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3. 20. 08:58

 

올해도 북극해가 완전히 얼지 않았는지 2월 하순의 냉기가 범상치 않다. 북극권 상층의 제트기류가 느슨해지면 냉기가 남쪽 위도로 내려간다던데, 한파가 엄습한 유럽에 사망자가 빈발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로 가난한 계층일 텐데, 우리나라도 춥다. 그래서 그런가. 친지의 부고장이 하루가 멀다고 발송된다. 그래도 봄은 곧 시작된다. 둥근 지구는 무한하다는 우주에서 둥근 태양을 돌고 돈다. 언제나 그랬듯, 봄이 온다. 새 생명도 꽃피겠지.

 

봄은 언제 오는지 묻자 한 어린이가 눈이 녹으면이라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막바지 한파가 물러가면 응달의 잔설도 모두 녹을 것이다. 이제 산골의 비탈진 밭도 봄을 기다릴 텐데, 까치들이 짝을 짓고 작년에 사용한 둥지를 수선하는 계절이 다가오자, 근교의 밭마다 유기질 비료 부대들이 잔뜩 쌓였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머지않아 녹을 테니 봄비가 내리기 전에 밭고랑마다 거무튀튀한 비료를 뿌릴 것이다. 그때 근교의 개성 있는 식당을 찾은 식도락가는 유기질 비료 특유의 냄새에 잠시 코를 찡그릴지 모른다. 그래도 비료가 땅에 스며야 싱싱한 채소가 식탁에 오른다는 걸 잘 알기에 냄새를 크게 탓할 리 없다.

 

입춘이 지나 춘분이 다가오면서 대지는 봄을 기다린다. 태양의 입사각은 어느새 양지에 온기를 보내고, 근교 시멘트 포장길 옆의 흙에 파릇파릇 새순이 보인다. 호미를 든 아주머니들이 냉이와 쑥을 캘 날도 머지않았는데, 말리고 싶다. 비록 자동차가 빈번한 도심에서 떨어졌을지언정 먼지와 소음이 날아드는데, 냉이와 쑥인들 안전하겠나. 장일순 선생은 일찍이 좁쌀 한 알에 세상이 다 담겼다 일렀다. 근교의 길가를 파릇하게 장식하는 냉이와 쑥에 도시의 독이 스몄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만, 밭 가장자리에 쌓아놓거나 고랑 가까이 늘어놓은 유기질 비료는 괜찮을까.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판매하는 유기질 비료인 만큼 눈에 띄는 문제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비료의 출처는 양해할만할까.

 

대구에서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을 개척한 천규석 선생은 대규모 축산단지에서 배출돼 가공한 요즘의 유기질 비료를 불신한다. 미국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사료로 먹인 가축의 배설물이라면 자연의 순환을 방해한 축산의 부산물이라는 이유로. 비록 석유를 직접 가공한 화학비료는 아닐지라도 엄격한 기준으로 따지자면 유기질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힐난하는 이 없지 않지만, 수긍이 간다. 해마다 양을 늘리며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리지 않으면 아예 경작이 불가능한 녹색혁명은 식량이 사람에게 전하는 자연의 순환을 저버리게 했다. 그런 농업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사람에게 피해를 안겼는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녹색혁명의 폐해를 훨씬 능가한다. 지역적 단작이 녹색혁명이라면 유전자 조작은 다국적 기업에 의한 세계적 단작을 강요한다. 석유는 훨씬 더 들어가야 한다.

 

유기적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보라. 삼라만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붙일 수 있는 용어를 석유 마구 퍼부어야 생산과 가공이 가능한 미국산 가축사료에 선사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사료는 국제 석유 가격이 오르는 한, 값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석유 정점’, 다시 말해 석유를 퍼올리는 양이 소비하는 양보다 줄어들면서 투기자본의 영향권에 놓인 석유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젖소 송아지 수컷을 만원에 팔아넘기거나 굶겨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 우리 목장은 문을 닫거나 과거 꼴을 베거나 방죽의 풀로 끓인 쇠죽으로 한두 마리 유기적으로 키우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텐데, 상경투쟁하는 모습을 보니, 그럴 의사는 없어 보인다. 대책을 세우겠다는 정부는 경쟁력 운운하며 규모를 더욱 키우려 드는데, 효과가 있든 없든, 그런 목장에서 발생하는 축산분뇨를 유기질 비료로 포장할 수 없다는 천규석 선생의 주장을 부정하기 어렵다.

 

근교 농촌에 쌓인 유기질 비료의 냄새로 보아 가축분뇨를 발효시켰을 것으로 능히 짐작하게 하는데, 가끔 음식물 쓰레기를 가공한 비료도 유기질로 포장된다. 그 비료는 천규석 선생이 인정할 만큼 유기적인가. 우리가 시방 먹는 음식의 정체를 알면 쉽게 판단이 갈 테지만, 역시 회의적이다. 한 사람이 평생 320킬로그램 먹는다는 첨가물과 색소는 과자를 먹는 아이에게 아토피를 안기게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을 방해한다. 석유를 과소비해야 생산이 가능한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들이 대형매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현실은 무엇을 반영하나. 게다가 요즘 농작물은 먼 거리를 달려 식탁에 오른다. 그 점에서 유기농산물 전문매장도 고심해야 한다. 수입하는 과일과 채소만이 아니다.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재료까지 따진다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았을지 모른다.

