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3. 1. 22. 16:27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

 

날씨가 모처럼 갰다. 파란 하늘에 도드라지는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는 겨울을 더욱 시리게 하는데, 북극해가 얼지 않자 삼한사온이 실종됐다. 제트기류에 막히던 북극권의 한파가 일찌감치 우리나라와 같은 중위도 국가로 내려간 몰아쳤고, 감기환자들이 순간 급증했다. 지구온난화의 여파는 그렇듯 사람들에게 예기치 않은 건강 이상을 불러들이는데, 자연의 생물들은 안녕할 수 있을까.


겨울잠 자는 동물은 산록과 들판의 열매로 체지방을 충분히 늘려야 하는데, 지난 가을에 유난히 비가 많았다. 아니 올해만 아니라 근 20년 가까이 우리 가을은 이상스레 덥고 축축했다. 체지방이 충분치 못한 동물은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날 수 있으니 봄을 건강하게 맞지 못할 것이다. 겨울잠 자지 않는 동물은 먹이를 찾아야하는데, 혹독한 겨울은 시련을 안긴다. 눈 덮인 산록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고 민가를 기웃거리는 멧돼지는 충동하는 소방대원의 총구를 조심해야 한다.


대기에 농축되는 온실가스로 빚는 지구온난화는 냉난방 조절되는 실내공간으로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이웃에게 전에 없던 혼란을 강요하지만, 가을이 지났으니 온대지방은 겨울을 맞는다. 23.5도 기운 지구가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1년에 태양을 한 차례 공전하는 한, 태양광의 각도가 변하기 때문이다. 삼한사온이 실종되고 한파가 일찍 찾아오더라도 가을보다 겨울이 춥고 겨울이 지나면 틀림없이 봄은 찾아온다. 겨울을 맞은 자연의 이웃들은 봄을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겨울은 고요하지만 휴식의 계절로 그치는 건 아니다. 휴식하며 내일을 준비한다. 앙상한 가지는 무성했던 나뭇잎을 떨어뜨린 자리에 잎눈을 마련하고 개구리는 봄에 낳을 알을 몸속에서 키운다. 도시 공무원들은 가로수마다 짚을 뒤집어씌웠지만 나방은 줄기에 알을 낳았다. 내년 봄 잎눈이 펼쳐지면 애벌레들이 알을 깨고 나올 것이다. 가는 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나무껍질 속의 나방 알을 용케 꺼내 먹는 쇠딱따구리도 봄을 준비한다. 내년 봄 일가를 이뤄야 한다.


이 겨울, 산록의 생명들도 지구온난화로 어수선해진 자연에서 나름대로 봄을 준비하는데, 도시 한복판을 장식하는 나무들은 새로운 시련을 겪는다. 아니 강요당한다. 지푸라기로 줄기와 가지가 휘감아진 가로수와 근린공원의 조경수는 가로등과 자동차의 불빛에서 사시사철 자유롭지 못하지만, 대형 건물과 상가 앞의 나무들은 형형색색의 꼬마전구를 이맘때 휘감아야 한다. 짧은 해가 기우면 광채를 발해야 한다. 수많은 전구는 거치대가 된 나무의 휴식을 방해한다. 대기오염과 빛으로 밤낮이 없는 스트레스를 받는 나무들은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나무에 기대는 생물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생물은 휴식 없이 건강할 수 없다. 하루의 적어도 3분의1을 쉬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피하지 못하는 사람도 건강을 잃는다. 왕성하게 분열하던 세포도 분열이 끝나면 쉰다. 학자들은 휴지기라고 이름 붙였지만, 세포가 쉬는 건 분명히 아니다. 필요한 물질을 생성하면서 새로운 분열을 준비한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것 같은 아기들의 몸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세포가 있기에 무럭무럭 성장한다. 사춘기가 지나 성장이 멈추었더라도 항상 새로운 물질로 채워놓는 세포는 쉬면서 일한다. 휴식 없이 분열만 계속하는 세포는 암이다. 암은 그 생명체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가을걷이를 마친 들판은 조용해도 멈춘 건 아니다. 나락이 떨어진 볏단은 따뜻한 햇살을 받는 물속에서 썩으며 땅을 기름지게 하고, 겨울철새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한다. 짚을 걷어먹는 철새들은 배설물을 내놓아 새봄에 다시 내릴 벼이삭의 뿌리를 튼실하게 만들 텐데, 기계와 화학비료가 들판을 점령한 요즘은 아니다. 나락이 털어진 볏짚을 비닐로 둘둘 말아 커다란 목장으로 팔아치우면서 들판은 영양과 휴식을 잃었다. 볏짚을 먹은 가축의 배설물은 들판으로 오지 않는다. 정화조에서 처리되거나 시내로 마구 흘러들어 하천 생태계를 망쳐놓는다.


