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0. 7. 2. 02:32

 

장마전선이 오르내리는 가운데 월드컵은 막바지에 다가갔다. 남의 잔치만 남은 월드컵의 상업주의는 어느새 잠잠해졌다. 올해의 절반이 지나면서 새롭게 지방정부를 구성한 자치단체마다 초심을 다짐하는 취임식이 열리고, 취임한 단체장은 소통을 강조했다. 예상 밖의 선거 결과가 웅변하는 유권자의 정언명령을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새롭게 출범하는 지방정부든, 아슬아슬하게 자리가 보전된 지방정부든, 그리고 2년 뒤 총선을 맞이할 정당이든,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선출직 공무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무엇인지 새삼 명심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월드컵 열기 속에 경기 관련 이외의 뉴스가 대폭 줄어든 상태에서 걱정스러운 소식도 들렸다. 정부의 민간인 사찰도 그 중의 하나다. 많은 이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어렵게 궤도에 오른 민주주의가 현 정권 들어 노골적으로 퇴보하는 현상 앞에서 실망한 이 땅의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이번 62지방선거의 결과는 웅변하는데, 월드컵 열기를 틈타 여전히 시민의 정언명령을 외면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주요 여론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걸까, 아니면 교활하게도 유권자보다 임명권자의 눈치를 더 살펴 그런가. 보궐선거와 2년 뒤 총선을 앞둔 유권자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려는 건지, 못내 궁금하다.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던 선거기간에 선량 후보들은 시민사회에서 분출하는 단체의 다양한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천이 특히 그랬을 터. 7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된 인천시장과 대부분의 구청장이 후보일 때, 마음이 급해 받아들인 공약의 내용과 성격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때, 새로운 단체장들은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해당 인수위원회에서 관심을 쏟으며 가중치를 두며 나름대로 걸러냈겠지만 충분했을 리 없다. 임기 시작을 계기로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야 하리라.

 

소통을 강조하며 출범하자마자 인천시에 굵직한 민원이 생겼다. 2014년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신설에 관련하여 불거진 서구민의 항의가 그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몇 가지 사항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사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출범한 인천시가 주경기장의 신설을 확실히 취소한 건지, 시 재정이 파탄 나든 말든 주경기장의 신설을 서구민들이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건지, 아직 모른다. 시민과 소통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시장은 민원을 제기한 서구민과 투명하고 민주적인 논의를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한데 말하기 쉬운 그 논의를 어떻게 실시할 수 있나.

 

서구의 아시안게임 주경기장의 건만이 아니다. 송도11공구 갯벌의 보전, 아라뱃길로 작명된 경인운하, 정부가 추진하는 인천만 조력발전이 그렇고, 그 이외에도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첨예하게 충돌할 뿐 아니라 이해 관계자가 다양한 여러 민원 뿐 아니라 당선을 염두에 두고 내세운 수많은 공약들을 모두 어떻게 처리하고 추진할 것인가. 납득할 수 있는 소통과 논의로 공직자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싹트고, 진정성 있는 민원 해결과 동의할 수 있는 정책 수행으로 시민들의 정주의식이 인천에 뿌리내리는 계기를 만들 수 없을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관여하는 일에 관심이 높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적극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 보여준 자세, 다시 말해 제기된 민원에 대한 처리를 알려주는 정도는 소극적이다. 진정한 소통과 거리가 멀다. 민원과 정책을 공개한 뒤, 관심을 가진 시민이나 그들이 추천하는 인사가 논의 구조에 직접 참여해 심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제기되는 민원과 정책을 모두 논의할 수 없다면, 가중치에 따른 우선순위를 정하는 사전 장치는 필요할 것이다. 그런 장치를 제도적으로 만들어 시민의 구속력 있는 참여를 배려할 수 있다. 나이, 성별, 계층, 그리고 보수와 진보에 치우치거나 배척되지 않는 인물의 투명한 참여다. 참여민주주의 수준이 높은 국가에서 일찍이 도입한 ‘심의민주주의’에서 합리적인 예를 구할 수 있다. 차분하게.(기호일보, 2010.7.9)

 
 
 

서평·추억

디딤돌 2010. 6. 14. 09:10

《강은 살아있다》, 최병성 지음, 황소걸음, 2010.