 

어떤 엄격한 이는 손수레로 옮기지 못할 거리에서 운송해온 농작물은 재배 방식과 관계없이 유기농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화려한 조명 아래 전시된 열대과일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에서 날아온 농작물과 가공식품도 마찬가지다. 유기농산물은 수출하는 순간 그 자격을 잃는다는 건데, 미국과 유럽하고 FTA를 체결했으니 우리는 유기농산물의 기준을 자본에 맡겨야 한단다. 이미 광고로 국내시장 진입을 선언한 외국의 유기농산물, 화학물질을 뿌리지 않았을 뿐 무거운 농기계를 사용하는 재배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석유를 소비했을 그 농산물이 도시의 식품매장에서 생활협동조합의 생존을 위협하더라도 저항하기 어렵다. 유권자의 지지로 선출된 대표든 의원이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투자자 정부 제소가 보장되지 않았던가. 자연의 순환을 방해하는 셈이다.

 

간혹 낙엽을 발효시킨 유기질 비료가 텃밭이나 화원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건 유기질인가. 모르긴 해도, 천규석 선생은 고개를 흔들 것 같다. 걸핏하면 벌레 낀다며 가로수와 공원에 살충제를 퍼붓지 않았나. 그런 곳에서 모은 낙엽을 가을 내내 발효시키려 해도 예전 같지 않다는 양묘장 관리원의 하소연, 들은 적 있다. 나무는 애벌레에게 뜯겨도 생장에 지장이 없을 만큼 잎사귀를 펼친다. 새들이 날아와 조절할 것이라는 걸 오랜 세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텐데, 살충제는 새들을 쫓아냈다. 새들이 풀과 나무의 씨앗을 떨어뜨려주지 않는 숲은 수명이 짧다. 가로수와 공원처럼 사람이 나무를 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뿐인가. 살충제에 금세 내성을 갖는 애벌레는 순식간에 공원과 가로수의 잎을 갉아낸다. 그래서 더욱 흥건한 농약 세례를 받은 낙엽이 자연 속에서 순환되기 쉽겠나.

 

참 어렵다. 순수성을 따지자면 유기질이라 판단할 비료는 드물거나 거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일. 노력하면 유기질의 순수성 간격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규석 선생에게 양해를 구하자. 사람은 제 탐욕을 한순간에 버리지 못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한 품종의 농작물을 거대하게 심어 큰돈을 벌어들이려는 탐욕은 자연의 순환을 거부해왔다. 순환을 잃자 땅은 황폐화되고 사람은 아토피로 고통스러우며 기후는 변화했다. 이대로 지속가능한 내일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면, 이제 복원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하는데, 발은 머리보다 느리다. 의지 있는 자의 솔선수범과 설득이 농촌은 물론 도시까지 번져야 한다.

 

인천의 한 근교에서 본 유기질 비료에서 파생된 상념이 여기까지 왔다. 어떤 특별한 묘책이 있으랴.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겠지. 서서히 공감대를 늘리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에 찌들어 황폐화된 농토에 더는 화학농업을 지속할 수 없으니, 우선 유기농업을 고민하는 농부를 위해 대규모 축산단지에서 나온 분뇨를 가공한 비료라도 뿌려, 땅을 회복시킬 필요는 있겠다. 그만큼 땅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유기적인 관계가 전보다 나아질 게 아닌가. 근교의 밭이 그렇다. 그 땅에서 재배한 농작물의 찌꺼기나 그 농산물을 조리한 음식의 쓰레기를 가공한 비료를 뿌린다면 이후의 유기적인 순수성은 더 좋아지겠지. 그 농작물을 먹은 시민도 건강해지겠지. 나아가 공원과 가로수에 곤충 애벌레가 생겨도 그냥 둔다면 새들이 날아와 처리할 테니, 농약이 묻지 않은 낙엽으로 만든 비료는 유기질이겠지.

 

3월은 영어로 마치(march). 시작한다는 의미다. 동창이 밝아 노고지리가 우지지는 봄이면 농부는 농구를 챙겨 들에 나가 한 해를 시작한다. 씨 뿌려 새싹이 돋으면 벌레가 끼겠지만, 마당에 닭과 개구리가 있다면 자연에서 모두 공존 가능할 정도로 처리할 것이다. 쥐불놀이로 벌레를 쫓아내던 우리 조상은 벌레의 씨는 남겨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벌레가 있어야 새도 개구리도 가까이 온다는 걸 잘 아는 까닭일 텐데, 순환이 보장되는 농토에 가을이 오면 사람도, 닭과 개구리도, 그리고 곤충도, 내년을 기약할 식량을 받을 것이다. 자연은 오랜 세월 그렇게 너그러웠다. 덕분에 도시에 사는 소비자도 건강했다.

 

자연의 순환을 독점하려고 농약을 퍼부으니 부메랑이 되었지만, 자연은 아직 순환한다. 너른 품을 가진 자연은 탕아에게 기댈 언덕을 여전히 제공한다. 유기질 비료를 쌓아둔 인천 근교의 농부와 그 농토에서 재배한 유기농산물을 사먹는 시민도 파릇파릇 새순을 무던히도 올리는 자연처럼 유기적 관계를 회복했으면 좋겠다. 곧 봄이다. (푸른생협, 2012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