즐거운 미래를 선택하자”고 제안하며 책을 맺는다. 매완 호는 유전자 조작을 중심으로 악몽이 될 생명공학을 경고하지만 생명복제와 줄기세포로 우리를 호도하는 생명공학은 우리의 내일을 지우려 한다. 악몽마저 꿀 수 없는 내일을 예고하는 셈이다. 생명공학은 나쁜 과학이다. 나쁜 과학은 반드시 몰아내어야 한다. 생명공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낸 결론이 그렇다.



그 밖의 책들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 이충웅 지음, 이제이북스 2005.

비판과 의심이 무시되고 토론이 없이 오직 열광을 부추기며 진행하는 과학기술의 문제를 과학사회학자의 눈으로 차분하게 지적한다.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소, 인간 배아줄기세포, 성체줄기세포들과 관련된 생명공학 연구 분야와 더불어 최근 신문지상에 성공신화와 환호 속에 오르내리는 과학기술이 과연 문제가 없는지 성찰적으로 접근한다.


『녹색의 상상력』, 박병상 지음, 달팽이 2006.

현기증 나게 변화하는 생명공학의 위험성과 비윤리성을 그때그때 고발한 기고문을 책의 전반부에, 환경에 관해 문제제기한 글을 후반부에 엮은 산문집으로, 과학기술 만능주의가 빚는 문제를 생태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전반부에서 『파우스트의 선택』 개정판 이후에 발생한 생명공학의 문제점을, 머리말에 황우석 사태 전후의 소회를 이야기한다.


『바이오테크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전영택 외 옮김, 민음사 1999.

미국의 저명한 문명비평가가 생명공학의 여러 가지 문제를 화려하게 밝히는 책으로, 이런 식으로 21세기를 생명공학으로 지배한다면 22세기 이후의 후손은 살아갈 수 있는가 묻는다. 수많은 자료와 예를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생명공학 연구와 개발 뒤에 얽힌 윤리적 문제,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소개해준다.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반다나 시바 지음, 한재각 외 번역, 당대 2000.

인도의 여성생태학자인 저자가 자원 빈국이지만 기술 부국에서 다국적기업을 동원해 기술 빈국이지만 자원 부국의 자연과 지식을 배타적인 특허로 약탈하는 현장을 고발한다. 다국적기업이 속임수와 협잡으로 토착민의 지식을 사유화하고, 푼돈으로 가난한 나라의 자연을 착취하는 행태를 들추어내면서 인도의 사례도 실감나게 소개한다.


『위험한 미래』, 권영근 편, 당대 2000.

주로 유전자 조작과 관련한 문제를 여러 국내 저자와 국제 사례를 번역해 소개한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안정성을 두고 시민단체와 국가가 벌인 논쟁을 살펴보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 재배현황과 유전자 조작이 식량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당시에 활발했던 관련 시민운동도 소상하게 이야기한다.


『부자의 유전자 가난한 자의 유전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송정화 옮김, 한국경제신문 2003.

구소련이 무너진 뒤, 역사는 가장 안정적인 체제인 자유민주주의로 수렴할 것으로 진단해 국제적인 논의를 촉발시킨 저자는 부자와 가난한 자에게 차별과 위화감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생명공학이 자유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를 퇴색하게 한다고 일갈하며 그 구체적인 사례와 논거를 제시한다.


『생명공학 시대의 법과 윤리』, 박은정 지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법철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우리 사회에 새롭게 던져진 생명공학의 법적 윤리적인 문제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학술적으로 조명하며 분석한다. 생명윤리가 무엇이고 생명윤리를 왜 법으로 통제해야 하는지,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쟁점과 사례를 소개하며 논의한다. 외국이 입법례도 친절하게 소개한다.(2006년 5월 22일, 가톨릭 서울교구, 생명위원회 발제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6. 2. 14. 00:51
 

요즘 장안의 화재는 단연 하인스 워드다. 미국의 한 스포츠 전문지는 ‘터치다운’도 거의 모르던 한국인들이 하인스 워드에 열광하고 있다고 타전하고, 우리 언론은 신이 나서 받아 적는다. 생소하다 최근 알게 된 용어가 어찌 터치다운뿐이랴. 슈퍼볼이 큰 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차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알지 못할 ‘테라토마’를 비롯하여, ‘배반포’, ‘핑거프린팅’도 잘 알고, 아리송했던 배아줄기세포와 성체줄기세포를 이젠 어느 정도 구별할 줄 안다.