농기계로 다져진 농토는 개구리의 겨울잠을 방해하니 농약을 간신히 이긴 개구리는 봄을 준비하지 못하고, 개구리가 사라진 들판에 살충제가 없으면 방제는 불가능하다. 농약이 흥건한 들판에 뱀이나 쥐가 다가오기 못하니 봄을 준비해야 하는 매는 파란 하늘을 선회하지 않고, 들판은 적막해지고 말았다. 냉난방이 자동 조절되는 학원에서 겨울을 지내는 아이들은 달라진 학원 교재로 봄을 알고, 아기 울음소리는 도시나 농촌이나 냉난방 조절되는 산후조리원에 갇히고 말았다.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


     겨울은 추워야 겨울답다. 간장독과 아이들은 겨울에 내놔도 얼지 않는다고 했다. 겨울을 지나치게 덥게 만들면서 휴식을 잃은 사람들은 지구를 거침없이 데웠고, 겨울철 빙원을 잃은 북극해는 그 냉기를 중위도 지방으로 사정없이 내려 보낸다. 그 때문에 북극곰은 터전을 잃고 멸종을 눈앞에 두었는데, 과학기술을 앞세우는 사람은 아직 멀쩡하다. 사람 역시 자연에 기댈 때 건강한 노릇인데, 언제까지 안녕할 수 있을까. 봄을 준비하지 못하는 겨울은 내일의 건강을 위협할 텐데. (야곱의우물, 20132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11. 8. 14:40

   내일을 위한 오늘의 휴식

 

갈무리하는 가을이다. 파란 하늘 아래 연한 갈색이 도드라진 감 한 송이는 가을이 어느새 깊어졌다는 걸 알린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 부지런히 탄소동화작용을 한 생명들은 휴식에 들어갈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단풍이 지고 으악새 슬피 울겠지.


가을은 차분하지만 때로 쓸쓸하다. 바빴던 일상을 정리하니 안정을 찾아 그런가. 불현 듯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싶다. 관객과 박수갈채가 사라진 극장에서 허전해진 연출가는 어디론가 급히 떠나고 싶을지 모른다. 을씨년스러운 무대는 말끔히 치워지고 곧 새 다른 배우와 연출가를 맞아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겠지. 무대를 벗어난 배우도 다음 연극을 준비하기 전에 충전이 필요할 것 같다.


파란 하늘에 황조롱이 선회하고 과수원마다 탐스럽던 열매를 다 땄을 때, 들판의 쥐와 산속의 토끼들은 지리산의 반달가슴곰이나 뒷산의 다람쥐처럼 토실토실하다. 겨울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황조롱이도 이맘때를 잘 넘겨야 한다. 겨울철에 건강해야 봄에 맘에 드는 짝을 만나 건강한 새끼들을 잘 낳을 게 아닌가. 삼라만상의 동물만이 아니다. 들판의 곡식도 그렇다. 곡식을 갈무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황금빛 벌판이 갑자기 텅 비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은 가을이지만, 자연에 조울증은 없다. 엉클어지던 수많은 생물이 일순간 조용해지지만, 다시 올 내일을 준비한다. 울긋불긋 단풍 든 잎을 떨어낸 가지들은 새로운 잎눈과 꽃눈으로 내년을 기약할 것이다. 5월 부끄러운 잎사귀를 펼쳤던 잎사귀들은 가을비에 휩쓸려 추레하지만 새 꽃과 잎을 위한 영양분을 준비해놓았다.


