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05. 12. 8. 18:41
  

희망, 녹색의 상상력



외신기자들은 우리나라를 대단히 역동적인 국가라고 평한답니다. 본국에 몇 년, 아니 몇 달만 다녀와도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는 곳이 대한민국이라고요. 해외에 보름 만 나갔다 와도 낯설게 느끼는 텔레비전 광고보다 빨리 바뀌는 분야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윤리 내용과 그 진위 논란, 그리고 원천기술 여부가 그것입니다. 자고나면 바뀌는 정도가 아닙니다. 오전 오후로 논의 내용이 바뀌어, 무심코 며칠만 지나가면 뭐가 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황우석 교수와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이 서로에게 책임을 씌우는 잇따른 기자회견이 발표되고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에서 관련 사실을 새롭게 들추어내면서,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를 기대해왔던 환자와 그 가족을 포함해서 많은 시민들은 혼란을 넘어 정신적 충격에 휩싸이고 있지만, 아직도 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이 책이 독자들 손에 들어갈 즈음이면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이번 사태는 또 어떤 분위기로 반전돼 있을까요. 상상 이상의 논문 날조르 밝힌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의 최종 결과가 검찰로 넘어간 시점에 의도적으로 보이는 황우석 교수의 마지막(?) 기자회견은 반전을 다시 노린 노회한 의식을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현기증 나는 반전을 뒤로, 미련을 남긴 채, 사필귀정이라는 제자리로 접어들겠지요.

 

2005년 5월 《사이언스》에 실린 황우석 교수 논문에 대한 MBC PD수첩의 의혹 제기로 진위 여부까지 논란되면서 우리나라의 과학자 집단은 원로를 중심으로 몹시 흥분했습니다. 언론에서 과학논문의 진위를 따지는데 따른 불쾌감이었지요. 그런데 원로들은 사실, 착각했습니다. PD수첩 팀은 논문의 진위 여부를 앞장서 판단하지 않았으니까요. 제보된 의혹에 무게를 느낀 PD수첩 팀은 검증할 능력이 있는 연구기관을 수소문해 과학자에게 조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의 일부를 들은대로 귀띔했을 뿐입니다. 요즘 과학기술은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PD들이 판단하기 어렵게 복잡합니다. 이웃 연구실의 연구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같은 교수의 대학원생끼리라도 진척상황을 속속들이 헤아리지 못하는 연구가 허다하니까요. 그만큼 세분화되고 첨단화된 것이겠지요. 따라서 검증을 의뢰한 PD수첩은 과학자가 대답해준 내용을 시민들이 이해할 수준으로 풀어 방송할 예정이었을 거고 실제 그랬습니다.

 

과학에 대한 검증은 다분히 과학으로 접근해야 하는 까닭에 과학자가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궁금증이나 의문마저 과학자에 맡겨야 하는 건 아닙니다. 과학기술의 성격에 따라 일반인들도 의혹을 가질 대목도 많습니다. 물론 과학자들 사이의 학술논쟁으로 진위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인맥과 학맥으로 얽힌 과학자 사회는 연구비의 크기와 향배에 따라 목소리가 좌우되고 전공이 움직입니다. 어느 과학자의 선후배인지 누구의 스승이고 제자인지 뻔히 아는 처지에, 내부고발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저임금 대학원생들이 혹사당할 정도로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연구비 없이 수행할 수 없는데, 대학원생의 등록금과 취업을 고려해야 하는 교수는 권력을 쥔 선배나 동료교수의 문제를 알고 있더라도 눈감기 십상입니다. 과학자 사회에서 눈 밖에 나면 연구비 수혜 대상에서 한동안 소외될 것을 염려해야 하고, “당신 제자 안 키는가?” 하는 선배교수의 점잖은 핀잔 한마디면 지도교수는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제자 앞길을 지도교수가 막을 수 없는 노릇일 테니까요.