 

그리스와 월드컵 일전으로 응원 없는 거리가 한산했던 그 시각, 4대강은 시뻘건 피를 콸콸 흘렸다. 굴삭기로 밤낮없이 뜯겨나간 강어귀마다 전날 밤부터 내린 비로 불어난 황토를 연실 토해냈건만 강가에서 천렵하던 기억을 간직하는 시민 대다수는 그 시각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광하고 있었다.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언론이 노동조합을 탄압으로 하던 바로 그 시각.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인 회색도시일수록 강변으로 떠나고 싶은 시민이 많은 것과 관계없이,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 태양을 공전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굽이쳐 흐르는 한반도의 4대강은 현 정권의 삽날 아래 급살당하고 있다. 온갖 생물이 어우러지던 금모래와 은모래를 잃고 숨을 헐떡인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야 바다도 강도, 그리고 인간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가슴에 새긴 한 목사는 강변의 아름다운 교회를 남겨두고 현장으로 나가야했다.

 

강은 흘러야 건강을 유지하는 생명이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생명을 물려받은 모든 가치들의 비빌 언덕인 강이 죽으면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럼에도 모래와 자갈을 경부고속도 위에 수십 미터 쌓을 정도로 파낸 뒤 10미터가 넘는 철근콘크리트 제방과 보로 가로막아 강을 죽일 참인가. 오로지 토목자본의 일시적 탐욕을 위해 후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차마 볼 수 없던 최병성은 청지기가 되겠다고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려 《강은 살아있다》를 펴냈다. “살리기”라는 말로 언어를 모독하면서 언론을 억압하며 자행하는 악행의 실상을 자식 키우는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다.

 

홍수와 가뭄은 강의 생명현상이다. 지금 우리보다 잔혹하지 않았더라도, 감히 강의 생명현상을 방해했던 유럽과 미국과 일본은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면서 재해를 막으려 애를 쓴다. 청계천은 복원인가.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재현해야 했건만 온갖 문화재를 치워낸 자리를 번지르르 꾸민 배수로에 불과하지 않던가. ‘4대강 사업’이 녹색뉴딜이라고? ‘녹슨 삽질’로 규정하는 최병성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진실을 전한다. 거짓을 이기려면 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과연 ‘물 부족 국가’일까? ‘4대강 사업’으로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고 철새의 낙원이 되며 수질을 개선할 수 있을까? 정권이 힘을 잃는 순간 들통 날 거짓으로 일관하는 ‘4대강 사업’의 진실을 알면 시민들은 행동에 나설 것이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할 수 있다. 사랑하면 행동하게 된다. 빗물의 절반 이상이 집중되는 장마철이 곧 온다. ‘4대강 사업’이 부를 공사현장의 작은 재앙은 머지않아 제방붕괴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질 텐데, 그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데 분노가 인다.

 

이번 62지방선거의 결과는 우리를 뿌듯하게 했다. 시민의 의견을 소중히 듣지 않은 자의 독선과 오만은 반드시 심판된다는 사실이 새삼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강은 살아있다》는 월드컵과 장마의 열기 속에서도 독자의 마음가짐을 더욱 다지게 할 게 틀림없다. 행동으로 이어질 유권자의 마음가짐이다. (시사in, 2010.6.?)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5. 13. 23:06

 