치매 노인은 추레하다. 쓸모없을까. 치매에 들었든 뇌출혈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든,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정리하는 노인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인간 사회는 질서를 잃지 않는다. 치매는 질병일까. 치료가 필요하고, 치료로 나을 수 있는가. 최첨단 현대의학과 관계없이, 노인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는 아이는 생명의 소중함을 절로 느낄 것 같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주던 부모가 늙어 제 진자리 마른자리를 스스로 만드는 건 생명이 잉태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숭고한 몸짓인지 모른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고쳐야 할 질병이라고 외쳐도, 치매에 든 노인이 치열했던 삶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다. 젊었던 자신의 삶을 아무리 반추하려해도, 노인은 곧 젊은이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노인은 손주를 극진히 돌본다. 삼라만상의 내리사랑이다. 생물학은 건조하게 답한다. 생식능력을 잃은 개체는 생식능력이 생길 개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버섯이든, 모든 세포는 분열한다. 분열하면서 수를 늘리지만 다 자라면 더는 늘리지 못한다. 그렇게 버티던 개체들은 머지않아 삶을 정리할 텐데, 세포들이 분열만하는 게 아니다. 분열하는 중간에 꼭 쉰다. 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까. 아니다. 쉬는 세포는 다음 분열을 준비하며 생명현상을 지속한다. 그렇게 개체는 성장하고 생활하며 늙어갈 것이다. 세포가 분열만 계속한다면? 그 세포는 암이다. 암을 통제하지 못하는 개체는 삶을 잃는다. 휴식을 잃은 세포 때문이다.


모든 개체는 삶 속에 휴식이 필요하다. 마음을 가다듬고 긴 원고를 쓰는 소설가도 한 장을 마치면 잠시 쉬야 한다. 여행도 다녀오고 사람도 만나면서 다음 장을 준비할 것이다. 뙤약볕에 허리 구부리던 농부들은 모내기 중간에, 갈무리 중간에 새참을 먹고 나무그늘 아래 낮잠을 늘어지게 청한다. 휴식이 없으면 모 뿌리가 고르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갈무리 즐거움이 온전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다음 추수까지 먹을 양식을 마련했다는 기쁨보다 힘겨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농회사가 맡아 키운 농작물은 살갑지 않다.


휴식이 충분하면 다음 일에 열정을 쏟는데 인색하지 않다. 여행을 다녀온 연출가, 책을 많이 읽은 배우, 산책을 즐기는 시인, 해가 지면 농구를 챙기는 농부들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준비할 수 있다. 하루에 서너 꼭지를 취재한 기자는 이튿날 푹 쉬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특종은커녕 독자의 원성을 살 수 있다. 피로한 몸과 마음으로 편중되지 않는 기사는 나오지 못한다.


성장호르몬은 소에 광우병을, 돼지에 구제역을, 닭과 오리에 조류독감을 안겼다. 비닐하우스와 농약은 농부에 하우스병을 안긴다. 하루 온종일 돌아가는 공장은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해도 사고를 피하지 못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지진과 쓰나미만이 폭발의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니다. 구미시 봉산리의 한 공장에서 불산이 터져 수확 직전의 농작물을 타들어가게 한 것도 충분하지 못한 휴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암세포는 개체의 몸에만 있는 건 아니다. 휴식 없는 사회에도 엄존한다. 불산에 타들어간 마을의 당산나무가 살아나길 바라면서, 건강한 내일을 위해 오늘 맞는 휴식의 가치를 새삼 생각해본다. (MS오토텍 사보, 201211월호)

 
 
 

도시·인천

디딤돌 2007. 1. 13. 00:16

    

     제법 쌀쌀한 아침, 옷깃을 여미고 지하철역으로 서둘러 걷는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이 눈에 띈다. 한데 그 강아지, 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었다. 따뜻할까. 가까운 이마트에서 개 외투 ‘한 벌에 만원!’이라며 세일하던데, 그 스웨터인가. 아무튼, 타고난 강아지 털이 무척 안타까워 보인다. 강아지에게 그 옷은 얼마나 불편할까.