 

PD수첩은 왜 의혹을 제기했을까요. 틀림없이 그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과학자의 구체적인 제보가 신빙성 있기에 움직였을 겁니다. 그 과학자는 자칫 공들여 쌓아온 연구 인생을 망칠 수 있을 텐데 왜 제보를 감행했을까요. 세간의 천박한 추측처럼 실력부족에 따른 질시 때문일 리 없습니다. 연구자의 양심을 더는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혹이 거듭 공개되면서, 자신이 확립했다는 배아줄기세포의 DNA 재검사는 절대 없다던 황우석 교수 측은 후속 연구 성과로 검증받겠다고, 곧 획기적인 논문을 내놓겠다고, 시간을 더 달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앞으로 전개될 연구 성과는 과거 논문의 의혹을 전혀 검증하지 못합니다. 일부 네티즌이 오해하는 바와 달리 PD수첩이나 시민단체는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능력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난 논문에 사용한 자료 중 일부(또는 전부)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제기된 의혹을 풀지 않고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의혹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사필귀정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배아줄기세포 진위 공방의 어지러운 역동성은 공동연구자인 미즈메디 병원 노성일 이사장의 이실직고(?)와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에 이은 검찰의 수사로 가닥을 잡아가는 듯 보입니다. 노성일 이사장이 왜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2005년 《사이언스》에 실린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11개 중 적어도 9개는 거짓이고, 2개는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힘을 입은 PD수첩은 종영 위기를 딛고 그간에 묻혀 있었던 논란의 실체를 즉각 방영합니다. 증인에게 강압으로 들릴 소지가 없지 않겠으나 끝까지 설득조였던 인터뷰 실황까지 공개하면서 과욕이 빚은 보도윤리 위배를 정중히 사과했습니다. 시청자들이 전후사정을 소상하게 이해한 이상, 이제 반전이 더는 허용될 분위기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진실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까칠한 수염을 언론 카메라 앞에 감상적으로 공개하며 병원에 입원한 황우석 교수는 기자회견을 자청, 줄기세포가 있고 시간만 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결연히 주장하지만, 주장만 있고 실체가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자들을 배석시키고 지지 세력을 불러들인 상태에서 사죄를 빙자하며 책임회피로 일관한 마지막 기자회견장에서도 6개월과 난자를 더 달라고 염치없게 부탁하지만, 동료와 제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에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파괴한 출처 불투명한 난자가 얼마나 되는데, 추출과정이 전혀 윤리적이지 않은 난자를 더 파괴하면서 다시 만들어 내는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마술사 같은 발상은 허위 논문에 대한 책임 표명이 없는 상태에서 공허할 따름이지요. 반성은커녕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인위적 실수’라는 용어만큼이나 가식적인 행태를 일관해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광기어린 네티즌과 일부 언론의 돌팔매를 버티고 진실을 거듭 보도한 PD수첩의 용기에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취재윤리를 변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참에 같이 생각해봅시다. 한 자연인에 대한 취재가 공포를 느낄 정도로 강압적이었는지 여부는 뒤로 미루고, 검찰수사를 언급하며 증언을 유도한 일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만, 그러면 연합뉴스를 비롯하여 PD수첩에 돌을 던진 언론들은 과연 이 시점에서 고개를 세울 수 있을까요. 시민단체와 종교계와 윤리학계가 거듭 지적해왔던 황우석 교수 연구 과정의 비윤리성과 젊은 과학자들이 끈질기게 의혹을 제기한 논문 허위 작성이 백일하에 밝혀진 지금, 황우석 교수의 말만 받아적어 보도해온 언론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논란의 실체를 취재할 의지도 없이 윤리가 과학기술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며 황우석 띄우기에 막무가내로 앞장선 언론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철두철미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취재 자세와 보도 태도도 윤리적으로 개선되어야 하고, 공정하게 가다듬어야 마땅합니다.

 

취재목적을 왜곡하거나 물타기하는 일은 어느 언론이나 흔했습니다. 사회고발성 프로그램일수록 몰래카메라와 허락받지 않은 녹음기는 필수품처럼 활용하지 않았던가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언론 종사자 이외 신분으로 자신을 숨기는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 언론사회에서, PD수첩 팀에 돌을 던질만한 양심을 지닌 언론인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언론들은 낡은 취재 관행을 일신해야합니다. 관공서의 안락한 기자실에서 배포되는 보도자료에 의존하기보다 취재윤리를 되새기며 다양한 취재원을 찾아 대립되는 의견을 편중되지 않게 청취하며 증거를 수집하고, 자신의 판단 하에 책임지고 보도하는 기자정신을 다시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를 스토커처럼 따라 다니며 치료 가능성을 선정적으로 부풀려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들을 지나치게 기대하게 하고, 외신을 내키는 대로 취사선택해 국제 사회의 평가를 고의로 왜곡하며, 밑도 끝도 없는 국가부가가치 환상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 태도는 다시 반복되면 안 될 것입니다.