거의 주말마다 ‘낙동강 순례’를 떠나는 지율스님이 50페이지가 되지 않는 책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지난 3월 녹색평론사에서 발간한 《낙동강 before and after》가 그것이다. 그는 체험으로 구한 감성적 언어로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행동이 필요하다는 각오를 억누를 수 없게 만든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강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만일 내개 본 것이 답이 될 수 있다면 눈이라도 빼서 보여주고 싶다.”고 한 지율스님은 “무엇보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강가에 물드는 보랏빛 낙조를 보여주고 싶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 휘돌아 가는 물길, 물길을 거슬러 오는 바람, 저문 강에 떨어지는 달빛, 새벽 강가에 하얗게 오르는 물안개, 물가에 그림자를 놓는 수변의 숲들, 그곳에 깃들고 둥지를 트는 생명들, 흰 모래사장에 꼬리를 끌고 지나간 수달의 발자국, 허리 굽은 농부의 깊은 한숨, 그곳을 배회하는 외로움 맘까지 모두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 3월 4일, 서울시청 근처의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불교환경연대와 에코붓다의 공동주최로 열린 “4대강 개발, 다른 대안은 없는가?” 라는 제목의 공개 심포지엄에서 신경림 시인은 “정부가 대운하를 포기하고 4대강 살리기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안도했다. 그러나 현장을 가보고 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달았다. 지금 4대강 유역에는 천벌을 받을 짓이 행해지고 있다. 이 전면적인 자연파괴를 추진하는 것은 물론, 이것을 막지 않고 방관하고 있는 것도 천벌받을 일임을 나는 확신한다.” 고 말했다. 흉포한 독재정권과 온몸으로 맞섰던 작은 체구의 연로한 시인은 생명을 받은 자의 의무를 절절하게 전했다.

 

터널로 산을 뚫어야 한다면 가장 짧아야 최선이라는 건 상식이다. 지하수를 포함한 물의 흐름이 교란되는 걸 최소화할 수 있고 생태계의 충격도 그만큼 작다. 한데 경부고속전철은 천성산을 가장 길게 뚫고 지나간다. 공사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실시하는 환경영향평가는 천성산에 터널공사가 시작되기 10년 전에 조사했다. 그렇다면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실시해야 한다. 법에 그리 규정돼 있다. 새로운 기술과 이론으로 다시 평가한다면 영향을 더욱 줄일 수 있기 때문인데 철도공단은 벌금 몇 푼으로 법 정신을 외면했다. 정진 중에 천성산 생명들의 두려움을 인식한 지율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300일이 넘는 단식을 수행해야 했다. 이제 그이는 ‘4대강 사업’의 낙동강 공사현장에 와서 물려받은 금수강산의 경관과 자연의 이웃들이 어떻게 파괴되며 살해되는지 우리에게 보라고 당부한다.

 

양심을 깨우는 시어로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을 물러가게 하는데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시인은 진작 ‘살리기’라는 정부의 말을 막연히 기대했지만 현장에 와서 보니 기막혔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행동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분노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은 "언어가 철저히 뒤집혀진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두렵다"고 최근에 발간된 《녹색평론》 112호 서문에 썼다. 흐르는 물을 정화할 뿐 아니라 숱한 생명가치들의 삶터이자 산란장이 모래와 자갈이다. 그 모래와 자갈을 강바닥에서 6미터 이상 퍼내고 10미터가 넘은 콘크리트 보로 영겁을 이어온 흐름을 계단처럼 열여섯 번 차단하며 제방을 틀어막는 전대미문의 토목공사를 ‘살리기’라니,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찾아가서 눈으로 본다면 누구라도 분노할 게 틀림없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닌가.

 

