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9. 5. 00:30

 

가수 이용은 《잊혀진 계절》에서 10월의 마지막 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노래했는데 그보다 먼저 나나 무스꾸리는 《트라이 투 리멤버》에서 젊고 아름다웠던 9월을 기억하자고 노래했다. 가을이 무르익은 10월의 마지막 밤, 1차를 거나하게 마친 주당들은 무리지어 노래방으로 들어가 《잊혀진 계절》을 목 놓아 부르겠지만 아직 한 달이나 남았으니 9월부터 생각해보자.

 

학생에게 2학기가 시작된 9월,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들이 혼수품 장만하러 동분서주하기 좋은 시간이 아닐까. 뜨거웠던 여름날의 기억을 뒤로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 있을 테고 그저 추억으로 남길 바라는 젊은이도 있겠는데, 9월은 비로소 어제를 돌이켜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의 시점이라는 느낌이다. 곧 오곡백과들이 익으면 갈무리에 들어가겠지. 무성하게 자라오르던 잡초도 기운을 잃고 극성이던 해충도 자취를 감춰가지만 추수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 9월. 앞뒤 밤낮 가리지 않고 뜨겁게 뜀박질했던 시간이 지나 파란 하늘이 높아진 만큼,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9월은 심신을 차분하게 한다.

 

시인 안도현은 구월이 오면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는지 연인에게 물었다고 읊는데, 들판에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하는 9월을 사파이어가 상징한다고 한다. 높고 공활한 가을 하늘을 코발트빛이라고 하던데, 사파이어 색이 꼭 그렇다.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가는 9월, 한낮 악다구니 쓰듯 울어대던 매미들이 한풀 꺾이자 어느새 귀뚜라미가 저녁 시간을 인수했다. 지난날을 반성하든, 내일을 기대하든, 아무래도 귀뚜라미 속삭이는 9월은 생각이 많은 시간인 모양이다.

 

올 9월 9일은 24절기의 백로(白露)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부는 “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 발 밖의 물과 하늘 청망한 가을일레/ 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소리 멀어져/ 막대 끌고 나와 보니 곳마다 가을일레”하고 노래했는데, 우리는 시방 가을을 맞고 있기는 한 걸까. “들녘의 농작물에 흰 이슬이 맺히고 가을 기운이 완연히 나타”난다는 백로에 과연 매미는 잦아들었는데 비는 그치지 않는다. 고추가 더욱 붉어지는 이맘때 비는 상극이다. 백로에 비가 내리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는 조상의 말이 그를 게 없다. 천정 모르고 가격이 치솟는 과일 맛은 요즘 싱겁기 짝이 없다.

 

늦어도 9월 초순이면 김장배추를 파종해야하는데,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 허리를 휩쓸었다. 농부는 하늘은 원망했을 텐데, 원래 이맘때 태풍은 일본으로 빗겨가는 게 보통이었다. 곤파스가 직전까지 중부지방은 가을장마를 맞았다. 보름 이상 떠나지 않은 정체전선이 슈퍼컴퓨터 여러 대 돌리는 기상대의 예보를 비웃으며 여기저기 국지성호우를 뿌린 것이다. 예년에 없던 현상이다. 그 뿐인가. 곤파스가 지나가자마다 같은 경로를 찾은 태풍 말로가 엎친 데를 덮쳤다. 올 김장은 금장일지 모른다.

 

지구온난화가 빚은 부메랑이다. 이맘때면 물러나야 할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도 대만 인근해역까지 맹위를 떨치며 태풍의 진로를 한반도 서해안으로 몰아낸 이유가 그렇다. 필리핀 동남부에서 발달하던 열대성 저기압이 위도가 훨씬 높은 대만이나 오키나와 해역에서 생성되거나 심지어 제주도 남쪽에서 만들어져 연실 북상해 한반도 여기저기에 ‘물 폭탄’을 떨어뜨리는 현상은 예년에 없었다. 한반도 해역의 수온이 지구촌 평균의 두 배 이상 오르기 시작한 15년 전에 보통 사람들은 가을장마, 국지성호우, 정체전선이라는 말을 일기예보 시간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9월은 추석이 주중에 낀 달이라 비행기 좌석이 벌써부터 매진이라고 한다. 고향을 찾아 제 뿌리를 확인하고 조상에 감사하는 일보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외여행에 나서려는 이가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지만 고향을 찾아 조상의 은덕에 고개를 숙이는 이가 훨씬 많을 것이다. 아직 오곡백과가 제 맛을 내지 못했고 익기 시작한 벼는 시간이 더 지나야 벨 수 있더라도, 일가친지가 모인 마당에서 9월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자연이 더 분노하기 전에, 함께 건강한 내일을 기대하며 앞뒤 가리지 않았던 어제를 반성하자는 뜻이다. (요즘세상, 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