하인스 워드가 슈퍼볼 엠브이피를 차지한 이후, 엘피지에이의 박세리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 우승하자 우리 사회에 골프 열풍이 불었듯, 곧 미식축구 열풍이 이어질까. 아마 그럴 것 같지 않다. 터치다운의 뜻을 겨우 알았다고 박진감 넘치는 미식축구의 복잡한 규칙과 묘미를 체험할 기회가 갑자기 열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곧 방한할 하인스 워드에서 훈장과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겠다며 호들갑떨지만, 정작 우리는 아프리카 계 흑인의 피가 반 섞인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국 피 운운하기에 앞서, 이 땅에 살고 있는 혼혈 시민에 대한 대우는 어떤지 반성해야 한다. 미국인 혼혈은 그나마 낫다. 우리가 외면하는 일을 떠맡는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에 대한 대우는 하인스 워드 앞에서 부끄럽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인스 워드의 방한을 계기로 혼혈인, 특히 비백인 혼혈에 대한 편견이 숙으러들지 두고 볼 일이고, 작년 말부터 터진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테라토마와 배반포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생명공학과 배아줄기세포와 관련한 상식이 풍부해졌는데,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은 그 만큼 성숙해질지 궁금해진다. 허술한 생명윤리가 촉발한 이번 황우석 사태를 거울삼아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 의식은 재발방지를 담보할 수준에 이르렀을까. 실체도 없는 부가가치와 근거가 부실한 실용주의적 편의로 위장된 애드벌룬을 위해, 여성의 몸과, 그 몸에서 적출한 난자와, 난자를 찢고 짜고 전기로 충격을 가해 유도한 배아의 생명은 이제 더는 버림받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까.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재개해달라며 분신한 시민을 열사로 추켜세우는 촛불집회가 서울 복판에서 계속되는 우리 사회에서, 적어도 일각은 아직 황우석 사태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건의 추측 기사가 검찰 쪽에서 오락가락 새나오고, 기사를 둘러싼 이른바 ‘황빠’는 여전히 인터넷 공간을 어지럽힌다. 황빠를 지지하는 ‘황빠빠’까지 등장했다 한다. ‘원천기술론’을 넘어 밑도 끝도 없는 수많은 ‘음모론’이 새롭게 가지치면서 불거져나오는 가운데, 불교계 일부 인사들은 백억 원이 넘는 기금을 마련해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핵이식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선포한다. 연구 재개를 촉구하기 위핸 삼보일배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는데, 마른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삼보일배마저 탐욕과 무지와 분노에 저당된 꼴이다.




분명 우리 사회의 생명윤리 의식은 전에 비해 나아졌다. 적어도 98대2로 비참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황우석 교수가 연구에 사용한 난자의 적출에 따른 윤리 문제를 탐사 취재한 MBC PD수첩 방영 이틀 후, 긴급 편성한 MBC 100분토론에서, 시청자들의 의견을 집계한 사회자는 다소 충격적인 수치를 귀띔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지지하는 시청자가 98퍼센트인데 반대하는 쪽은 2퍼센트에 불과하다고. 그 후 인터넷의 젊은 과학도,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 감사원, 그리고 검찰을 통해 연이어 드러나는 추악한 실태를 파악하고 많은 시민들이 고개를 돌린 지금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문제를 느끼는 시민들의 비율이 훨씬 늘었을 것이다. 물론 체세포 핵이식 방식의 배아줄기세포를 찬성한다고 해서 생명윤리 의식이 낮거나 결여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체세포 핵이식 방식의 배아줄기세포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 사회는 날조와 거짓으로 점철된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미련을 여태 버리지 못할까. 불치병과 난치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국가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일 것으로 확고하게 믿었던 기대를 차마 내버릴 수 없기 때문일까. 황우석 교수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내용이 보도되기 무섭게 늘어나는 촛불집회의 대오는 말할 것도 없고, 황우석 교수가 아니라도 황우석 교수의 연구를 이어받을 젊은 연구자가 많다는 것에 안도하는 시민들도 배아줄기세포와 관련되는 생명윤리의 문제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난자 추출과 연구 과정에 얽힌 비윤리성보다 논문의 날조 여부와 그에 둘러싼 연구자의 거짓말, 편중 지원된 연구비의 사용처에 촉각을 집중하는데 머무는 경향이 크다. 배아줄기세포가 진정 효용성이 있는지,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


