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1. 27. 20:01

작년 12월 말, 하필 가장 추울 때 서울광장에서 집회가 있었다. 약속이 발목을 잡아 참석치 못했는데, 다녀온 이는 모인 군중의 열기 덕분에 추위를 몰랐다면서 코를 훌쩍였다. 철도 같이 막대한 세금이 들어간 공공시설을 자본의 손에 헐값으로 쥐어주는 일에 분노한 그는 영리병원을 허용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할 말을 잊는다. 민영화하자 요금이 서너 배 뛰어 오른 외국 철도의 예처럼 진료비의 상승도 불을 보듯 뻔하다며.


영리병원의 진료비가 높으면 일반 병의원을 이용하면 될 텐데, 왜 흥분할까?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장비나 의약품의 질과 양을 비교할 때 우리 의료 수준이 결코 낮지 않으므로 영리병원을 외면하면 그만인 듯하겠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멀쩡한 새마을열차를 몰아낸 KTX를 보자. 영리병원이 본격 도입되면 기존 병의원의 치료과목을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 시간을 내고 느긋하게 편안하게 이용하고 싶어도 배정된 차량이 적은 새마을열차는 승객이 대폭 줄었을 뿐 아니라, 점차 잊어지고 있다. 일반 병의원도 그렇게 망해갈 것이다.


언젠가부터 산모는 퇴원하기 전에 산후조리원으로 향한다. 산후조리원도 철도만큼 이용료 차이가 크다는데, 어떤 차별성이 있는 걸까. 언젠가 산후조리사 당 배정된 신생아가 지나치게 많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가격 높은 산후조리원은 산후조리사가 충분한 걸까. 신생아가 스스로 젖병 들고 먹어야 했던 산후조리원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는 이용료 높은 산후조리원에서 발생하지 않을까. 그 방면에 과문해 알 수 없는데, 노인요양원 비용도 시설마다 제각각이라고 한다.


KTX가 오히려 교통 시간을 늘렸다는 주장이 나온 적 있다. KTX열차가 서지 않는 지역의 주민은 새마을열차를 기다리거나 KTX열차가 서는 역으로 가야하므로 그렇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에 사는 부유층이 KTX열차를 타려면 서울역으로 가야한다. 수서에 KTX역이 생기면 서울역은 그만큼 한가해질 텐데, 수서 KTX를 자회사로 분류해 민간에 매각한다면 모회사는 적지 않는 손실을 감당해야 할 게 분명하다. 그러면 모회사까지 매각하려 할까? 이후 경영 합리화로 요금이 급등하거나 노동 유연화로 해고가 늘게 생겼다.


새마을열차로 5시간 거리를 KTX로 두 시간 만에 도착하면 이용자는 3시간이 남을까? 모처럼 서울이나 부산에 사는 친구를 만나 차라도 한 잔 나눌 수 있을까? 터무니없다. 우리는 남는 3시간만큼 일을 더해야 한다. 만일 KTX 민영화 이후 가격이 일본이나 영국처럼 오르면 우리는 그 비용을 각자가 부담하기 어렵다. 교통비를 지급한 회사는 쉬는 꼴을 싫어한다. 차라리 비행기를 탄다고? 탑승료 인상 구실을 찾지 못하던 항공사가 KTX 자본과 담합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나?


산후조리원이 없었을 때,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모친이나 자매가 흔쾌히 도왔지만 일반화되면서 싫든 좋든 산모는 산후조리원을 노크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이삿짐센터가 일반화되면서 친구 도움을 청할 수 없게 되었듯. 여유 없는 산모는 가격이 낮은 산후조리원을 노크할 수밖에 없다.


농경사회나 대가족에서 치매는 요즘처럼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돌볼 손길이 집안에 있었다. 핵가족과 맞벌이 시대가 되면서 치매에 든 노인은 요양원에 떠넘기게 되었다. 치매뿐 아닌지, 노인 전문 요양원은 도시에서 늘어나기만 한다. 이제 노환은 자본의 먹이가 되려고 한다.


시설 수준과 무관하게 산후조리원이 아기에게 좋을 리 없다. 산후조리원을 외면할 수 없는 걸까? 집보다 아늑한 산후조리원은 아기에게 없는데.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환자로 등록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의료자본이 환자를 양산하는 세상인데, 자본은 오늘도 의존하라고 속삭인다. 아기를 돌보는 할머니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거다. 우리가 고분고분한 탓인데, 작년 12월 그 추웠던 날, 사람들이 KTX 사유화에 저항하고 나섰다. 사실상 비영리로 운영하는 병의원은 없다. 영리든 비영리든, 찾는 이가 없으면 망한다. 길들어지지 않는 몸과 맘이 두루 건강해야 한다.


원격이나 화상진료는 영리병원 설립과 이어질 것으로 많은 이는 예상한다. 영리병원만이 원격과 화상진료가 가능하도록 규정하면 그리 될 텐데, 체온 없는 진료와 처방이 환자에게 어떤 위안을 줄까. 혈압과 맥박, 오르내리는 혈당은 환자나 보호자가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다. 원격이나 화상이 아니라도 된다. 위급하다면 당연히 입원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환자는 마음을 주고받는 진료와 처방을 원한다. 높은 수가를 요구하는 영리병원이 특별히 노인의 치료에 유리할 리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이라는 책에서 암 수술을 만류하는 의사는 뜻밖의 현상을 주목한다. 파업으로 병원이 50일 넘게 문을 닫았더니 사망률이 30퍼센트 이상 낮아졌다는 게 아닌가. 적군의 오랜 포위로 의약품이 떨어진 2차대전 당시의 덴마크에서 사망률이 오히려 낮았다는 경험과 다르지 않은데, 상비약 준비해두고 건강관리에 신경쓴다면, 영리병원 도입에 대항하는 병의원이 여러 날 문을 닫아도 걱정 없으리라. 영리병원 따위에 긴장할 필요가 없다. 그냥 거부하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는 날의 길이보다 그 질을 높게 평가한다. 노인도 마찬가지다. 건강진단으로 질병을 확인한 뒤, 입원해 독한 약 처방이나 수술로 고통스런 날을 견디거나 가망 없는 삶을 연장하기보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길 원한다. 노인에게 발생하는 질환은 대부분 질병이 아니다. 노환은 나이 들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독한 약과 수술이 노화를 치료하지 못한다. 원격의료나 진료는 말할 나위도 없다.


노환은 예방하거나 늦추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KTX가 없다면 사람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새마을열차나 고속버스를 여전히 이용했을 것이다. 천성산 터널로 도롱뇽은 서식지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자연은 지금보다 건강했다. KTX의 사유화는 막아야한다. 영리를 위해 요금 올릴 자본은 일자리를 줄여 사고를 늘릴 수 있다. 영리병원도 비슷할 텐데, 노화를 예방하는 육체와 정신 운동을 나이 들어도 멈추지 않는다면 영리병원을 소용없게 만들 수 있다. 병의원도 덜 필요해진다. (작은책, 20142월호)