 

시골 경작지 사이를 가르는 국도에 밝혀놓은 가로등은 농부에게 골칫거리다. 불빛으로 밤에 쉬지 못하는 벼는 가을이 와도 이삭을 패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농작물이나 추울 때는 추워야 하고 쉴 때는 쉬어야하는 법이거늘, 전기는 계절과 휴식을 빼앗는다. 어떤 이는 전기를 ‘잠 도둑’으로 규정하는데, 벼의 휴식을 빼앗는 가로수 벼에게 무엇일까. 가로수는 농부의 원성을 사는데 그치지 않는다. 벼의 처지에서 종자 생산을 가로막는 존재가 아닌가.

 

언젠가부터 도심의 나무들은 밤마다 수난을 강요당한다. 대형 빌딩 앞 자그마한 녹지에 장식된 조경수에 작은 전구들이 휘감겨 밤이면 경쟁적으로 불을 밝히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만 휴식을 잃었고, 모르긴 해도 그 나무들의 수명은 몹시 단축될 것이다. 가로수의 불빛으로 밤 같지 않은 밤을 보낼 텐데, 나뭇잎 사이를 휘감은 꼬마전구는 쉴 새 없는 탄소동화작용을 강요할 것이 아니겠는가. 24시간 불 밝힌 계사에서 밤낮 사료 먹으며 알을 낳는 닭은 2년도 못가 수명을 다하는데, 전구에 휘감긴 나무는 어떨까. 

 

겨울철 도시의 나무는 그 정도가 심하다. 휴식만 잃은 게 아니다. 부분적으로 계절까지 빼앗겼다. 전구의 열기가 수피를 자극하는 까닭이다. 나무에게 겨울은 봄을 위한 준비기간인데, 도심의 겨울나무는 잎눈과 꽃눈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 연말연시를 맞아 꼬마전구의 거치대 역할이 강요된다. 봄을 준비하지 못하는 도시의 겨울나무는 대기오염에 시달리며 앙상한 가지마다 휘황찬란한 전구를 매달고 있을 따름이다.

 

장미는 일 년에 한 차례 꽃을 피워낸다. 하지만 화훼농장의 장미는 일 년에 여섯 번 꽃을 피워내야 한다. 덕분에 100송이 장미를 애인에게 한 아름 안겨주는 연인들은 행복에 겨울지 모르지만 장미는 제 수명을 잃었다. 30년 살던 장미는 6년이면 죽지만 화훼농가는 일찍 죽는 장미를 애도하지 않는다. 새로 품종개량한 나무로 바꿔주면 그만이기 때문인데, 온갖 화학약품에 찌들며 휴식마저 잃은 장미는 사랑의 메신저일 수 없다. 여유를 잃은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 법이므로.

 

휴식을 잃은 도시에 가로등을 밝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동차 사고는 물론 절도와 폭력 사고를 미연에 막으려면 가로등이 필요하다. CCTV를 위해서도 가로등 불빛은 요긴할 터인데, 가로등, 어쩌면 휴식을 잃은 도시의 한계일지 모른다. 휴식을 잃은 도시의 겨울나무를 위해 전구를 떼어낼 수 없을까. 회색도시의 가로에서 봄부터 오염된 대기를 정화해주던 겨울나무에 휴식을 배려하지 못할망정 수난을 강요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소비자를 유혹하는 꼬마전구는 건물 벽이나 근사한 거치대를 세우면 되는 게 아닐까.

 

휴식이 부족한 생명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나무도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온갖 불빛으로 휘황찬란한 도심일수록 범죄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에도 휴식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건강한 내일을 약속하는 휴식, 꼬마전구 거치대가 된 겨울나무에게 더욱 절실하다. (인천e뉴스, 2007년 2월)

아침고요수목원 요란한 전구를 보고 왔는데...거기 운영하시는분이 뭔 원예전공이라고...
저도 분명 스트레스받는다고 들었거든요...
참 인간이 이기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