왜 요즘의 우리 사회는 점점 가벼워지는 것일까.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의 주장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으려는 현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간에 쫓겨 사는 시민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내는 인터넷과 관계있지 않을까. 요즘 시민들은 책과 잡지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아 정리하면서 내용을 성찰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몇 가지 키워드만 넣으면 정리된 자료를 제공하는 인터넷을 뒤진다. 그런데 시각적 자극으로 유인하는 인터넷의 자료들은 어떤 의도에 의해 편집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편집된 정보를 통해 편익을 은근히 추구하거나 그럴싸하게 포장해 드러낸다. 깊이 있게 논의하자는 텍스트는 대개 작은 활자가 빼곡할 뿐 아니라 내용도 길어 시간을 쪼개야 하는 시민들은 외면하고 만다. 사유를 생략한 채, 완성된 정보를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내려는 시민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와 보고 싶은 내용만 취사선택하는데 익숙해지지 않았을까.


자본에 종속된 언론도 인터넷과 다르지 않다. 젊은 층이 구독을 외면하는 종이신문은 인터넷으로 활로를 찾고, 클릭 수가 광고에 직결되는 상황에서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아야 하는 기사는 점차 설자리를 잃는다. 빠르게 움직이거나 자극적인 화면에 길들어진 젊은 층에 영합하는 인터넷 신문은 문제의 본질을 차분하게 취재해 심층 보도하기보다 드러난 결과를 선정적으로 편집하기 일쑤고, 그런 보도에 세뇌된 독자들은 문제의 시작과 과정을 파악하자는 주장에 관심을 줄 시간도 용의도 없다. 황우석 교수와 관련된 보도가 널뛸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현상은 무엇을 웅변하나.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 배아줄기세포의 치명적인 비윤리성과 허약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생명공학의 실체는 요약돼 나열된 결과보다 과정을 성찰적으로 사유할 때 비로소 다가온다. 사유를 잃은 세대의 천박성은 정보를 독점하는 세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한 원로 윤리학자는 우리나라의 윤리가 무너졌다고 개탄한다.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존댓말이 있긴 있지만 버릇일 따름이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선행도 찾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빈 노약자보호석을 끝까지 앉지 않는 자양강장 드링크 박카스의 광고가 뇌리에 강하게 작용했는지, 노인 앞에서 노약자보호석을 고수하는 젊은이들은 요즘 보기 어렵다. 존댓말이 윤리와 상관없는지 그 방면에 일가견이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윤리학자는 4가지 사회 현상을 증거로 들며 우리나라의 생명윤리 수준이 매우 천박하다고 진단한다. 벌레가 죽을까봐 뜨거운 물을 한꺼번에 수체구멍에 쏟지 않았던 조상의 후예가 돈으로 친절과 편의와 배려까지 사고팔게 되면서 생명윤리도 버림받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이삿짐 날라주는 친구에게 고마워하는 시대를 이삿짐센터가 접수한 요즘, 산후조리는 미시족을 지향하는 친정어머니의 몫이 아니다. 신생아와 산모를 산후조리원에 맡기는 요즘, 시골은 물론 도시에서조차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돈이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생명윤리 의식이 낮다고 주장하는 원로 윤리학자는 분별없는 낙태, 자연분만 건수에 가까운 제왕절개, 처참하게 낮은 모유수유율, 그리고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불임클리닉을 그 예로 든다. 낙태와 제왕절개와 모유수유와 불임클리닉에 의탁하려면 물론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애초 돈벌이를 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그 기술 덕분에 많은 생명이 태어나 건강하게 자라면서, 불행했을지 모를 가정에 행복을 보장하지 않던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기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터무니없이 심하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태어나 보살펴지는 생명에 비해 지워버리는 생명이 더 많고, 통증이 싫은 산모나 의료수가를 의식하는 의사가 소파수술을 선호하고, 몸매관리를 먼저 생각하는 산모와 분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산부인과 병의원에 의해 분유소비가 촉진되고, 출산능력이 있음에도 대리모 자궁으로 아이를 받으려하는 일부 고소득 계층이 벌이는 행태는 생명윤리의 천박성을 웅변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다. 그런 기술은 누가 왜 우리나라에 도입했을까. 기술을 개발한 국가에서 거센 반발이 쏟아졌던 그와 같은 기술은 사회적인 숱한 논쟁을 거치며 최대한 생명윤리에 합당하게 통제될 수 있었지만, 의료자본이 경쟁적으로 도입한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부작용에 관한 세심하고 친절한 설명은 물론, 생명윤리에 부합하는 까다로운 절차마저 생략한 채, 실용적 혜택만 강조되지 않았던가.