서슬이 퍼런 독재정권일수록 정부와 그 하수인은 시민들의 사회참여를 방해한다. 그래야 자신의 의도대로 예산을 집행하며 집권할 수 있지 않은가. 그를 위해, 불의를 보면 피가 끓는 젊은이들이 현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 필요가 있다. 다짜고짜 물리적일 필요는 없다. 이른바 ‘3S’ 정책, 다시 말해 스포츠, 섹스, 스크린과 같은 말초적인 자극으로 관심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면 되는데, 이따금 소용없는 녀석이 나타나면 그때 무시무시한 공권력을 동원해야겠지.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 우리 군사독재 정권이 그랬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며 양심에 어긋나는 굴종을 강요당했다. 이제 군사정권은 물러갔다. 피가 끓는 젊은이의 멈추지 않은 행동을 물리적으로 도저히 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행동하는 젊은이가 이 땅에 드문 건 불의가 사라진 까닭인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반대는 경제성장”이라 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야한다는 소명의식, 뒤쳐지면 낙오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벌이에 몰두하라는 위기 조장이 시민들의 양심을 짓누르는 시대가 되었다. 자본이 독재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거다. 군홧발보다 한층 교활한 자본 역시 시민들의 사회참여를 방해한다. 표준화한 시험으로 서열화하면서 저항을 포기하도록 길들인다. 자본의 하수인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말을 잘 들으면 성공할 것이고 아니면 국물도 없다는 걸 각인시킨다. 거기에 언어의 마술이 동원된다. ‘4대강 사업’을 모독된 언어로 강행하는 현 정권은 그 전범이다. 자본에 포섭된 언론의 간계로 시민의 눈과 귀를 막고, 이따금 저항하는 시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한다. 지방선거가 다가오자 선거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의견 표명을 제한한다. 어떤가. 유권자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선거가 민주사회에서 의미를 가질까. 유권자의 행동을 억압하는 정권을 민주적이라고 평가할 역사는 없을 것이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이어 ‘4대강 사업’에 대한 젊은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현 정부의 태도는 선거철마다 북한 위협설을 유포시켰던 과거 독재정권의 태도와 다르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조계사 앞에서 수천 명이 모여 ‘4대강 사업’의 문제를 지적하는 수륙제를 수행해도, 명동성당 앞에서 만여 명이 모여 같은 목적의 시국미사를 거행해도 언론은 침묵했다. 일제고사와 토익 점수에 매달리다 심신이 지친 젊은이는 틈나는 대로 영상문화에 몰입하는데, 연예인들의 시시덕거림을 쏟아내는 건 손바닥 안의 전화기도 예외가 아니다. ‘4대강 사업’은 쉬지 않고 문제점도 드러내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피가 뜨겁다는 걸 경험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4대강 사업’으로 토목 자본에 막대한 세금을 몰아주는 정부는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 이어 섬진강까지. 이 땅의 혈관이자 젖줄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정체시킨다. 문화와 역사를 간직해온 4대강이 유구했던 흐름을 멈춘다면 이 땅에 생명을 의탁할 젊은이는 내일은 기약할 없다. 대학입시와 취업과 승진을 위한 표준화된 시험에 주눅이 든 젊은이를 뒤집힌 언어로 회유하면 피를 식게 해 행동을 차단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정부는 2년 전 촛불집회에 참여한 젊은이에게 반성을 요구했다. 자본이 지휘하는 돈바람과 화려한 영상문화에 길든 젊은이를 굴종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는 것인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매를 보는 순간 꿩은 낙엽 더미에 대가리를 박는다. 그런다고 매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내장까지 파고드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너무나도 쉽게 허리춤을 낚아채는 매는 칼날 같은 부리로 살점을 뜯어낼 것이다. ‘4대강 사업’을 외면한다고 추악한 본질과 드러난 환경 폐해가 사라질 리 없다. 뒤집힌 언어로 젊은이의 눈귀를 교란하며 행동을 막는다고 다음 세대의 생태계가 보전되는 게 아니다. 연예인의 이름과 취향은 두루 꿰지만 내 지역 선량 후보의 이름과 그 됨됨이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젊은이들이여! 차분히 생각해보라. 누구의 말에 자신의 내일을 맡길 것인가. 뒤집힌 언어에 굴종하며 자신의 피가 맥없이 식어가도 좋은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지율스님은 저항의식을 잃지 않은 젊은이들과 낙동강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신경림 시인은 현장에 가서 강이 처참하게 살해되는 현장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행동을 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거라면서. 그렇다. 우선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에 힘이 생긴다. 거기에 하나 더. 백문이 불여일견이지만 백견이 불여일행이다. 백번 본다고 ‘4대강 사업’이 중단되는 건 아니다. 실상을 알았으니 피가 끓을 터. 양심이 이끄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행동이 이 땅을 독재로부터 다시 구해낼 수 있다. 행동은 여러 가지다. 민의를 반영해야 마땅한 선거도 그 중의 하나인데, 지방선거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세상, 20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