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10. 17. 18:55

 

하루가 지나갈수록 가을이 완연해진다. 사람들은 유난히 아름답다는 올해의 단풍을 맞으려 산과 들을 찾아 집을 나서지만, 기상이변으로 예년 같지 않은 여름 내내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노폐물이 쌓인 나뭇잎들은 초록을 잃고 가을색을 머물며 잠시 더 매달려 있을 뿐이다. 머지않아 땅에 쓸쓸이 떨어지면 내년 봄 대지에서 싹을 틔울 씨앗과 열매를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될 것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성장이 멈춘 나무는 벌써 내년 봄에 펼칠 잎눈을 달아놓았다.

 

언제든 먹을거리가 지천인 사람과 사람 주변에서 먹이를 구하는 애완동물도 덩달아 예외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먹을 게 풍성할 때 새끼들을 낳는다. 초식동물이 어미젖을 뗄 때 연한 풀잎이 널렸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의 새끼들이 막 태어날 때 젖을 뗄 것이다. 그때가 대략 봄이지만 모름지기 생명이 깃든 자연의 삼라만상은 내일의 생명을 위해 가을에 갈무리한다. 우리가 가을에 거두는 온갖 곡식도 내년을 위해 잘 보관한다. 햅쌀로 밥을 지어먹는 농부는 막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 믿으며 뿌듯해했을 것이다.

 

결실의 계절이라 그런가. 정부는 인구 문제를 가을에 들고 나왔다. 지난달 30일 부천에서 5000만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고, 우리나라가 이제 인구 5천만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한 지 한 달도 안 돼, 이제 우리의 인구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 2100년이면 반토막, 2500년이면 우리 민족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북한의 한민족과 해외 동포의 수를 뺀 결례가 있다는 걸 지적하면서 나아가 한 지역의 인구 변화가 그 따위 일차함수로 늘고 주는 게 아니라는 걸 덧붙이고 싶다.

 

모름지기 자연에서 변화하는 생물종의 개체수는 환경 여건과 밀접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건이 허락되면 낳지 말라고 해도 낳을 테고, 더 낳으려 하지 않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정부가 덮어놓고 아이를 더 낳으라며 여성들을 자극하는 행위는 무책임할 뿐 아니라 부도덕하다. 낳은 아이를 남 못지않게 키우려는 부모의 심정을 거의 충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아직도 수정하지 못하는 처지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다. 지위와 계층을 막론하고 일단 태어난 아이가 건강한 사회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려는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역행하지 않던가.

 

교육 여건이나 일자리만이 아니다. 식량자급률은 비참할 지경으로 떨어졌어도 기름진 농토는 정부 주도의 개발로 점점 사라져 해외 의존은 더욱 심화되는데,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세계 식량의 수급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석유는 정점을 지나 에너지 위기를 예고하지만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비는 국제사회의 갈등을 부추긴다. 내일의 환경이 안정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를 더 낳으라는 건가. 조상이 물려준 금수강산은 맥없이 파괴되고 물과 대기와 땅은 형편없이 오염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뿌리가 파괴된 공동체에서 마음 나눌 이웃 만나기 어렵다.

 

아이를 더 낳아야 애국이라고? 얼마 전까지 인파가 몰리는 광장마다 숫자가 늘어나는 ‘인구시계’를 세워놓고 아이를 그만 낳으라고 다그치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피임 기구를 무료로 나누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정관 수술을 하면 예비군 훈련도 즉각 면제해주었다. 1983년 남쪽의 인구가 4천만이 되었을 때 정부는 아이를 셋 이상 낳은 자를 징벌해야 할 철면피로 취급했다. 의료보험은 물론이고 학자금 혜택도 제외하며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며 성화하더니 이제 더 낳으라고? 4천만일 때 많다던 인구가 5천만이 되자 왜 부족하게 된 건지, 납득할 만한 변명이 없다. 그 사이 농토나 식량이 늘었나. 아니면 환경이라도 나아졌는가.

 

‘고령화사회’에서 ‘저출산’이 문제라고? 산업체에서 일한 인력이 장차 부족해질 거라고? 그 말은 어느 정도 맞을 텐데, 에너지 과소비와 자동화를 추구하는 산업화가 지금보다 얼마나 확대되어야 하는지 여부는 여기에서 따지지 않기로 하고, 정부는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해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는 젊은이를 위해 어떤 정책을 구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부만이 아니다. 일할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 엄살을 펴는 기업은 어떤 배려를 준비하고 있는가. 고상한 척하며 저출산과 고령화사회의 대책을 요구하는 논객들은 더 태어날 후손에게 어떤 내일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들이 나이 들었을 때 맞을 환경은 염두에 둔 것일까.

 

평균 수명이 연장되면서 늘어나는 노인을 적은 수의 젊은이가 부양하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될 거라고? 노인은 가족이 아닌가. 내가 태어났을 때 진자리 마른자리 보살폈던 노인을 부양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아깝다는 겐가. 병원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노인의 몸이 젊은이와 다른 건 당연하다. 늙어간다는 건 치료 대상인 질병이 늘어난다는 게 아니다. 노화는 현상이다. 건강은 나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노화는 본인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사회가 서로 이해하고 벼려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노화를 굳이 질병이라 부르짖는 이유가 수상하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노인은 당연히 부양되어야 인간세상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아니 그런가. 야생의 동물세계처럼 방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리나라가 어느새 ‘고령화사회’가 되었다고 하는데, 인구의 7퍼센트 이상이 65세일 때를 고령화사회라 하므로 노인의 기준이 65세인 모양인데 산업체 인력을 미리 걱정하는 기업은 왜 65세보다 한참 빠를 때 해고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가. 그리고 정부는 그런 기업을 제재하지 않는가. 고달팠던 산업화의 터널을 어렵싸리 빠져나온 65세 이후의 노인이 과연 자식에게 부양받아야 할 퇴물일까. 대부분의 노인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일을 더 할 수 있다. 그들의 경륜은 사장되어야 할까.