자연스럽던 출산에 기술이 개입하면서 우리의 전통 생명윤리 의식은 희석되었다.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생명윤리는 천박해진다. 원로 윤리학자가 개탄할 정도로 생명윤리 의식이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배아줄기세포 연구 수준이 가히 세계적인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불임클리닉은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수정과 착상에 필요한 수보다 훨씬 많은 난자를 관행적으로 적출한다. 사회적 논쟁을 거치지 않은 만큼 감시의 눈초리가 없고, 실용주의를 당연시하는 풍토는 수정 후 남아 냉동해둔 수정란을 연구에 활용하려는데 별 다른 저항감을 부가하지 않는다. 선명성이 남다른 연구자는 유혹을 자제하지 못할 것이다. 미즈메디와 마리아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수정란 배아줄기세포를 거푸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냉동 수정란의 부모에게 사전양해를 받았을지 모르나, 사회적 논쟁을 통한 생명윤리의 각성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수정란의 부모로서 아기를 낳아준 의사의 우월적 지위에 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의사는 애국주의로 무장하지 않았던가. 그런 분위기가 만연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2천개가 넘는 난자가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채취돼 황우석 교수의 체세포 핵이식 방법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손쉽게 동원되었다.




햇살이 강렬해 살인을 저지른,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주인공처럼, 사소한 이해관계에 따라 친구나 동료도 선뜻 살해하는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는 요즘, 실물에 가까운 그래픽의 인터넷 게임은 죽고 죽이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남을 많이 죽여야 점수가 높은 게임에서 내가 죽어도 별게 아니다. 약이 오르면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다. 가재나 햄스터 뽑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은 5백 원에 불과한 병아리를 옥상에서 던지는 놀이가 재미있다. 공장식 가축사육 시스템에서 대량생산하는 ‘숨 쉬는 햄버거’와 우유와 계란은 이미 생명과 거리가 멀다. 항생제 듬뿍 들어간 유전자조작 사료와 바꾼 생산품에 불과하다. 이렇듯 생명에 대한 배려는 물론 아쉬움도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독일 철학자 울리히 벡은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한 뒤 “과학적 성찰이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위험하다”고 통찰했다. 사회적 성찰은 인문과 사회적 사유에서 비롯될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과학기술을 거의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사회학 분야 전공자는 승진에 목맨 정책결정자로 일하고, 인문사회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 없이 연구에 몰두한 과학기술자는 실용적 가치를 앞세워 정책결정자에게 연구비를 신청한다. 실용적 가치가 높은 연구일수록 연구비는 크고, 연구비를 크게 지원할수록 정책결정자는 지위가 상승한다. 내세운 실용주의가 그럴싸하면 승진의 명분도 그럴싸하다. 약속이 화려한 생명공학이 특히 그렇다. 실체가 분명치 않아도 내세우는 실용성은 무궁무진하고, 성공할 때 보장될 부가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는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기술자의 실용적 계획에 거액을 지원하고, 위험성은 증폭된다.


예를 들어보자. 치매를 치료하겠다며 달라는 연구비는 가히 천문학적인데 연구행위는 윤리로 포장된다. 치매 앓는 부모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시민들을 위한 연구가 아닌가. 성공은 연구비를 훨씬 초월하는 부가가치를 약속하는데, 윤리와 돈을 막무가내로 약속하는 치매 연구는 해가 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치매는 치료해야 할 질병일까. 나이 들어 발생하는 과정은 아닐까. 관절염이 왜 발생할까. 관절염 유전자가 있기 때문일까. 관절염 유전자의 발현을 막으면 관절염은 발생하지 않을까.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내는 거액의 연구비는 효도 명분으로 배려된다. 그런데 혹시, 나이 들어 관절염이 생기자 그 유전자가 발현한 건 아닐까. 그런 궁금증은 연구비를 수령하는데 중요하지 않다.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내던 아니던, 중요한 것은 연구비다. 관절염 유전자를 찾아낸 다음에는 치료방법을 찾아 연구비는 추가로 지원될 것이다. 실용적 명분을 제시하는 한, 일단 지원된 연구비는 계속 지급될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 명분은 얼마든지 재생산되고, 연구자에게 들어가는 연구비는 확대 재생산된다. 블랙홀이다. 과학기술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도 덕분에 승승장구하고 과학기술이 세련되게 편집한 애드벌룬의 실용화를 목매 기다리다 지친 소비자들은 연구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혜택을 여전히 기대하며 세금을 더 갹출해야 마땅할 것이다.