 

해외 학술잡지에 논문을 경쟁자보다 많이 투고해야 교수 자리를 잡을 희망이 생기는 요사이의 국내 대학 분위기는 영 마땅치 않습니다. 지방대학 출신에 유학도 다녀오지 않은 만년 시간강사 처지라서 그리 생각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언어가 종속되면 문화까지 종속되고, 문화가 종속되면 제 나라의 과학도, 사회도, 시민의식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로 영어인 외국어로 논문을 쓰기 위해 더 공부해야 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외국어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은연중 무시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불리한 환경에 불만이 생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와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가 제시하는 기준에 의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바뀌면 연구자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타고난 자신의 삶과 환경을 스스로 억압하고 훼손하면서 연구의 개성과 신념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영어는 선진, 한국말은 미개로 오해할까 두렵습니다.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화 된 국가를 선진국으로 지칭하며 줄서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자 지구촌 곳곳은 환경문제의 중병을 않고 있습니다. 세계가 트루먼이 제시한 기준에 충실하려다 자원을 낭비하고 생태계에 대한 폭력이 거세어졌던 탓이겠지요. 누군가 영어를 제국주의 언어라고 지적합니다.

 

외국 학술잡지에 논문을 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당이므로 우리나라의 이공계 연구자는 그들이 요구하는 윤리기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과서를 읽은 의과대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내용을 알고 있는 ‘헬싱키 선언’이 그 대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제자의 난자가 연구에 사용되었으나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알았지만 프라이버시 차원에서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고 주장하는 황우석 교수는 매매된 난자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고 해명합니다. 하지만 황우석 교수의 해명은 어딘가 옹색합니다. 생명공학 연구자가 헬싱키 선언을 몰랐다는 주장은 교통경찰이 교차로의 신호등 규칙을 모르는 경우에 비견할 수 있으니까요. 애국하는 과학자를 비통하게 만들었다는 언론과 네티즌도 있습니다만, 어안이 벙벙합니다. 아니, 애국하지 않는 연구자도 있다던가요. 한 중앙 언론매체의 의학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무책임하게 쏟아냅니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사실을 까발려 국익에 지장이 생겼다”고, “국익이 진실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이는 듣는 이를 여러모로 서글프게 합니다. 우리 과학의 ‘인위적 실수’ 또는 과오가 민족주의 감정으로 덮어질 수 있을까요. 그 덕분에 국익이 발생할까요. 군사독재정권의 악몽을 경험한 처지에 전체주의의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제 운운할 정도로 막역한 공동연구자인 미국 피츠버그 의대 제럴드 새튼 교수의 결별선언이 논란을 촉발했을지언정, 우리 땅의 젊은 과학자에 의해 의혹이 제기되고,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논란이 증폭되는 와중에서 시민단체는 황우석 교수 논문의 진위 여부를 독립된 제3의 과학자에게 맡겨 해소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내용을 전혀 숙지하지 못하는 대통령까지 나서 진위논쟁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바라는 엉뚱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PD수첩은 광기어린 네티즌들의 등쌀로 광고가 사라지더니 급기야 방송까지 중단되는 마당에, 황우석 교수 논문의 진위를 검증할만한 용기 있는 독립 과학자를 순조롭게 수소문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는데, 먹구름 속의 한줄기 햇살처럼 이 땅의 젊은이들이 살아있습니다. “과거를 묻지 말라, 앞으로 잘 하면 되잖아!” 하며 지나갔더라면 어쩔 뻔 했을까요. 제기되는 의혹의 경중과 관계없이 앞으로 등장할 다른 과학자의 부정행위까지 묻어야 할지 모릅니다.

