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1. 4. 4. 23:33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 이유진 지음, 이매진, 2008.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 황태자의 첫 사랑을 촬영한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선술집을 몇 년 전에 찾았다. 일정을 마친 일행이 느긋한 마음으로 예약된 시간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맙게도 아리랑을 들려준 선술집은 실내가 어둑했다. 돈 많은 나라의 유명한 선술집답지 않아 궁금해 하는 우리에게 하이델베르크의 유적을 보전하기 위해 지역에 화력발전을 도입하지 않은 관계로 전기를 아껴 쓰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연구소는 인근 도시에서 전기를 끌어오지만 주민들은 작은 하천과 지붕에서 생산하는 전기에 만족한다는 거였다. 그날 그 선술집의 맥주는 기막혔다.

 

세계는 시방 방사능 비상이다. 예기치 못한 규모의 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일본 동북부, 세계 최고의 안전관리를 자부하던 동경전력의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침수되어 전원이 차단되자 사고는 걷잡을 수 없게 이어졌다. 수천도의 핵연료를 식히며 증기를 발생시켜 발전터빈을 돌리던 냉각수가 보충되지 못하자 수증기는 수소와 산소로 유리돼 발전소 실내에 밀집되었고 이어 발전소 외벽을 깨뜨리는 수소 폭발로 이어지며 다량의 방사능이 유출되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냉각수 대신 소방차와 헬기로 바닷물을 냉각수를 퍼부어도 분열되는 핵연료의 열을 이기지 못한 연료봉과 격납용기가 파괴되면서 미증유의 막대한 방사능이 편서풍을 타고 대기와 태평양으로 유출된 거다. 사람의 힘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고는 동경을 비롯한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를 바싹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의 관련 전문가는 냉정하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반경 50킬로미터 이내의 주민을 소외시켜야 한다고 참견하기에 이르렀는데, 1986426일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설정한 안전반경보다 넓은 면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사고의 여파는 후쿠시마에 그치지 않고 있다. 중국은 안전한 소금의 확보를 위한 사재기가 아비규환으로 연출되었고 미국과 유럽에 후쿠시마 발 방사능이 감지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와중에 일본에서 수입한 물고기가 잘 팔리지 않는 우리나라도 편서풍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 400기가 넘는 핵발전소 중 수명이 다해가는 시설이 많고 그중 보도되지 않아 그렇지 아찔한 사고를 모면한 발전소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한결같이 시설이나 운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확신했을 터. 하지만 어느 곳의 어떤 핵발전소라도 사고가 나면 세계가 아연실색 긴장한다. 설계 시효가 끝나 연장 운영하는 고리의 우리 핵발전소는 안전하다 확신할 수 있을까. 일본도 설계를 믿고 방심하다 당했는데.

 

양수발전이란 게 있다. 해발고 400미터 이상 차이가 나는 두 곳에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위 저수지에서 아래로 물을 흘려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의 발전소다. 한두 시간 전기를 생산한 뒤 다시 아래 저수지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느라 기껏 생산한 전기의 1.5배 가까이 소비해야 하는 양수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는 수력이라고 애써 강조하지만 독일의 한국계 에너지 전문가는 핵발전소의 사생아라고 혹평했다. 소비량이 작은 밤에도 끌 수 없는 핵발전 때문에 전기는 남아돌고, 그 전기를 활용해 아래 저수지의 물을 끌어올린 뒤 소비량이 급격히 올라가는 낮에 전기를 생산하는 양수발전은 핵발전소가 없다면 만들 까닭이 없기 때문인데, 양수발전소는 우리의 수려한 자연 생태계를 여기저기에서 파괴한다.

 