 

보건복지가족부의 지원을 받는 한 민간단체는 저출산을 걱정하며 ‘123 캠페인’에 나섰다. “결혼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30세 이전에 낳자!”는 다그침이었다. 그런 캠페인에 대항한 여성단체는 ‘1234 캠페인’을 내놓았다. “결혼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30세 이전에 낳는 가정은 40세 이전에 파산한다.”면서. 지면 도태된다는 경쟁사회에서 남 못지않은 교육과 의식주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려면 하나의 아이도 벅찬 세상이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서른 전에 두 명의 아이를 낳으려면 도대체 몇 살에 결혼을 하라는 겐가. 대학 졸업하지마자? 결혼하거나 임신한 여성에 배려할 줄 모르는 회사가 대부분인 곳이 우리나라이므로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여성들은 코웃음을 짓는다.

 

가정을 꾸려 아기를 낳아 잘 기르고 싶은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가. 저출산이 심각하다는 걸 십분 이해하지만 결혼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 땅의 여성들은 평균 거의 서른이 다 돼야 결혼을 생각한다고 언론은 통계수치를 내놓는다. 힘들게 공부해서 전문지식을 쌓은 여성더러 어서 결혼해 아이를 낳으라고 성화하면 누가 달가워할 것인가. 더구나 지원도 배려도 외면하면서. 드라마와 상품광고는 소비와 향락을 요란하게 부추기는데, 결혼해 애를 낳으라니. 아이를 다섯 낳으면 천만 원을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지만 그런 말초적 처방은 효과가 지속적일 수 없다. 아무리 성화해도 지난해 세 자녀 이상의 가정은 5퍼센트 줄었다는 보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이 직장을 다니는 여성만의 일도 아니다. 정부는 직장마다 탁아시설을 의무화하겠다고 얼마 전에 발표했지만 그건 아이를 막 낳은 여성이 태어났을 때에도 발표한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한 발표된 정책도 정치권과 여성계의 차가운 평가처럼 충분한 대책과 거리가 멀다. 예산이 부족하니 이해해달라고? 예산이 부족하다며 4대강을 막아 내일의 환경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데 펑펑 예산을 버리는 행태는 어느 세력의 내일을 보장하려는 노심처사인가. 가정을 지키는 여성, 그리고 직장을 다니는 남성을 위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고 여성단체는 지적하던데, 사실 그런 지원이 만족할만한 국가라 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알량한 대책을 놓고, 그러면 그렇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반발한 모양이다. 정부의 “검증되지 않은 선심성 규제로 새로 만들거나 강화해 기업의 인력운용을 제약하고 고용창출 능력마저 낮추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정부안이 현실화되면, 기업이 여성 고용을 회피할 것”으로 어깃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은 내 알바 아니니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라는 투였는데 세계 각국의 숱한 경험이 증명하고 있듯, 규제 없어도 기업이 앞장서서 비용을 들이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부의 규제가 동인이었지만 정부는 시민들의 의식에 따라 움직였다. 그 때문에 망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규제에 능동적으로 응한 기업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인구가 줄어들어 한국의 중장기 성장률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다지만 그럴까.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국가들이 그랬던가. OECD의 지적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일은 감내해야 할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기업의 연구소는 2100년이면 인구가 반으로 줄고 2500년이면 민족이 소멸된다는 일차함수를 연구결과라고 내놓은 모양인데, 그런 예측은 내일을 위해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그보다 좁은 국토에서 후손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미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지금의 인구를 줄이는데 열과 성을 다하자고 제안해야 옳지 않았을까. 식량과 석유위기가 다가오는 지구온난화 시대를 대비해 내 땅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한시바삐 조성해야 책임 있는 선조의 자세가 아닌가.

 

전체 인구의 14퍼센트가 65세 이상일 때 ‘고령사회’, 20퍼센트 이상일 때를 ‘초고령사회’라고 학자들은 정의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농촌은 이미 초고령사회지만,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여전히 농사를 짓는 덕분에 아직 우리는 이 땅에서 먹고 살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또한 자신의 일에서 은퇴한 노인을 폐물 취급하면 곤란하다. 어쩌면 많은 노인들은 타의에 의해 일자리를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화사회를 넘어 고령사회를 앞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책임 있는 정부라면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인들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을 놓지 않을 여건을 정책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적은 수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사회도 함께 해결하려 노력할 어려운 일이 남는다. 하나 또는 둘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웃과 다정하게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사회성을 깨우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불안한 국제정세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자족이 거의 불가능한 작은 국토에 뿌리를 내린 우리에게 작금의 저출산 현상은 어쩌면 내일을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무책임한 저출산 타령은 전에 없이 삭막해진 우리 땅과 지구의 환경에서 내 자식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인천in, 2010.10.20)

정말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을 기계로 취급하고 있는 세상이고
빈약한 철학과 실패한 정책에 의한 고용의 문제를
젊은 사람과 나이먹은 사람의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드디어 3월입니다
봄이 더욱 더 가까워지는 것 같네요
유용한 글 잘 보고 갑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에 공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