 

외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의 요구로 실체가 밝혀졌다면 어쩔 뻔 했을까요. 모골이 송연합니다. 논문 위조 사실이 외국에 의해 드러났다면 우리 과학은 침몰합니다. 국제적 망신은 돌이키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은 해외 학술잡지에 실리기 매우 까다로워질 뻔했을 것입니다. 신뢰할 수 없으니까요. 이미 우리의 연구윤리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상당히 훼손되었습니다만, 황우석 교수 팀은 아직까지 진정한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만, 황우석 교수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던 정부와 언론, 특히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며 “확실하게 밀어 주겠다”던 청와대의 태도가 아직 모호합니다만, 이제부터라도 제기된 문제를 납득할 수 있게 밝히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후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정비와 의지를 투명하게 실천해 나간다면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제기가 덕분에 미숙했던 연구윤리가 성숙해지고, 과정이 투명해지면서 연구결과도 더욱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양심적인 국내 소장파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해명요구는 앞으로도 우리 과학계의 정화능력으로 빛을 발할 것이고 의당 그래야 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 사회는 황우석 교수 연구 과정의 윤리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을 무턱대고 비난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정부와 정치권, 언론과 학계는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정비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과학은 일차적으로 논문을 심사하는 과학자 집단에 의해 검증되어야 옳겠습니다만, 시민들이 과학에 대해 점점 소외되는 현상도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복잡한 수식과 용어로 소통되는 과학기술의 내용을 소비자인 시민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근래에 이르러 점점 거대화되는 과학기술은 최근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과학기술 뒤에 이윤을 찾는 기업과 패권을 노리는 국가가 자리하면서 언어가 암호화되고, 연구결과는 특허로 보호돼 일반인의 접근은 봉쇄됩니다. 생명공학과 정보산업과 핵산업들이 그렇습니다. 기업은 현란한 광고를 통해 자신의 개발한 상품의 소비를 유인하려 들고, 국가는 연구결과를 기밀에 붙이지만, 혜택이 자본과 국가로 최우선으로 돌아가는 대신,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으로 다가옵니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위험과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는 과학기술은 사전에 시민이 평가하고, 시민이 원하는 바에 따라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1983년 인도 보팔시 유니온 카바이드사의 농약공장 폭발과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을 비롯한 숱한 과학기술의 사고가 연속 발생하면서 그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과학기술자와 기술관료에 의해 밀실에서 한쪽 논리로 결정되던 정책을 사회의 판단에 맡기자는 주장입니다. 기존 ‘과학기술’에 ‘사회’를 더 붙인 이른바 ‘과학기술사회’(STS)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공급자가 아니라 소비자, 오늘이 아니라 내일, 사회적 약자와 생태계의 안위를 두루 살피는 과학기술정책을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며 민주적으로 결정하자는 당위성이지요. 그를 위해 과학자는 과학기술을 대중에게 쉽게 안내하고, 시민들은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과학기술사회학자는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흔쾌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공계와 인문계가 분리되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들의 권리가 제대로 충족되려면 분리된 인문계와 이공계 사이의 벽을 낮추거나 없애야 합니다. 인문사회적 성찰 없이 과학기술만 끌어올리다 촉발된 ‘위험사회’를 먼저 만난 국가들의 경험을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최근 일부 과학자들은 ‘이공계 위기론’을 제기합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 이공계에 지원하는 인재가 줄어들고 있다는 하소연도 그 위기론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공부도 남 못지않게 많이 했는데 의사나 변호사보다 수입이 적다고 푸념하는 이공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문사회계는 온전할까요. 인문사회계는 과학기술의 윤리와 민주적 정책결정을 끌어갈 준비가 되어있을까요. “이공계가 위기라면 우리는 고사상태”라고 인문사회학자들이 좌절해온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배아줄기세포 논란과 숱한 환경사고에서 짐작하듯, 사물과 현상을 인문과 사회적 측면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과학기술은 천박하기 쉽습니다. 과학자를 위해서, 그리고 과학기술을 위해서, 과학을 모르는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인문사회를 모르는 과학자가 내세우는 성공신화에 맹목적으로 현혹되는 현상이 이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합니다. 위험사회의 도래가 걱정되니까요.

 