나이 들면 치매나 관절염도 생기고, 암도 발생한다. 줄기세포로 노화가 사라지면 세상은 행복해질까. 조금만 생각해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세상이 도래하면 안 된다. 낙관이 아니라 비관이다. 거리를 북적이는 젊은 오빠와 젊은 누나들이 진짜 젊은이들과 취업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이성을 차지하려고 얼굴을 붉히며 멱살 잡는 세상이라면 행복과 거리가 멀 것이다. 젊은 오빠와 누나는 별개로 하고, 노인에게 발생하는 퇴행성 질환에 큰돈들일 효자는 흔치 않을 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도 불치병과 난치병에서 예외일 수 없다. 젊은이에게 발생되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명공학을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인문과 사회적으로 조금만 깊게 사유해보면 그렇지 않다는데 동의하게 되리라 믿는다. 척수환자를 양산하는 교통사고나 작업장 사고는 안전시설과 의식을 통해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 젊은이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한 만성질환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마실 물, 대기, 먹을거리의 오염을 차단하면 불치병과 난치병은 크게 감소한다. 기존 환자들의 경우, 불편을 최소화하는 시설을 갖춘 사회에서 차별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줄기세포가 불필요한 세상인 셈이다.




천성산을 종축으로 길게 뚫지 않으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전철의 운행에 지장을 받고, 수십조 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터널공사를 해야 부가가치를 챙길 수 있는 세력이 편집한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해야 치부할 수 있는 세력은 갯벌의 가치를 왜곡하고 주민들에게 개발에 대한 환상을 주입한다. 어긋난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기며 중저준위 핵폐기장 유치에 혈안이 된다. 거기에 실용주의에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언론이 거들면서 현혹된 시민들은 안티지율 카페를 운영하고 새만금 간척사업과 핵폐기장을 찬성하며 황빠와 황빠빠를 조직해 촛불의 의미를 주말마다 퇴색시킨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천박하게 공격하면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 발전, 다시 말해 실용주의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국주의로 둔갑한 부가가치에 눈이 먼다. 상대를 설득시킬만한 자신의 논리를 개발하지 못하는 대신, 상대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볼 뿐이다.


엄연히 살아 있는 가로수를 파고 깎아 페인트를 칠한 목포시 공무원은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차피 베어내 죽일 나무가 아닌가. 도시 미관을 위해 아름답게 조각한 것인데 칭찬은커녕 손가락질하다니, 억울했을지 모른다.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 연구와 같은 숭고한 목적에 사용될 난자를 기증해달라는 민간재단이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설립되는 세상에서, 한 광고는 소비를 부추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하고. 산업체에 동원될 인적자원을 위해 교육당국이 존재하는 마당에 대학은 이미 벤처기업 양성소인데, 교육을 통해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지 사유하기 어렵다. 숭고하다는 의미를 특정 목적에 따라 규정되어도 좋은지 성찰하기 어렵다. 자본이 편집한 광고가 책보다 인터넷을 즐겨 보는 소비자의 인생을 충고할 따름이다.