생태계만이 아니다. 핵발전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용 후 핵연료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자손손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 거의 영구적으로, 사용 후 핵연료에 우라늄이 분열할 때 생기는 플루토늄이 포함되는데, 반감기가 24천년에 달하는 플루토늄은 1그램으로 100만 명을 폐암에 걸리게 할 정도의 맹독성 방사능이 분출한다. 수명 30년 안팎에 불과한 핵발전의 열매는 현 세대가 독점하는 대신 그 치명적인 쓰레기를 수백세대의 후손에게 떠넘기는 발전 방식은 누가 뭐래도 친환경도 아니다. 후손을 위한 발전은 더욱 아니다. 그런 핵발전소가 일본과 우리나라에 곧 100기 이상 가동될 모양인데 현재 10여 기 가동하는 중국도 70여 기를 계획한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의 핵발전소에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피해는 당대와 후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나. 화력은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수력은 생태계를 파괴하며 우리나라에서 조력은 해양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게 훼손하는데, 전기 없이 하루도 편히 살 수 없는 우리는 어떤 대안을 찾아야 하나.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발굴하자는 이야기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진지하게 나오지만 태양과 바람으로 핵이나 화력만큼 막대한 에너지를 생산할 것 같지 않다. 그런 에너지를 태양과 바람으로 얻으려면 막대한 면적의 땅과 바다를 확보해야 하고 엄청난 자본이 필요할 게 틀림없다. 전기가 모자라면 우리의 에너지 집약산업 뿐 아니라 가정이나 사무용 건물, 어려 종교 시설이나 시장과 농어촌도 지금과 같은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 인구에 비해 국토가 좁은 우리 땅에서 얻는 태양이나 바람 에너지로 지금과 같은 생활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핵이나 화력발전보다 생산비가 월등하게 높다는데,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대표적 환경단체 중의 하나인 녹색연합에서 젊음을 바친 이유진은 그런 답답한 마음을 가진 보통 시민들에게 희망의 대안을 제시한다. “동네 에너지가 희망이라는 거다.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중앙에서 집중적으로 생산해 비용을 지불하는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공급 체제가 아니라 동네에서 생산해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과 논의해 전기를 생산해서 나누는 지역 자급 체제를 주장하는 거다. 100만 킬로와트 급 발전소 한 기를 만드는데 대략 1조 원 이상의 자금이 들어가는데 동네에서 어떻게 그런 막대한 돈을 어떻게 염출해 전기를 생산하고 나눌 수 있겠는가 많은 이는 의심하겠지만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를 쓴 이유진의 설명은 명쾌하다. 동네 규모에 따라 소박하게 마련하자는 거다. 다음 세대의 생명까지 생각한다면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많은 국가와 도시에서 이미 실현하는 사례를 들면서 우리도 당연히 가능하다는 걸 전하려 노력한다.

 

태양과 바람만이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 그 두 가지를 생각하면, 태양과 바람은 소비자에게 영수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설을 갖추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발전 이후 발생하는 온실가스나 방사능과 같은 치명적 환경문제는 거의 없다. 사실 핵과 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의 가격이 싼 건 환경과 후손에 미치는 피해를 원가에 가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자손손과 생태계에 미칠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화석연료나 핵을 사용하는 발전의 비용은 지금보다 현저히 높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50년 이후 사용하는 전기의 전부를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원대한 목표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덴마크와 독일과 같은 국가들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생산 단가가 오히려 가장 저렴하다고 산정했다. 후손의 생명을 염두에 둔 조상이 편중되지 않게 계산한 결과였다.

 

바다에 풍력발전 단지가 거대한 덴마크, 생태주거 단지의 거의 모든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붙인 독일, 민간기업과 관료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메카를 꿈꾸는 중국 더저우에서 세계는 많은 경험을 공유하지만, 비록 규모는 작더러도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동네는 많다. 이유진은 충남 홍성군의 여러 사례를 들며 그 동네 사람의 의견을 밝게 전한다. 광주와 제주에도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찾는 동네가 있다. 유채와 가축의 배설물과 같은 훌륭한 에너지원도 찾아내는 동네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걸 확인한다. 하지만 아직 초보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사당과 청와대의 넓은 지붕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없을까 묻는 이유진은 해외에서 시도하는 적극적인 시민의 자세를 눈여기며 우리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새삼 다짐한다. 생각해보라. 독일의 바람이 삼면이 바다이자 산악국가인 우리보다 강할까. 우중충한 날씨가 많은 유럽의 태양이 우리보다 밝을까.

 

일본의 경제평론가 우치하시 가츠토(內橋克人)식량(Food)과 에너지(Energy)와 돌봄(Care)은 자유무역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각 나라와 지역사회의 자급 능력이나 자주적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이른바 ‘FEC 자급권을 제창했다. 먹을거리를 나누는 일, 노인과 아이와 병약자를 보살피는 일은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돈을 주고 맡기기보다 평소 얼굴을 마주 대하며 희로애락을 나누는 이웃과 의논해서 해결해야 지속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의미의 주장인데, 그거에 하나 더. 에너지도 다르지 않다는 게 경제평론가의 주장이다. 논밭 일을 서로 땀 흘려 거들고 땔나무를 나누는 일은 이웃 사이에 허물없이 지내는 동네에서 자연스럽다. 춥고 헐벗은 이를 따뜻한 품에 안을 수 있는 이는 동네에 있다. 두터운 가죽과 털을 잃고 사나운 인상과 억센 근육도 없으며 손톱과 발톱과 이빨이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은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서로 돕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생존했을 리 없다.

 

싫든 좋든 외부의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가여운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지구온난화에 이은 석유위기 시대, 그리고 핵발전과 방사능 위기 시대의 대안은 환경이나 생명보다 돈과 권력을 추앙하는 중앙 집중의 자본에 맡길 수 없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 역시 마찬가지다.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에서 이유진은 독자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 것인데, 핵산업에 관련하는 자본을 배려하려는지, 우리와 중국 정부는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여전히 선언한다. 그 점에서 매우 애석하게도 미국 오바마 행정부도 마찬가지인데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사뭇 달라 보인다. 핵에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던 독일의 메르켈 정권은 실각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고 해외 언론들은 전한다.