이번 파동은 우리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깁니다. 새삼 타산지석의 교훈을 되새길 때입니다. 과학기술은 윤리의 기반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는 상식으로, 우리 사회에도 윤리적 연구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각성을 새로 인식하리라 믿습니다. 한데, 과연 자연스런 생명의 흐름을 역행하려는 생명공학이 불치병과 난치병 치료에 궁극적인 효과가 있긴 있는 것일까요. 안정된 환경을 파괴하는 온갖 개발 역동이 필연적으로 빚는 수많은 질병을 생명공학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번 역동적 논란과 그에 이은 파동을 겪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생명공학 자체의 위험성과 비윤리성, 그리고 효용성 유무를 거의 고민하지 못하니 저는 그 점이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권의 책을 엮었습니다. 생명공학과 관련하여 최근에 문제제기한 글을 앞에 묶고, 우리의 절박한 환경 현안과 천박한 상황 인식에 대해 애달파하며 여기 저기 투고한 에세이들을 뒤에 모았습니다. 현기증 나게 발생하는 생명공학의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읽는 분들에게 실체를 알려야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원고를 작성하다 보니 꼭지에 따라 중복되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눈에 거슬리겠지만 문맥 유지를 위해 그대로 두었습니다. 넓은 아량을 부탁합니다. 이어 우리 사회에 등장하는 여러 환경현안과 환경인식을 생태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에세이들을 소개했습니다. 근본주의자라는 비난을 칭찬으로 오해하는 서생의 한계를 감안하고, 환경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사회는 요즘 생명공학에 대해 일방적으로 열광하지만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 책이 나왔습니다. 읽는 분들이라도 생명공학에 내재된 비윤리와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게 된다면 저는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생명공학의 생태적인 대안도 생각했는데, 야무진 기대입니다만, 제 글이 생명공학 반대와 감시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어지는 글은 가볍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환경실상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환경운동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운동은 희망이 가진 낙천주의자의 몫이라고 선배들이 가르쳐준 덕분입니다. 제 글들을 읽은 분들이 대안을 생각하고, 환경운동 현장에 참여한다면, 열대림을 파괴해 만든 이 책은 생태계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셈입니다.

 

사실 동료들이 ‘생태주의자’로 남들에게 소개하곤 하는 저는 ‘환경’보다 ‘생태’라는 용어를 더 좋아합니다. 이미 건설업자들에 의해 ‘생태골프장’과 ‘생태아파트단지’가 운운되면서 생태라는 용어도 ‘환경’ 이상 오염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생태가 더 좋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환경운동보다 ‘우리’를 중심으로 ‘생태운동’이 더 근본적인 까닭입니다. 그 생태에는 ‘나’보다 ‘우리’의 개념이 들어가고, 우리에는 가족과 내 노후, 주변의 생태계, 후손의 삶까지 두루 포함됩니다. 바로 희망의 내일입니다. 이 작은 책이 이야기하는 녹색 상상력이 내일을 희망으로 앞당기고 연장하는데 도움이 되길 또한 희망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출판 사정이 무척 열악한 가운데 잘 팔릴지 기대할 수 없는 책을 흔쾌히 출간해준 달팽이출판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이와 달팽이출판도 내일을 희망으로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듭이 없는 시간은 2005년을 벌써 보냈습니다. 2006년은 여러모로 더 나아지려는지요. 돌이키기 어렵게 황폐화된 환경에서 내일을 희망으로 일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을 녹색으로 상상하는 시민운동이 오히려 맘 편하게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신념을 퍼뜨리기 위해서라도 계속 글을 쓰고 말을 아끼지 않으렵니다. 내일은 불안스런 역동보다 안정적인 환경이기를 바라면서요.

 

2006년 1월, 박병상.

 

*** 애초 2005년에 쓴 글을 대폭 수정해 출간하였습니다.

ㅇㅇ 외국의 생명공학 연구팀에도 그대로 적용시키고 그렇게 운동한다면 당신을 인정해 주리오다. 안그럼 당신은 매국노고.. 일본 논문 나온거 검증하고 윤리 문제 다 파헤치고 우리나라 과학자 있자나.. 색안경 끼고 일본 생명공학 과학자를 짓밟아버리겠다는 의도하에 검증해보자꾸나.. 어떤 결과가 나올까나 ~ 아님 미국은 왜 난자채취가 합법인지 물고 늘어져 보자꾸나 .. 이런 입닥쳐 개새꺄
일본은 너같은 매국노가 없어서 아마 힘들거야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음 조용히 하는게 좋을거다
생긴거 보면 한대 갈겨주고 싶네 .. 하는 짓도 생긴거처럼 논다.. 우엑 토나와
동의합니다. 뭔가 느끼게 해주시네요. 힘내십시오.
내가 살기 싫어지는 날 너 찾아간다. 조심해라 . 행동 똑바로 해 살고싶음
나치 당원도 대단한 애국자였고, 카미카제 특공대도 엄청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KKK단원들도 당연히 애국자들이겠죠.. 열혈애국자들이 많은 대한민국, 무섭습니다-_-;;
동의하는 바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책 잘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책이나 한번 보고 말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