인생을 즐기라고 자본이 유혹하는 가운데, 자본과 한통속인 정부는 여성들에게 성화한다. 이런 추세라면 생산인구가 위축되니 출산율을 높이라고. 이젠 여성들이 아기 낳는 기계가 될 판이다. 결혼 1년 내에 첫 임신을 하고, 2명의 아이를 30세가 되기 전에 낳으라면서 ‘123’을 주창하는데, 그에 대항해 ‘1234’가 나왔다. 정부의 제안을 따르면 40세 이전에 파산한다는 딴지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와 대량폐기로 자원부족은 물론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게 파괴된 마당에 불치병과 난치병은 전에 없이 증가한다. 영양 개선에 이은 개인위생과 개선되는 의료기술이 몸과 마음이 아픈 수명을 획기적으로 연장하는 가운데 혹사당하는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가 실직사회를 냉소적으로 희화한다. 최면에 가까운 명분으로 여성의 몸을 착취해 빼낸 난자를 찢고, 꾹 누르고, 핵 빼내 엉뚱한 세포의 핵을 밀어 넣고, 고압의 전기로 충격을 주어 접시에서 배양하면 생명을 구해낼 뿐 아니라 덕분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발상은 실용주의 시대의 천박한 환상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에 인문적 소양이 위축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많다. 실용주의에 의해 인문적 가치가 무시하면서 환경과 생태계는 물론, 사회적 약자와 후손의 생명가치도 천대받는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으면 강퍅해지는 법, 자원이 위축되고 환경이 오염된 세상에서 양극화는 피할 수 없을 텐데, 곧 늙어버릴 자신은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사회 전반의 성찰이 필요한데, 내일의 생명을 건강하게 배려할 인문적 소양은 어떻게 배양될 수 있을까. 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환경과 생태계에 관한 책을 두루 읽고 사유와 논의를 통해 성숙해지면 좋으련만 인터넷에 길든 시민들까지 책과 사유에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인문사회와 이공계를 고등학교 2학년부터 분리하는 교육제도를 개선하면 좋겠다.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상식을 두루 섭렵하는 시민, 즉 소비자들이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에 의해 밀실에서 추진되는 과학기술 정책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관심 갖게 될지 모른다. 이공계 전공자는 인문사회를, 인문사회 전공자는 과학기술을 들여다보면서 인문사회와 이공으로 나누어지는 두 문화의 벽을 낮춰 의사소통이 원활할 수 있도록 대학교육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두 문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의 활발한 토론과 합의로 과학기술의 정책이 공개적으로 입안되고 실천된다면 울리히 벡이 걱정하는 위험사회는 쉽게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의료보험이 환자를 낫게 하지 않는다. 의사가 환자를 고쳐주는 건 더욱 아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치유는 생명체가 스스로 한다.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고, 보험은 제반 비용을 지원할 따름이다. 의료보험보다, 의사보다, 환자가 발생하지 않는 환경을 위해 사회가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황우석 사태는 생명에 대한 인문과 사회적 사유와 성찰이 부족한 분위기에서 배양될 수 있었다. 과유불급이었는지 언론에 제보한 동료 연구자에 이은 젊은 과학자들이 자칫 은폐될 수 있었던 문제를 지적하기에 이르렀고, 마지못해서인지 기성 과학기술자와 검찰에서 제기된 문제의 추악한 실체를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우리 사회는 반성과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에 나설 것인데, 제2 황우석과 황빠는 재발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단정하며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선 배아줄기세포기술을 더욱 육성해야 한다고 외치는 분위기에서, 생명공학 자체의 문제를 근본에서 제기하는 목소리를 지금처럼 외면하고 억압해도 위험사회가 우리를 피해갈까.


황우석 사태의 추악성이 만천하에 속속 드러나면서 백가쟁명이 펼쳐지고 듣기 민망한 비하인드스토리가 새삼 꼬리를 물지만, 정작 반성해야 하는 사람들은 입을 꽉 다물고 있다. 과학자 사회와 정부, 언론과 정치권, 특히 “과학이 아니라 마술”이라며 황우석 교수를 추켜세우며 “확실히 밀어주겠다!”던 청와대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반성 없이 재발 방지는 난망이다. 제도가 완벽하게 정비된들 반성과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데 황우석 사태로 드러난 문제를 어찌 통제할 수 있으랴. 황우석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의 반성과 그에 상응하는 후속 처리가 납득할 수 있게 조치되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불치병과 난치병의 대상자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시민들도 자신과 이웃과 후손과 생태계의 생명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상 없이 태어나지 못한 우리는 후손 없이 생명을 지속할 수 없으며 생태계의 도움 없이 온전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실용 대상일 수 없다. 작든 크든, 젊었든 늙었든, 부가가치를 위한 재료로 둔갑할 수 없다. 자연스런 생태계의 흐름을 저해하는 탐욕은 생태계의 오랜 균형을 허물어 결국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게 닥칠 위험을 막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욕심과 기만으로 점철돼 나타난 황우석 사태는 이제 교훈으로 남아야 한다. 자연스러울 때 가장 건강한 생태계 속의 생명들을 위해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한 실용주의 생명론을 함께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환경과생명, 200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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