 

이론적으로 태양과 바람과 지열만으로 우리는 원하는 에너지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다고 전문가는 확신하지만 재생 가능한 에너지 역시 중앙 권력과 자본에 의해 머나먼 사막에서 집중적으로 가져온다거나 막대한 자본을 끌어들여 일방적으로 발굴해야 한다면 의미가 없다. 지역과 동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 에너지 정책은 의존과 불신, 그리고 낭비와 사고를 낳을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의 주민들처럼 지역에서 소박하게 생산한 에너지에 맞게 삶의 방식을 관리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시방 전기를 비롯한 에너지를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다. 낮은 밝고 밤은 어두워야 하듯,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야 정상이건만, 지구온난화와 방사능 위기를 자초한 사람들은 지독한 에너지 낭비로 겨울 같은 여름, 여름 같은 겨울을 만끽하다 자신의 건강마저 잃었다. 이제 위기는 흉흉한 내일을 거듭 경고한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이웃과 후손의 건강한 내일을 위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지역에서 자급할 희망을 모색해야 할 텐데, 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는 그 빛을 비춰줄 것이다. (인천in, 2011.4.?)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2. 2. 09:34
 

녹색평론 최근호는 발행인 김종철 선생과 원로 영문학자 김우창 선생의 ‘신념대담’을 실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대담에서 김종철 선생은 ‘FEC 자급권’을 소개한다. 일본의 경제사상가 우치하시 가츠토(內橋克人)라는 분이 오래 전부터 제창한 ‘FEC 자급권’은 식량(Food)과 에너지(Energy)와 돌봄(Care)은 자유무역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각 나라와 지역사회의 자급능력이나 자주적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제안이라고 김종철 선생은 덧붙인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우리의 식량 자급률은 이미 비참한데, 국내 농경지는 개발 유보지로 취급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 사업은 논밭을 갈아엎으니 이제 우리는 외국 식량에 굴종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는 더하다. 환경단체에서 내복을 입자고, 실내온도를 섭씨 18도에 맞추자고 제안하지만, 사둔 내복을 입을 일이 없을 정도로 천지사방의 겨울이 덥지만 거의 전량의 에너지를 수입한다. 돌봄은 아직 자급에 가까운데, 한미FTA 타결 이후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식량과 에너지와 돌봄은 국내와 지역 내에서는 사고팔아도 좋다지만 맹목적인 이윤추구는 지양해야 한다. 일찍이 이반 일리치와 칼 폴라니가 통찰했듯, ‘우정과 환대’로 나눌 것을 제안한다. 담거나 퍼가는 사람이 서로 모르는 ‘마르지 않는 뒤주’나 ‘밥퍼 공동체’ 같은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고, 산동네에 연탄 날라주듯 에너지를 마련해주며, 이웃집의 아기와 노인 보살피듯 의료나 복지를 제공하자고 한다. 그와 같은 우정과 환대는 내 얼굴을 기억하는 이와 거래하는 공동체에서 빛을 발할 것 같다. 팔면 그뿐인 국내외 교역에 우정과 환대는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가히 에너지 전쟁이다. 석유자원에 대한 살벌한 국제 경쟁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할까. 남의 자원을 가로챌 자본이나 군사력이 부족하니 한정된 자원을 선점하려 세계 오지의 생태계를 파괴해야 할까. 우리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경쟁은 전쟁을 낳을 수 있다. “태양은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을 발굴과 보급하면서 에너지 체계를 생태 친화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효율화와 절약을 말한다. 하지만 전국의 개발 열풍은 내일을 걱정하게 한다.

 

정부는 식량 자급을 위해 농경지를 보전하고 농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이를 우대해야 마땅한다. 소비자는 농사꾼에 빚진 마음으로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다가올 식량안보 시대의 마지막 보루이므로. 한데, 기후변화로 세계 식량 수급이 불안전하면서 가격 앙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절대농지를 해제하겠다는 이명박 정부 인수위원회의 발상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돌봄은 어떤가. 아이를 산후조리원에 맡기는 풍조가 만연되는 가운데 시댁과 친정 부모는 집을 은행에 맡기고 해외여행을 즐기란다. 의료는 국가에서 책임지는 국가도 많은데 감기 치료에 수백만 원이 들어가는 미국계 병원이 곧 진주할 예정이다. 받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헤아리는 돌봄은 점점 실종된다.

 

식량과 에너지와 돌봄은 우정과 환대로 거래해야 한다면 돈과 땅과 사람은 절대 사고팔 수 없어야 한다고 김종철 선생은 지적한다. 그런데 어떤가. 카지노 판이 아닌데 세상은 돈을 사고파는데 눈이 뒤집혔다. 외환거래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국제 에너지와 식량 시장마저 투기장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돈다발을 든 투기꾼이 아파트 분양시장에서 침 흘리는 일은 이제 뉴스거리도 안 되고, 인력시장은 노예시장과 다르지 않다. 모든 걸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인데, 이제 우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기승을 부리는 신자유주의에 더 큰 날개를 달아줄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낙담할 수만은 없다. 제국주의 시절에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이 꽃을 피웠듯, 신자유주의의 성장 지상주의에 맞서는 시민운동에 나서야 한다. 그에 앞서 우리는 사고팔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2008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